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친구가 마왕이 될 것 같다 2권-1. 맥주와 치킨 (7/23)

1. 맥주와 치킨

다음 날, 놈이 약속한 시각에 나를 깨웠다. 일어나는 대로 가볍게 몸을 풀며 내 몸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좋지 않지만 어쩌겠어.

시간이 임박했길래 곧장 예선전을 공지하는 원형 연무장에 도착해 예선전 출석을 알렸다. 조금 웃긴 건 사제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처맞은 것처럼 욱신거린다는 점이었다.

아카데미 안 연무장 곳곳에 예선전을 치를 무대를 만들어놨다. 지름 15m의 원형경기장에 테두리를 따라 5cm 두께의 금을 그려놨는데, 경기장과 관람객 사이를 막아줄 펜스도 있다. 제법 본격적인데?

룰은 간단하다. 원하는 무기를 쓸 것. 제한 시간 없음. 기권하거나 덤비지 못하면 탈락. 금을 넘어도 탈락이다. 펜스 안쪽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참가자와 심판뿐이다.

“라이라 크로넷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자허 블리스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예선전 첫 상대는 대검을 쓰는 검사였다. 초면의 선배는 검면이 다른 장검에 비해 두툼한 브로드 소드로 찌르기와 베기보다 후려치는 타격 기술을 주로 사용했다.

모르는 상대와 대결은 이래서 좋다. 내가 알지 못하는 기술을 볼 수 있고, 그에 맞춰 대응하는 사고의 폭을 유연하게 넓힐 수 있다.

몇 달 사이 죽어라 수련만 했더니 실력이 는 건지, 제법 잘 싸우는 선배를 제법 수월하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창술은 적수가 없다 들었는데 검 역시 뛰어나군요.”

“칭찬 말씀 감사합니다. 본선에서 다시 뵙길 기다리겠습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아직 나는 그럴 실력까진 못 되고 남을 봐줄 온건한 성질머리도 아니다. 유효타가 들어가 어깨 관절이 부러지고 쇄골이 박살 난 선배는 그대로 신전으로 향하는 듯했다.

묵직한 브로드 소드를 흘리고 막느라 검날이 톱니처럼 처참하게 깨진 롱소드를 예선전 사무 직원에게 반납했다. 대전 도중 무식한 후려치기에 롱소드가 깨지지 않게 주의해야 했지.

금속 투구를 벗자 땀 냄새가 훅 끼쳤다. 땀에 젖어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나는 씩 웃었다. 확실히 몸을 썼더니 머릿속이 맑아졌다.

마왕 놈의 예선전은 나와 비슷하게 시작하고 비슷하게 끝나서 관람할 수 없었다. 놈의 움직임을 삼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쉬운 일이다.

놈은 뭐가 그리 급한지 자신의 시합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찾아와 몸 상태를 물었다.

“몸은 괜찮은가?”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안 괜찮아. 삭신이 쑤시고 결리는데. 특히 허벅지가 얼얼해.”

“다시 사제를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괜찮아. 거기까진 아니야, 라고 하기에는 상태가 좀 안 좋긴 하다. 오후 일정 시작하기 전에 사제님 뵈러 가야 할 거 같은데?”

놈이 염려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래서 어제 싫었어? 히죽히죽 웃으며 놈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놈이 은은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뭐. 왜. 뭐. 내가 좀 밝힐 수도 있지.

“눈이 막 불손하다? 자꾸 그러면 나 빈정 상해버린다?”

“싫지 않아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나? 자제하지 못한 탓에 네게 무리를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한 거다.”

“나도 같이 즐겼으니 괜찮아. 정말 싫고 안 될 것 같으면 안 된다고 확실하게 말할 거고. 너도 나 정색하는 거 보면 바로 알걸? 내가 그럴 땐 또 존나 무섭거든.”

“…….”

“너 방금 내 정색한 얼굴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이제 독심술도 할 줄 알게 된 건가.”

“하, 자식. 정말 무서운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네. 내가 화낼 땐 진짜 무섭거든? 보고서 후회한다?”

“보고 싶지만 안 볼 거다. 널 화나게 해서 내게 무슨 이득이 있겠나.”

피로가 조금 쌓였다고 지금 당장 무너지진 않겠지만 앞으로 일주일간 진행될 무투회 일정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다. 내 몸 관리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창은 본선부터 쓸 생각인가?”

“우선 검으로 어디까지 통할지 보려고. 오늘 오후 예선까진 검 쓸 거야.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내 짐작대로라면 내일 오후에 붙을 상대가 만만찮거든.”

“B조에서 만만찮은 상대라면, 원더인가.”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내일 내 적수가 될 상대는 쌍둥이 남매 중 누나인 에일 원더 쪽이다. 녀석도 제법 검을 쓸 줄 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라고 했다. 당기는 힘이 소와 같아야 제대로 겨눌 수 있다는 복합궁인 흑각궁부터 팔꿈치 길이의 단궁까지.

손아귀에 쥐어 날릴 수 있는 화살의 수가 도합 다섯이라는 말도 있고, 적의 코앞에서도 살을 날리기에 사정거리가 0이라는 말도 들었고.

“그런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던가?”

“내가 아무리 친구가 너뿐이어도 그런 말은 나를 무시하는 거다?”

“그래서 대화를 했다고?”

“아니, 들었지. 치료실에서 대결 중에 살 맞고 온 녀석들이 대화하는 걸.”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하는 게 역력한 놈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줬다. 마왕 녀석이 있는 D조에서 이름이 알려진 건 미스트 가문의 본가 차남이지만, 남은 예선에서 잘만 한다면 그와 붙지 않을 거다. 어차피 예선전은 딱 네 번만 이기면 본선 진출이니까.

아, 더 싸우고 싶다. 처음 보는 검술을 상대하는 거 재미있었는데. 입맛을 다시며 하인들이 정리 중인 원형의 연무장을 바라봤다. 물론 그 전에 사제님을 찾아뵙고 등이랑 허벅지 뻐근한 거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무투회 일정 내내 쏟아져 나올 부상자를 대비해 아카데미에서 임시로 모시고 온 사제만 해도 작은 왕궁의 대표 신전 하나를 꾸릴 정도라 했다. 그 덕분인지 크게 기다리지 않고 사제님에게 밤새 시달린 근육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배식대에서 나눠준 종이 그릇 스튜로 간단하게 속을 채우고 방어구를 손질했다. 크게 상하지 않은 덕에 예비 가죽 갑옷으로 환복할 필요는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이마까지 완전히 덮어주는 호두알 같은 투구의 목 끈을 쥐고 빙글빙글 돌리다 다시 고쳐 썼다.

오후 예선은 동급생 쌍검사였다. 완만하게 휜 한 쌍의 곡도를 쓰는 놈이었는데 특이하게 폼멜 대신 검날과 같은 길이의 붉은 술을 달아뒀다.

시야를 흐트러트리는 효과가 있겠거니 짐작했고, 짐작대로 검격을 주시하지 못하게 주의를 분산시키기는 하더라.

처음에 싸운 녀석보다 상대하기가 쉬워, 가문 비전 기술을 사용해 춤추듯 검을 휘두르는 상대를 잠시 관찰하다가 정강이를 검면으로 후려치고 팔을 부러트리는 데 10여 합이 걸렸다.

“다음에도 또 대련해 보고 싶습니다.”

“저야말로.”

부러진 오른팔을 제대로 들지 못해서 왼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동급생이 제법 멋있어 보였다. 나도 나중에 본선에서 지면 저렇게 멋있게 끝내야지. 어차피 우승은 마왕 놈 몫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이렇게 틈틈이 다짐해도 난 내가 놈과 싸울 때, 추하게 뒹굴 걸 안다. 아득바득 지지 않았다고 일어나서 놈이 내 사지를 찢을 때까지 덤비고 또 덤비는 게 눈에 선하다.

본선이면 관객도 있겠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지고 나면 검귀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도 잠잠해지려나. 애써 마왕 놈에게 패배함으로써 얻는 이득 비스름한 걸 생각해 봤다.

음, 속 쓰리고 분하군.

사람이 좀 쿨하고 매너도 있고 그래야 하는데 대신 오기와 독기로 똘똘 뭉친 걸 잘 안다. 난 멋있는 기사가 되기 그른 것 같다. 뭐 어쩌겠어, 그렇게 사는 게 나라는 사람인데.

오후에 있던 예선이 끝난 대로 바로 빈 연무장을 찾아가 늘 해오던 수련을 이어서 했다. 몸을 예열시키기 위해 스트레칭을 한 뒤 연병장을 땀이 날 때까지 달렸다.

두 바퀴 달릴 때 마왕 녀석도 예선이 끝난 건지 대여해 둔 연무장을 찾아와 몸을 풀었다. 마지막 스무 바퀴를 다 달린 후 연습용 창을 쥐고 영감님에게 배운 기초식을 수련했다. 오늘 대련은 없다. 앞으로 무투회가 끝날 때까지 그럴 거다.

해가 질 즈음 정해둔 일정이 끝났다. 약간 뻐근하게 근육통이 남은 몸은 가볍게 씻고 나면 내일 아침에 회복될 거다. 내일 일정에 무리가 가면 안 되니 이 정도만 해야지.

땀을 머금은 가죽은 냄새가 죽여줬다. 아무 생각 없이 냄새를 맡으면 바로 토할 정도다. 그래서 가죽 손질은 매일 해줘야 한다.

소금기에 가죽이 삭는 것도 문제라서 공용 갑옷은 그때그때 병장기 관리인에게 반납하고, 내 갑옷은 직접 손질했다. 그리고 바로 내 옆에서 마왕 놈이 손짓 하나로 자신의 갑옷을 관리 중이다.

“마법으로 내 것까지 손질해 주면 저녁 사주는 김에 디저트도 내가 쏜다.”

“더해서 맥주 한 잔.”

“젠장, 좋아.”

아무래도 내가 미래에 마왕이 될 놈에게 뻔뻔함과 협상을 가르친 것 같다. 음, 미래가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느낌이다. 좋은 건 빨리 배우는 놈 같으니.

갑옷을 수납하고 밖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외출증을 끊었다. 마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번화가가 있는데 아카데미 직원이나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 물가는 비싸도 품질이 좋은 편이다.

외출은 처음이라 결국 헤맸다. 아이고, 아무 식당이나 예약하고 올 걸 그랬다. 무투회를 맞아 아카데미 주변 식당들이 다 만원이라 두 번이나 헛걸음했다.

자허 블리스라는 이름을 밝히면 어디든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겠지만, 난처해하는 직원을 채근해 억지로 자리를 만들 뻔뻔함은 아직 못 배웠고 앞으로도 배울 일 없다.

결국, 나 대신 마왕 녀석이 앞서서 예전에 가봤던 곳이라며 후미진 뒷골목에 문을 연 선술집을 소개해 줬다.

“와, 여기 분위기 좋다. 메뉴 세 개뿐인데 괜찮아?”

“그걸로 충분한 가게니까. 추천하자면 다 시키는 게 좋을 거다.”

“헉! 여기 튀긴 닭 있다. 튀긴 닭!”

구운 마늘을 품은 튀긴 닭. 시금치와 토마토, 베이컨을 넣은 키쉬. 그리고 맥주 한 잔이 메뉴의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 족한 가게였다.

갈색으로 껍질까지 바싹하게 구워진 닭다리를 찢자 육즙이 접시 위에 흘러넘쳤다. 뼈는 포크로 누르기 무섭게 분리되는데 닭 육즙을 머금어 호물호물한 마늘과 염지해서 짭짤한 닭고기를 한 번에 입 안에 넣으면 절로 맥주 생각이 간절해졌다.

먹는 속도가 절로 빨라졌다. 나는 조금 간절한 눈으로 마왕 녀석의 맥주를 바라봤고, 한숨을 내쉰 후 물로 목을 씻었다. 저 자식은 몰라도 나는 술 마시면 안 된다. 피로가 쌓인 근육에 가장 나쁜 것이 알코올이니까.

“어흑, 존나 맛있어. 치킨 최고. 치킨님 최고.”

“잘 먹어주니 소개한 보람이 있다만 그렇게 맛있나?”

“치킨은 언제나 옳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거 비슷한 음식을 예전에 먹은 적이 있거든.”

블리스 저택의 주방장이 더 잘하는 것 같은데, 라고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마왕에게 추억 비슷한 게 있는 요리라며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차갑게 식은 목구멍에 두툼한 베이컨이 잘강잘강 씹히는 키쉬를 큼직하게 잘라 넣어 우물거린다.

버터에 볶은 시금치의 촉촉한 달달함. 익은 토마토가 촉촉하고, 그 모든 것을 감싸주는 달걀 님의 꼬들꼬들한 식감. 흰자와 노른자를 완전히 섞지 않아 도리어 쫀쫀함과 꼬들꼬들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젠장, 이거야말로 맥주 없으면 절대 안 되는 조합이다. 그렇지만 나는 맥주를 마실 수 없지. 시원하게 맥주를 비우는 마왕 놈의 목울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 입 줄까?”

“한, 입……. 안 돼. 내일도 예선전이야. 무투회 끝나면 마실 거야.”

젠장. 맥주와 치킨이라니, 잊어야지. 근 손실은 안 된다. 머리를 거칠게 털고 남은 포도 주스 한 모금을 비울 때 선술집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가 우리 맞은편 의자에 태연하게 앉았다.

뭐지, 또 마땅찮은 내 팬인가 했는데 사내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맞은편에 앉은 마왕 놈에게 향했다.

“이런 곳에서 식사하고 있었습니까? 펠런.”

“…나인.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지?”

“이 근처에서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전하, 아카데미 밖으로 외출한다는 전갈을 받았다면 미리 찾아뵈었을 텐데요.”

“개인적인 외출이니 너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제 기쁨입니다.”

주스 잔을 내려놓고 눈을 깜박거리다가 마왕 놈과 인사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웃는 낯으로 사내가 가볍게 묵례하길래 엉겁결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사내는 마왕 녀석을 지척에 두고도 두려워하거나 본능적인 혐오를 보이지 않았다.

검게 보일 정도로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그와 같은 남청색 눈. 은은하게 웃는 모양 그대로 눈가가 옅게 주름진 50대 중반의 남성이다.

체격은 마왕 못지않게 단단한데 딱 맞는 검은 슈트를 입은 탓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호리호리한 것처럼 보였다. 이채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내가 마왕 새끼에게 나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이쪽 분은?”

“블리스의 자허. 내 친우다.”

“아아, 그렇군요. 펠런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나인입니다. 펠런의 오래된 친구죠.”

“그렇습니까. 소개받은 대로 자허 블리스입니다.”

이름만 들어서 알 수 없다. 빠르게 머릿속에 쌓이는 가설들을 정리하느라 잠깐 생각이 굳었다. 그래도 배운 예법은 어디 가지 않아, 한 호흡 틈을 두고 장갑 낀 손으로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는 사내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나인? 기억에 있는 이름은 아니다. 벌써 10여 년이나 지났으니 주요 소설 등장인물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저 사내는 마왕 놈과 상당히 친해 보였다. 나를 이미 알고 있고, 심지어 마왕이 내 이야기를 저 사내에게 종종 한 것 같다.

문제는 저 사내가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느냐다.

마왕이 나를 알고 지낸 건 입학시험 때부터다. 그 이후 놈은 블리스 저택이나 아카데미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놈이 어딜 나갔다면 내가 알았겠지.

더불어 놈은 수업 또한 나와 함께 듣는다. 놈이 나와 떨어져 지낸 시간은 각자 방에서 자는 시간과 다른 놈이 보낸 결투장을 처리할 때뿐이다. 말인즉슨, 저 사내가 마왕 놈과 만날 수 있는 시간 역시 우리가 아카데미에서 지낸 3개월뿐이라는 거다.

한밤중에 아카데미 기숙사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교원과 기숙사실에서 거주하는 학생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로열 아카데미와 기숙사에 제국의 마술사들이 설치한 마법 방벽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실력자거나, 그런 실력을 갖춘 마왕 놈이 특별히 마법을 써서 부를 만한 인물이겠지.

“매우 신뢰하는 사람인 모양이야?”

시선을 사내에게 고정하고 마왕 놈에게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앞뒤로 생략한 말을 마왕 놈은 이해할 거다.

‘어린 시절 너를 도왔던 마족 부하라서 내 이해도 구하지 않고 나에 대해 말한 거야?’

생각보다 내 어투가 명랑하게 들려서 즐겁다. 왜냐면 화가 났거든.

“나인은 유능한 마법사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펠런.”

마법사라, 그렇다면 가장 먼저 든 의문은 해결이 된 셈이다. 물공에 올인한 것처럼 보여도 저 마왕 꿈나무 역시 마법사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걸 떠올려보자. 마법사들은 장거리 통신이 가능하다. 서로의 마나 회로에 링크한 후 개인 간의 대화 혹은 공용 주파수를 맞춰 대화뿐만 아니라 회로를 겹쳐 마법의 위력이나 지속시간을 늘릴 수도 있다고 하더라.

이론은 빠삭하지만, 실제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어차피 일반인 수준의 마력만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다. 뭐, 시험에 나올지 모르니 내용은 외워뒀지만.

그래도 말이야,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놈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는데 누가 좋아하겠냐고. 물론 마왕 놈이 나 말고 다른 놈이랑 신변잡기 풀 수 있지. 그거야 이해하지. 그래도 내 이야기는 나름 기밀인데, 이상할 정도로 섭섭해서 표정 관리가 안 된다.

말갛게 웃는 내 얼굴을 보고 마왕 새끼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분명 떠들썩한 식당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두고 다른 테이블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이 우리에게 시선을 두거나 관심을 주는 일도 없다.

마법에 대해 감탄하기보다 차갑게 식은 머리가 놈이 하는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를 설득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왕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내 유년기를 지킨 마족이기도 하다.”

“…허.”

“그렇군요. 정정 요구를 받았으니 다시 소개하도록 하죠. 알려진 직위는 드로젠 마법사 협회의 이사 중 한 명인 마법사이지만 사실 비경의 공작이며, 북부 산맥의 검은 뱀이라 불리는 나인 드라코헤드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방인.”

나인이라는 사내의 말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 기억난다. 마왕 놈 어릴 때 놈을 지켜준 마법사가 있었다고 했다. 이놈이 그 사람이구나. 그건 그렇고, 방금 나를 뭐라고 불렀지?

“그……! 이방, 인. 이라는 걸 알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당연하지요. 어거스트 전하 사망 이후, 앞으로 만나게 될 이방인의 처우에 대해 이미 펠런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니까요. 우리는 이미 소설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그마치 10여 명의 이방인이 미래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 측근의 몸을 빼앗아갔지요. 펠런은 기억하지 못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이지요. 가장 처음 처리한 인물이 누구였더라, 아. 그래. 산파였던가요. 펠?”

“…기억나지 않아.”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펠런에서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린 나인이 빠르게 말을 지껄였다. 목소리는 명료하고 발음은 또렷했지만, 말이 빠른 데다 제스처까지 섞어 말하니까 듣는 나는 넋이 나갈 것 같았다.

일단, 이해는 했다. 놈은 나를 보자마자 내가 이방인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때라면 마왕 놈이 나에 대한 말을 저 나인이라는 마법사에게 할 만도 하다.

오랫동안 출현하지 않은 이방인을 찾았다든지, 살의는 보였으나 공격은 하지 않더라 같은 거. 대화를 통해 친구가 되었다거나, 당분간 블리스 저택에서 머물겠다거나. 뭐 이런 식의 대화였겠지.

“하긴, 펠런은 태어난 직후였으니까요. 살의를 가진 이방인이 10여 명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갓 태어나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를 죽이기 위해 이계에서 온 암살자의 수가 말입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도 참 인생 기구하다.”

“고문하고, 정보를 뜯고, 이미 이전 이방인에게 알아낸 정보와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그리고 이방인을 처분했지요. 우리가 만난 마지막 이방인은 상당한 거물이었습니다.”

“…어거스트.”

“일전에 펠런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요? 우리는 석 달 동안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에게 소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다행히도 당신을 사로잡아 그 기가 막힌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그것참, 감사합니다?”

아, 그래서 내게 소설 내용에 관해 묻지 않은 거야? 내심 궁금했던 내용을 들어서 좋긴 한데, 좀 오싹하긴 했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았다면 나도 잡혀서 고문당하고 소설 내용 불고 그랬을 거 아냐.

마왕 놈이 마법을 써서 우리 주변의 기척과 소리를 가둔 즉시 말문이 터진 것처럼 마족 사내가 유려한 목소리로 말을 쏟았다. 말 진짜 많다. 수다쟁이 갈가마귀 같은 놈이군.

“나인의 말은 신경 쓰지 마. 저자는 타인을 흔드는 재미에 사는 놈이니까.”

“간결한 소개 말씀 감사합니다. 펠런.”

미간을 구긴 마왕 놈은 해야 할 단어를 신중히 골라 말하는 것처럼 평소보다 느리게 말했다. 나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갑자기 떨어진 묵직한 정보에 사고가 멈추고 놈의 말을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마왕 놈은 고개 돌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사내를 서늘히 응시했다.

사내는 초면인 상대에게 마족임이 알려졌음에도 아무 문제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내용을 말한 마왕 놈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거나, 나에게 마족이라는 것이 들켜도 상관없을 정도의 인물이겠지.

“우연히 여기 온 것 같으니, 이제 볼일이 없다면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부디 친우분과 즐겁게 지내시길.”

사내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가 의자에서 벗어나자, 창문을 연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마왕을 따르는 마족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에서 읽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왕을 따르는 마족은 많다. 아니, 모든 마족은 본능에 이끌려 마왕을 추종하고 마왕의 명령을 듣는다.

마족은 개인주의가 강한 군체다. 내가 강의를 통해 배운 마족의 개념은 위와 같다. 군체와 개인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의아하지만, 알고 보면 마족의 생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인류가 보는 마족, 마물, 마수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짐승의 형태인 마수. 그보다 더 진화해, 여러 개체가 뒤섞인 외형의 마물, 그리고 지성이 있고 사유를 하는 마족. 아직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북부 산맥에서 독자적인 사회구조와 문화를 이룩한 사유하는 괴물들.

인류와 유사한 계급으로 나라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고 유추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마족이 군체로서 활동할 때는 오로지 그들의 우두머리 마왕이 존재할 때뿐이다.

마왕은 세습제가 아니며, 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기록상 가장 마지막에 마왕이 등장한 건 제국 건국 직전, 약 30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저놈이 바로 그 300년 만에 등장한 마왕 꿈나무지. 나는 내 시선을 피해 맥주잔을 꾹 쥔 마왕 놈을 흘겨봤다.

마왕보다 강한 마법사라면 기억할 만도 한데. 하긴 마왕이 너무 먼치킨이라 마왕 군단에 어떤 놈들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사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도 한 게 마왕이 워낙 세서 말이지. 혼자서도 세계 정복할 것 같은 놈이었지.

그런 놈과 내가 친구 먹은 건가. 대단하다 자허 블리스.

떠날 것처럼 몸을 돌렸던 사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잠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사내의 시선은 마왕이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온전히 주의를 끄는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그 남청색 눈과 시선을 맞췄다.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던 사내가 입꼬리를 올려 내게 말했다.

“이번 생의 선택은 친구입니까? 그것 또한 나쁘지 않지요. 여신의 저주를 억누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뭐, 괜찮습니다. 부디 그 낯선 몸을 이번만큼은 오래 즐기시길.”

“하?”

등 돌려 식당을 떠나는 사내를 잡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다. 이번 생? 여신의 저주? 낯선 몸? 저 자식,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말투였다. 그러나 마왕 새끼가 잡고 있던 내 손을 풀고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사내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어디 갔어. 이를 부드득 갈고 문밖으로 달려 나갔지만 밤늦은 뒷골목에 인기척이 없다. 취객 둘이 내가 나온 선술집에 다시 들어가려다가 나와 마주쳤을 뿐이다.

어어 하고 걸음을 휘청거리던 취객이 몇 마디 지껄이긴 했지만, 내용이 머릿속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젠장. 없어졌어. 빌어먹을 마법사 같으니.

사납게 미간을 구기고 다시 선술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내 등 뒤에 우두커니 선 마왕 새끼를 본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나인이라는 마법사는 이 자식 부하다. 다시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다. 차라리 만나기 전에 정보를 수집하는 편이 좋다.

“갑자기 왜 나간 거지? 나인을 뒤따라갈 것 같았다.”

“못 들었어? 그 녀석이 가기 전에 여신의 저주 어쩌고 했잖아.”

“…여신의 저주?”

“진짜 못 들었어?”

의아한 눈초리인 놈을 바라보며 내가 더 당황했다. 이거 뭐야. 그럼 저 나인이라는 마법사가 내게 전음이든 텔레파시든 보낸 거야? 몰라. 왜 귓말인 양 나만 알아들었는데.

마왕 놈에게 부탁해서 마족 마법사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만나는 건 어렵다고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신은 마왕이 아니라 그를 호출하거나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했다.

나인이라는 마법사를 만나서 대화 좀 나누겠다고 마왕이 되면 안 되는 놈에게 마왕이 되어달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물며 생각에 잠겼다.

“나중에 너를 찾아오면 나도 만나게 해줘.”

“네가 원한다면.”

놈 역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덕분에 기숙사로 돌아오는 내내 나눈 대화는 고작 그게 끝이다. 오늘은 생각할 것이 많다는 핑계로 간단하게 몸을 씻고 내 방에 처박혔다. 녀석도 그런 나를 굳이 부르거나 방 안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방문을 노려보다가, 서랍을 뒤져 오랫동안 읽지 않은 종이 뭉치를 꺼내 뒤적거렸다. 서툴기 짝이 없는 암호와 은유로 머리에 쥐가 나도록 적었던 소설 내용.

여신의 저주.

그 비슷한 편린조차 『굴러라 용사님』 안에서 읽은 바 없다. 여신이라, 아마도 빛의 신을 말하는 걸 거다. 인간의 신앙 아래서 절대적인 신성을 보여주는 인간의 신.

그런 신이 내게 저주를 보낼 게 뭐가 있지. 그걸 또 나는 언제 풀었대? 혹시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그 저주 때문인가. 이번 생은 무슨 말이야.

추측할 뿐 확신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정보는 한정적이고,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정보는 유효성도 신빙성도 부족하다. 그러니 단순하게 사고의 폭을 넓히고 할 수 있는 가정을 늘리는 거다. 맞든 틀리든 언젠가 일어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내가 쓴 내용은 대부분 앞으로 몇 년 후의 일들뿐이다. 그것도 용사가 성장한 과정을 추적한 이야기라 상황이 바뀐 지금 시점에서 쓸 수 있을까 모호한 것들뿐이다. 추측해 보자, 여신의 저주는 뭘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이방인들이 물불 안 가리고 마왕을 죽이려 들었다는 본능적인 살의. 두 번째는 이 빌어먹을 세계로 내 혼을 끌고 온 어떤 힘.

저주라고 했으니 내가 좋게 작용하지는 않겠지.

아무리 종이를 뒤적거려도 쓸 만한 내용이 없다. 아무것도 없어. 한숨을 내쉬며 젖은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침대 위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뒤섞여 고였다. 시커멓게 썩은 늪지처럼 너무 많은 가정과 추측이 무겁게 느껴졌다.

한 이방인이 사망하면 다음 이방인이 등장한다. 새로운 이방인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인 드라코헤드의 말 때문에 다른 가정을 하나 더 떠올렸다. 어쩌면 펠런 엑사 드로젠을 죽이기 위해 등장 배역에게 빙의한 모든 이방인이 사실은…….

욱신―

순간, 지독한 두통이 머리를 후려쳤다. 두통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 나는 헛구역질 하며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악문 잇새로 앓는 신음이 끓었다.

젠장. 머리 아파. 시트에 이마와 코를 처박고 더운 숨을 빠르게 내쉰다. 아주 조금씩 두통이 가라앉았다. 나는 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많이 생각했던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여튼 나는 머리 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설렁설렁 머리를 흔들고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좋아. 생각하자. 가장 먼저, 할 수 없는 일은? 그 마법사를 다시 만나는 것. 지금 당장은 어려움. 그럼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은? 정보가 없으니 정보를 모아야 해. 내일 사제님을 뵙고 여신의 저주에 관해 물어보자. 도서관에 가서 빛의 신, 혹은 여신에 대한 서적을 찾아볼 것. 저주 항목도.”

그 외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 자문한다. 없다. 당장 내일도 예선전이다. 그것도 중요한 대결이 있지. 내 마음이 흐트러지면 상대에게도 실례다.

속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두통에 시달려가며 구토할 수 없다. 신물이 올라오는 걸 억지로 삼키며, 한숨을 깊이 내쉬고 시트를 가슴 위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