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니니와 아이스티 (1)
예선전 둘째 날, 첫 시합은 맥이 빠질 정도로 빨리 끝났다.
무투회를 대비해 제작한 글레이브를 보고 상대가 낙심한 표정을 보였을 때부터 짐작해야 했다. 상대편 검사는 외날 펄션과 원형 버클러를 들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창신만 2m 길이인 글레이브를 양손에 단단히 쥐고 하단을 겨냥해 창 머리를 내렸다. 자연스럽게 내 상완이 완전히 드러났지만 대놓고 보인 함정이라 설마 거길 노릴까 했는데 정말 노리더라.
내 창을 대비한 건지 손목에 찰 수 있는 금속 버클러를 착용한 건 좋았는데, 상대가 한 발 내딛는 타이밍에 빠르게 왼발을 박차고 닷지하며 창을 긁듯 쳐올리자, 상대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히이익!”
뭐야. 왜 빠져. 버클러로 창을 쳐내든 흘리든 해야 할 거 아냐. 잠시 상대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방심하지 않고 다시 빠르게 달려들어 명치를 노리고 창을 중단에서 내찔렀다.
양손으로 쥔 창대에 하중을 다르게 주어 낭창낭창 흔들리던 창신이 상대의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자리 잡았다. 어라, 이게 된다?
실전에서 이걸 바로 쓸 거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기회가 생겼으니 해보자. 곧장 손잡이를 돌려 허리와 어깨를 비틀어 깊이 내찌르자, 순식간에 창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건 옆에서 보면 마법 같다. 창의 간격이 변한 거니까.
날이 선 창날에 달린 후크에 상대의 검이 걸리는 느낌이 닿기 무섭게 창대를 끌어당겨 회수한다. 야호, 월척이로구나! 후크에 가드가 걸리자, 상대가 어어 하며 검을 놓쳤다.
바닥에 검이 떨어졌다. 상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와 검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벌겋게 살이 까진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기권하겠습니다.”
검을 놓친 상대가 곧장 전의를 잃고 기권을 선언했다. 어차피 두 번은 져도 괜찮으니 차라리 여기서 기력을 비축해 다음 시합에서 만회하겠다는 수가 보였다. 그럴 수 있지. 그렇기야 한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대전 상대가 좋지 않았다. 모든 아카데미생들이 무투회에 우승을 노리고 참가하는 건 아닐 것이다. 가문의 명령에 따라, 혹은 참가했다는 권위를 얻기 위해 싸우는 생도도 있다는 걸 알지만 말이야.
이번에도 마왕 녀석의 대결은 볼 수 없었다. 기어코 나보다 먼저 연무장에 찾아온 놈에게 나는 투덜거리며 하소연했다.
“그것도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영리한 건데, 난 영리한 놈들 싫더라.”
“좀 더 싸우고 싶은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됐어. 오후에 에일 원더와 대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신나게 싸워야지.”
크하하. 피다. 전투다. 다 파괴해 주마. 욕구불만을 떨치기 위해 과장을 섞어 웃었더니 마왕 놈이 슬쩍 두 걸음 물러났다. 뭐. 왜. 내가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는 놈의 곁에 찰싹 붙어 옆구리를 찔렀다.
난 약하다. 좀 심각하게 약한 편이다. 마왕 놈과 대련하며 한 번도 놈에게 심한 손상을 준 적이 없다. 영감님과 했던 대련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몸이 부러지고 찢어지는 건 이제 익숙해졌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잘 안 부러지고 안 찢어진다. 약하면 약한 대로 좀 유순하게 살 수도 있는데 왜 그게 안 될까. 단명하기 딱 좋은 성격인 걸 잘 알지만 고치기 어렵다.
“지상 최강이 되고 싶다. 그리고 전부 이긴 다음에 ‘훗, 변변찮군.’이라고 말하는 거야.”
“훗, 변변찮군.”
“와. 네가 말하니까 완전히 못돼먹고 사악해 보인다. 막 빌런 같고 그래. 그 대사는 버려야지.”
놈이 은은하게 웃더니 내 뺨을 뜯기 위해 손을 뻗었다. 놈의 손이 닿기 전에 나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좋아. 난 지금 욕구불만이야. 덤벼봐라. 마왕 놈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저 마왕 놈 역시 당연하다는 듯 연승 행진 중이시다. 놈과 나 둘 다 한 번만 더 이기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본선에서 이 자식을 만나면 내가 한 방이라도 먹일 수 있을까? 놈을 흘겨보다가 날이 조금 상한 브로드 소드를 담당자에게 건네고 점심을 먹기 위해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점심은 토스트를 먹기로 했다. 생햄과 치즈를 넣은 흰 빵을 납작하게 구운 파니니는 그릴 자국이 그대로 남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쫀득하다. 녹은 치즈와 햄이 짭짤해서 염분이 빠진 몸에 스며드는 맛이다.
거기에 얼음을 가득 넣어 유리잔 표면에 결로가 낀 아이스티를 마시면 단짠단짠이 황홀하다. 배만 차지 않으면 이대로 영원히 파니니와 아이스티의 루프에 빠질 것 같다.
물론 그것만으로 부족해서 곁들여 주문한 클램차우더를 훌훌 떠 마셨다.
제국에서 바다를 보려면 가장 가까운 근해만 해도 미스트 제후국을 거쳐야 하는데, 잘강잘강 씹히는 바지락은 여전히 맛있다. 부드럽게 부스러지는 감자도 달고, 심지에 씹는 맛이 남은 브로콜리가 크림을 잔뜩 먹어 고소하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후 냅킨으로 손가락에 묻은 녹은 치즈를 닦았다. 그리고 아직도 토스트를 우물거리는 마왕 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원 뭐 빌 거냐? 나랑 사귀자 그런 거 빌 거야?”
“…큽!”
다행히 놈은 토스트를 삼키는 데 성공했다. 젠장 아깝다. 놈이 실수하는 거 볼 수 있었는데 말이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놈이 나를 응시했다.
“우승 후에 말하는 거 아니었나?”
“어차피 우승은 정해진 거 같은데 미리 알면 나도 대비하고 좋지.”
“…연애나 감정을 우승의 대가로 받고 싶지 않군.”
“그럼? 고백은 나중에 한다고 치고. 뭐 받고 싶은데?”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
“야. 너. 인마. 자식아, 말고 제대로 펠런이라고 네가 불러줬으면 좋겠다.”
이건 내가 나쁘다. 정말 나쁘다. 마왕 놈이 주저하며 입을 연 걸 보니 오랫동안 생각한 모양이다. 변명할 거리가 있으면서도 입맛이 쓰다.
찬물을 한 컵 가득 마신 후에도 여전히 목 안쪽에 뭔가가 달라붙은 느낌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우승하면.”
놈의 눈가가 옅게 휘어져 웃는 낯을 했다. 이 자식하고 이런 대화를 할 때마다 놈이 아니라 내가 악당처럼 느껴졌다. 의도한 건지 몰라도 이럴 때만 순한 척하는 불곰 새끼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몰라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그리고 네가 여전히 사람일 때까지.”
“사람일 때까지?”
“그날이 오면 난 튈 거거든. 너랑 싸울 자신도 없고 이길 자신은 더더욱 없어. 그러니까 그때까지 우리 약속했잖냐. 친구는 네가 선빵 때리기 전까지야.”
놈이 생각 깊은 얼굴을 했다. 호칭 같은 걸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는데 말이야. 어차피 놈도 나를 자허라고 부른 적이 없으니까 호칭은 야, 너, 인마로 충분할 거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이 자식 생각보다 섬세한 불곰 새끼였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굴러라 용사님』 세상에 떨어져 자허라고 불린 적이 거의 없었다. 보통은 보라라든지 꼬마라든지 애송이 같은 별명으로만 불렸고 나도 다른 놈들을 변명으로 불렀다고 변명해 본다. 내게 저 자식은 펠런 엑사 드로젠이 아니라 마왕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놈의 이름을 의식해서 부르고 싶지 않았거나.
“그럼 너도 자허라고 불러. 생각해 보니 너도 내 이름 안 부르네?”
“그건 네 진짜 이름이 아니니까.”
“이름 알려주기 전까지 계속 안 부르려고? 나만 널 이름으로 부르고?”
“억울하면 우승해라. 네가 우승하면 나도 네 소원 하나 들어줄 테니.”
“…제길, 다시 생각한 거지만 강해져서 반드시 다 파괴할 거야. 너도 부술 거야.”
주먹 불끈 쥐고 최근 생긴 장래희망을 다시 다지고 있는데 놈이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좋아. ‘섬세하고 생각 많고 고집 센 불곰 새끼’. 그럼 뭐지, 고백은 언제 하려고? 거기까지 물어보기엔 내 낯짝이 그렇게 두껍지 않아서 난 놈의 평가에 단어 몇 개를 더 추가하고 몸을 일으켰다.
“나 이제 오후 예선 시작 전에 사제님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가실?”
“나는 신전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라고 말끝을 흐리며 놈이 고개를 돌렸다. 뭐지? 놈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리니 우리가 앉은 카페테리아 야외 테이블로 중절모를 쓴 장년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네 부하?’
“모르는 놈이다.”
입만 달싹거려 물었더니 모르는 사람이란다. 제2의 나인이 온 줄 알았지 뭐야. 그 사이 우리의 지척까지 사내가 다가왔다.
목에 외부인 방문객 명찰을 단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나와 마왕 놈이 앉은 테라스 테이블까지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내게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자허 블리스 님이시지요. 블리스가의 변호사 밀런 게체트입니다. 제국 안에서의 일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하고 찾아뵙게 된 점 양해 구합니다.”
“자허 블리스입니다. 여기까지 와줘서 감사합니다.”
마왕 녀석에게 양해를 구하고 변호사와 함께 아카데미 내 상담실을 대여해 대화를 나눴다.
역시나 제뉴어리 새끼 때문에 찾아온 변호사였다.
변호사는 이미 현장을 검사한 마법사와 사건을 처음 목격한 외부자인 경비 대장 그리고 교수와 면담을 마친 상태였다.
증거는 차고 넘치는 데다 당시 내게 약 섞은 칵테일을 준 바텐더를 구금하고 바텐더와 제뉴어리 사이의 금전 관계 및 협박도 증거자료로 모았다고 한다.
“자허 블리스 님과 그, 펠런 엑사 드로젠 님의 진술만 받으면 끝입니다. 구금 중인 피의자가 범죄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재판까지 큰일은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변호사인 밀런은 두려움 섞인 눈으로 흘깃 마왕 놈을 바라봤다가 시선을 빠르게 돌렸다.
간단하게 일어난 일만 서술한 후, 짧은 면담이 끝났다. 더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사건에 관련한 모든 권한을 밀런에게 일임했다. 단, 합의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당신과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밀러가 고개를 숙여 나 역시 마왕 놈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 부탁했다. 마땅찮아 보이던 마왕 놈이 말없이 자리를 비우고도 한동안 침중한 얼굴로 망설이던 변호사 밀러가 내게 말했다.
“어제 블리스 제후국에 사건의 경과를 보고하던 도중, 라울 미스트 님에게 언질 받은 것이 있어 알려드립니다.”
“흠? 라울 미스트 님이라면 제 고모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의 단독 전언입니다. 이번 무투회에서 4강 이상 달성을 기원하며, 방학 때 반드시 제후국을 방문해 주시길 요청한다. 이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거기까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만, 추측하건대 방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고모부를 믿는 건 아니다. 그래도 언질이 있다는 건 내게 좋으나 나쁘나 블리스에서 무슨 사건이 생겼다는 뜻이겠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지만 마땅하게 건질 만한 건 없다. 확실한 것. 4강 이상 달성 요망, 블리스 제후국 방문. 추측은? 방계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후계가 건재함을 알려야 할 상황임.
“할아버님은 건강하시지요?”
“마물 토벌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지만 그래도 건재하시다고 합니다.”
아카데미 내에서 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진술을 듣는 대로 변호사 밀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간 가까이 구술하느라 몸을 쓴 것도 아닌데 기력이 쭉쭉 빠진 기분이 들었다. 시간을 확인했더니 오후 예선전까지 고작 한 시간 남았다.
안 되겠다. 난 이제 남은 기력이 없다. 사제님을 만나러 가는 것도, 도서관에 들르는 것도 내일 하자.
생각보다 제뉴어리 새끼가 더 좆같았던 모양이다. 퇴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형을 산다는 말에 그냥 결투를 빌미로 죽여버리면 안 될까 잠시 생각해 봤다. 국가적인 차원의 보상금도 나올 테지만 내 알 바냐. 어차피 난 돈이 존나 많다.
상담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 마왕 놈이 변호사가 나가자, 다시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그때 모가지 밟아서 부러트릴걸.”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 보마.”
“그 새끼 모가지를 부러트릴 자리를?”
“그건 네 몫이라 했으니 사지 멀쩡하게 네게 보내면 되겠지?”
내 헛소리를 침착하게 맞받아쳐 주는 놈에게 아주 조금 고마움을 느꼈다. 마왕 놈의 손에 꽁꽁 묶여 바닥에 나뒹구는 제뉴어리 새끼를 상상하며 엎드린 채 낄낄 웃었다.
마왕 놈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뭐, 괜찮다. 당장 닥친 일부터 생각하자. 에일 원더의 화살을 피해서 내가 이길 수 있는 전술이라든지.
* * *
기다렸던 4차 예선전 시간이 되었다.
에일 원더는 흑각궁 대신 활대가 두꺼운 단궁을 쥐고 연무대 위로 올라왔다. 연병장의 크기가 작아서 연사가 가능한 단궁을 선택한 듯했다. 좀 아쉽지만 뭐 괜찮다. 마음껏 글레이브를 휘두를 생각을 하니 신난다.
“잘 부탁합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대결 시작을 알리기 전에 에일이 시위를 걸고 살을 쥔다. 굳게 입을 다물고 차갑게 과녁인 나를 응시하는 사수의 눈은 전율이 일게 했다. 젠장, 존나 멋있다. 원거리 딜러.
“시작.”
쐐액―!!
심판의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에일이 겨눈 살을 쏜다. 중단에서 꼬나쥔 창신을 휘둘러 화살을 쳐내고 보니 바닥에 떨어진 살의 수가 세 개다?!
미친!
파바밧―!!
쉴 틈 없이 살이 날아온다. 뒤로 뛰어 간격을 넓히며 연사하는 자세가 내가 배운 궁술은 애들 장난처럼 느끼게 했다. 상성이 안 좋긴 하지만 알까 보냐. 어차피 마족은 이보다 더 세다.
“흐, 읍!!”
다시 어깨와 옆구리를 노린 살을 쳐내고 간격을 좁혀 뛰어들었다. 닷지. 다시 닷지. 마치 노린 것처럼 디딤발을 노리고 빠르게 날아온 살을 쳐내기 무섭게 에일이 도리어 내 품으로 파고들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패링 대거를 순식간에 꺼내서 내 목을 노렸다.
“하!”
목이 긁혀 핏물이 튄다. 혈관은? 멀쩡하다. 화끈한 자극에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곧장 창을 축 삼아 바닥을 지지하고 다리를 쳐올려 에일의 명치를 후려쳤다. 충격에 그녀의 갑옷에 부딪힌 그리브의 조임쇠가 거친 쇳소리를 냈다.
제대로 닿은 느낌. 에일이 뒤로 나가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들어 그녀의 숨통을 노리고 창을 내찌른다. 단궁으로 창을 쳐내고, 시발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다시 사각에서 쐐기처럼 내찌르는 패링 대거.
같은 수에 당할까 보냐. 창을 비스듬히 꺾어 대거를 긁듯 밀어내고, 곧장 바닥에 뒹굴던 에일이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키며 징 박은 그리브로 내 허벅지를 내려찍었다.
콰직―
허벅지에 덧댄 가죽 갑옷을 꿰뚫고 얕게 살이 찢어졌다. 피가 튀지만 심한 상처는 아니다.
간격이 멀어짐과 동시에 다시 날아오는 세 대의 살. 아니, 네 대다. 한 대를 쳐내지 못해 어깨에 박혔다. 괜찮아. 뼈는 상하지 않았으니 싸울 수 있다.
아랑곳하지 않고 블리스가의 창술을 전개했다. 호흡은 지금까지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고 정신은 맑고 명료하다. 창끝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눈에 선하다. 마치 미래 예지처럼.
구불구불 물결치던 창이 곧장 하나의 실선이 되어 빠르게 상단을 겨냥한다. 블리스 창술의 기본, 그리고 모든 창의 기본인 찌르기지만 그 속도는 살보다 빠르다.
쿠드득―!!
에일 원더의 어깨를 창날이 꿰뚫었다. 가죽 갑옷을 뚫고 근육을 부수는 감각. 그와 동시에 에일이 뒷걸음질 쳤다. 상처는 얕지 않다. 그녀의 눈에서 치밀어오르는 호승심을 읽고 씩 웃었다. 에일 역시 마주 웃는다.
“하하!”
다시 간격을 벌리기 위해 뒤로 뛰는 에일의 품 안으로 파고든다. 창 날, 거세게 휘둘러 에일의 귀를 터트렸다. 창을 회수한 팔에서 뿌드득, 근육이 기분 좋게 수축하고 다시 그녀의 살처럼 강하게 내찔렀다.
살이 터진다. 피보라가 붉게 일었다. 입 안에 비릿한 맛이 나는 것 같아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무릎 꿇은 에일 원더를 내려봤다.
“시합 종료. 승자, 자허 블리스.”
같은 자리 또 뚫린 허벅지가 너덜너덜하고 옆구리가 좀 찢기긴 했지만 이겼다. 아직 어깨에 박힌 살을 힘주어 비틀어 빼냈다. 같은 아카데미생이라 배려해 준 건지 화살 끝에 달린 촉이 물고기의 배처럼 매끈하다.
나만 당한 건 아니라 에일 원더의 상태는 더 처참하다. 완전히 날아간 귀 한쪽은 지혈이 잘 안 되는지 머리를 귀가 뜯겨 나간 쪽으로 기울인 자세가 삐딱하고 멋지다.
“원래라면 쐐기 같은 촉을 써서 살을 째고 화살을 빼야 하는데 동기끼리 그럴 수는 없잖아.”
“배려 감사합니다.”
“재미있었어. 오래간만에 몰입해서 싸워서 즐거웠지. 검도 잘 쓴다며, 나중에 나랑 대련하자. 내가 장검도 잘 쓰거든.”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에일은 피 철철 흐르는 어깨를 대충 지혈한 채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아직 피가 굳지 않아 끈끈한 손으로 악수하며 나는 서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입이 잘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와 말이 아닌 창과 활로 더 오래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에일 원더는 앞서 기다리고 있던 개인 시종과 함께 치료를 위해 연무장을 떠났다. 생각해 보니 내 상처도 침 좀 바르고 놔둘 찰과상은 아니다. 긴장하고 있던 탓에 잠시 잊고 있던 통증이 밀려오길래 나는 허벅지를 절뚝거리며 창을 지팡이 삼아 치료실로 향했다.
먼저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마왕 놈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사제를 만났다. 다행히 무투회 일정 때문에 인원을 충원한 건지 처음 보는 사제님들이 여럿 계셔서 대기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아픈 건 사라졌는데 밤을 지새운 것처럼 전신이 나른하다. 발끝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가자, 치료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왕 놈을 발견해 대충 손을 흔들어줬다.
“이겼냐?”
“그래. 너도 이겼더군.”
“상대하기 까다롭긴 했어. 아무래도 활은 검과 간격이 다르니까. 연무장이 조금만 더 넓었어도 위험했어.”
내 지척까지 다가온 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어라, 마왕 놈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계속 붙어살다 보니 이제 조금은 놈의 생각이 보였다.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녀석들로 북적거리는 신전 앞을 피해 마왕 녀석과 사잇길을 걸어갔다.
“암수에 당하기라도 했어? 상대가 더럽게 싸우던? 왜 우울해 보이냐.”
“네가 다른 녀석에게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와 젠장. 이 자식 미쳤나 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귀 끝까지 열이 오르는데 이게 화병인지 아니면 쑥스러워서 이런 건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아니, 내 코뼈 부수고 사지도 찢었던 놈이 할 소리야?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다친 걸 보고 우울해하는 놈이 귀엽다는 생각이 뒤섞여서 기분이 이상하다.
“다치려고 다친 건 아니고, 싸우다 보니 이성을 잃게 되더라고. 그래도 목숨에 크게 지장 있는 건 아니니까.”
“다시 말하지만, 사제의 치료는 만능이…….”
“아니지. 그래 알아, 인마. 하지만 나는 제국의 창이라고? 여기서 지면 우리 영감님 무슨 면목으로 보겠냐.”
아직 제후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진 건 아니다. 그래도 말이야. 실력은 있지만 내가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실력이 없으니 꿈도 못 꾸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다른 건 약속 못 하는데 너 말고 다른 녀석에게 지지 않을 거라는 약속은 할게.”
“청혼인가?”
“아니다, 이 자식아. 차라리 결투 신청이라고 해.”
은근슬쩍 하는 말을 보라지. 우리 애가 능글맞아졌어요. 내가 이상한 걸 가르쳤나 봐. 나는 다시 한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 둘 다 예선전 3일간의 일정 중 먼저 4승을 달성했으니 남은 경기에서 모두 패배한다 해도 본선 진출 확정이다. 무투회 운영 위원회는 운도 실력이니 4승을 달성한 본선 진출자는 남은 예선전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난 예선전 끝까지 달릴 생각이다.
“연달아 나갈 기력 없다. 오늘은 집밥 먹자.”
“여긴 집이 아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헉, 해산물! 오늘은 이거 먹어야지.”
저녁은 나가서 먹는 대신 아카데미 내 학생 식당에서 대충 해치우기로 했다. 몸은 치료를 받아서 가뿐한데 정신적으로 피로가 누적된 기분이 들었다.
나만 지친 게 아닌지 테이블마다 예선 치른 놈들이 피와 먼지도 씻지 않고 언데드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빵이나 고기 등등을 질겅거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상처는 대충 치료들은 한 것 같지만, 옷에 묻은 피는 지워지지 않으니 도축장에 들어온 것처럼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나만 해도 안에 받쳐 입은 천 갑옷의 바지 한쪽과 상의가 말라붙은 피투성이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피곤해도 입에 밥은 들어간다. 잘 먹어야 근 손실이 안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먹자, 먹어야 내일도 싸우고 모레도 싸우지.”
“모레는 본선 전이라 전투가 없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농담을 못 알아들어요, 우리 영감님.”
“효도나 하면서 영감 취급하도록.”
반숙 달걀과 상큼한 소스로 버무린 어린잎 샐러드에 전분 가루 묻혀 튀긴 새우에 매콤달콤하게 칠리소스를 끼얹은 튀김. 그리고 버섯과 각종 채소와 해산물을 넣어 걸쭉하게 끓인 수프를 맛본다.
새우는 꼬리까지 바싹하게 튀겨졌다. 촉촉한 새우살에 버무려진 달짝지근한 소스가 없던 입맛도 살릴 정도였고 수프는 김이 안 나길래 얕봤다가 입천장을 데고 찬물을 들이켜야 했다. 그렇지만 두툼한 관자와 목이버섯이 씹는 맛은 좋더라.
“너는 내일 예선전 어떻게 할 거야? 남은 예선 넘기고 바로 본선 신청할 거면 오늘 저녁까지 말해야 한다던데.”
“마지막까지 치를 생각이다. 너도 마찬가질 텐데?”
“나야 뭐, 아직 부족하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너는 더 싸울 필요 없지 않을까. 레벨 차이 때문에 경험치도 안 들어오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 밤새도록 게임하며 라면 먹고 싶은 밤이다.
근력 운동을 하는 것도 대련하는 것도 마땅찮다. 가벼운 몸살이라도 도진 듯 몸이 무겁길래, 가볍게 스트레칭만 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욕실 벽에 머리를 박고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치열하게 고민했다.
제후는 어떻게 하는 거지?
딱 1년 전만 해도 나는 블리스의 제후가 될 생각이 없었다. 받아먹을 수 있는 것만 받아먹고 튈 생각이었는데 애초 예상이랑 일이 너무 많이 틀어졌다. 어쩌다가 마왕 놈이랑 친구 먹게 된 거지? 그야 놈이 협박했지. 친구가 되지 않으면 추적 관찰 감시하겠다고.
빌어먹을 마왕 새끼.
놈은 미래를 알고 있으니 이제 소설대로 내용이 전개될 거란 생각도 못 하겠다.
마왕 놈이 각성한다는 빌미로 내 살길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놈이 얌전하게 천수 누리고 살면 나도 여기서 호호 할아버지 될 때까지 잘 먹고 잘 살 것 같다. 이렇게 아카데미 졸업하고, 블리스로 내려가서 후계자로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나?
내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나왔다. 나 다음으로 욕실을 쓰기 위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놈이 나를 돌아봤다. 놈이 소파에서 일어나기 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가 앉아 있는 놈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빌어먹을, 네가 잘못했네.”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알면 내일 저녁은 네가 쏴.”
“…생각해 보니 그리 큰 잘못은 안 한 것 같다.”
“아냐, 했어. 큰 잘못 했어. 몸만 쓸 줄 아는 내가 머리 쓰게 만들었으니 큰 죄거든?”
“지난번에 먹었던 닭고기면 되나?”
“물어버릴 거야. 물어버릴 테다! 그럴 땐 ‘넌 원래 머리도 잘 썼다.’라고 해야지.”
“넌 원래 머리도 잘 썼다.”
놈의 머리를 아구아구 물다가 지쳐서 소파에 나가떨어졌다. 소파에 축 늘어진 나를 마왕 놈이 안 빨고 내버려 둔 세탁물 바라보듯 은은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욕실로 씻으러 들어가고 나는 그대로 소파를 차지해 모로 누워 쿠션을 끌어안았다.
“골치가 아프네, 골치가 아파요~”
저 녀석과 친구인 게 나쁜 건 아니다. 상대가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데다 죽도 잘 맞고 심지어 놈은 잘생기고 강하다. 하다못해 내가 자유무역 도시로 튄다 해도 저놈 하나 데리고 가면 어디서 칼밥 먹으며 살 수도 있을 거다.
블리스에 데리고 갈 생각은 없다. 그럴 수야 없지. 만약에 놈이 각성하면 바로 지척에 있는 나도 나지만 영감님도 죽고 블리스도 망한다.
어차피 놈이 마왕이 되면 인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 직전에 이르겠지만, 내 행동으로 블리스가 망하는 시점을 앞당기고 싶지 않은 거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까지 챙길 주제도 못 되고. 아 빌어먹을, 제기랄.
잠깐 생각하던 사이 어느새 나온 마왕 놈이 내 귓바퀴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단단하지만 따뜻한 손이 여간 다정한 게 아니다.
기분 좋아서 놈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놈의 손이 멈칫 굳었다. 이럴 줄은 몰랐냐? 노린 거다, 이 자식아. 도리어 내가 놈의 손에 이마를 묻기 위해 손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나?”
“네가 마왕으로 각성하면 어디로 튈까 하는 생각.”
“…이름 없는 섬이 좋을 거다. 마지막까지 인류 외 종족의 거처는 건들지 않았다고 하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자유무역 도시에서 신분 세탁하고 새 이름 얻어서 배 타고 가야지.”
“그럴 돈은 있고?”
“모으고 있지, 당연히. 너 각성해도 이 두 군데는 건들면 안 된다?”
“거기서 못해도 10년 정도 버티면 용사가 해결해 줄 거다.”
“선생님, 지인 찬스는 없습니까? 하나뿐인 친구 놈은 살려준다. 뭐 이런 건 없어요?”
“마음 편하게 마왕의 부하가 될 생각은 없나?”
“그 말 그대로 우리 영감님 앞에서 해봐.”
“…내가 잘못했다.”
순순히 항복하는 마왕 놈을 돌아보기 위해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주고 소파에 바로 누웠다. 벌써 씻고 나왔나? 아니면 생각하느라 시간이 흐른 것도 모르고 있었나?
소파에 오래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눌린 뺨이 뜨끈뜨끈하다. 침도 좀 흘린 것 같고. 생각한 게 아니라 잠깐 잠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입가를 슬슬 문질러 닦는데 놈이 방 안에서 자라며 채근했다. 요즘 마왕 놈 잔소리가 우리 제리 못지않다. 마왕 놈에게 두 팔을 뻗고 힘없이 흔들며 빠른 침대 이송을 요청해 봤다.
“업어라. 젊은이. 나는 쇠약해서 일어나 걸어갈 기력이 없구나.”
“…효도라도 해주랴?”
“효도? 어디 한 번 극진하게 해봐라.”
“마사지라도 해줘야 하나?”
“…그거 말고. 그냥 침대에 데려다 주십쇼.”
그 망할 놈의 마사지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놈이 알고 나도 안다. 어금니 바득바득 갈며 말하자, 놈이 피식 웃고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등허리와 허벅지를 단단히 받친 두 손에 나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거 말로만 듣던 공주님 안기!”
“내가 알던 공주보다 체격이 부실한데?”
“드로젠 왕국의 왕세녀 준 엑사 드로젠이랑 비교하는 거면 너무한 거 아니냐? 그 양반은 양손에 배틀 엑스 하나씩 들고 마물 참수가 특기라던데.”
“요즘도 마경과 맞닿은 국경에서 마수 사냥 중일 거다.”
이부 누나와 사이가 좋냐는 이야기는 안 물어봤다. 한 녀석이라도 마왕 놈에게 잘 대해줬다면 『굴러라 용사님』은 시작도 안 했겠지. 짧게 입맛을 다시고 놈이 침대에 눕히는 대로 순순히 드러눕는 척 놈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히 놈에게 물었다.
“야, 있잖아. 우리 섹스할래?”
“…….”
“오늘 말고, 내일 예선전 끝내고. 이틀이나 쉴 수 있으니까 내일 저녁에 한 판 뜨겁게.”
“섹스하면 친구 아니라고 한 건 너잖나.”
“한 번만 해보자. 친구인 채로, 하고 나서도 여전히 친구인 걸로.”
놈의 표정은 의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자식은 불쌍한 척 의뭉 떠는 건 존나 잘하면서 이럴 때만 표정 관리 철저하더라.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놈의 목에서 손을 풀었다. 반응이 없으니 괜히 민망하다.
“내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데,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이유를 물어도 되나?”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게 성교로 확인이 되는 일인 줄 몰랐군.”
“자식 말 많네. 아, 좋아. 내가 선심 썼다. 내일 네가 넣어도 되는데 어때.”
“…오늘은 안 되나?”
뭐 이런 비열한 놈이 다 있어. 나는 낄낄 웃으며 놈의 인중에 주먹을 휘둘렀다. 아쉽게도 내 주먹은 간단히 잡혔지만 말이다. 나는 붙잡힌 손을 털고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내가 이것저것 준비를 안 했어. 내일 괜찮지?”
놈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세히 보니 놈의 귓가가 불그스름하다. 체온으로 말하는 새끼 같으니. 나는 히죽거리며 주먹질하기 위해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파묻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따로 자자. 아니면 내가 너 덮친다? 막 네 엉덩이 탐해버린다?”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그런데 있잖냐. 너는 나 왜 좋아하냐?”
내 말에 놈이 눈을 깜박거린다. 아이고, 당황하셨군. 입을 잠시 달싹거리던 놈이 조금 굳은 얼굴로 내게 묻는다.
“나는 좋아한다고 네게 말하지 않았다만.”
“그럼 싫어?”
“…….”
“빼지 마, 인마. 몸으로 나눈 정도 정이라고 몸 섞으면서 정든 거 딱 보여서 그래. 그래서 나도 한번 제대로 몸 섞어볼까 한 거고.”
“그것 때문에 좋아하는 거 아니다.”
“그럼 뭐 때문인데?”
놈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뭐야, 그럼 좋아하긴 좋아하는 건가 보네. 말하면서도 혹시 내가 설레발 치고 있는 건 아닌가 불안했는데 말이야. 더듬더듬 손끝에 걸린 베개를 끌어당겨 가슴에 끌어안고 상반신만 일으킨 채 놈을 바라봤다.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면 지금 말해. 내가 설레발 치고 있거나 아니면 착각하는 거 그냥 놔두는 거면 너 나쁜 놈인 거다? 내가 진심으로 부딪치는데 너도 그래야지. 아냐?”
“…착각 아닌 거 알잖나.”
내뱉듯 외치고 도망치듯 물러나는 놈을 배웅하는 대신 나는 배를 붙잡고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방문이 닫히고 나는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억지로 쥐어짠 웃음은 금방 멈췄다. 왜 대련보다 이게 더 힘든 건지, 심장은 전력으로 달린 것처럼 뛰고 얼굴이 터질 것 같다.
나는 놈을 좋아하는 걸까?
놈이 만지는 게 나쁘지 않다. 오히려 대화가 즐겁고 편하다. 지내다 보면 장래에 날 죽일지도 모를 놈이라는 걸 잊을 지경이다.
놈은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 그럴 수 있고 내가 놈을 좋아하는 게 맞으면 어쩌지. 블리스로 데리고 갈 수 없으니 저 새끼 데리고 튈까. 각성 안 할 수도 있다잖아? 사람 죽이기 싫다고 한 녀석인데.
여전히 놈이 무섭다. 그러나 그건 놈이 앞으로 저지를지도 모를 일에 대한 불안이지, 놈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다. 반강제로 친구가 되긴 했지만 진짜 친해지기도 한 마당에 난 놈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본명은커녕 내 지난 생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전부 다 털어놓고, 놈이 나를 배신하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갓 잡아 올린 숭어처럼 퍼덕거렸다. 아우 젠장, 민망하다. 연애든 사랑이든 뭘 해봤어야 지금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짐작이나 해보지. 빌어먹을 제기랄.
생각 금지 그리고 추측도 금지. 불길한 미래를 전망해 봤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는 이상 기력 낭비다.
새삼 생각하는 거지만 난 머리 쓰는 거 싫다. 스트레스에도 취약하다고? 내가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하고 연약한 검귀인데 말이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쓰린 속을 달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예선전은 마왕 녀석보다 내가 먼저 시작했다. 예선전 상대는 두 사람 다 롱소드를 쓰는 몇 학년 위의 선배였다.
두 번 이상의 패배를 겪은 이들이었기에 악다구니를 가지고 덤비리라 생각하고 단단히 각오했는데 오전에도, 그리고 오후 마지막 대결까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치열하기로 따지자면 첫날 싸웠던 검사가 더 상대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예선전이 끝나고 6승을 기록한 나는 곧장 마왕 놈이 싸우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녀석의 마지막 예선 상대인 진 미스트가 어떻게 싸울지도 궁금하고 3자의 시점으로 마왕 놈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왕 녀석의 예선이 치러지는 연무장은 이미 사람이 가득했다. 어라, 보아하니 펜스 안에 이미 사제가 대기 중이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어리둥절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왕 녀석을 발견했다.
“허, 저 무기 처음 보는데.”
마왕 놈은 평소 쓰던 가드가 긴 롱소드가 아닌 검날이 완만한 곡선 형태의 사브르를 양손에 한 자루씩 쥐고 있었다. 특이하게 손잡이 또한 검날처럼 휘어진 반달 모양이었는데, 가드가 폼멜과 이어져 손등을 완전히 감싼 형태였다. 마왕 자식 쌍검술도 배운 적 있나?
“사과 깎기 잘하게 생겼네.”
짧게 감탄하며 벌써 시작한 전투를 감상했다. 가드에 수월한 무기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마왕 녀석은 두께 얇은 사브르로 빠르게 짓쳐 오는 진 미스트의 아밍소드를 수월하게 비껴 흘린 후, 마치 과일을 깎듯 상대의 갑옷 틈으로 파고들어 베고 또 베고 다시 벴다.
무심하게 툭툭 쳐내는 것 같은데 힘과 기술이 극에 달하다 보니 진 미스트가 검에 반응하기 전에 면 갑옷은 찢어지고 살이 깎여나갔다.
찔리는 게 차라리 낫지. 저렇게 살이 깎이면 당한 상대는 전의부터 상실하기 마련이다.
썰리다 보면 뼈도 보이고 피고 흐르고, 고통도 심하겠지만 저런 식으로 당하면 정신도 함께 깎이기 마련이다. 보는 내가 괜히 아픈 것 같아 목이 다 뻣뻣하다. 그보다 저 자식, 저런 기술도 쓸 줄 알았구나. 감탄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진 미스트는 곧 기권했다. 더 싸우고 싶어도 출혈이 심해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인 듯했다. 심지어 연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제가 허겁지겁 시합이 종료됨과 동시에 진 미스트에게 달려갔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저 마왕 놈이 치르는 예선전 내내.
“승자, 펠런 엑사 드로젠!”
승리를 외치는 심판의 안색이 창백하다. 피 기름에 흥건히 젖은 사브르를 시종에게 건넨 마왕 놈이 연무장 아래로 내려와 바로 나를 찾았다. 상대인 진 미스트가 출혈이 심해서 악수를 청하지도 받지도 못할 상황이라는 건 둘째 치고 아무도 놈을 보고 감탄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놓고 혀를 차는 사람들, 질려 하거나 혐오하는 시선들이 목 안을 찌르는 생선 가시처럼 거슬려서,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놈을 마주 바라보며 나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뭐 상대를 죽인 것도 아니고 제 기술 써가며 잘 싸웠는데 왜 우리 아이 기를 죽이고 그러냐 진짜.
“장하다. 멋있다. 연전연승이네. 내 새끼.”
“…뭐?”
“어디 다친 덴 없어? 얼굴에 피가 잔뜩이네. 성실하게 훈련한 보람이 있어.”
수건에 물을 적셔 마왕 놈의 얼굴에 튄 상대방의 핏물을 닦았다. 놈은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착하고 순한데 말이야. 사람들이 진짜 뭘 모른다. 애를 저렇게 대하니까 애가 막 비뚤어지고 마왕 되고 그러는 거 아냐. 나쁜 놈들.
마지막 예선전이 끝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치료와 운신을 위한 건지 얼마간의 휴식 시간이 흐른 후에, 무투회 담당 교수가 중앙 분수대 앞에 모인 본선 참가자들에게 본선 일정과 대진표를 발표했다.
“본선은 토너먼트 형식이다. 이틀의 휴일을 보낸 후 다시 한 주의 첫날부터 나흘간 1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 대결을 벌일 것이다.”
분수대 허공에 마법으로 쏘아 올린 대진표가 전광판처럼 반짝거렸다. 가장 먼저 내 이름과 마왕 놈의 이름이 적힌 위치를 확인했다. 아카데미에서 의도한 건지, 아니면 우연인 건지 내가 지지 않고 계속 올라가면 마왕 놈과 결승에서 붙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보자, 에일 원더는 나보다 먼저 마왕 놈을 만날 것 같고, 보아하니 6승을 달성한 이들은 초전에 바로 만나지 않도록 떨어트린 듯했다.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을 추적해 보면 진 미스트가 내가 연승하는 경우, 16강 전인 4차전에서 만날 상대다.
우선 내일부터 모레까지 대결도 강의도 없는 주말이다. 이틀간 쉬면서 앞으로 만날 상대의 전략을 짜거나, 아니면 평소 하던 대로 몸을 단련하거나, 혹은 누군가와 섹스하거나. 문득 잊고 있던 일정이 생각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웠다.
“저녁 기숙사에서 먹는 건 어때? 내가 요리해 줄게.”
“요리도 할 줄 알았나?”
“그 정도는 패시브지. 잘하는 건 아닌데 먹을 만할걸?”
밖에서 먹는 것도 내키지 않고, 학내 식당을 이용하고 싶지도 않아서 간단한 재료를 사서 기숙사 방 안에서 먹기로 했다. 어차피 놈도 요리할 줄 알고 나도 간단한 건 만들 수 있다.
학생들을 위한 생활용품 상점에 들러 식자재를 바구니 안에 넣으며 나는 놈에게 조곤조곤 속삭였다.
“만약에 본선에서 나랑 싸우게 되면 네가 제일 잘 쓰는 무기 들어줘.”
“내가 잘 쓰는 무기는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사브르는 어디서 배웠대 그럼?”
“어릴 때, 지난번 봤던 마법사가 소개해 준 용병에게서.”
“아, 그 나인이라고 했던?”
놈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놈에게 연락 온 건 없고?”
“없다. 워낙 신출귀몰한 놈이라. 개인 채널을 통해 연락을 해봤지만, 답을 하지 않더군.”
“하는 짓은 부하가 아니라 상전인데?”
신중하게 바구니 안에 두 사람이 하루 먹을 정도의 재료만 집어넣었다. 사는 김에 필요한 물건도 더 사고, 스쳐 지나가듯 성인 용품 코너에서 슬쩍 물건 하나 챙기고.
요리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식자재가 남아봤자 버리기만 하겠지. 향신료는 가지고 있으니 재료만 사자. 호두를 넣어 구운 딱딱한 호밀 빵이 하나. 덩어리 치즈와 우유 그리고 감자랑 양파를 넣고. 좋아, 당근은 빼자. 내가 당근은 잘 안 먹어서.
기숙사 방으로 들어와 장 본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간단하게 몸을 씻었다. 간단한 반소매 셔츠와 면바지로 갈아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우선 재료 손질부터 할까?
“너도 뭐 만들게?”
“크림 스튜 만들 거잖나. 함께 먹을 간단한 요리로 준비하마.”
“오오, 요리도 잘하고 그런가 보다? 막 기대한다? 검술 솜씨만큼 기대해 버린다?”
놈이 비죽 웃더니 내 뺨을 가볍게 쥐었다 놓는다. 괜히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놈의 손가락을 무는 시늉을 한 후 냄비를 찾아 마법 화덕 위에 올렸다.
속이 깊은 냄비에 버터 한 조각을 넣고 한입 크기로 자른 소고기를 가볍게 굽는다. 이크, 화력이 세서 그런지 냄비 바닥이 금방 탄다. 다시 버터 한 조각 추가. 생각보다 버터가 많이 들어가는데 이거? 뭐, 이거 먹고 침대 위에서 한 판 뜰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크게 썬 감자와 양파, 잘 안 먹지만 당근을 포기한 대신 셀러리를 넣고 함께 볶기 시작하다가, 양파의 가장자리가 투명해질 즈음 밀가루를 한 스푼 집어넣고 덩어리가 지지 않도록 잘 섞어준다. 그리고 우유를 부어 농도를 조절하는 거다.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 불 온도를 줄이고, 대신 덩어리 치즈를 강판에 갈아 표면에 뿌려준다.
“접시랑 포크 좀 챙겨줘. 빵도 잘라주고.”
“빵은 각자 한 덩어리면 되나?”
“응. 소스 찍어 먹을 거니까 알아서?”
내가 크림 스튜를 만드는 동안 놈은 알아서 메쉬드 포테이토와 홀랜다이즈 소스를 끼얹은 에그베네딕트를 만들어 빵과 함께 큰 접시 위에 얹었다.
큰 집게와 함께 냄비를 테이블 위로 옮겼다. 와인 병을 따는 대신 음료는 알코올 없는 진저에일 병을 땄다.
조리할 시간이 길지 않아, 일부러 얇게 썬 고기를 썼더니 고기가 조금 질긴 맛이 있다. 그러나 아마추어가 만든 것치고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사실 요리는 자기가 만든 게 제일 맛있는 법이다.
반숙 달걀을 갈랐더니 노란 소스에 노른자가 뒤섞여 제법 맛있는 냄새가 났다. 호밀 빵 위에서 줄줄 흐르는 노른자를 한입에 덥석 물었다. 입 안에 뜨끈뜨끈하고 고소한 달걀노른자와 새콤 고소한 소스 맛이 제법이다.
“음음음, 네가 만든 에그베네딕트 맛있어. 한참 옆에서 버터를 녹이고 있길래 뭐 만드는가 했지.”
“마음에 들었다면 조식으로 종종 만들어주마.”
“스튜는 어때? 좀 묽지 않아?”
“고기가 많아서 좋군. 맛있다.”
크림은 조금 묽게 된 건가. 뭐 상관없다. 어차피 놈도 나도 고기파다. 혀끝에 남은 알갱이진 후추를 오독오독 씹다가 부드러운 포테이토를 남김없이 빵으로 득득 긁어 먹었다.
나도 잘 먹는 편이지만 놈도 만만찮다. 양 조절에 실패한 것 같은 5인분은 되어 보였던 크림 스튜가 한 끼 만에 바닥을 보였다.
“맛있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오랜만에 만들어서 그런지 영 손이 잘 안 움직이네.”
“예전에도 요리했었나?”
“아니, 요리는 잘 안 했어. 거의 사 먹었지. 삼각 김밥에 라면, 근처 식당에서 돼지 불고기 백반. 샌드위치…….”
“샌드위치 말고는 생소한 요리들뿐이군.”
“아주 가끔 요리하긴 했는데. 그냥. 그럴 때 있잖아. 이런 날만큼은 사서 먹지 말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뭘 만들어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
“그럼 오늘은?”
“너랑 나 자신을 위해 요리하는 날.”
성탄절이라든지, 추석이라든지, 생일이라든지 여하튼 그런 날이 있을 때는 인터넷에서 조리법을 뒤져가며 재료를 사고 조리를 했다. 나 같은 요리의 요 자도 모르는 놈은 어레인지는 꿈도 꾸지 말고 조리법대로만 만들면 최소한 기본은 하니까.
오늘은 뭘 위해서 요리한 건지 놈도 추측하고 있을 거다. 섹스가 이렇게 기념할 만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너는 요리 누구에게 배웠어?”
“책을 통해서. 삽화도 함께 있어서 배우기가 어렵진 않았지. 내가 거주하는 별궁에 오래 머무는 요리사나 하인이 없어서 스스로 조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독학했었다.”
“대단하네. 씩씩하게 잘 자랐네. 기특해, 기특해.”
“…다른 요리도 할 줄 아는 거 많다.”
“언제든 또 만들어주라. 완전 맛있어. 나도 가끔 해줄게. 네가 못 먹어본 것도 있을 거야. 여기서 재료는 구할 수 있으니까.”
내가 만든 음식이 누군가의 뱃속에 남김없이 들어간다는 건 생각보다 기쁜 일이다. 그걸 오늘 처음 느꼈다. 요리사들은 날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겠구나. 설거지는 놈에게 맡기고 나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며 슬쩍 놈에게 물었다.
“오늘 뭐 하는지 알지?”
“…설거지 끝나면 네 방 정리하고 기다리마.”
“내 방에서 하게?”
“내 방이 더 좋다면 그렇게 하고.”
“음, 아니다. 내 방에서 하자. 정리하지는 말고 그냥 기다려. 괜히 너 일만 시키는 거 같잖아.”
이미 샤워를 해서 더 씻을 것도 없다. 내가 씻으러 들어간 게 아니라는 걸 놈도 알까.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한 후, 샤워기를 틀었다.
온몸에 홧홧하게 열이 오른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기대가 반이고 나머지 반은 불안과 공포와 여하튼 싱숭생숭함이다.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고.
엉덩이 한쪽을 한 손으로 쥐고 손가락을 틈 사이 밀어 넣어봤다. 아무래도 뻑뻑해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물감이 어마무지 심하다. 물이 들어갈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역시 뭔가 써야겠지 생각하고 아까 마트에서 사서 샤워할 때 슬쩍 욕실 찬장 구석에 숨겨둔 젤 타입 윤활제를 꺼내 손바닥에 부었다.
물 때문인지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하다. 젤 냄새를 맡아봤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이거 사려고 일부러 장도 보고 결제도 내가 했다.
손가락이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을 구부려 휘저어봤지만 뜨겁다는 느낌 말고 잘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손가락을 하나 더 넣어보자. 침착하게 중지를 밀어 넣어보지만, 입구에서 막혔다.
젤을 더 써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튜브 뚜껑을 완전히 제거하고 뾰족한 끝을 틈 사이 밀어넣고 꾹꾹 짜 젤을 한 통 다 넣어봤다.
나는 마왕 놈의 작은 마왕 놈이 얼마나 큰지 안다. 곧 그게 이 안에 들어온단 말이지. 잘 안 풀어두면 내 엉덩이는 처참하게 사망할 거다. 물론 사제님을 찾아가서 치료하면 되겠지만 엉덩이 문제로 사제님을 찾아가고 싶지 않다.
“읏, 크으. 아까, 보다 더 들어가는 거 같기도 하고.”
손가락 두 마디를 더 넣고 꾹꾹 눌러봤더니 안쪽이 왠지 간질간질하다. 더 씻다가 온몸이 물에 퉁퉁 불어버릴 것 같아 결국 대충 샤워를 끝마치고 욕실을 나섰다.
마왕 놈은 역시나 내 방 안에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말도 안 듣고 시트를 정리하고 계신다. 아이고, 내가 히든 보스인 모양이다. 지상 최강 마왕님을 시종으로 다 부려먹기도 하고.
“머리는 다 말려야지. 그래야 감기에 걸리지 않아.”
“자허는 이제 어른이라 혼자 할 수 이써여.”
어린애 취급하기는. 놈의 장단에 맞춰 혀짤배기 어린애처럼 말했더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놈의 표정이 미미하게 풀렸다. 그래 인마. 넌 표정 굳으면 존나 무섭단 말이지. 그래도 기죽은 얼굴보다 훨씬 보기 좋다.
심지어 놈은 그사이 나 마시라고 물도 떠 놓았다. 마왕 놈이 건네준 차가운 물을 마셨더니 열이 오른 것처럼 뜨거운 속이 한결 식었다. 젖은 머리카락에 수건을 얹고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놈을 바라보며 나는 욕실 안에서 한참 고민하던 생각을 놈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싫거나 무섭거나 여하튼 하고 싶지 않으면 바로 말해야 한다? 하는 도중에도 그렇다? 나는 막 억지로 하고 그러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건 내가 네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물론 나도 싫으면 바로 말할 거야. 여하튼 해도 되는 거지?”
“…그래.”
“그럼 일단 씻고 와. 특히 고추는 잘 씻어야 한다?”
지저분해진 몸으로 성교할 수 없어서 마왕 놈을 욕실 안에 밀어넣었다.
“가서 고추 뽀득뽀득 잘 씻고 와. 잘 씻었는지 검사할 거야.”
내 딴에는 콘돔 없는 이 세계에서 건강하게 떡 치려면 청결이 최우선이라 한 말인데 놈은 귀 끝이 은은하게 붉어져 내 시선을 피해 욕실로 들어갔다.
뒤는 더 풀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으로 입구를 꾹 눌러봤다. 욕실 안에서 해보긴 해본다고 손가락을 두 개 넣긴 했는데 마왕 자식 성기 크기를 생각하면 한참 부족할 것 같고.
내 성기는 반쯤 발기한 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더 커지는 일은 있어도 여기서 더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슬픈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내가 성욕의 아이콘이 아닌가 싶고. 변태 같고.
“으, 미치겠네. 이상하게 가려운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이거 미약 성분이라도 들어 있는 젤인가? 그냥 성인용품 코너에 있던 거 마왕 놈이 보기 전에 재빨리 담느라 제대로 못 보긴 했는데.
손가락이 닿기 무섭게 조금 부푼 입구가 움찔거렸다. 가렵다고 말했지만, 벅벅 긁고 싶은 느낌은 아니다. 비슷한 느낌이 가려움증뿐이라 그렇게 말한 거지, 조금 더 애타는 느낌이다. 전생 이생 합치면 내 나이가 몇인데 당연히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지.
마디를 구부려 안쪽을 꾹꾹 눌러봤다. 남자도 뒤로 느낄 수 있다고 하던데. 엉덩이로 하는 자위 어쩌고 하는 걸 인터넷에서 봤었다. 전립선 마사지라든지.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다. 나도 호기심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
그런데 잘 모르겠다. 손가락을 넣어서 기분이 좋긴 한데 확 오는 느낌은 없다. 내 손가락이라 그런가? 아까 넣은 젤 때문인지 안이 좀 미끌미끌하긴 한데. 휘젓고 있으니 뻑뻑한 느낌도 들고.
그래서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딱딱하게 굳은 마왕 놈을 보며 목이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흐으, 들어오지 말고. 읏. 가서… 윤활제로 쓸 만한 거. 가져와.”
놈은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마법을 썼다. 손만 조금 휘둘렀을 뿐인데 어디선가 작은 금속 통이 날아와 놈의 손에 잡혔다. 오오, 마법. 부럽기도 하지.
그건 그렇고 저 자식, 어차피 이제부터 떡을 칠 건데 왜 속옷을 입고 있는 거야. 부끄러움이라도 타나?
아니, 그러면 다 벗고 엉덩이 벌린 채 엉덩이 구멍에 손가락 집어넣고 스스로 풀고 있는 나는 어떻게 되냐. 혹시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놈의 하반신이 시드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온 놈이 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놈의 손을 거칠게 낚아채 손가락 사이 부드러운 살을 혀로 핥았다.
손을 뺄 것처럼 움찔거리지만, 막상 빼지 않는 게 조금 귀엽게 느껴져서 손가락 마디 사이를 가볍게 물었다가 놔줬다.
“그렇게 물면 흥분하게 된다.”
“흥분하라고 하는 건데? 물리니까 좋지? 다른 데도 물어줄까?”
“네가 원한다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거리며 두 팔을 뻗어 놈의 목을 휘감고 끌어안았다. 놈이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몸을 밀착했다. 놈의 목덜미에서 나와 같은 비누 냄새가 났다.
놈의 혀가 손가락 사이를 가볍게 훑었다. 굳은살이 단단한 거친 손을 사탕 빨듯 빨고 깨문다. 짜르르 오르는 쾌감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네가 만지면 엄청 좋아.”
마왕 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가슴 위에 닿는 녀석의 숨이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예민해졌다. 일부러 함몰된 유두를 놈의 콧등과 입술에 문지른다.
“거기, 가슴 핥고 빨아줘.”
내 말을 듣고 마왕 놈이 낮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놈은 적나라한 단어를 들으면 더 흥분하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자식은 변태인 것 같다. 하긴, 섹스하자고 요구한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곧 내 체온보다 조금 서늘한 혀가 유륜에 닿았다. 뾰족하고 단단한 혀가 오목하게 들어간 틈 사이를 부드럽게 휘저었다.
부드러운 자극에도 예민한 몸이 안달 나서 자꾸 몸이 잘게 경련했다. 놈의 단단하고 매끈한 피부에 예민한 곳이 쓸릴 때마다 엉덩이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제대로 발기한 걸까. 괜한 걱정이 들어서 무릎을 슬쩍 들어 놈의 사타구니를 슬금슬금 문질러봤다. 촉진해 본 결과 다행히 하반신이 제법 단단하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 시들지 않을까 했는데 조금만 더 키우면 바로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오, 다행이다. 잘 커지고 있네.”
기특한 마음이 들어서 무릎으로 놈의 하반신을 위아래로 가볍게 문질러줬다. 놈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목 안에서 그르렁거리는 신음을 삼킨다. 귀엽긴.
슬쩍 상반신을 일으켜, 놈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등 근육이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놈의 호흡이 흐트러진다.
미치겠다. 이 자식 잡아먹고 싶게 굴고 있어. 할 때 하더라도 내가 넣었어야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등을 끌어안은 손을 미끄러트려 놈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주물럭거렸다.
“다음번엔, 흐응. 기회가 생기겠지.”
놈이 움찔하더니 상체를 밀착했다. 고개 숙인 놈의 머리카락이 가슴팍에 떨어져 가슴이 간지럽다. 놈은 다시 고개 숙여 봉긋하게 부푼 내 유두를 입 안 가득 머금고 가볍게 빨며 혀끝을 세워 유륜을 부드럽게 굴렸다.
절로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을 막을 새도 없이 헐떡거리는 숨을 가쁘게 내뱉으며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놈의 두 팔이 내 허리와 팔을 감싸고 조금 서늘한 두 다리가 얽혔다.
“빨리, 할 걸 그랬어. 손해 봤네. 완전 좋아.”
놈이 움직이는 바람에 엉덩이를 쥐던 손이 풀렸다. 나는 놈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쥔다. 창백한 피부와 검은 눈. 높게 솟은 코 아래 항상 굳게 닫힌 입술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놈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 그런데.
“먼저 핥고 물어볼 말은 아닌 거 같은데 키스해도 돼?”
놈은 대답 대신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술을 짓누르는 놈의 입술에 입이 조금 벌어졌다. 더운 숨을 뱉기 무섭게 놈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다가, 입술 안쪽 매끈한 점막을 제 입술로 가볍게 비볐다.
와, 이 자식 어디서 해봤나 봐. 사납게 달려드는 것치고 행동이 제법 노련하다. 초짜인 내가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흐읍, 읍. 흐으응.”
이럴 때는 눈을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놈의 검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부, 부, 부끄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 파고든 놈의 혀가 내 혀를 얽었다. 혀가 닿은 자리가 짜릿짜릿하게 전류가 인 것 같다. 이 틈에 놈의 몸을 만지며 즐길 생각이었는데 자꾸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허겁지겁 놈의 어깨만 붙들었다.
“너, 무 입술만, 하면. 숨……. 읏. 흐…압.”
“조금만. 하고.”
내가 저 자식이 하는 조금만이라는 말을 제일 못 믿는다. 다시 입술을 덥석 삼킨 놈 때문에 호흡이 자꾸 흐트러졌다.
놈의 손이 등허리를 뭉근히 훑었다. 엉덩이 위쪽 오목하게 들어간 척추 선을 훑을 때는 몸이 감전된 것처럼 진저리쳤다. 내 입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음이 멋대로, 흘러나와서.
“흐응, 아, 거기. 이상해.”
입술을 한참 빨던 놈이 입을 떼지 않고 목덜미를 잘근 물었다. 놈이 만지고 핥은 자리가 전부 성감대인 것처럼 온몸이 자지러진다. 욱신거리는 성기에서 물처럼 선액이 줄줄 흘러 나는 거의 울다시피 흐느끼며 스스로 손으로 성기를 훑었다.
“너, 무 느껴서. 아파. 아, 흐으. 미치, 겠네. 이제 넣으면 안 돼? 응? 안에, 간지러워.”
진짜 운 건지 콧물까지 훌쩍거리며 놈에게 매달렸다. 미치겠다. 젤에 간지러운 성분이라도 있었나? 간지러움이 지나쳐서 욱신거리기까지 하다.
내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들어 처먹는지 놈은 넣으라는 성기는 안 넣고 도리어 내 옆구리에 이를 박는다.
“하윽!”
거기도 성감대인 모양이네. 미친. 놈의 입술과 손이 닿는 자리마다 느껴서 몸을 퍼득거리며 떤다. 너무 힘이 들어간 허벅지랑 엉덩이가 쥐가 날 것 같다.
놈은 먹이를 아껴먹는 짐승처럼 내 몸 구석구석 핥고 빨아댔다. 발등을 타고 잘근잘근 씹더니, 무릎을 깨물릴 땐 놈의 명치를 발로 찰 뻔했다. 너무 느껴서.
“아, 흐, 아아. 미친, 거기 물지 마. 이상, 해애.”
선액이 끈끈하게 흘러 아랫배와 고환을 적셨다. 뒤가 욱신거려 미치겠다. 더 못 참겠다. 채근하듯 놈의 허리를 두 다리로 휘감자, 놈이 내 사타구니 사이를 어루만지더니, 푹 젖어 흐물흐물해진 내 뒤에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아, 흑!! 아. 거기. 거기 더. 문질러, 아 그거 말고. 네 거, 시발. 네 거 넣으라고.”
손가락 말고 개새끼야. 네 좆 넣으라고. 울먹거리며 놈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쥔다.
“흣, 읍, 아아. 손가락이 안에서 움직여. 미친 거기, 응, 거기 느껴엇.”
마디 굵은 단단한 손가락이 내벽을 가볍게 쳐올리며 안을 쑤실 때마다 내 성기에서 선액이 소변처럼 줄줄 흘렀다. 내 손가락으로는 닿지 않은 조금 안쪽 깊은 곳에 놈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다리가 퍼드득거리며 매트를 두드리고 밀어냈다.
“그냥, 넣으면 네가 다친다.”
“다칠게, 그냥. 아, 학! 아. 좋아. 더… 더 해봐. 안에 쑤셔줘.”
애원하며 발등을 들어 놈의 사타구니를 거칠게 문질렀다. 제발 넣어줘. 안에. 머리채를 쥐어도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 개수를 늘려가며 안을 헤집었다.
“미, 친. 갈 거 같. 아, 싫어……. 가, 가아. 읏, 흐… 흐아. 아.”
허리가 한껏 앞으로 휘어져 나는 덜덜 떨며 사정했다. 앞은 만지지도 않았는데 뒤를 쑤시는 손가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안쪽 깊은 곳까지 스며든 젤이 꿀렁거리며 역류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랫배 안쪽이 욱신거려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의 사타구니를 발바닥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박, 으라고. 좀!”
기어코 눈물이 제대로 터졌다. 눈물은 줄줄 흐르고, 콧물을 훌쩍거리며 놈을 노려본다. 놈도 발기한 상태니 제법 아팠을 텐데, 오히려 고개 숙여 내 눈두덩이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잘못했다. 울지 마라.”
“잘못, 한 거 알면. 넣, 으. 흐읏!”
놈이 내 두 다리를 감싸 쥐고 아까부터 단단하게 발기한 제 성기를 흐물흐물 젖은 내 뒤에 가볍게 밀어붙였다. 손가락 세 개 정도는 충분히 삼켰던 뒤에 단단한 귀두가 닿자 긴장으로 움찔거리며 수축했다.
두툼한 귀두가 입구를 팽팽히 벌리며 안으로 파고든다. 뜨거운 점막을 가르며 깊이 밀고 들어오는 묵직한 압박감에 나는 헐떡거리며 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시발, 미쳤나 봐. 시발. 내가 섹스를 하네? 핏줄 불거진 놈의 성기 모양이 제대로 느껴졌다. 위로 단단히 휘어진 놈의 성기가 위쪽 점막을 부드럽게 긁자 고여 있던 눈물이 줄줄 흘러넘쳤다.
“아, 흑. 안에 가득, 차서. 이상해. 안에 이미 다 찼는데… 자꾸 들어와…….”
울먹거리며 놈을 채근했다. 자식아. 뭘 혼자 처먹고 이렇게 커서. 내가. 괴로운데. 아니 시발 이건 언제까지 들어와. 한참 들어온 거 같은데 왜 아직 계속. 들어와서. 아랫배가 짓눌리는 버거운 감각보다. 더 안이 꽉 차서.
몇 번이나 쑤시고 비벼져 혹사당한 내벽 안쪽이 술렁거리며 놈의 성기를 꽉 물었다.
“아, 미친. 미친, 그냥. 넣었는데. 넣은 건데. 안에……. 이런, 걸로. 가……. 흐. 으, 아으, 그읏!!”
아, 젠장, 참을 새도 없이 두 번째 절정이 왔다. 발가락이 단단히 곱아,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삽입만으로 절정에 달한 몸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자위와는 전혀 다르다. 놈의 아랫배를 정액으로 흥건히 적시고도 절정은 좀처럼 멈추지 않아서, 나는 시트를 발끝으로 벅벅 긁으며 진저리쳤다.
“언, 제까지 들어와. 그만…해.”
“읏, 조금만… 조금만 더.”
이윽고 닿으면 안 되는 곳까지 놈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나는 흐느끼며 놈의 어깨를 벅벅 긁고 있던 손을 풀고 시트에 풀썩 뒤통수를 대고 누웠다. 아, 미치겠다. 두 번이나 갔어.
“아, 하하. 이거. 너무 힘, 들어.”
“…괜찮은가. 힘들면 그만하겠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냐고 물어보는 마왕 후보자를 보며 나는 실소했다. 내 욕심 같아서는 뒤에 욱신거리던 게 좀 가라앉기도 했고, 여기서 더 하면 내 몸이 남아나지 않겠구나 싶긴 한데. 놈의 처지에서 보면 내 몸을 좀 어루만지다가 이제 간신히 삽입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힘드니까 그만하자고 하면 아마 놈은 그만하겠지. 펠런 엑사 드로젠은 성실한 호구니까.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기도 하고. 아주 조금 궁금한 것도 있어서 고개만 조금 들어 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아… 좋아, 괜찮으니까. 움직여도 돼.”
귀두 두툼하고 단단한 성기가 안을 헤집으며 느리게 빠져나갔다. 안이 진공이 된 것처럼 수축하는 느낌이 생경하면서도 기분 좋다.
귀두만 남겼던 놈의 성기가 다시 가볍게 쳐올려 내벽을 쑤시자 앓는 신음이 터졌다. 삽입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내 몸을 완전히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해서 내가 모르는 새로운 생물로 다시 만드는 것 같은 뒤죽박죽인 감각에 온몸이 자지러졌다.
“아, 학. 아. 죽겠, 어. 천천히이. 잇. 안에, 망가져. 아으응, 계속 가는 거 같아……!”
녹는다. 몸이. 흐늘흐늘하게, 열이 들끓고 뇌가 자극에 절여져 의식도 이성도 오로지 쾌감만 쫓는다. 아랫배가 조금 부푸는 것 같은, 아니 맨눈으로 봐도 부푸는 것이 확연한 아랫배에 오히려 박힐 때마다 놈의 허리와 등을 끌어안고 매달린다.
놈이 없으면 추락사할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좋아,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놈이 쳐올리는 대로 허리를 흔들며 웃었다. 기분 좋아. 이런 걸, 모르고 살았다니. 지난 생이 참 헛살았다 싶은 쾌감.
“아, 좋아. 거기. 더 쑤셔줘. 안에, 잔뜩 박아주는 거. 느껴엇. 으응, 너, 도 좋아? 나로 느껴?”
“나도, 좋다.”
“더 해줘, 아. 아학, 하, 아. 안에. 박아줘.”
놈이 이를 드러내고 내 목과 어깨를 문다. 예전에 제뉴어리가 만든 흔적은 사제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졌지만, 귀신처럼 놈이 물고 빤 자리를 깨물고 핥는다.
탐욕스럽게 잇자국을 남기고 가슴과 옆구리에 울혈을 남기는 놈에게 먹히는 것 같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또, 와. 갔, 는데. 방금, 또. 그…아…학!”
벌써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알 수 없다. 박히는 대로 정액이 줄줄 흘러도, 놈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 한 번, 놈이 내 허리를 으스러트릴 듯 끌어안고 사정했다. 동시에 절정에 달해 갈라진 목소리로 흐느꼈다.
젤 섞인 정액이 흘러나올 틈도 없이 놈은 사정하면서도 정액을 더 깊이 밀어넣을 듯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안, 에. 뭔가 있어. 아… 하하. 안에. 네, 거 또 들어와.”
“조금만, 더 할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안 할 거잖아. 거짓말, 안에, 자꾸 치대면 아, 흑!!”
놈의 성기는 사정하고도 시드는 기미가 없었다. 잠시 멈추나 싶더니 다시 용두질을 멈추지 않았다. 절륜한 새끼. 놈의 조금만에서 나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그…만, 해. 새꺄.”
“괜찮, 다. 큭. 천천히 할 테니까.”
“내가, 안 괜찮. 시, 바. 안, 너만 괜찮다고…….”
시트가 척척하다. 나는 버둥거리며 침대 머리를 움켜쥐지만, 등허리를 질겅거리는 마왕 놈의 손에 끌려 아래로 미끄러진다. 살려줘. 젠장. 역류한 정액에 매트까지 푹 젖은 것 같다.
“너, 죽일… 거야.”
“이제 곧 끝난다. 조금, 만. 후우.”
밤이 깊어지다 못해 창밖이 어슴푸레 푸르르다. 새벽이 되어서도 좀처럼 멈추지 않는 놈의 허리 짓에 나는 반쯤 울며 그만하자고 매달리고 애원했지만, 놈은 듣지 않았다.
“흐으, 으. 아 힘들, 어.”
결국, 사정하지 않고도 갈 수 있다는 걸 배우고, 너무 가면 오히려 아프다는 것도 배우고. 너무 울어서 걸걸하게 쉰 목소리로 여기서 더 하면 얼굴도 보지 않겠다고 정색하고 으름장을 놓아서야 놈은 성기를 빼냈다.
“나, 쁜 새끼야. 이게, 조금만이냐?”
“자제한다고 한 거다.”
“…빌어먹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은 나와 다르게 놈은 멀쩡해 보였다. 너무 멀쩡해서 빡쳤다. 제길. 운동량을 늘려야겠다. 바득바득 이를 가는 나를 안고 놈은 욕실로 들어갔다.
축 늘어진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히고 마왕 놈이 따뜻한 물을 틀어 무릎부터 적셨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 열기가 가시자 추운 것 같아 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놈의 몸에서 나는 살냄새가 기분 좋다. 나른하고 피곤하고, 그런데 닿은 자리는 따뜻해서 이상하게 간질간질하다.
“…나쁘진 않네.”
“네가 좋았다니 다행이다.”
“좋았다고 한 적은 없고요. 선생님. 자꾸 날조하지 마시죠.”
투덜거리며 놈을 노려봤다. 그만하라고 할 때마다 조금만이라고 말하는 게 어디 있냔 말이다. 짐승 같은 체력이 좀 부럽긴 하지만 나도 변명 거리는 있다. 이쪽은 몸이 밤새 뚫렸다고.
억울한 심정이 들어 놈의 어깨를 강하게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잇자국을 낼 생각인데, 탄탄한 피부에 이가 박힐 뿐 피 맛은 나지 않았다. 피부가 얼마나 강한 거야.
입 안에서 느껴지는 살맛이 생각보다 좋아서 우물우물 질겅질겅 부드러운 살코기 씹듯 질겅거리는데 허벅지에 뭔가 묵직한 게 닿는다.
시발. 왜 또 커지고 그러냐.
입술을 떼고 몸을 뒤로 물렸지만, 놈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으니 어디 달아날 곳도 없다. 따뜻하게 쏟아지는 온수에 등허리가 따뜻하다. 그냥 씻고 나가자. 내가 잘못했다. 뭐라고 빌어야 할지 몰라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들고, 열 오른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맹수를 본다.
“안 돼. 더 안 들어가. 진짜야. 이번에 하면 나 죽음.”
“괜찮다. 넌 버틸 수 있다.”
“아니, 그런 말은 전장에서 하는 거지. 섹스할 때 상대에게 하는 말로는 완전 꽝이거든?”
미친놈아, 그만둬. 버둥거리고 싶었지만 이미 허리가 붙잡혀 떨어지지 않았다. 물이 묻어서 미끄러운 피부를 어떻게 그렇게 단단히 잡을 수 있는 건지. 마법이라도 쓴 건지 묻고 싶을 지경이다.
놈이 고개 숙여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제 묻지도 않고 하네.
부드럽게 밀착하는 입술을 깨물까 고민하다가 놈의 입술 사이 한숨을 내쉬며 혀로 핥았다. 옅은 소금기 밴 부드러운 점막. 혀로 문지른 틈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놈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샤워기 물소리가 빗소리 같다. 눈이 저절로 감겨 나는 촉감에 집중해 놈의 혀를 맛봤다. 매끄러운 치열, 그보다 앞서 내 혀를 얽는 놈의 혀.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감싼 손이 내 견갑골을 어루만지고, 곧 등허리로 미끄러졌다. 움푹 들어간 등뼈를 문지르는 엄지가 엉덩이 바로 위에 닿자 퍼드득 몸이 떨렸다.
놈의 젖은 몸과 내 몸이 밀착했다. 사타구니에 닿는 놈의 성기. 어느새 내 성기도 발기해 놈의 배와 내 배에 서로의 것을 비빈다.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밤새 시달린 아픈 기억은 어디로 날아간 건지, 나는 중독된 것처럼 놈의 등을 끌어안았다.
놈이 가볍게 내 허벅지를 쥐고 들어 올렸다. 바닥에서 발끝이 떨어진다. 어어 하는 사이 나는 아이처럼 놈에게 매달렸다. 내가 무겁지 않나? 의아했지만 생각할 틈 없이 놈이 혀뿌리까지 강하게 빨아들이는 탓에 목 안에서 애끓는 신음을 삼키며 놈의 아랫배에 정신없이 성기를 비빈다.
“흐으읍, 읏, 하, 읍!”
미친, 너무 좋아. 추태라는 것도 잊고 정신없이 허리가 흔들렸다. 자세 탓인지, 벌어진 엉덩이골 사이 놈이 싼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놈의 명치를 후려쳤을 텐데, 지금은 모르겠다. 중요한 건 키스하고 비비고, 느끼는 일뿐이다.
놈이 단단히 엉덩이를 받쳐 자세를 잡아줬다. 나는 놈의 머리와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뗀다. 머리가 멍하다. 아, 그렇구나. 숨이 막혀서 그래. 호흡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다급하게 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맞췄다.
애액에 젖어 단단하고 미끈미끈한 귀두가 엉덩이 틈 사이 닿았다. 밤새 박히고 쑤셔진 탓에 퉁퉁 부은 입구에 귀두가 닿자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다. 이게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아는 맛이 무섭다더니 미치겠다. 굶주린 것처럼 허리가 멋대로 흔들려 놈의 것을 삼키려 들었다. 놈이 전처럼 바로 넣지 않고 진을 뺄까 봐 겁이 났다.
“나중에 물릴 테니까.”
놈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쾌감으로 단순해진 머릿속은 놈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 정도로 해석했다. 그래서 열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진 뒤를 벌리며 놈의 성기가 깊이 쑤시고 들어왔다.
“허, 으, 아… 미쳤…….”
해일이 밀려온 것처럼 압도적인 쾌감이 생각을 다 쓸어버렸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가 경련했다. 뱃속 깊은 곳까지 놈의 성기가 들어와 나를 꿰뚫은 것 같았다.
사정과 다르게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쾌감이 지나쳐서 죽을 것 같다. 놈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너무 조이면, 움직이질 못한다.”
“네가, 큰 거야, 이 자식아. 으응, 네놈 크기를 생각 못 해.”
엉덩이를 움켜쥔 놈의 손이 내 몸을 놓지 않았다. 등에 시원한 타일이 닿았다. 자꾸 추락하는 이상한 느낌에도 깊이 박힌 놈의 성기 탓에 몸이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았다. 힘을 풀면 더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나는 더듬더듬 한 손으로 내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와, 시발 여기까지 들어간 거 같은데?
손바닥 아래 조금 볼록하게 부푼 내 배가 만져졌다. 밥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튀어나온 적이 없는 배가 놈의 성기 하나 삼켰다고 안에서 느껴진다. 기가 막혀서 손으로 배를 꾹 누르자 놈이 낮게 신음하며 몸을 밀착한다.
“우, 움직이지. 아, 흐읏!”
단단한 기둥이 아까부터 저릿저릿하게 자극 오는 곳을 꽉 짓눌렀다.
몸이 밀착하며 더 강하게 느껴지는 쾌감에 나는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 봤자 마왕 놈의 가슴과 욕실 벽 사이다.
부질없는 몸부림에 오히려 마왕 놈이 제 성기를 다시 깊게 밀어넣으며 내가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압박했다.
“으응으, 흣, 흐으으!”
몸이 벌벌 떨렸다. 이렇게까지 느낄 일인가. 뒤로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고, 침대 위에서도 몇 번이고 가긴 했지만, 아주 조금 돌아온 이성 탓에 오히려 침대보다 욕실 안에서 행위가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성이라도 잃으면 좋을 텐데.
“여길 비비면 더 반응하는군.”
“으응, 아, 누, 누르지 마.”
빌어먹을, 내 반응을 놈도 읽기 시작했다. 둔부를 움켜쥔 놈의 두 손이 내 몸이 뒤로 밀리지 않게 단단히 붙들더니, 아랫배 쪽을 긁듯 놈의 성기가 정액과 젤에 흠뻑 젖은 점막을 비볐다.
놈의 단단한 기둥이 몇 번이고 쑤셔진 탓에 민감해진 내벽을 몇 번이고 치댔다. 아, 학. 하으으으. 발작하듯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젠장. 너무, 느끼는데 이게 왜 끝나지 않나. 발기한 내 성기에서는 이미 배꼽에 고일 정도로 선액을 흘리고 있었고 절정과 비슷한 쾌감에 나는 헐떡거리며 생리적인 눈물을 흘렸다.
“더 하면 네가 상하니 한 번만 하겠다. 그러니 조금만 참자.”
“이게, 끝. 끝이야. 알았어?”
“그래. 오늘은 이만하마.”
아니 이 자식아. 이제 끝이라고, 라고 입을 열고 외치고 싶었는데 나오는 말은, 신음뿐이다.
이상하다. 너무 느끼는데 더 큰 쾌감이 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섭다. 지금도 느끼고 있는데 어떻게 더 클 수가 있어.
그만, 제발 그만하라고 입을 벌려도 내 입에서 달뜬 울음만 흘러넘친다. 뇌가 곤죽이 된 것 같다. 그야말로 짐승처럼 본능과 두려움 앞에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아까 느꼈던 해일보다 더 큰 절정이 올 거라고 예감하기 무섭게 뇌를 태울 것 같은 쾌감이 내 온몸을 후려쳤다.
“……!!”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숨을 멈추고,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발가락이 제멋대로 곱고, 몇 번이고 사정한 성기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절정은 멈추지 않아서 나는 저며지고 녹고, 끈적끈적하게 젖은 짐승처럼 꿈틀거리고, 경련하다가 간신히 내 육체를 다시 뒤집어썼다.
아래에서 놈의 정액이 느껴졌다. 틈 하나 없이 맞물린 입구에서 놈이 아쉬운 듯 느리게 성기를 빼내자, 젤에 섞여 묽어진 정액이 다시 흐른다.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놈의 목을 끌어안지 못하고 그대로 축 늘어진다. 간신히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메마른 목으로 숨을 들이켜고 그저 웃었다.
“아, 하…하. 미친, 이게 섹스구나.”
“괜찮나?”
“그걸 네가 묻냐 이 나쁜 놈아?”
축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나를 놈이 이번에야말로 고분고분 씻겨줬다. 엉덩이 안까지 얌전히 물줄기로 세척해 주는 놈을 잠시 노려보고 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물줄기가 예민한 곳을 쑤시는 통에 조금 흥분하긴 했지만, 더 하면 진짜 죽을 것 같다. 놈도 보송보송하게 말린 나를 새 잠옷으로 재빠르게 갈아입혀 줬다.
왠지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건 무시하기로 하고. 잠은 결국 놈의 침대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내 침대는 마왕 놈이 마법으로 깨끗하게 처리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공기에서 여전히 야한 냄새가 나서 환기를 해놓기로 했다.
“흣, 으……. 내, 가 살던 곳에서는 말이야.”
침대에 나란히 누워 놈의 팔을 끌어당겨 내 배 위에 올렸다. 놈의 손을 두 손으로 쥐고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자 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무감한 것 같던 검은 눈에 오로지 나만 비쳤다.
저건 내 얼굴이 아니다. 하지만 놈과 섹스한 건 소설 속 자허 블리스가 아니라 나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같은 성별끼리 성행위를, 하는 걸 터부라고 여기는 이들이, 다수였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을 보며 결국 웃고 말았다. 생각이 드문드문 끊기고 문장을 이어 말하기 어렵다. 아직 여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상대와 섹스했다는 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지, 그게 아니면…….
누군가와 몸을 섞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서 그런 건지.
“그래서, 나는 안 했어. 할 수가 없었어. 그게 당연하다고 믿는 세상에서 살았으니까. 그래서 조금, 아니 좀 많이 호기심 같은 건 있었거든?”
이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놈은 이해하지 못할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더듬거리며 지껄였다. 오히려 놈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니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하려고 했지. 여긴, 그런 거 없잖아. 말도 안 되는 터부 같은 거.”
“기회가 되면?”
“어른이 된 후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가지고 놀던 놈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휘감는다. 놈의 손바닥을 가볍게 손끝으로 긁다가 나는 고개를 돌려 놈의 눈을 다시 바라봤다.
“그냥 그랬는데. 예전에 제뉴어리가 건드니까. 존나 빡치는 거야. 새끼가 자기가 뭐라고 날 만져. 너하고도 키스도 못 하고 섹스도 못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끼고 아끼는 게 능사가 아니구나 싶었지.”
“그래서 허락해 준 건가?”
“응. 이왕 할 거면 너랑 하는 게 좋아. 여기서 내가 너 말고 다른 놈과 친해질 리도 없고,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죽지 않을 테니까.”
길게 하품했다. 밤을 새웠더니 졸려. 이래서야 정오 전에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놈의 팔을 배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눈 안쪽이 뻑뻑하다. 목도 쉬고. 허리도 뻐근하고. 내일 하루종일 몸 상태가 좋지 않겠구나 싶다. 뭐 어때. 쉬는 날인데. 늘 최선인 상태로 있는 건 아니니까.
“죽지 않는다고?”
놈이 물었다. 눈꺼풀이 무거워 뜨지 않고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죽지, 않겠지. 죽이는 한이 있어도. 그게 무섭더라. 네가 내가 아는 이들, 더 나아가 나까지 죽일까 봐.”
“그러지 않을 거다.”
“모르는 거야 인마. 너 아직 마왕 아니잖아.”
그러니까 근성으로 버텨봐, 인마. 놈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가 놓아줬다. 더 못 버티겠다. 졸려. 잠깐이라도 자야지. 불분명한 발음으로 잘 자라고, 인사한 것을 끝으로 내 의식은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