3. 파니니와 아이스티 (2)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떴다.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탁상시계를 찾는다고 침대 옆 탁자 위를 더듬었지만, 어라? 항상 시계를 이 근처에 놔뒀는데 손에 걸리는 게 없다. 비몽사몽 허우적거리는 내 옆에서 마왕 녀석이 시간을 알려줬다. 아, 그렇구나. 여기 이 녀석 방이었지.
“정오다. 피곤하면 좀 더 자라.”
“…그것밖에 안 됐어?”
정오를 조금 넘겼다고 하니 한 여섯 시간 잤나? 적게 잔 건 아닌데 몸이 무겁다.
허벅지 아래가 싸늘하다. 고개만 내밀고 봤더니 이불을 상반신에만 뒤집어썼다. 이그, 이러니 춥지. 몸을 굼벵이처럼 꿈틀거려 발끝을 이불로 덮자 시린 발가락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덮어주면 걷어차고, 또 덮어주면 걷어차길래 더워하는 줄 알았더니.”
“…언제 일어났냐?”
“나도 방금 일어났다. 차라도 가져다줄까?”
갈라진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다. 젠장 하룻밤 만에 목이 다 쉬었다. 입 안이 깔깔해서 놈에게 찬물이나 한 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평소라면 내가 알아서 마시겠는데 지금은 나른해서 목도 못 들겠다.
“어우, 죽겠다. 도서관 갈 생각이었는데 걷지도 못하겠네.”
“체력을 좀 더 단련하는 건 어떨까.”
“그럴 생각이긴 한데 네가 말하니까 빡치고 좋네.”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물을 야금야금 삼켰다. 찬물이 들어왔더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 왜 이리 추운가 했더니 이불이 얇다. 내가 덮고 자는 이불은 보송보송한 겨울 이불인데 이 자식은 벌써부터 홑이불을 덮고 자는 모양이다.
성교한 다음 날은 뭔가 다를 줄 알았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거나 혹은 마왕 놈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거나. 그런데 그런 거 하나도 없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여전히 늦봄답게 강렬하고, 내 옆자리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은 놈은 여전히 나쁜 놈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그렇게 절륜할 수가 있냐. 나쁜 놈. 욕망의 화신. 음란 마왕.
소리 내서 투덜거리니까 놈의 손이 내 얼굴을 덮었다. 마르고 단단한 손가락이 얼굴 윤곽을 느리게 훑었다. 놈의 손에서 내가 좋아하는 비누 냄새가 났다.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놈의 손목을 두 손으로 꾹 쥐고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마왕 놈이 낮게 웃었다. 손바닥을 타고 놈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거두고 놈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베개를 괴고 바로 누워 물끄러미 그 검은 눈을 응시했다. 놈의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맛있는 연어로 배를 채운 불곰 같은 얼굴이 얄미워야 했지만 도리어 놈의 표정을 따라 하며 같이 웃고 말았다.
“네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자허라니까.”
“네 진짜 이름.”
고집 센 마왕 꿈나무 같으니. 투덜거리며 옆으로 누워 놈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네가 내게 고백하면 알려주지.”
“…….”
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벅지 진짜 탄탄하다. 끌어안은 촉감이 좋아 코를 묻고 이마를 비볐다. 시야가 어두워지니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더 자면 안 되는데, 오늘 도서관 가서 여신의 저주에 관련한 자료를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놈의 손이 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손 갈퀴로 머리카락을 빗겨줬다. 누가 만져주는 거 생각보다 좋은 거구나.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양 노곤해져 근육이 저절로 이완된다.
그리고 마왕 놈은 덤덤히 내 속내를 꿰뚫었다.
“고백하면 넌 거절하겠지.”
“…허.”
“몇 년 후에 세상을 파괴할 마왕 후보와 연애하고 싶지 않다고, 파트너 신청을 거절한 그날처럼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이야.”
목이 꺾일 정도로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봤다. 화가 난 건 아닐까 했는데 목소리도 평소와 다를 바 없고 표정도 아까 봤던 배부른 불곰의 얼굴 그대로다.
“그러니 난 네게 고백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도 나를 거절하지 않은 거다. 고백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으니 우리는 여전히 전과 같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지금 거절할까?”
“고백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날 좋아하지 말아 달라고 말할 셈인가.”
“지금 한 건 고백이 아니라고 말할 셈인가.”
놈의 말투를 따라 하며 투덜거렸더니 놈이 몸을 돌린 후 내 겨드랑이 사이 손을 끼우고 내 몸을 들어 올렸다. 근육 탓에 제법 무게가 나가는 몸인데도 자연스럽게 놈의 허벅지 위에 주저앉았다.
놈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이 자세가 영 불편했다. 괜히 추워서 손끝으로 더듬어 놈의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에 둘렀다.
“좀 더 치열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무섭고 싫은 일을 해치우듯 빠르게 정리하지 말고.”
“…했어, 고민. 했는데.”
“넌 좀 극단적인 성격이니까.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으로 일을 타결하려 하지 말고.”
“그런 적 없는데? 나 완전히 치열한데? 겁나 논리적이고 냉철한데?”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물음에 그래도 된다고 말해줘. 네가 긍정하면 네게 고백하마.”
뭘 물어보려는 건지 몰라도 뭐든 Yes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두 주먹을 굳건히 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다른 사람과 연애해도 되나?”
“…….”
“다른 사람에게 키스해도 괜찮나?”
“…그건, 그건.”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나?”
머릿속이 하얗다. 입 안이 쓰고 목구멍이 메말랐다. 아득한 서글픔에 짓눌려 나는 입을 열었다. ‘응, 그래. 괜찮아. 그건 내가 허락하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지.’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긍정하고 싶지 않다. 상상조차 하기 싫다.
입만 달싹거리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놈이 내 허벅지 위를 토닥거렸다.
“그러니까 조금 더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네가 그런 후에도 싫다고 말하면 나도 네게 고백하고 제대로 차일 테니까.”
얼굴에 열이 올라서 귀 끝까지 뜨겁다. 입 안이 쓰고, 시다. 나는 놈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듯 쓰러져 놈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불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 같지만 알까 보냐. 수치심에 불타는 중이라 추위도 날아갔다.
미치겠네. 난 개새끼였다. 놈을 거절할 생각이 가득하면서 이 새끼가 다른 놈이랑 연애하는 꼴은 죽어도 싫다니. 이게 뭐야. 이 무슨 도둑놈 심보야.
마왕 놈이 내 등을 끌어안고 둥글게 굽은 등을 쓰다듬었다. 쪽팔리고 민망해서 뻣뻣해진 몸이 조금씩 풀렸다.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하고 자고 싶지 않다. 너와 같이 지내고 싶고, 네가 눈 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네게 키스하고 싶고 너와 오래 연애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게 고백이라고.”
“거절할 건가?”
“생각 좀 해보고. 생각할게. 한다고 빌어먹을.”
아침 겸 점심은 남은 재료를 몽땅 때려 넣은 에그 인 헬을 만들어 남은 호밀 빵과 함께 먹었다. 물론 요리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파들거리는 나 대신 마왕 놈이 해줬다.
버터 두 덩어리와 양파 하나. 자투리 고기와 셀러리. 브로콜리도 넣고, 찬장에 남아 있던 햄과 치즈도 다 탈탈 털어 넣은 후, 토마토 페이스트 한 병을 남김없이 쏟았다. 실상 우유만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어제저녁 먹은 것과 속 재료는 같다.
“말린 페페론치노 넣어주라. 매운 게 당기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오냐. 짐이 오늘 입맛이 없으니 맛있게 준비하거라.”
뜨거운 물에 넣어 잠시 불린 페페론치노가 두세 개. 달걀은 반숙이 좋다. 남은 호밀 빵 위에 따끈따끈하고 걸쭉한 노른자와 토마토소스를 얹어 게으른 소처럼 우적거렸다.
어제만큼 식욕이 돌지 않아 한 접시를 비운 후에 더 먹지는 못했다. 맛은 좋은데 기력이 없으면 먹는 것도 고된 일이다.
“아, 운동하고 싶다.”
“모레 충분히 운동할 수 있을 거다.”
“아 맞아. 너 본선 첫 상대 누군지 아냐?”
“번 틸. 상급생 전사라는 말은 들었는데 본 적은 없군.”
소파에 누워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대화를 나눴다. 세탁물도 꺼내서 시종에게 맡겨야 하고, 기숙사 청소도 맡겨야 하는데 지금은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 뒀다.
입학하고, 아니 아니지. 블리스 저택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오늘만큼 느긋하게 하루를 보낸 게 얼마 만인가 싶다.
그래도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더니 움직일 만한 기력이 돌아왔다. 역시 사람은 밥심이구나. 어떻게든 정한 일을 미루고 싶지 않아서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봤더니 마왕 놈이 두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카데미 안에서만 움직일 거라 타이 없이 셔츠 위에 조끼를 걸치고 무늬 없는 바지를 입었다.
요즘 날이 따뜻해서 재킷을 걸치지 않아도 좋다. 곧 반소매 셔츠를 입어도 될 날이 오겠지. 여름에 가죽 갑옷 입고 연병장 구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코를 씰룩거렸다.
여신의 저주, 여신.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길거리 고아 시절 이야기다. 그때 내가 만났던 이라고 해봐야 길거리에서 점 보는 야매 집시와 학파에서 퇴출당한 늙은 마법사 정도가 다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간신히 모은 돈을 바쳐도 내 상황이 왜 이 모양인지,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도 대답해 주지 못했다.
대부분 사기꾼이어서 나를 어느 시골 영지에서 올라온 뜨내기로 알고, 부모님은 시골에서 잘 계실 거라 말하는 미친놈도 있더라.
밑도 끝도 없이 장래가 암담하니 어느 순간부터 그냥 다 포기하고 하루 살기 바빴던 것 같다. 그 지독하게 우울한 타성이 돈과 권력을 다 가진 지금에 와서도 내 발등을 잡아채고 행동하지 못하게 막았다.
지금 내 상태를 말하자면 그거다. 어차피 돌아가서 뭐 할 건데. 여긴 그래도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친구도 있잖아. 여기서 근 10여 년 살았으면 그냥 체념하고 살지 뭐. 그래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돌아가려고? 마왕만 없으면 여기도 제법 살기 좋은 세계잖아.
“돈 있고 권력 있으면 살기 좋은 건 거기나 여기나 같네.”
“거기?”
“내가 전에 살던 곳. 먹고 살기 안 좋았거든.”
오늘과 내일은 쉬는 날이다. 그리고 다시 첫 주부터 본선을 치르겠지. 나처럼 몸 쓰는 놈들은 본선을 준비하거나 미진했던 기술을 수련하기 딱 좋은 날이고 머리 쓰는 놈들은 무투회 후 치러질 중간고사 공부를 해야 하는 날이다.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아카데미 안은 휴일치고 북적거렸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길을 걷던 놈들이 마왕 놈을 보고 흠칫 놀라 거리를 벌려 걷기가 편했다. 보는 놈들마다 저러니까 내가 커다란 불곰의 목줄을 쥐고 산책 중인 사육사처럼 느껴졌다.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필요한 자료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도서관에 들어가 가장 먼저 사서를 찾아 여신과 여신이 내린 저주에 관한 내용이 들어간 자료를 문의했다. 잠시 고민하던 사서가 책으로 엮은 논문 몇 편과 리포트 형식의 자료 몇 개를 알려줬다. 몇몇 자료는 복사본이 없는 원본이기에 자료 열람에 주의를 당부받았다.
책을 읽으며 마스크와 장갑을 껴보긴 처음이다.
햇빛 들지 않는 조도 낮은 개인 열람실을 대여하고 논문을 읽었다. 두 사람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열람실이라 마왕 놈은 맞은편 개인 열람실에서 상대적으로 정보가 적은 대량의 자료를 읽어서 알려주기로 했다.
“필사할 수 있는 부분은 필사해 줘. 많은 정보는 필요 없고 혹시 여신이 저주를 내린 개인에 대한 일대기가 있다면 어떤 저주인지, 그 사람이 저주를 받고 어떻게 살았는지 정도만 알아도 되니까.”
“달리 해야 할 건 없나?”
“그 정도면 충분해. 먼저 끝나면 다른 책 읽고 있어. 심심하면 나 부르고.”
앞으로 마왕이 될 놈에게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보를 준 놈도 마왕의 부하고, 나는 저 자식 말고는 도움받을 손도 없다. 내 상황을 이야기할 지인도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은 모두 여섯이다. 빛과 어둠, 불과 물, 바람과 땅으로 딱 봐도 대적하기 좋게 구성되어 있다. 이중 빛과 불과 바람이 여신이고 나머지가 남신이다.
딱 봐도 누가 내게 자주 걸었는지 감이 잡혔다. 빛의 신은 인간의 신이니 그가 저주를 걸었겠지. 불은 수인의 신이고 바람은 조인의 신이니 말이다.
가장 먼저 신의 저주에 대한 목차를 살폈다.
몇 시간이 흐른 건지 모르겠다. 너무 오래 자료를 읽은 탓에 목과 허리가 아프고 눈이 뻑뻑했다.
시간을 들여 얻은 소득이 있나 하면 아니다. 내가 찾은 신의 저주는 대부분 우화나 설화고 실제 인물이 저주를 받은 문항이 없다.
저주를 받아 거미가 된 직공, 개울이 된 거인과 정반대의 예언만 하게 된 예언자라든지. 눈이 멀고 가족이 대신 죽거나 영원히 고통받는 무한한 굴레에 빠지는 등 모든 신의 저주는 비슷한 인과를 보였다.
보통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신에게 사기 치는 놈에게 신은 저주를 내렸다. 저주를 받은 놈은 극복하지 못하고 죽거나 비참해져 후회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거다. 나는 신에게 사기 친 적도 없고 저주받을 만큼 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아니 젠장. 애초에 나는 이 세계 사람도 아니잖아.
기지개를 켠 뒤 몸을 일으켰다. 여신에 대한 항목은 많다. 저주에 대한 항목 또한 많다. 그런데 이 두 개를 겹쳐서 봐야 하니 얻는 수확이 거의 없다.
자료를 찾지 못한 걸 수도 있지. 논문과 서책을 정리해 사서에게 반납하고 외부 도서관에 신의 저주와 관련된 다른 서적을 보유하는 곳이 있는지에 관해 물었다.
“원하는 정보를 구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음… 제가 알기로 신학에 관한 문헌은 아카데미 도서관보다 대신전 안의 문헌정보실에 더 많이 있을 겁니다.”
“대신전입니까. 좋은 정보를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마왕 녀석이 들어간 개인 열람실 문을 두드렸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네. 괜히 나 때문에 주말인데 도서관에 박혀 있는 놈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미안, 여기서 시간 다 보내네. 이제 가자. 다 안 봤어도 가자.”
“이것만 필사하면 끝나니 잠시 기다려라.”
슬쩍 안을 봤더니 테이블 위에서 펜이 홀로 필사하고 있다. 마왕 놈은 자료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작성 중이시다. 그런데 필사한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거의 책 한 권 분량이잖아. 저거.
어쩌다 보니 마왕 녀석 도움을 받고 필사본 한 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안에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을까? 이건 자기 전에 읽기로 하고 저녁부터 먹기로 했다.
벌써 저녁 아홉 시다. 시간이 너무 늦어 학생 식당이 문을 닫지 않았을까 했는데 다행히 열 시에 문을 닫는다고 했다.
맛있는 냄새를 맡고 종일 책만 보느라 사라졌던 입맛이 다시 돌아왔다. 밀반죽에 고기와 허브를 넣어 만두처럼 찐 펠메니에 사워크림을 듬뿍 끼얹어 한 그릇을 남김없이 비웠다.
녀석이 만들어준 필사본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바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멀거니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본다.
내일은 대신전에 서신을 넣어 방문 날짜를 조정해 볼 생각이다.
대신전이 우리 집 앞마당도 아니고 마음먹었다고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방문이 가능한 대략의 날짜와 일정, 방문 목적을 적은 후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도장을 찍어서 아카데미 내 신전을 통해 우편으로 보내면 답신이 올 것이다.
평소 신앙심이 깊었던 것도 아니고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경우가 많아서 어떻게 서신의 내용을 채워야 할지 약간 막막하다.
“졸업 논문 준비 중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1학년에 벌써부터 무슨 졸업 논문 준비야.”
“조기 졸업을 원하거나, 한 해 동안의 연구 자료로 논문 준비가 부족한 경우, 저학년부터 논문을 준비하는 예도 있다. 어차피 졸업 논문은 자유 주제니 네가 원하는 걸 묻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말 꺼냈으니 그 내용으로 논문도 준비해야 하고?”
“거기서부터는 네 재량이니 잘 해결하길 바라마.”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역시 너 요즘 잔머리 많이 늘었다. 아, 맞아. 신전에는 따라오지 마. 대신관이 널 안다며. 괜히 거기 기웃거리다가 만나면 안 좋을 거 아냐.”
따라오지 말랬더니 은은하게 웃었다. 무슨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안색이 밝아서 왜 그따위 표정을 하고 있냐 묻자 놈이 덤덤히 대답했다.
“네가 날 신경 쓴다니 좋아서.”
“…미치겠네.”
손에 쥐고 있던 필사본이 구겨질까 봐 우선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불시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귀여워 죽겠네. 열이 오르는 뺨을 두 손으로 거칠게 문지르다가 놈을 노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지금 너 덮치고 싶어.”
“…….”
놈이 움찔 굳더니 뒤로 물러섰다. 마왕도 후퇴하게 만들다니 역시 나는 제국의 창이군. 내 이글거리는 욕망 어린 시선을 피하는 놈에게 오히려 상체를 기울여 접근했다.
“내가 잘할게. 응? 싫다고 하면 바로 떨어질게.”
“싫다.”
“뭐 이 자식아?”
대답 참 칼 같네. 나는 투덜거리며 놈이 우려준 미지근한 차를 단번에 비웠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든지, 기분 좋다고 말해봐야 놈이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냐. 너 만지고 싶은데.”
벌러덩 소파에 눕자 놈이 슬그머니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내 다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발목과 정강이를 꾹꾹 주무르는 손길이 기분 좋다.
한동안 놈의 안마를 받아주다가 슬그머니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 물어봤다. 이 정도 친해졌으면 이제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하고 개인적인 사심을 담아서.
“내가 오기 전에 왔다고 한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어?”
놈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놈의 시선이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놈에게 마저 변명 비슷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궁금해서. 나처럼 소설 하나 잘못 읽고 끌려왔으니 다들 사연이 기구할 거 아냐.”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죽은 자가 태반이라 잘 모르겠다.”
“에이, 그래도 소설 내용 알 정도면 어느 정도 대화 해봤다는 거잖아.”
고문을 통해 구한 자백 같은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왕 녀석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정의감 강한 선인도 아니고 내 살길 개척해 나가는 것도 어려운데 말이야.
“나도 연관된 일이니까 물어보는 거야. 네 말을 듣고 여신의 저주에 대해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이방인은 내 성을 수호하는 기사였다.”
녀석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을 꺼내는 건 아닌가?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잠자코 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루 전만 해도 내켜 하지 않아도 성실하게 내 호위를 했고, 내게 검술을 가르쳤던 인물이었다. 그때도 대련하고 있었지. 목검을 쥐고 휘두르기를 배우고 있었는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나를 보자마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서투른 찌르기였지만 막을 수 없었고 배가 뚫렸다.”
그랬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일상을 이야기하듯 덤덤한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괜한 걸 물어본 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녀석의 말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놈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인간 사제는 마족을 치료할 수 없다. 내가 반은 마족이라는 건 이미 어머니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기에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기억은 없어도 전부터 몇 번이고 누군가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어머니라고 생각했지.”
놈이 손을 뻗어 내 발등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나는 잘게 떨리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다물었다.
“나인은 그보다 더 어렸던 시절부터 나를 지켰다. 내 상처를 치료해 준 것도 나인이지. 신생아 시절 어머니와 독대한 녀석이 어떤 수를 쓴 건지 몰라도 나인은 내 전속 마법사로 성에 머물 수 있었고, 나는 녀석과 함께 종종 찾아오는 이방인을 더욱더 수월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나인은 어떻게 널 만났어?”
“그는 왕의 수호자라고 했다. 몇 세기에 한 번씩 등장하는 차기 마왕을 찾아 그를 육성하고 수호하는 것이 나인의 역할이라고 했지. 보통은 북부 산맥에서 마왕이 될 그릇이 태어났지만, 네가 알다시피 나는 드로젠에서 태어났지. 그래서 나를 찾아오는 데 시일이 걸렸다고 했다.”
소설 속 내용이 아니다. 살아 있는 펠런 엑사 드로젠의 이야기다. 놈의 입으로 듣는 내용에 그걸 새삼 실감했다.
놈은 제 셔츠를 끌어 올려, 자신의 명치 아래를 보여줬다. 피부색이 다른 곳과 달리 연한 부위가 실선처럼 놈의 명치부터 배꼽까지 이어져 있다. 알고 나서 봐야 보이는 그런 상처였다.
“뛰어난 솜씨지? 덕분에 상처투성이 몸이 되지 않았다. 너는 내 몸을 보기 좋아하니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이지 싶다.”
“내, 내가 뭘 좋아한다고.”
“내 얼굴과 몸.”
좋아하긴 하지. 그야 그렇지. 잘생기고 멋진 거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항의하려고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몸을 소파에 푹 묻었다.
“계속 이야기해 봐. 네 이야기 듣고 싶어.”
“이방인은 아무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살의를 가지고 나를 공격했지. 그러나 보통 암살 시도는 서툴기 짝이 없었고 보자마자 살기를 드러내 잡아서 처리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건 내가 나이를 먹고 강해질수록 더 수월해졌지.”
하긴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 원래 몸에 있던 자허 블리스의 기억이나 기술은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 다른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갑자기 이 세계로 떨어져, 눈앞에 있는 아이에게 주체할 수 없는 살의를 느꼈겠지.
“그래도 나는 너 보자마자 그렇게 막 달려들어서 죽여야겠다. 이런 생각은 안 들던데?”
“그건 네가…….”
마왕 놈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추궁하듯 놈의 소매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난감해하던 녀석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린다.
“내 외모가 출중하니 네 살의도 억누른 게 아닐까.”
“뭐라는 거야. 미친 거 아냐?”
자신감이 저 정도로 지나치면 그것도 병인데. 어이가 없어 놈을 흘겨봤다. 어디서 뻔뻔한 말을 배워 왔어. 또 나냐? 내가 잘못 키운 거냐?
투덜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 놈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그래, 너 잘생긴 거 아니까 이제 더 이야기해 보라고 재촉하자 놈이 귀 끝이 불그스름해져 다시 자신이 만난 이방인들에 대해 말했다.
“병사의 몸에 들어온 이방인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 내 나이가 6세 때 이야기다. 때마침 나인이 궁에 머물던 시기라 이방인에게 자백을 받는 건 나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때 소설에 대해 들은 거야?”
“우리가 사로잡은 첫 번째 이방인은 소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잊기 힘든, 그러나 잊고 싶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듯 놈의 목소리는 조금 느렸고, 그래서 그런지 신중하게 들렸다.
첫 번째 이방인은 어디서 온 건지, 왜 펠런 엑사 드로젠을 죽이려 하는지 자신의 입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인은 가차 없이 이방인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었다. 고위 사제나 되어야 저항할 수 있는 마법에 이방인은 저항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곧 몇 가지 사실을 실토하게 되었다.
여기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던 인물이라는 것.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육체에 들어와 있었고 눈앞의 소년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살의를 느꼈다는 것.
누군가 펠런을 처리하기 위해 다른 세상의 이방인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고 나인은 설명했다. 전대 마왕들의 시대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했다.
“인간의 나라에서 태어났기에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된 걸지 모른다고 나인이 말했다. 지금까지 마수나 마물 출신의 마왕도 있었지만, 반인반마였던 차기 마왕은 없었으니까.”
“어거스트라고 했지. 네가 마지막에 만난 이방인.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줘.”
“어거스트는, 글로리아 왕의 국서인 아타난의 장자였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라는 걸 해본 적이 없어. 보통 드로젠 왕가에서 나는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가족 모임에도, 행사나 의식에도 참여한 적이 없다. 그래도 얼굴은 알고 있었지.”
너무 누워 있었나. 옆머리가 욱신거렸다. 눈에도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드러누워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쿠션을 끌어당겨 턱을 괴고 웅크렸다.
“괜찮나? 안색이 좋지 않다.”
“오랜만에 몇 시간씩 책을 읽어서 그런가? 좀 어지럽긴 한데 괜찮아.”
“바로 들어가 쉬는 게 좋지 않을까.”
“내일 쉬면 돼. 오늘은 마저 네 이야기 들을래.”
가장 먼저 어거스트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났다. 자고 일어났더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준 엑사 드로젠이 기뻐하겠군.
펠런은 냉소적으로 자신의 이부형제들을 판단했다. 드로젠의 차기 왕이 될 후보는 둘이었다. 무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준, 그리고 머리가 좋고 성실한 어거스트.
기억을 잃은 어거스트를 위해 고위 사제가 찾아왔지만, 치료는 실패했다. 어거스트는 요양을 이유로 중앙의 성에서 펠런도 머무는 낡은 외성으로 거취를 옮겼다. 요양은 말뿐이고 사실상 유배였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어거스트는 검을 쥐고 휘둘렀다. 검에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지. 언제든 쳐낼 수 있는, 검을 잡아본 적도 무언갈 해쳐 본 적도 없는 자의 손놀림이었다.”
설마 이부형제까지 이방인이 될 거로 생각하지 못했던 펠런은 골치가 아팠다. 다음엔 누구지?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방인이 빙의될 수도 있겠군. 그리고 언제든 쳐낼 수 있는 검을 앞에 두고도 멀거니 서 있는 소년을 앞에 두고 어거스트는 말했다.
‘앞으로 넌 마왕이 될 거야.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이려고 들겠지.’
눈을 질끈 감고 검을 내찌르는 어거스트의 검을 쳐내는 것으로 부족해, 펠런은 어거스트를 무릎 꿇렸다.
펠런의 전갈을 받고 나인은 바로 어거스트에게서 정보를 빼냈다. 다른 자들과 달리 이번 이방인은 왕자의 몸을 뒤집어썼기에 처리는 더더욱 긴밀해졌다.
공식적으로 3개월의 실종 기간, 그리고 어거스트의 시체는 마경 초입에서 마물에 물어뜯긴 채 발견되었다.
“네가 죽인 거야? 아니면 나인이?”
“내가 처리했다. 살의를 이기지 못하고 그 이방인은 나를 죽이려 들었어. 그래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다 말고 마왕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놈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꺾일 것 같은데 코 안쪽이 뜨뜻미지근하더니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뭐야. 입술을 타고 뭔가 흐르는 느낌에 손등으로 훔치고 나니 코피가 났다.
“어우, 이게 뭐야.”
투덜거리며 마왕 놈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숙였다. 수련할 때나 대련할 때도 안 나던 코피가 오랜만에 책 좀 읽었다고 나냐. 조금 머쓱해서 지혈될 때까지 웅크려야 했다.
“괜찮나?”
“괜찮아, 괜찮아. 무투회 준비한다고 요즘 무리했더니 터졌나 보다.”
코맹맹이 소리가 우습다. 한창 숙이고 있으니 차츰 지혈되는 건지 피가 멎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나 찬물로 입과 코 주변을 씻었다.
셔츠부터 안고 있던 쿠션에도 피가 튀었다. 이건 바로 세탁 맡겨야겠네. 붉게 물들어 개수대로 빨려 들어가는 물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정신 차리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마왕 놈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에 미미하게 어린 걱정이 새삼스럽다. 나도 이방인인데, 나도 잘못했으면 너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내가 너를 보자마자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살의를 참은 이유.”
“다른 이방인과 네 차이는 하나뿐이다. 다른 이방인은 이곳에 온 직후 나를 만났지만 너는 나를 만나기까지 10년 이상의 유예기간이 있었다는 거.”
그건가. 대답을 듣기 위해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바로 대답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하긴, 녀석도 계속 이방인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겠구나.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아카데미 시험날이라 놈을 죽이고 싶어도 주변의 시선 때문에 죽이지 못했고, 이미 마왕 녀석은 이방인에게 정보라는 단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쭉쭉 빼먹은 상태라는 점부터 내가 여기 오래 살았던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살의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것까지.
아, 그렇지. 놈의 친구가 되자는 협박에 순순히 굴복한 것도 포함하자.
다시 소파에 앉아서 저주와 이방인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는데 마왕 놈이 나를 침실로 끌고 갔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아 보이는데 다른 거 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라는 말에 얼핏 마왕 녀석에게서 제리와 노아가 스쳐 지나갔다.
이불을 덮고 침대 가장자리 걸터앉은 마왕 녀석을 바라봤다. 저 녀석은 참 이상하다.
“이방인인 내가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막 대답해 주고 그래도 돼?”
“상관없다. 오히려 나는 네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서 좋았다.”
이 자식, 요즘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때가 있단 말이지.
“그야 나랑 연관이 있는 이야기기도 하고, 궁금하잖아. 여신의 저주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다른 이방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나는 저항한 건가.”
“살의를 말하는 걸 수도 있지. 아니면 다른 걸 수도 있고.”
“그럼 그 궁에서 혼자 살았어? 시종이나 하인들하고? 그 녀석들이 너 잘 대해줬어?”
“그건 나중에. 너나 나나 무투회가 끝나면 이야기하자.”
놈이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검은 머리카락에 놈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잠깐, 내가 양치하긴 했는데 그래도 코피 흘려서 피 맛 날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놈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림자에 나는 눈을 빠르게 뜨고 놈을 노려봤다.
“키스하는 줄 알았잖아.”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는 거라고 네가 말하지 않았나?”
도리어 억울하다는 듯 말 빨라지는 것 좀 보라지? 아니 그래도 이 타이밍에는 키스가 맞잖아. 나는 이불 속에서 팔을 꺼내 놈의 멱살을 쥐고 끌어 내렸다.
놈은 순순히 끌려와 고개를 숙였다.
놈의 입에서 옅은 홍차 맛이 났다. 다행히 피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 혀에 얽히는 놈의 혀가 부드러웠다. 입술 사이 얇은 점막을 조심스레 맛보는 놈의 혀를 혀와 입천장 사이 끼워 가볍게 빨아들였다. 젖은 물소리에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다.
놈의 두 팔이 베개를 눌렀다. 체중을 온전히 실은 놈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놈의 등을 감싼 손. 틈 하나 없이 얽힌 혀가 서로 마찰할 때마다 숨이 거칠어졌다.
내 상체는 반쯤 일어나 나는 가슴으로 놈의 몸을 끌어안았다. 놈의 탄탄한 허리로 미끄러진 손이 자연스럽게 놈의 두 엉덩이를 움켜쥔다.
젠장, 흠칫 놀란 놈이 서둘러 입술을 뗐다.
“칫.”
손안에 아직 탱탱한 감촉이 남아 있다. 아, 좋았는데. 타이밍 완벽했는데. 가볍게 깨물고 문질러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먼저 눈에 띈다. 그리고 옅은 배신감 어린 검은 눈까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놈에게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어줬다.
“잘해줄게. 착하지? 침대로 올라와.”
“싫다. 잘 자고 내일 보자.”
사타구니 쪽이 불편할 것 같은데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먹이를 놓친 비열한 하이에나처럼 짧게 신음하며 이불 위로 털썩 쓰러졌다.
피곤한 건지 오랜만에 꿈을 꿨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앙상한 체구, 흰 피부에 세상 모든 것을 믿지 않는 차가운 검은 눈을 한 어린 소년. 나는 보자마자 그 소년이 펠런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뼈마디가 툭 튀어나온 앙상한 팔에 피 묻은 칼 쥔 펠런. 나는 펠런의 곁에서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봤다. 그것은 절명한 내 시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시체를 바라보던 펠런이 쭈그리고 앉아 내 시체가 입고 있던 화려한 의복에 칼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았다. 나는 괜히 서러워져서 펠런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죽은 내 눈꺼풀을 손으로 직접 덮어줬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 거울이 보였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봤다. 목덜미를 덮은 짙은 흑갈색 머리카락. 펠런과 비슷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 만성피로에 시달려 구부정한 등. 나는 입을 열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꿈이라는 게 다 그렇듯 맥락 없고 강렬한 감정만 남았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숨만 깊이 내쉬었다.
창밖이 밝다. 해가 뜬 걸 보니 정오에 가까운 시간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꾼 꿈이 악몽이라니. 자기 전에 다른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럴 거다. 그리고 피도 보고 잤으니 꿈자리가 사나울 수밖에 없겠지.
방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왕 놈이 뭘 하는 건가? 하고 없는 기운을 끌어모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왔더니 세상에나, 우리 마왕님 요리 중이다.
남은 찬이 없을 텐데? 하고 물어봤더니 일찍 일어나서 간단하게 재료를 사 왔다더라. 팬과 주걱을 들고 있는 놈의 뒷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여서 나는 침착하게 눈을 비볐다. 피곤하니 눈도 나빠지는 걸까.
“도와줄 일은 없어? 재료 다듬기라든지 청소라든지. 아, 맞아. 설거지는 이따가 내가 할게.”
“나중에 부탁하지. 지금은 우선 세수부터 하고 와라.”
나 아직 씻지도 않았구나. 머쓱해서 헤헤 웃고 욕실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서 도와줄 셈이었는데 나오고 보니 테이블이 한 상이다. 손이 빠른 건지 마법을 쓴 건지 모르겠다.
냉큼 포크와 스푼, 그리고 개인 접시를 세팅하고 마왕 놈과 마주 앉았다. 문득 이러니까 같이 사는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에 급격하게 열이 올라 나는 뜨끈뜨끈한 김이 나는 캐비지롤을 노려봤다.
촉촉하게 수프를 머금어 잘 쪄진 양배추가 달다. 다진 고기와 잘게 썬 양배추와 부추 등의 채소가 어우러져 담백하고 속이 편안해지는 맛이다. 꿈 때문인지 심란해서 한 끼를 제대로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내 앞에 놓인 한 그릇은 제대로 비울 수 있었다.
“간식도 만들어 뒀으니 소화되면 그것 먹도록 하자.”
“헐, 간식. 완전 좋아. 뭔데? 단 거? 단 거 당기는데.”
“티라미수 한 통. 스푼으로 퍼먹을 수 있게 만들어 뒀다.”
“와… 너 나랑 결혼할래?”
이크, 입 밖으로 꺼낸 후에 해서는 안 되는 농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놈이 냉큼 그러자고 할 줄 알았더니 옅게 웃고 만다. 나도 어설프게 따라 웃고 말았다.
* * *
대신전에 서신을 넣기 위해 아카데미 안 신전을 방문하기로 했다. 겸사겸사 아카데미에 상주 중이신 사제님에게 여신의 저주에 대해서도 물어볼 생각이다.
마지막 휴일이어서 그런지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차가 몇몇 보였다. 짧은 휴일을 집에서 보내고 귀가하는 아카데미생들일 것이다. 나도 저택 쪽에 연승하고 있으며 다음 주부터 본선에 참여하니 꼭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편지를 써뒀다.
서신을 보내고 나면 연무장에 가서 가볍게 수련을 하기로 했다. 창술 수련을 며칠 못했더니 좀이 쑤신다. 마음 같아서 마왕 놈과 대련도 하고 싶지만, 하루에 두 번씩 사제님을 만나는 건 좀 미안할 것 같아 대련은 본선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다 끝나면 기숙사에 가서 느긋하게 티라미수를 먹을 거다. 행복한 저녁이겠네. 히죽거리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마왕 놈이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저 자식은 가끔 보면 내 머리 만지는 게 아주 습관이 된 것 같다. 뭐 나도 좋으니까 말리지는 않지만.
“빌어먹을.”
그리고 마왕 놈이 걸음을 멈추더니 짧게 욕설을 토하며 하늘을 봤다.
“갑자기 왜 그래?”
놈이 보는 하늘을 나도 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 검은 점이 까만 별처럼 점점 흩어져 있다. 원래 빛나는 바탕에서 광원 없는 작은 물체를 찾는 게 어려운 일인데 저게 보이는 이유는…….
“저거 뭐지?”
조금씩 커지는 물체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지만 확인할 틈이 없었다. 마왕 놈이 내 팔을 낚아채고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야. 왜 그러는데? 마왕 놈의 보폭에 맞춰 전력으로 질주하며 나는 놈을 채근했다.
“이유, 짧게! 해야 할 일, 짧게!”
“마물이다. 병장기 챙겨.”
제국 수도 한복판에 마물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발을 빠르게 놀리면서도 점점 커지는 검은 형태를 본다. 좌우로 찢어진 것처럼 날카로운 날개를 인지할 정도로 형체들이 가까워졌다.
저마다 발을 멈추고 어어 하며 하늘을 손가락질하는 학생들과 직원들이 하나둘씩 늘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하기 무섭게 아카데미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 실제상황입니다. 반복해서 말합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아카데미 상공에 출현한 적의 침입 예정 시간 10분 전입니다. 전투가 어려운 분들은 1번 실내 수련장, 교내 활동 중인 교직원과 재학생 중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모두 본관 분수대 앞으로 집결해 주십시오.
“…….”
- 다시 말씀드립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전투 가능 인원은 본관 분수대로, 전투할 수 없는 이들은 1번 실내 수련장에 집결합니다.
상황을 알아차리고 우왕좌왕하는 아카데미생들을 인솔하기 위해 발 빠르게 등장한 학생회와 글로리를 위시한 여섯 가문의 이름을 단 몇몇 교수들이 앞서서 움직이는 듯했다.
다행이다. 휴일인데 아카데미 내에 머무르고 있었구나.
허겁지겁 건물에서 튀어나온 교수와 교직원들이 목청껏 고함쳐 학생들을 통제했다.
“병장기를 들 수 없는 자는 아카데미 내, 실내 1번 수련장에 집합한다!”
“2서클 이상 마법사는 본관 분수대로!! 핀 더 라이트 교수 앞으로 집결하라. 일시적으로 공용 마나 회로를 여는 것을 허가한다!”
“천지를 지배하는 만물의 근원이신 빛이여…….”
자신의 키만 한 지팡이를 든 교수가 캐스팅을 마치기 무섭게 아카데미 담장 위로 거대한 반구형 막이 생성되었다.
대형 연무장에 있는 무기고 앞은 이미 북적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발 빠르고 노련한 직원들이 모든 무기고를 활짝 열고 검과 창, 지팡이와 활을 분배했다. 본선을 준비 중이라 이미 손에 무기를 들고 있던 이들도 태반이다.
“병장기를 착용한 자는 곧장 담당 교수를 찾도록! 4인 1조! 1학년부터 북, 동, 남, 서광장!! 고학년 마법사와 사수를 포함해 방진한다!”
“마물 확인 완료! 와이번, 개체 수 추정, 100! 대상의 목표는 아카데미입니다!”
“펜시버그 교수 외출 중입니다!”
“3학년!! 렉싱엄 교수와 합류해서 남 광장으로!!”
“사수와 창기병!! 침입 마물에 한한 단독 행동을 허가한다!”
나와 마왕 놈 역시 곧장 무기고 앞에서 병장기를 나눠 주는 직원의 손을 빌려 창과 바스타드 소드를 찾아 쥔다. 방어구를 온전히 입을 시간이 될까. 가슴 갑주를 착용하고 벨트를 고정했다.
그리브와 건틀릿을 착용할 때 제 키보다 큰 흑각궁을 든 에일 원더와 눈이 마주쳐 슬쩍 눈인사했다. 그 옆에 있는 청년은 에일의 쌍둥이 동생이겠지.
북 광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길이 2.5m의 재블린이 들어 있는 거대한 통이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 하인들이 끌고 나온 건가. 우리는 그중 가장 가까운 통으로 달려갔다.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투척용 무기를 보며 반색하고 가죽끈 감긴 손잡이를 쥐었다.
투창은 내 전공이다. 나 외에도 창 던지기를 배운 이들이 둘셋 재블린을 쥐었다. 마왕 놈도 마찬가지다. 난 가끔 저놈이 못 쓰는 병장기가 있나 궁금해질 때가 있다. 좋아. 이제부터 잡생각 금지.
재블린의 무게 중심을 확인하고, 어깨를 간단히 풀었다. 언제든 던질 준비 만반이다. 에일 원더가 앞에 섰다. 활줄을 거는 그녀의 눈에 들끓는 호승심이 나 못지않다. 반구형의 방호벽을 찢기 위해 와이번이 온몸을 부딪치니 방호벽이 출렁거렸다.
키애애애액―!!
귀청을 찢을 듯 마물이 거세게 운다. 기어이 막을 찢고 머리를 밀어넣는 놈의 얼굴을 노리고 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렸다.
“와이번은 마법 내성이 있다! 원소 마법은 피하도록!”
쐐애액―!!
팽팽하게 당겨진 흑각궁에서 쇠 화살이 날아가 와이번의 눈을 꿰뚫었다. 거칠게 몸부림치는 와이번의 다른 눈에 다른 화살이 처박히고 나서야 마물은 움직임을 멈췄다.
“근력 강화 부여 부탁합니다!”
단호한 요청에 마법사 둘이 에일 원더에게 버프를 부여했다. 젠장, 역시 멋있다. 원거리 딜러. 질까 보냐.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과녁이 하나둘이 아니다. 창을 어깨에 메고 팔을 뒤로 빼며 몸을 뒤틀었다. 두세 스텝 밟고 곧장 창을 내쏜다. 물고기처럼 출렁거리며 빠르게 쏘아 올린 재블린이 와이번의 눈에 박혔다.
순식간에 재블린의 개수가 줄어들었다. 나 역시 누군가가 걸어준 근력 강화 마법을 받고 재블린 하나당 한 마리씩 와이번을 꿰뚫었다. 팔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이 팽팽하게 부풀지만, 아드레날린이라도 솟구치는지 아프지 않다.
통이 텅텅 비었다. 타이밍 맞춰, 그물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한 방호벽이 기어이 깨졌다. 곳곳에서 방호벽에 머리 걸린 와이번을 처리했어도 이제 반이다. 허공에서 추락하듯 와이번이 우리의 머리를 노리고 활강했다.
피이이익―!!
지척까지 다가온 와이번의 볼에 붙은 부레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방호벽!’을 외치기 무섭게 후위에서 대기 중인 마법사가 마법을 전개했다. 화염방사기 같은 불길이 채찍처럼 마법 방호벽을 후려쳤다. 적지 않은 열기가 훅 다가왔지만, 방호벽 덕에 화상을 입지 않았다.
바닥에 배가 긁히기 직전까지 낮게 활강하던 놈이 우리를 앞에 두고 솟구쳤다. 그 목을 웅크린 짐승처럼 튀어 오른 1학년 담당 검술 교수가 단번에 쳐냈다. 더운 피가 소용돌이치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거구가 땅에 떨어지자, 나는 창을 꼬나쥐고 뒤이어 쏟아지는 와이번의 아랫배를 창끝으로 긁었다. 내 등 뒤로 마수가 뜨끈한 내장을 쏟으며 바닥에 처박혔다.
“와이번이다. 보통은 북부 산맥 산악 지역에 무리 서식하는 마물이며 번식기 외에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녀석이지.”
투핸디드 소드를 어깨에 걸친 검술 교수가 죽은 마물의 머리를 발로 차며 덤덤히 말했다.
전례 없는 상황이지만 지도자가 흔들리면 학생도 흔들린다. 거대한 검을 양손으로 쥔 검술 교수는 이를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용병 시절 식후 운동 겸 썰던 놈이 여기까지 왔군.”
마력을 회복한 핀 교수가 마법 방벽을 활성화하는 대신 광역 버프를 시전했다. 버프를 받은 몸이 평소보다 가볍고 창을 쥔 손에 활력이 돌았다.
“왜, 왜 버프가 안 들어가지?”
후위에서 우리 조에 버프를 걸어주던 마법사 선배가 당황한 얼굴로 마왕 놈을 바라봤다. 축복도 걸리지 않더니 버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주변에서 당황하거나 말거나 마왕 놈은 마법사 선배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바스타드 소드로 와이번의 몸을 후려치고 목뼈를 끊었으며 날개를 부러트렸다.
콰드득―!!
“날개를 노려!”
“끄아아악!!”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 그리고 마물의 포효가 뒤섞여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마물의 사체와 사체에서 쏟아지는 핏물에 아카데미 건물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곧잘 싸우는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어서 교수들의 시선이 미처 닿지 못하는 자리마다 아카데미생들이 쓰러졌다.
“사제!! 사제!!”
“시종들은 즉각 부상자를 치료실로 옮기도록!!”
올 초부터 북부 산맥에 준동한 마물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영감님도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자주 뵙지 못한 거고, 그래서 실력 있는 상급생들은 이미 휴학계나 방학을 당겨 북부에 출몰하는 마물을 토벌하러 떠났다.
남은 건 아직 기사 작위를 얻지 못한 이들이나 우리 같은 신입생이나 시험공부 중인 문과 지망생들뿐이다.
“질서를 수호하는 빛의 신이여!”
“마법사!! 베리어!!”
와이번이 토한 화끈한 불덩어리가 어깨를 긁으며 옆을 훑었다. 한 박자 늦게 활성화된 방호벽이 다행히 후위에서 활동 중인 사수와 마법사들을 지켰다.
마왕 놈은 혼자서 무쌍을 찍고 있었다. 피 기름에 절어버린 바스타드는 이빨이 나가 몽둥이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할 텐데도, 베지 못하니 휘두르고 내려찍어 와이번의 목뼈를 부수고 숨골을 터트렸다.
“두 마리 더 데리고 온다!”
“문제없다.”
자연스럽게 마왕 놈 등 뒤로 2학년 선배 궁수 둘이 더 붙어 몹몰이 역할을 했다. 화살을 쏴서 와이번의 주의를 끌면 성이 나서 달려드는 와이번의 숨통을 마왕 놈이 끊는 형태였다.
괜한 질투를 느낄 필요가 없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놈이 나보다 더 잘 싸운다고 내가 섭섭할 게 뭐가 있을까. 나는 감탄하며 놈을 곁눈질하고 다시 내 전장에 집중했다.
1학년 중 방패를 드는 놈이 없어서 서글프다. 그래도 휴일인데도 교수들이 남아 있는 게 천운이다. 겁에 질린 동급생의 등에 다시 불덩어리를 토하기 위해 부레를 부풀린 와이번의 목에 창을 찔러 넣으며 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 광장 전체를 크게 둘러봤다.
“이게 마지막이다!”
“상공에 출현 마물 없습니다. 광역 스캔 부탁드립니다!”
한나절이 지날 즘, 허공에 보이는 마물은 없었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현저히 줄었다.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걸 처리하면 끝난다.
날개가 끊겨 바닥에 나뒹구는 와이번의 눈 안에 창을 내려찍었다. 이제 이 주변에 살아 있는 마물은 이놈이 마지막이다.
“흑, 흐으윽. 내 팔. 내 팔!”
바삭하게 타버린 새까만 팔을 움켜쥔 동급생이 오열했다. 몇몇 있던 시종은 먼저 쓰러진 부상병들을 데리고 가느라 자리가 비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놈의 성한 팔을 어깨에 걸치고 그를 부축했다. 괜찮다. 사제는 외상만큼은 완벽하게 고친다.
“신전으로 가겠습니다. 부축할 테니 움직여주십시오.”
“부, 부탁합니다.”
본능처럼 고개를 들어 우측을 살폈다. 조금 멀리 떨어진 채 신전을 향해 걸어가는 마왕 놈이 보였다. 놈은 옆구리에 피투성이 두 녀석을 끼고 있었다. 마물의 피가 튄 건지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모습이 갓 사냥을 마친 마왕 같다.
부서진 건물 파편과 피 웅덩이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도착한 신전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사제들이 거칠게 고함쳤다.
“응급 먼저!! 중상자 거수!!”
다친 놈보고 손 들라는 게 아니다. 중상자를 데리고 왔거나, 중상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급하게 손을 올렸다. 불을 쓰는 와이번의 특성 탓인지 화상을 입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아아아, 아파, 아파!”
“조금만 참자. 응?”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사제가 평소보다 많아 치료를 받지 못해 숨이 끊어지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누군가는 치료를 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고 쓰러졌을지 모른다.
울음과 신음이 뒤섞이고 피비린내와 고기 타는 내가 진동을 한다. 누군가는 헛구역질하고 또 누군가는 사제를 애타게 불렀다.
“사제님! 중상자 거수합니다!!”
“끄으윽!!”
한참 시간이 지나고 팔이 구워진 동급생이 치료실에 들어갔다. 보아하니 치료하느라 한계까지 성력을 소진하고 실신한 사제들도 있는 듯했다.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싶지만 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치료받을 차례는 한참 지난 후에 돌아왔다. 진물이 흐르는 익은 어깨를 치료받고 다시 투구를 고쳐 썼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방호벽을 뚫고 들어온 와이번은 전부 다 처리한 듯 다시 반투명한 반구가 아카데미를 뒤덮고 있었다.
“아직 전투 종료 선언 없었어?”
“교수님이 광역 스캔 후 선언하신다고 했는데.”
창을 쥐고 다시 북 광장으로 향했다. 부상자 운송 후 이미 광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왕 놈이 짧게 목 인사를 했다. 놈은 어디 다치거나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전투보다 더 긴 정적이 찾아왔다. 돌아온 학생과 교수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흐른 후, 교수 한 명이 북 광장으로 달려와 전투 종료를 외쳤다.
“아카데미 전투 종료! 전투 종료!”
병장기를 벗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곧장 전투 가능한 기사와 병사를 소집했다.
“전투 지속 가능한 종자 이상의 기사는 중앙 분수대로!”
“무슨 일입니까!”
“수도에 마물 출현이다! 외교부 청사와 중앙 시장 등등 와이번과 전투 중!”
어느새 내 옆에 서 있는 마왕 놈을 흘끔 바라보고 곧장 중앙 분수대로 달려갔다. 한바탕 싸우고 나니 머릿속에 생각이라는 게 돌아왔다.
원작에서 이런 일이 있었나? 모르겠다. 자허 블리스와 작당해서 마왕을 퇴학시켰던 제뉴어리 엑사 드로젠이 구금된 것부터 이미 많은 게 변했다.
마물의 서식지는 북부 산맥과 산맥 사이 흐르는 계곡을 낀 마경뿐이다. 그러니 마물이 제국에 나타났다는 건 북부 산맥과 마경을 수호하는 제후국과 왕국 중 한 곳이, 어쩌면 그 이상 뚫렸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뚫렸을 거라 가정할 수 있는 나라는? 드로젠, 혼, 글로리, 그리고 블리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북부 산맥에서 제국까지 직선거리를 제일 짧게 잡아도 말을 타고 달려도 사흘이 걸린다. 가장 먼 드로젠은 일주일 이상이다. 그것도 밤낮 가리지 않고 역참마다 말을 갈며 달렸다는 가정하에서다.
와이번이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북부 산맥에서 이곳 아카데미까지 날아오는 동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국경 수비대부터, 일반 시민까지 눈이 있으면 당연히 봤을 테고 난리가 났을 텐데.
‘마법이다.’
그거 말고 없다. 제후국이나 드로젠에 마물이 침공했다면 제국이 분명히 대응했을 것이다. 명색이 제후국의 후계자인 내게까지 전갈이 왔을 테니 말이다.
“뭐라고 생각해?”
내 의견을 마왕 놈에게 소곤거리며 묻자 놈의 미간이 잠시 구겨졌다. 잠시 생각하던 놈이 질문에 대답했다.
“북부 산맥에 있는 탑은 빛의 신의 축복을 받은 역장이 상시 발동되니, 마족이라 하더라도 뚫기 어렵다. 뚫렸다면 그 즉시 마물의 침입을 제국이 알아차렸을 거다.”
“맞아.”
“그러니 최소 사용한 마법은 두 가지 이상일 것이다. 역장 제어와 텔레포트. 이만한 수의 중형 마물을 동시에 제국에 뿌렸으니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일 가능성이 크다.”
“빛의 탑은 신의 기적인데 거기서 나오는 역장을 마족이 제어할 수 있다고?”
“가정일 뿐이다. 확실하진 않아.”
“반드시 제후국이 뚫렸다고 볼 수는 없잖아. 드로젠에는 빛의 탑이 없으니 마경을 통해 온 걸지도 모르겠고.”
마왕 녀석의 안색이 창백하다. 아무래도 말실수를 한 모양이다. 놈이 드로젠에 애착이 남아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고 말을 막 한 셈이다. 나는 즉시 놈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무신경했어. 너도 드로젠이 걱정될 텐데.”
“괜찮아. 상관없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놈의 표정이 좋지 않아, 혹시 그 마법사가 나인은 아닐까 묻지 못했다. 와이번의 습격은 마왕 놈도 모르는 일인 듯했다. 하긴, 나인이 한 짓이면 마왕 놈도 알았겠지.
황궁과 주요 관청은 기사단이나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아카데미를 침입한 와이번의 수만 100마리에 달한다고 했다.
다른 곳도 이런 식으로 습격을 당했다고 하면 검을 들어본 적 없는 시민들은 속수무책이다. 수도 상황이 이 모양인데 지방 도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너도 너무 불안해하지 마라.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블리스 제후 측에서 연락이 왔을 거다.”
“그야 그렇지만. 아이고, 모르겠다. 소설에선 이런 일 없었던 것 같은데.”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뛴다. 호흡이 흐트러졌다는 걸 마왕 놈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후에야 깨달았다. 깊게 심호흡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찮다. 마왕 후보는 아직 내 옆에 있다. 놈은 각성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나는 죽지 않을 거다.
창을 고쳐 쥔다. 이미 중앙 분수대는 병장기를 든 아카데미생들로 가득했다. 짙은 피비린내와 땀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또 다른 전투를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수도 곳곳에서 전투 중인 동료들과 공용 마나 회로를 열고 상황을 즉각적으로 피드백했다. 공유 회로를 통해 과도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간신히 감당하고 있는 건지 지팡이를 쥔 이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거무죽죽하다.
“자허 블리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테넨 글로리다. 피 묻은 방패와 브로드 소드를 쥔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한껏 목소리를 낮춘 그가 말했다.
“북부 산맥이 뚫렸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피가 빠르게 식었다. 눈을 굴려, 테넨을 봤다. 가정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억누른 진실이 나를 찾아왔다. 목 안이 깔깔해서 마른침을 삼키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쉰 목소리로 묻는다.
“다니엘 블리스 제후께서는…….”
“…블리스가, 혼가, 글로리가의 가주님 세 분 모두 확인 미상 마물과 격전 중 부상으로 생사 불명이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검과 방패는 제국을 위해’. 당신은 블리스의 정통 후계니 당장 가야 합니다. 자허 블리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는 아직 제국의 창이 아니다. 다니엘 블리스의 종자며, 블리스의 정통 후계자니까. 블리스가 위험하다면 나는 응당 블리스를 위해, 그리고 블리스가 수호하는 제국을 위해 창을 들어야 했다. 그것이 자허 블리스인 나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배웠다.
“검과 방패는 제국을 위해.”
나 자신도 신경 쓴 적 없는 성마른 관용어를 지껄이며 나는 몸을 돌렸다. 얼핏 마왕 놈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이 상황에서 놈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놈의 새까만 눈이 가슴 한쪽에 박히는 듯했다. 괜찮아, 놈은 다칠 일 없을 거다. 한달음에 달려가 놈의 어깨를 툭 쳤다.
“블리스에 다녀올게.”
“…나도 같이 가겠다.”
“안 돼. 이유는 너도 알잖아. 금방 갔다 올게. 사고 치지 말고 기다려.”
“나는, 전력이 된다.”
“…거기서 너 각성하면 우린 다 뒈지는 거고.”
“…….”
“기다려 펠런, 처리하고 네게 돌아올 거야. 나 믿지?”
“…….”
내가 매정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다. 북부 산맥은 마족의 영역이다. 내가 놈을 거기 데리고 가서 놈이 마왕으로 각성하기라도 하면 거기서부터는 나 혼자의 생존 문제가 아니게 된다.
내 단호한 말에 마왕 놈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불쌍한 척하거나 약해 보이는 척하는 건 종종 봤지만, 놈이 이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다.
나는 결국 체면이고 소문이고 다 무시하고 놈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이럴 때니 내가 할 수 있는 말, 그리고 이럴 때라 놈에게 통하는 말.
“유마야. 내 이름. 성 없이 유마.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내 이름은 펠런 네가 가지고 있어. 그리고 갔다 오면 나랑 있을 때 많이 불러주라.”
손을 풀고 놈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백하면 알려주기로 했으니 늦게나마 알려주는 거라고 속삭였다. 입을 달싹거리는 펠런 놈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린 후 테넨과 함께 곧장 분수대 난간을 디디고 일어섰다.
“검과 창, 그리고 방패의 기사들은 들어라. 불측하고 간악한 마수들이 감히 제국에 발을 들였다! 전선에서 싸우는 우리 자매 형제들이, 우리의 제후께서, 나아가 우리의 황제께서 마물의 격멸을 원하신다! 그러니 외쳐라! 검과 방패는!”
“제국을 위하여!!”
졸업 후 제후국에 가기로 예정이 된 선배들과 제후국 출신의 생도들이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방계뿐만 아니라 가신들의 후계들도 열 오른 눈으로 나와 테넨을 바라봤다.
수도를 수호해야 하는 제국 출신 생도들의 수가 반수 이상이라 많은 이가 우리와 함께 움직일 수 없겠지만 우리와 함께할 이들이 부릴 수 있는 사병과 기사들을 포함하면 제법 수가 될 듯했다.
시간을 아낄 겸 잠시 흩어진 후, 제국의 국경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빠르게 눈을 돌려 펠런을 찾았다. 모인 사람이 많아도 그 특유의 검은 머리 장신은 곧바로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역시나 분수대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 우리가 대화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펠런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가서 해결하고 바로 올게. 나는 눈으로 인사한 후, 고개를 돌렸다.
생도들은 셋으로 나뉘었다. 제국 출신들은 교수의 지도하에 아카데미 밖에 남아 있는 마물을 처리하러 떠나기로 했고, 부상을 막 치료한 이들은 아카데미에 남아 추후 있을 습격을 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먼 거리를 떠나야 할 이들, 세 제후국 출신인 아카데미생들로 마구간은 인산인해였다.
“긴급 외출 허가서다. 한 달간 사용 가능하니, 그 안에 복귀하길 빌마.”
3학년 학과장이 내민 서류에 테넨과 내가 급하게 서명했다. 우리는 병기를 쥐고 갑옷을 벗지 않은 채 마구간에서 말을 빌렸다.
“저택에 먼저 들러, 봉문하십시오. 저택에는 이미 보고가 갔을 겁니다.”
* * *
테넨의 말이 맞았다. 나는 아카데미 입구에서 테넨과 잠시 헤어져, 곧장 블리스 저택으로 향했다.
시내는 이미 공포가 한 바탕 휘몰아친 후였다.
와이번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건 이 주변에서 아카데미뿐인 듯했지만 직접 중형 마물을 본 제국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 제국의 병사와 발 빠르게 움직인 모험가 길드에 의해 임시 고용된 용병이 완전무장을 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중이었다.
다행히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듯 집사 노아와 제리는 저택 현관 앞에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어쩌죠. 어쩌죠?”
“괜찮아.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나를 따라와. 그리고 노아는 블리스에서 전갈이 올 때까지 저택의 문을 닫아. 이건 블리스의 후계자이자 다니엘 블리스의 종자인 자허 블리스의 명령이며 다니엘 블리스나 그에 준하는 블리스의 혈족이 아니라면 누구도 명령을 거두지 못한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길.”
현관 앞에서 대기하던 등짐 진 준마로 갈아타고 나는 약속했던 국경에서 테넨들과 합류해 곧장 북부 산맥으로 말을 몰았다.
제국의 검은 제국을 수호한다. 북부 산맥에서 출몰하는 마물이 제국에 이를 드러내지 않도록 산맥을 낀 세 가문인 창의 블리스, 검의 혼, 방패의 글로리는 항상 마수를 토벌해 왔다.
북부 산맥은 마물과 마수, 마족의 영역이다. 대륙 유일의 산맥으로 총 길이는 1,400km, 높이 8,000m의 최고봉을 비롯해 평균 고도 5,000m 이상의 연속된 높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서식하는 마물의 종류만 1만, 추정 개체 수 1,000만이며 다양한 종이 어우러져 있으나 상명하복이 철저한 군집 생활 생물이다. 생태학자들은 먹이사슬로 구성된 피라미드 끝에 모든 마수, 마물, 마족을 지배하는 마왕이 몇 세기마다 한 번씩 등장한다고 추측할 뿐이다.
인류에게 적대적이며 교류하지 않는 생물.
북부 산맥과 산맥 사이 골짜기인 마경과 국경이 맞닿은 나라는 총 네 곳이다. 가장 서쪽, 마경과 맞닿은 소국 드로젠. 그 뒤로 검의 혼, 창의 블리스, 방패의 글로리가 마물의 공격에서 제국을 지켰다.
제국이 건국되고 단 한 번도 제국의 국경은 마물의 침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빛의 신의 가호를 받은 탑이 있기에 마경부터 산맥까지 마수는 개체 수의 많고 적음만 골치 아픈 일이었을 뿐이지, 지금처럼 직접적인 위해는 될 수 없었다.
그만치 여섯 제후국은 3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굳건했다. 굳건해야만 했다.
지금처럼 마물의 침입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
영감님은 괜찮으시겠지.
얼마나 강한 양반인데. 와이번을 잡다가 쓰러질 이가 아니다.
제국에 마물이 출몰한 건 북부 산맥의 수성이 무너진 탓이겠지.
확인 미상 마물. 생사 불명.
‘가장 먼저 무너진 건 마경과 국경이 맞닿은 소국 드로젠이었다.’
털어내도 다시 끈끈하게 달라붙는 불길한 추측을 삼키며 땀을 줄줄 흘리는 말을 곧장 역참에서 교체했다.
함께 이동하는 기사와 병사의 수만 해도 100여 명이 넘는다. 역참 내 보유한 마릿수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근처 목장에서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말을 빌리는 기사도 반수 이상이었다.
지친 말에서 내가 탈 말에게로 등짐을 옮기고 달리다가, 마법등으로도 발치를 밝힐 수 없는 깊은 밤이 오면 침낭을 깔고 병사들과 함께 번갈아 불침번을 서며 노숙을 했다.
“향초가 다 타면 불침번이 끝납니다. 그때 글로리 님을 깨우면 됩니다, 블리스 님.”
“앞서 수고했소. 이만 주무시오.”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으로 휴대식을 질겅거린 입 안이 깔깔하다. 내가 불침번을 설 차례가 되자 곧장 일어나 나무를 등지고 웅크려 앉았다.
나처럼 불침번을 서는 이가 다섯 정도다. 스물 넘는 인원이 길 한복판에 침낭을 깔고 쓰러져 잤다. 한밤중엔 바닥에 한기가 들었지만, 모포를 덮으면 추운 줄 모를 정도였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침입한 마물은 와이번뿐이며, 첫날 모든 개체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관청과 아카데미, 그리고 기사단과 병사 훈련소를 직접 타격한 것으로 보아 와이번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위급 마족이 있을 거라고 나와 테넨을 포함한 기사들은 추론했다.
내가 아는 마족은 마왕과 나인뿐이다. 얼핏 생각이 말 많은 마법사 나인에게 닿았지만, 확신은 없었기에 나인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쪽에 마법사가 둘 정도 함께해 준 덕분에 제국 내의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제국을 침략한 마물은 와이번 한 종뿐이며 개체 수는 합계 1,000마리라고 했다. 다행히 사상자 없이 반나절 내에 모든 와이번을 토벌했다고 한다.
제국에 상주하는 기사와 병사의 수가 많아서 망정이지 1,000마리는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닌 데다가 300년간 난공불락이었던 제국의 하늘에 적이 침입한 것으로 제국 내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이야기였다.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제리는 실신하듯 잠들었다. 나는 창을 끌어안고 길을 따라 길게 뚫린 검은 하늘을 바라봤다. 어둠에 눈이 익어 달빛만으로도 시야가 환하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할 텐데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다음 불침번 차례인 테넨을 흔들어 깨웠다. 잠을 자지 않은 건지, 선잠을 자고 있었던 건지 테넨은 내 손이 닿기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초췌한 얼굴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 영감님만의 일이 아니었다. 글로리의 가주님도 생사불명이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테넨 글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뻣뻣하고 부석부석한 머리카락이 제리와도 다르고 마왕 놈하고도 다르다. 무슨 생각으로 선배 정수리에 손을 얹는 객기가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괜찮을 겁니다. 우리 가주님도, 블리스 제후님도 압도적으로 강한 분이니까요.”
“실례했습니다.”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좋던데요. 누가 쓰다듬어 준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다면야. 테넨은 오히려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털 뻣뻣한 얌전한 멍멍이를 쓰다듬는 것 같은 감촉에 어설프게 웃으며 조금 강하게 머리를 헝클어트려 주고 손을 뗐다.
“늦게 말하게 되었지만 동행해 줘서 감사합니다.”
제후국에 뜻을 둔 예비 기사들을 이끌고 글로리의 후계인 테넨 글로리와 블리스에 입성한다.
긴급한 상황이기에 더 효과적이다. 글로리는 자허 블리스를 후계로 인정한다고 공식적으로 알리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테넨이 동행을 먼저 제안했다는 걸 블리스 저택에서 말을 교체하며 깨달았다.
“저는 강한 사람을 동경하거든요.”
어머니 되시는 크림힐트 글로리 역시 역대 가주 중 가장 강한 이라며 테넨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부상이 있다 하더라도 사제가 함께 토벌에 참전했으니 다시 싸우고 계시겠죠.”
“신뢰하고 계시는군요.”
잠도 오지 않아서 나는 테넨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풀벌레와 새가 울고 숨 죽은 모닥불에서 이따금 수액 끓는 소리가 났다.
불침번을 서던 젊은 병사 둘이 우리에게 다가와 민트 잎을 끓인 차를 건넸다. 날이 춥진 않았지만, 찻잔을 쥐고 손을 덥히고 있으니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이완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마법을 배웠다면 나도 지금쯤 펠런과 마법사 통신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반나절 지났다고 벌써부터 놈이 그립다. 놈이 하는 시답잖은 농담도 그립고 딱 두 번 먹은 놈의 밥도 그립고, 여하튼 쓸쓸하다.
“실례가 될지 모르는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불편하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어, 음. 너무 실례가 아닌 거라면요?”
갑자기 조용히 묻는 테넨의 말에 나는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그런 말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갑자기 무거운 내용을 물어볼 것 같아서 괜히 불안하다. 그냥 자는 척할 걸 그랬다. 잠이 안 와도 눈 감고 누워 있을걸.
우리와 함께 불침번을 서는 이들은 한참 떨어져 있다. 거기까지 우리 대화가 들릴 리 없겠지. 그래도 자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 너무 민감한 질문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지금 연애 중이십니까?”
훅 치고 들어오네. 이 자식 창의 블리스가 왜 아닌지 의아할 정도다. 치고 들어오는 게 군마 탄 창기병 못지않다.
물론 일직선인 질문이니 빠져나갈 방법이야 많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물어볼 만한 질문이냐고 정색을 해도 되고, 아니면 웃으며 사귀는 사람 없습니다, 라고 말해도 좋고.
테넨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나와 펠런의 관계가 궁금한 거겠지. 그러니까 블리스가의 차기 가주인 자허 블리스가, 드로젠의 왕족이지만 왕위 계승 자격이 없는 펠런 엑사 드로젠을 배우자로 생각하고 있느냐 뭐 이런 거라는 거 아닐까.
“마음에 둔 사람은 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놈은 있다는 게 맞겠지.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백 비슷한 걸 받았고 나도 성실하게 대답하려고 노력 중이니까. 이 난리가 끝나고 아카데미에 돌아가면 놈에게 대답해 줄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망 플래그 같다. 나는 속으로 낄낄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테넨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뭔가 푸근해 보이는 미소가 배부른 강아지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우리 영감님이 내 창술 진척을 확인할 때의 표정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뭐가 만족스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쁜 기색은 아니다.
“관계는 소중하지요. 검과 수련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도 그에 맞먹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아차린 것 같은 말투, 더불어 테넨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나도 알아차렸다. 너무 수련에 몰두하고 말고 다른 이와 관계를 쌓으라는 거겠지.
하긴 오늘만 하더라도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테넨이 말해준 후에야 떠올릴 수 있었다. 어려울 때 필요한 건 지인이지.
이 세상에 홀로 낙오된 뒤로 나는 극단적으로 사람과 교류하지 않았다.
옆에서 볼 때 그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는지 잘 안다. 빙의하고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 내가 제대로 교류를 한 사람은 마왕 놈뿐이다. 그 외에 친분이 있다고 해도 영감님, 제리, 노아, 그리고 테넨이 끝이다.
자허 블리스는 귀족이며, 곧 제후가 된다. 누구보다 인맥과 친분이 중요한 자리이다. 내가 알던 미래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 내 행동도 바뀔 미래를 생각해서 대응하는 게 맞는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못하는 게 사람이지 뭐. 어쩌겠어. 난 여전히 사람이 무서운데.
내가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테넨은 재빨리, 날이 더 밝기 전에 조금이라도 잠을 청하라며 내 등을 밀어줬다.
제후님들에 대한 테넨의 확신이 맞았다. 어스름 푸르른 새벽녘 글로리의 마법사가 구겨진 로브도 펴지 않고 달려와 테넨과 내게 세 가주님 모두 무사히 회복 후 다시 토벌 중이라는 전갈을 전했다.
그러나 고마운 전갈은 불길한 소식도 함께 가져왔다.
“확인 미상 마물의 정체를 박물학자들이 밝혔습니다. 특징과 외형 모두 일치합니다. 300여 년 전 등장했던 암룡(暗龍) ‘바슈키’라고 합니다.”
“…암룡.”
하다 하다 이제 용까지 등장하냐.
“그리고 황제께서 혼가의 제후님이 귀환하길 원하셔서 제국으로 돌아가셨다 합니다.”
“국경의 상황이 좋지 못한데 세 제후 중 한 분이 북부 산맥을 떠나셨다고?”
“대신 혼가의 병사와 기사들은 가주님을 수호하는 몇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 빛의 탑에 남아 있습니다. 혼가의 가주님이 임시로 지휘권을 다니엘 블리스 제후님께 넘겼다고 하더군요.”
미친 황제 새끼라고 테넨이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못 본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친절하고 정중한 줄만 알았던 테넨이 욕을 하는 건 처음 봤지만, 오히려 인간미가 엿보여 좋게 느껴졌다.
재빠르게 침낭을 정리해 찬 이슬에 젖은 말의 등을 털어주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도 상대할 생각을 못 하고 도망칠 궁리를 짰던 내가 이젠 용을 상대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