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레모네이드와 추러스 (5/23)

4. 레모네이드와 추러스

몇 주간 저택에서 영감님을 만날 수 없었다. 영감님은 못 오는 대신 북부 산맥에서 폭발할 듯 증가하는 마수들을 토벌 중이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하필이면 씨를 뿌리고 땅을 가꾸기 시작할 농번기라 직접 논과 밭으로 나가야 할 국민의 불안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아카데미 안에서도 북부 산맥을 낀 세 제후국 출신 중 기사 서임을 받은 상급생들은 사유서를 던지고 글로리로, 혼으로, 블리스로 서둘러 귀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전에서 마수 토벌 내용이 나왔던가? 너무 읽어서 달달 외우다 못해 삭아버린 소설 내용을 적어둔 종이를 훑어봤지만 역시 그런 내용은 없었다.

내가 이 시점에 관련해 적은 건 ‘20세. 마왕 아카데미 1학년. 인간불신 차곡차곡 쌓는 중. 제국 수도에 대한 언급 없음. 용사는 자유무역 도시에서 일하는 중. 치킨에 콜라 먹고 싶다.’ 이 정도뿐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랍 깊은 곳에 종이를 밀어 넣었다. 와, 정말 쓸모없는 내용을 적어뒀구나.

아쉽지만 나는 블리스 제후국으로 올라가 영감님과 함께 마물 토벌을 도울 수 없다. 아직 정식 기사 서임을 받지 못해서다.

무투회에서 준우승 이상 성적을 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저택에 거주하며 나를 가르치던 기사들도 전부 마수 토벌을 위해 북부 산맥으로 올라갔다.

상황이 심각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집사 노아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라며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나를 달랬다. 아카데미에서 무사 무탈하게 공부하는 사람이 영감님에게 걱정거리를 더 드리면 안 될 것 같아, 무투회 준비는 스스로 하기로 했다.

무투회를 위해 주문했던 병장기를 찾을 겸 다시 주말에 저택을 들렀다. 기사와 병사가 빠져나간 저택은 한산하다 못해 삭막하다.

남은 이들은 원래 저택을 관리했던 집사 노아와 내 시종 제리, 그리고 정원사와 하인들 몇뿐이다. 그들의 식사를 위해 상주 중인 요리사까지 포함해도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솔직히 난 이편이 편하지만, 노아는 나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있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전시 중에는 맨바닥에서 자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한다. 내가 앞으로 지켜야 할 내 나라가 마수의 출몰로 고통스러워하는데 나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 등등. 세 치 혀를 좀 놀렸더니 감동한 눈치다.

그래도 오늘은 짬을 내서 외출하기로 했다. 무투회 전야제에서 입을 정복도 사야 했고 제리와 한 약속을 간신히 지킬 만한 짬이 생겼기 때문이다.

들었던 대로 고위 사제님은 잘린 사지도 멀끔하게 붙이더라. 뼈가 부스러기가 되고 육편이 좀 너덜거리는 단면에도 말이다.

마왕 놈의 검을 흘리지 않고 맞부딪쳤다가 창도 박살 나고 내 팔도 박살 났다. 좌우로 흩어진 두 팔에서 핏물이 수도꼭지 튼 것처럼 줄줄 쏟아져, 연무장 모래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정작 나는 창을 부딪친 충격에 곧장 기절해서 모른다. 의식이 있었다면 쇼크사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에 사제님이 흘겨봐도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잚탰슴다, 죄삼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은 못 하지만…….

사제님은 타박하고 한숨 쉬고 체념한 후 주말 요양을 권했다. 상처는 아물었어도 신경이 완벽하게 적응하려면 하루이틀 창을 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 겸사겸사 주말이라 나왔다. 부서진 창 대신 새로 창도 몇 자루 사야 했고.

우선 간단하게 노점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잠깐 나온 것뿐인데 제리가 신이 난 눈치다. 도련님 이게 맛있다고, 저것도 맛있다고 놀이공원 놀러 온 아이처럼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가는데 그저 허허 웃으며 녀석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실제로 제리가 권한 주전부리들이 다 맛있었다.

“아, 저거 먹어보자 저거, 꼭 먹어보고 싶었어.”

“저기서 같이 파는 양고기 꼬치가 맛있어요. 도련님 저 양고기 꼬치 먹고 싶어요.”

“그래, 그것도 먹어. 제리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움막집에 살 때 배를 곯으며 먹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기름에 튀긴 밀가루 빵에 계핏가루 섞은 설탕을 듬뿍 뿌려 먹는 과잔데 생각했던 것만큼 맛있지는 않더라. 오히려 좀 느끼해서 레모네이드 석 잔을 사서 나, 제리, 마왕 놈이 한 잔씩 들고 쭉쭉 들이켰다.

한 손에 레모네이드를, 다른 손에 양고기 꼬치를 쥔 제리는 오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였다. 귀여워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더니, 소스 묻은 양고기를 꿀떡 삼키고 씩 웃는다.

그래, 도련님은 우리 제리 잘 먹을 때가 제일 좋더라. 시골 놀러 온 손주 보는 심정으로 제리를 보고 있자니 마왕 놈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내가 한 것처럼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놈의 손을 낚아채서 손등을 덥석 문 다음 놔줬다.

음, 잇자국이 선명하군. 내가 보통 사나워야 말이지.

요기를 하고 가장 먼저 서점에 들어가 책을 몇 권 샀다. 서점에서 지난번에 읽었던 논문의 개정판이 나왔다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서점은 늪과 같다. 사야 할 것만 사서 나오자고 생각해도 어느새 또 다른 책을 찾아 서서 읽고 있다. 그 책이 마음에 들면 저자를 확인하게 되고, 그가 쓴 다른 서적도 찾기 마련이다.

잠깐 보고 간다는 게 한 시간 가까이 서점에서 책을 고르느라 소비했다. 들고 갈 수 있지만 그러면 손이 모자랄 것 같아, 기숙사 방으로 배달을 부탁하고 주소를 적어줬다. 마왕 놈도 책을 몇 권 골랐다. 흘깃 곁눈질로 봤더니 전부 검술이나 체술 관련 서적이다.

“돈 괜찮냐?”

“받은 돈이 넉넉해서 이 정도는 쓸 수 있다. 제후께 감사 편지를 써야겠군.”

“편지 보낼 거면 내 거랑 같이 보내자. 이번에 무투회 나가는 거 아직 모르시거든.”

요즘 놈의 돈주머니는 넉넉하다. 놈의 빈곤한 주머니 사정을 안 영감님이 마왕 놈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장학금을 주기도 했고, 월초에 근로 장학금이 들어온 것도 있다.

대장간을 겸업하는 무구점을 들른 후, 마지막 목적지는 옷가게였다. 집에 있는 옷이 수두룩한데 꼭 옷을 사야 할지 의문이다. 심지어 한 번 입고 못 입은 정복도 두 벌이다. 정복 입을 상황이 입학시험 치를 때와 입학식뿐이어서 그랬지만.

그래도 온 건, 군말 없이 나와 대련해 주는 마왕 놈에게 신세도 갚을 겸 놈의 정복을 맞추러 간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디자이너를 저택으로 불러 맞춰도 되지만 놈이 거절했다. 기성품을 입으면 된다고 미간을 찌푸리는 놈을 보며 나도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옷 한 벌 맞추는 데 치수 재고 디자인 보는데 온종일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내 옷은 바로 골라 포장까지 마쳤지만, 문제는 마왕 놈이었다.

“맞는 치수의 기성품이 없습니다. 새로 맞추시지요.”

“…….”

“…큽!”

문제는 놈의 체격이 너무 좋다는 데 있었다. 기장이 맞으면 허벅지와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넉넉하게 입으면 허리가 헐렁하거나 소매가 짧다. 역삼각형 몸이 저래서 안 좋다. 나는 낄낄 웃으며 디자이너의 손에 이끌려 치수를 재러 떠나는 놈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안타깝게도 제리는 대기실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제리를 저택으로 먼저 돌려보냈다. 고작해야 노점에서 점심 때우고 서점 들른 것뿐인데 제리는 기쁜 낯을 숨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직원이 준 카탈로그를 대충 훑어보고 내려놨다. 음, 난 디자인을 봐도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다.

영감님이 예법과 춤에 더불어 안목을 키워야 한다며 예법 선생을 붙여줬지만, 다른 건 다 잘해도 안목 수업만큼은 낙제점에 가까웠다. 그래도 몇 가지 물건을 골라 포장을 부탁했다. 저택에 남아 있는 사용인들과 제리를 위한 선물이다.

직원도 나가서 대기실이 조용하다. 한 권 빼놓은 『마수의 영역 - 생식 활동에 따른 서식지의 변화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나도 맞춤옷 만들 때 겪어봐서 아는데 마왕 저놈 앞으로 디자이너에게 한 시간은 붙잡혀 있을 거다. 놈이 곤란해하리라 생각하니 광대가 자꾸 실룩인다.

“여기서 다시 만나는군. 자허 블리스.”

연극 대사를 외치는 것처럼 가식적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부른 놈을 본다. 노크 소리도 없이 대기실 문을 열고 벌컥 들어온 것은, 빌어먹을. 제뉴어리 드로젠이다.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고 화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로젠의 제뉴어리. 이곳은 옷을 맞추러 온 겁니까?”

“무투회 전 개막식 때 입을 정복을 맞추러 왔네. 듣자 하니 자네도 무투회에 나간다고?”

놈은 눈을 굴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왕을 빌미로 나를 찾아온 것 같다. 놈의 눈에 녀석이 보이지 않자 빌어먹을 마왕 놈의 더 빌어먹을 이부형제는 뻔뻔스레 내 옆에 앉았다. 아니 맞은편에도 소파가 있고, 다른 대기실도 많은데 왜 여기 앉는 거냐.

“자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칭찬이 자자하더군. 밤낮 가리지 않고 성실히 수련한다는 말도 말이야.”

놈의 몸에서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엉덩이를 옆으로 슬금슬금 빼며 물러났더니 눈치도 없는 새끼가 아까보다 더 밀착한다.

대외적으로 놈은 펠런 드로젠의 형제니, 대기실에 놈이 들어오는 걸 막을 사람도 없었을 테고.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찾아온 건지 몰라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더 엉덩이를 뒤로 빼다 결국 소파 가장자리까지 몰렸다.

내가 여기서 한 대 치면 외교 문제가 되려나. 오만 생각을 하던 차에 놈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같이 앞길 창창한 재원이 왜 저런 잡스러운 서자와 함께 다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군.”

“…펠런은 뛰어난 검사이며 그를 존경한다고 말했을 텐데.”

자식이 입으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어디서 주둥아리를 짹짹거려. 구겨지는 미간을 풀지 않고 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놈이 입꼬리 한쪽을 올려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요행과 꼼수를 실력으로 착각하는 걸세. 그는 어떠한 검술도 배우지 못했고 그럴 주제도 되지 못하지. 함께 다녀야 할 이를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예를 들면…….”

나라든지, 라고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놈이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얹고 뭉근히 문지른다. 음, 벌레를 만져도 이것보다 기분 나쁘지는 않겠다. 나는 선량하게 웃으며 놈의 손을 벌레 떼듯 가볍게 쥐고 털었다.

“교류할 상대를 고르는 것은 내 안목이지. 그리고 나는 내 교류 상대에게 충분히 만족하고 있소.”

“그건 모를 일이지. 그 천박한 녀석이 자네 입 안의 혀처럼 살갑게 굴던가? 아니면 다른 쪽으로 자네를 상대해 주던가. 그런 거라면 그놈보다 내가 훨씬 나을 텐데 말이지.”

제뉴어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내가 방중술 교육 또한 제법 잘 받아서, 라고 속살거리며 또다시 내 허벅지 안쪽을 움켜쥔다.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고 나는 그대로 제뉴어리의 손에 내 손을 포갠 후, 힘을 주었다.

“끄아아아악!”

손을 으스러트리는 건 어렵다. 내 악력은 마왕 놈만큼 강하지 않지만 그래도 남 아프게 하는 다른 방법은 몇 가지 알고 있다.

손가락은 역으로 꺾을 만한 관절이 많다. 거기다 이 자식 존나 약하다.

놈이 기이한 각도로 마디마디 꺾인 제 오른손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군다. 눈물 콧물 줄줄 흘리는 모습이 한심하다. 아니, 뭘 어쨌다고 손가락 좀 부러진 거 가지고 우냐? 아카데미 학생증 토해라, 자식아.

“협잡꾼의 세 치 혀가 계속 더러운 말을 지껄이게 두기엔 내 귀가 워낙 깨끗한 걸 좋아해서 말이야. 네놈의 말을 더 들을 필요는 없겠지. 초대한 적 없으니 네 발로 나가라.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마라. 제뉴어리 엑사 드로젠.”

외교 문제 하라고 해. 놈이 그렇게 나오면 나도 할 말 많다. 내가 머무는 대기실에 멋대로 들어온 건 놈이니까 말이다.

“멍청한, 선택을 후회하게 해주지.”

눈물 줄줄 흘리며 제뉴어리가 달아났다. 좀 더 놀려줄까 하다 어깨를 으쓱하고 마저 읽고 있던 논문에 시선을 돌렸다. 세상엔 참 별의별 멍청이가 다 있단 말이지.

내가 부탁했던 선물들을 포장해 돌아온 점원에게 부탁해서 차를 한 잔 더 가져다 달라고 했다. 점원의 표정은 나갈 때와 같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건지, 아니면 최소한의 수치는 알고 제뉴어리 드로젠이 손 부상을 숨기고 달아난 건지 알 수 없다. 뭐, 내가 알 필요 없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데, 생각보다 일찍 마왕 놈이 드레스룸 밖으로 나왔다. 벌써 치수를 다 잰 건가 했더니 놈의 안색은 딱딱하고 함께 들어간 디자이너는 창백하다.

아, 맞다. 보통 사람은 저 녀석에게 공포를 느꼈지. 잊고 있던 소설 설정이 생각나서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고 몸을 일으켰다.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건, 치수 잰다고 시달렸기 때문인가.

“제뉴어리가 여길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아, 그거 때문이냐?”

“…무슨 일 없었나?”

“없었어. 난 또, 치수 재느라 표정 구겨진 줄 알았지. 개소리를 지껄이길래 손을 좀 봐줬더니 울면서 나가더라.”

귀도 참 밝다. 고객 정보 보안 어쩌고 때문에 치수 재는 방 안과 대기실은 서로 소리를 듣지 못할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옷은 골랐나 모르겠다.

“무투회 전까지 적어둔 기숙사실로 배송 부탁하겠어. 그때 내 것도 같이 보내줘.”

허리 숙여 절하는 디자이너를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냥 서 있어도 불편했을 텐데, 심기까지 나쁜 마왕을 지척에 두고 치수를 재야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영감님에게 받은 돈도 있어서 내 옷을 계산하면서 놈의 옷도 함께 계산했다. 일시금으로 계산해도 기성품이라 용돈에 흠집도 나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용 마차를 탔다. 의상은 배달을 부탁했지만 양손 가득 의상실에서 산 선물로 한 짐이다. 그래 봤자 막 눈인 내가 뭘 알까 싶어 의상실에서 제일 잘 나가는 손수건과 넥타이 세트로 주문했다.

원래 평소에도 조용했던 놈이 오늘따라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왠지 쓸모없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무시하기로 했다.

그냥 적당히, 내가 언급하지 않으면 놈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 빌어먹을 호구는 결국 그 변태 놈의 이름을 언급한다. 나는 인상을 구기며 거칠게 손사래 쳤다.

“제뉴어리 드로젠의…….”

“대신 사과하지 마. 네가 잘못한 거 아니면.”

“…….”

“네가 그 새끼 배설물까지 치울 필요 없어. 이건 드로젠의 문제가 아니야. 그 빌어먹을 변태 새끼의 문제지. 그리고 설사 드로젠의 문제라 하더라도 네가 사과할 필요 없잖아.”

“내가 없었다면 그가 너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건 찾아온 그 자식이 잘못한 거라니까. 그리고 너, 드로젠에 뭐 받아먹은 거 있어? 없잖아. 들어보니 오히려 네가 학대당하면 당했지. 야, 나 같으면 빌어먹을 드로젠 버리고 만다.”

놈의 표정이 이상하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하다. 자식이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먼치킨에 미래에 마왕이 될 놈이어도 주변에서 이런 조언하는 새끼 하나 없으니 사람이 엇나가서 인류도 멸망시키려고 하고 미치고 그러는 거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당당히 놈의 옆자리에 앉아 미래 마왕 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조금 껄렁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뒷골목에서 산 세월이 있거든.

나는 이를 드러내고 비열하게 웃으며 놈에게 강요했다.

“야, 따라 해봐. 빌어먹을 드로젠 왕가.”

“…….”

“따라 하라니까? 빌어먹을 드로젠 왕가.”

“…빌어먹을, 드로젠 왕가.”

“그럼 이어서 말해봐. 빌어먹을 드로젠 왕가. 내가 더러워서 버린다.”

“…빌어먹을, 드로젠 왕가. 내가, 더러워서 버린다.”

“잘했어, 인마. 그거야. 손에 더러운 게 묻으면 씻으면 되는 거야. 그걸 아득바득 움켜쥐고 가봤자 네 손만 썩어.”

“그렇군…….”

“그런 거지.”

놈의 표정은 여전히 이상하다. 나를 따라 비속어를 지껄이는 낮은 목소리가 너무 안 어울려서 나는 낄낄 웃으며 놈이 내게 한 것처럼 놈의 검은 머리카락에 손을 얹고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놈이 내 손을 낚아챈다. 내가 한 것처럼 손등을 물까 했더니 놈이 손을 끌어당겨…….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낯간지러운 행동을 잘도 한다 싶다. 그래도 얼굴 잘생긴 놈이 하니 그림 같긴 했다. 받은 나는 괜히 머쓱해 빠르게 손을 거뒀지만.

포장한 선물이 썩 좋은 게 아니었지만 집사 노아에게 부탁해서 모두에게 선물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마법사의 통신을 이용하면 영감님과 바로 대화할 수 있지만, 몸값 비싼 마법사를 그렇게 부릴 수 없는 노릇이라 직접 고른 커프스단추와 넥타이핀 세트를 편지와 함께 우편으로 보냈다.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한동안 마왕 놈과 검술 대련을 하는 대신 창술 훈련에 매진했다. 그래도 일정은 크게 바뀌지 않아서 강의, 훈련, 식사, 수면. 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면 내가 데이트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는 거다. 신입생보다 재학생의 비율이 더 높았는데 잘난 외모 탓인지 남녀 가리지 않고 쉬는 시간마다 뒤뜰에 나가야 했다.

대화는커녕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스스로 갈고닦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고 얼굴 보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블리스라는 이름이 이렇게 무섭다.

그중 멍청해 보이는 두 놈은 마왕 놈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가문이 드로젠 왕가보다 더 뛰어나며 중앙 권력에 가깝다는 개소리를 지껄이고 갔다.

상대할 가치가 없으면 정중한 거절도 아까워서 자꾸 개처럼 짖으면 네발로 기어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조언했다. 한 놈은 꼬리를 말고 달아났고, 한 놈은 갑자기 내게 덤볐다가 흠씬 처맞고 치료실 쪽으로 기어갔다.

나는 입으로 뱉은 말은 지키는 주의다.

이야기를 들은 마왕 놈이 입을 열었다.

“무도회를 준비하는 거겠지. 겸사겸사 블리스의 이름도 등에 업는 기회가 될 테니까.”

“무도회는 앞으로 두 달이나 남았는데? 바로 코앞인 무투회가 먼저 아니야?”

“네 실력을 보면 무투회에서 상위권 입상은 충분하겠지. 그때가 되면 어중이떠중이들은 네게 접근하지 못할 것 같으니 지금 덤비는 거다.”

“너도 데이트 신청받았냐?”

마왕 놈이 말없이 가방 안에서 편지 세 통을 꺼내 보였다. 하긴, 마왕 놈 인상이 워낙 차가워서 얼굴 보고 데이트 신청하기 힘들긴 하지. 그래도 대단하다. 저 녀석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놈이 다 있고.

“결투장이다.”

“아…….”

어쩐지 편지 봉투가 삭막하고 전투적이더라. 음. 그렇구나.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데이트 신청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다. 저 자식을 알고도 덤비려는 미친놈이 있다니. 싸움에 미친 놈이거나 목숨이 여러 갠가.

왠지 귀가 간지러워서 귀를 긁고 나는 놈을 흘깃 바라봤다.

“터트리지 마. 부수지 마. 적당히 상대해. 괜히 박살 내고 적 만들지 말고.”

“필요하다면.”

하루가 빠르게 흘렀다. 하는 일이 배우고 훈련하고 먹고 자는 것뿐이니 시간 가는 게 흐르는 물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무투회가 이틀 남았다. 전야제까지 포함하면 하루다.

전야제는 약식 파티라고 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열흘간 진행될 무투회를 위해서 참가자들의 선전을 응원하고 안전을 기원하는 행사라, 무투회 참가자는 참여해야 한다.

춤은 배웠지만 출 필요는 없다. 파트너가 꼭 필요한 파티도 아니어서 전야제 때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요청도 다 거절했다. 음식만 먹고 나와야지. 맛있는 고기. 행복한 고기.

즐거운 상상 중인데 불쑥 마왕 놈이 치고 들어온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로.

“전야제 파트너가 되어주십시오.”

“안 돼.”

놈을 거절한 게 이로써 세 번째다. 이쯤 되면 저 자식 고집불통 아닌가 싶고, 좀 막막하다. 하지 마. 좀 거절하면 거절을 받아들여. 놈의 뺨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젠장, 꼬집은 자국도 남지 않는 튼튼한 몸이 얄밉다.

“춤은 잘 배웠다. 네 발을 밟을 일은 없을 거라 자부하마.”

“내가 대충 배워서 그래. 내가 전투적인 발등 파괴범이라 그래.”

“내 발등은 튼튼해서 네가 내려찍어도 터지지 않을 거다.”

“아오, 한마디를 지지 않아.”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린 후 놈의 발등을 구둣발로 꾹 밟았다. 자, 원하는 대로 밟아줬지?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가 백 번 신청해도 백 번 거절할 거니까 그만해.”

“거절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잖나.”

“그건, 그런데. 아니. 전야제엔 꼭 파트너가 있을 필요가 없다니까. 그러네.”

이틀 전 도착한 예복을 보고 나는 목덜미를 잡았다. 이 빌어먹을 마왕 놈이 나와 같은 디자인의 예복을 골랐다. 다행히 난 흰색 바탕에 포인트 색상이 남색이고 저 자식은 검은 바탕에 포인트 색상이 붉은색이지만, 디자인이 같다.

“와, 하필 이걸 골랐냐. 너랑 따로 입장해야겠다. 누가 보면 파트너라 맞추고 온 줄 알겠어.”

“네가 고른 디자인에 맞춘 게 맞다. 그리고 네게 파트너가 되어 달라 요청하는 바입니다.”

다시 그날을 생각하니 열이 오르고 가슴이 답답한 것이 이게 화병인가 싶다. 아주 숨이 턱턱 넘어간다, 넘어가.

“다시 말하지만 안 돼. 가뜩이나 너랑 나랑 잔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소문 키울 일 있냐.”

“그 비슷한 건 하고 있잖나.”

좋아. 오늘이 마왕 놈 영면하는 날이구나. 침착하게 오른발을 디딤발 삼아 단단히 바닥에 고정하고 왼발로 놈의 목을 노려 후려친다. 발끝에 묵직한 것이 닿았지만 놈의 목은 아니고, 손이다.

발목을 쥔 놈의 손이 단단하다. 그대로 튀어 올라 놈의 팔꿈치를 무릎으로 찍으려 했지만, 발목 끌어당기는 손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빡쳐서 한 대 쥐어박으려고 했는데, 마왕 놈 한 대 치는 게 이렇게 하드 콘텐츠다.

발목 쥔 손이 정강이를 훑고 올라가더니 내 허벅지를 감싸 쥔다. 그 바람에 자세가 어정쩡해졌다. 밀착한 몸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졸지에 허벅지를 휘감고 끌어안은 꼴이다.

“한 대만 때려봤으면 원이 없겠네.”

“그럴 만한 실력이나 쌓고 오도록.”

빌어먹을 새끼. 놈의 이마에 박치기하고 싶지만 깨지는 건 내 이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딜러면 딜러, 탱커면 탱커. 하나만 잘하면 되는데 이 자식은 원딜, 근딜, 범위공격에 탱까지 가능하다. 그러니 평범하고 연약한 근접 딜러 창기사는 울 수밖에 없다.

놈의 손이 슬그머니 내 엉덩이를 쥔다. 놈의 손등을 철썩 때렸다. ‘하지 마. 여기 밖이야.’ 괜히 쑥스러워 놈을 올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자, 놈이 부드럽게 웃는다.

잘생겼다. 펠런 드로젠.

아무래도 난 미인에 약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놈에게 약해질 수 없다.

“여긴 우리만 쓰니 괜찮아. 오는 사람 없다.”

하루가 멀다고 연무장 하나 빌려 대련에 대련했더니 이 연무장은 우리가 전세 낸 셈이 되었다. 뭐 상관없다. 여기 말고도 개인이 쓸 수 있는 연무장이 매우 수두룩하니.

“그래도 밖에서는 안 돼.”

“안에 들어갈까?”

이 변태 자식. 눈을 흘기며 놈을 노려보다, 놈의 몸을 감은 허벅지에 힘을 주고 밀착했다. 몸이 조금 뜬 덕에 놈의 사타구니에 내 사타구니를 맞붙이고 슬쩍 문질렀다.

“말 잘 들으면 상을 주지.”

“…변태 녀석.”

진짜 변태에게 변태 소리 들으니 기가 막힌다. 어이가 없어 놈을 노려보다 손을 뻗어 놈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가 놔준다.

“싫으면 말고.”

“싫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럼 파트너 신청 그만해. 너랑 다르게 나는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거절할 때마다 미안해 죽겠거든.”

딱 잘라 단호하게 말한 후 놈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놈이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한 말인데 이런 제기랄.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고 계시다.

“내가 그 표정 이제 안 통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지.”

“그렇지만 나는 너 말고 없다.”

“파트너 없이 갈 수 있는 파티라니까. 예복 노리고 같은 디자인으로 맞춘 거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만 하시지? 소문을 잠재울 생각을 해야지. 더 일을 키우려고 그러냐.”

매가리 없이 우두커니 선 놈의 소매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자식이 맘 약해지게 말이야.

손을 뻗어 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물에 떠내려간 사과 보고 망연자실한 불곰의 터럭을 쓰다듬는 것 같지만, 요즘 불곰보다 놈이 더 귀여워 보이긴 하다. 몸 맞대고 온종일 얼굴을 보니 익숙해진 걸 테지.

“대신 무투회에서 우승한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하자.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소원이라…….”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야. 알았지? 못 들어주는 건 안 돼.”

놈이 우승자가 되는 건 천지가 개벽하거나 빛의 신 최후의 버프를 받은 용사가 오지 않는 한, 기정사실이다. 둘러서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 시무룩했던 놈의 검은 눈동자에 생기가 돈다. 나는 히죽거리며 놈의 허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안 할 거야?”

“안 한다는 말은 안 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후, 놈과 정신없이 손장난했더니 저녁 먹기 싫을 정도로 몸이 노곤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데 몸은 찝찝하다.

배에 엉겨 붙은 정액이 찝찝해 시트를 끌어 대충 닦았다. 음, 민망하니까 이 시트는 내가 빨아서 말려야겠다. 말리는 건 마왕 놈에게 마법 써달라고 하면 되겠지. 이렇게 누워 있자니 참 안온하고 내가 쓰레기 같다.

‘미래에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를 놈과 거시기를 만지작거리는 사이가 되다니. 이래도 괜찮은 건가.’

욕망에 져서 멀리 날아갔던 이성이 되돌아왔다. 소위 말하는 현자 타임이다. 지금까지 내 행보를 되짚어 보면 앞날이 참 막막하다. 이 자식이랑 딸 쳐주는 사이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냐. 한 번이 두 번 되긴 어려운데 세 번부터는 쉽더라. 멍청한 나 새끼.

‘이 자식 죽이긴 글렀네.’라고 생각하며 나는 마왕 놈의 허벅지에 머리를 괴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하여튼 대한민국 사람은 정이 문제다. 정이.

놈이 내 머리카락 사이 손가락을 밀어 넣어 느리게 어루만진다. 만져주는 손길이 기분 좋아서 눈을 뜨고 놈을 마주 응시했다.

만족한 것처럼 평소보다 순해 보이는 눈매가 우스워서 놈의 허벅지 위를 손가락으로 슬금슬금 문질렀다. 조금 차갑고 단단한 근육. 괜찮다. 나도 굵기만 다를 뿐 근육 잡힌 건 비슷하다. 역삼각형 몸으로 근육 찌울 생각도 없고. 그나저나…….

놈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척하면 알지. 부득불 전야제에 같이 가고 싶어 하거나 슬쩍 진도 더 빼려고 하는 걸 보면 딱이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너무 멋지고 잘난 탓이려니 한다. 이방인이니 뭐니 하더라도 알맹이가 실하고 잘났잖냐. 낭중지추는 나를 일컫는 말이 아닐까. 얼핏 머릿속을 지나간 다른 사자성어 미인박명은 잊도록 하자.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하며 놈의 허벅지 근육을 쓰다듬었다. 놈은 뭘 안 발라도 피부마저 좋아서 손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촉감 놀이용 장난감 만지듯 주물럭거린 내가 잘못인 건 알지만, 놈의 반응이 참 극적이라 보는 재미가 있다.

시치미를 뚝 떼고 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또 커지냐.”

“네가 만지니까?”

“아이고, 그러셨어요? 내가 만졌더니 쑥쑥 자라셨어요? 와, 내가 마법산가 보다.”

만져서 커지면 내 다리나 만질걸. 여기서 딱 5cm만 더 커졌으면 좋겠다.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아무래도 상대적인 수치라, 마왕 새끼랑 머리 하나 차이 나서 볼 때마다 고개 꺾고 봐야 하는 게 짜증 난다. 얄미운 꺽다리 자식.

피식 웃으며 다시 자라기 시작한 마왕 주니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크긴 크다. 내 것도 큰데 놈은 ‘아, 이래서 이 자식이 이 세계관 최강이구나’ 하고 이해가 될 크기다.

놈이 허벅지를 움찔거렸다. 놈 걸 쥐고 흔들 생각도 없을 정도로 피곤한데 너무 자극했나 싶다.

어느새 허리 숙인 놈이 나를 검고 깊은 눈으로 바라본다. 놈의 등허리에서 쏟아진 검은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시야를 가렸다. 바로 누워 놈을 바라보다 놈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는 거라니까.”

“…알고 있다.”

“모르니까 하는 말이잖아, 인마. 서로 좋아해야지…….”

놈이 나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 놈이 무섭다. 놈도 눈치가 빠르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다. 내가 놈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는 것도 눈치챘으니까 말이지.

혼란이 뒤섞인 검은 눈을 보는 게 미안해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놈과 내 몸에 묻은 정액 냄새가 쿰쿰하다. 어우, 씻고 빨리 환기해야겠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묶다가 놈이 팔을 붙드는 바람에 머리가 다시 풀렸다. 뭐야 인마. 고개를 돌리자, 놈이 팔을 끌어당겨 내 손바닥에 다시 입 맞춘다.

괜히 손바닥이 간지러워 팔을 비틀어 뺀다. 또 그 우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의 팔을 붙들어 놈이 한 것처럼 나도 놈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손바닥에 뽀뽀 한 번 하는 거로 놈이 나를 죽이지 않게 된다면 수지맞는 장사다. 서로 성기도 물고 빨아봤는데 손바닥이 대수일까. 놈의 놀란 눈이 우스워 손을 가볍게 물고 놔줬다.

“와서 등이나 밀어줘. 나도 밀어줄게.”

억울해 보이는 눈 좀 보라지.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가 밀당하는 거 맞다. 무조건 밀다가 놈이 눈 뒤집혀서 마왕 되자마자 폭주하면 어쩌려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엔 내가 저 자식 평생 책임질 준비를 못 하겠다.

저 자식은 모른다. 나라고 더 진도 빼기 싫은 게 아니다. 저 탐스러운 엉덩이를 볼 때마다 이성이 날아가는 걸 얼마나 열심히 붙들고 있는데.

연애 전에 제일 나쁜 놈이 마음 줄 거 아니면서 줄 것처럼 구는 놈이라는데, 어쩌면 내가 마왕 놈보다 더 나쁜 놈일지 모르겠다. 여러 목숨 구하자고 정작 놈을 이용하는 게 미안쩍은 마음에 욕실에 뒤따라와 내 몸을 끌어안은 놈을 밀어내지 않고 그냥 방치했다.

놈도 나도 벗고 있어서 닿는 체온이 물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내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적거리는 놈의 팔뚝에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로 문질렀다.

소금기 옅게 남아 짭짤한 놈의 팔뚝에 잇자국이 남을까 하고 가볍게 물어봤지만, 흔적도 없다. 패시브 스킬로 육체 강화 같은 거라도 있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본다.

놈이 낮게 신음하며 내 엉덩이골 사이 쑥쑥 성장한 제 물건을 비빈다. 응……? 으, 응? 긴장해서 단단해진 내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기세가 제법 강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서둘러 몸을 돌려 놈의 성기를 두 손으로 쥐었다. 씻고 바로 잘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한 발 더 빼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내 본능이 경고음을 세차게 울렸다.

한 손으로 기둥을 쥐고 다른 손은 손바닥을 펴서 귀두 전체를 감싸 쥔다. 선액이 미끈미끈하게 손바닥에 달라붙어 느리지만 진득하게 귀두만 노리고 문질렀다. 네놈이 어디가 약한지 잘 알지.

팔뚝에 닿는 놈의 허벅지가 단단해지며 이따금 경련했다. 신음을 참을 생각인지 입술을 꾹 물고 끙끙 앓는 놈의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내가 마법사 맞나 보네, 네놈을 끙끙 앓게도 만들고.”

내게 마조히즘 말고 사디즘 성향도 있었던 걸까. 놈이 움찔거리며 반응하는 곳만 집요하게 문지른다.

열이 올라 벌게진 놈의 귓가가 맛있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놈의 피부가 따뜻하다. 어깨와 이어진 목의 단단한 근육을 이로 가볍게 문다. 놈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물리니까 좋아? 아픈 쪽이 좋으면 엉덩이도 찰싹찰싹 때려줄까?”

“그런 취미는 없다만.”

“이대로 손으로 해줘? 아니면 입?”

“입, 도 좋지만. 지금은 손이 좋다. 얼굴 볼 수 있으니까.”

자식이 자꾸 양심에 걸리는 말만 하고 있어. 괜히 쑥스러워 놈의 어깨를 다시 와구와구 물었다. 이번엔 좀 아팠던 걸까, 놈이 내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다. 체중이 앞으로 쏠려 자연스럽게 놈과 하반신이 밀착했다.

허벅지가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몸이 붕 떴다. 놈이 두 손만으로 나를 들어 올린 탓이다. ‘억, 야. 아오.’ 뭐 하는 거. 당황하던 차에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쏟아질 것 같아 놈의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풀어 어깨와 팔을 붙들었다.

힘만 좋은 놈 같으니라고. 속으로 욕을 하던 차에 어느새 놈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야, 넌 좀. 말을 하고 하든, 아, 겁나 놀랐네.”

놈은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내 엉덩이를 단단히 붙들어 내 몸이 뒤로 빠지지 않게 보듬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입술을 피해 고개를 슬쩍 돌려 놈의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 젖은 다리가 놈의 허리를 휘감았다. 밀착한 몸에 열이 오른다.

호흡이 조금 가빠와서 눈을 감았다. 놈의 탄탄한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한 번 눈을 감았더니 다시 뜨기가 어렵다. 바로 지척에서 놈의 숨소리가 들리는 탓이다.

놈이 내 성기와 제 것을 동시에 쥐었다. 아래서부터 치미는 적나라한 감각에 나는 놈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간신히 눈을 떴다. 선액이 줄줄 흐르는 두 개의 성기. 놈의 커다란 두 손에 다 잡히지 않는 것을 슬쩍, 어깨를 잡지 않은 손으로 맞잡고 귀두를 비볐다.

“한, 번만이야. 내일은 전야제고. 모레부터 다른 놈들하고 싸워야 하니까.”

허리가 자꾸 위로 튄다. 질척하게 젖은 귀두가 서로 맞닿을 때마다 하반신이 다른 생물처럼 찌릿찌릿하며 녹는다. 빌어먹을, 이래서 끊지 못하겠다.

이미 침실에서 한 발 빼고 왔더니 몇 번 훑지 못했는데 금방 사정감이 치밀어 올랐다. 놈도 이제 한계인 듯, 절정 직전의 민감한 귀두를 놈이 거칠게 문지른다. 자꾸 튀어 오르는 허리를 억누르느라 놈의 어깨를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크으읏, 흐…아.”

수축했던 근육이 느리게 이완한다. 가슴팍까지 튄 정액에 아무 생각 없이 놈과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두 사람 분량이지만 한 발 뺐더니 정액이 묽은 것 같다. ‘아, 이제 씻어야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놈의 얼굴이 한 치 앞이다. 와, 존나 놀랐네. 검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본 탓에 당황해서 몸을 뒤로 물리다가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그 바람에 펌프를 잘못 눌러 머리 위로 곧장 찬물이 한 움큼 쏟아졌다.

“차, 가워!”

머리가 푹 젖어 나는 낄낄 웃었다. 아직 우기가 시작하지 않은 초봄이지만 딱히 추위를 느낄 만한 계절은 아니다. 놀란 것이 한결 가시자, 찬기도 금방 사라졌다.

그것보다 평소라면 기습처럼 쏟아질 물도 정수리에 눈이 달린 양 피했을 놈이 꼼짝없이 물을 맞았다는 데 있다.

내가 무릎 위에 있어서 피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피하지 않은 건지.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넘기는 놈이 숨 막히게 잘생겨 보여서 나는 후자에 초점을 맞췄다.

머리를 쓸어넘긴 놈이 나를 내려다본다. 가끔 놈의 눈이 검은 거울처럼 오로지 나만 반사할 때가 있다.

놈의 두 손이 놈처럼 물에 푹 젖은 내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겼다. 나는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놈의 손바닥이 물에 젖은 것치고 따뜻해서 손이 닿은 자리에 잘게 솜털이 곤두선다.

“내가 우승하면…….”

“소원 두 개로 늘려달라고 하는 거 안 돼.”

빠르게 선공을 날렸다. 놈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난 봤다 놈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저건 둘 중 하나다. 그런 생각을 아예 못 했다가 지금 깨달았거나, 아니면 생각하고 있다가 내게 정곡을 찔렸거나.

“…네 진짜 이름을 알려줘.”

“들어줄 수 있는 소원만 들어준다고 했어.”

“어렵나?”

“이 몸에 들어온 내게 남은 게 그거 하나뿐인데 그것까지 가져가면 안 되지, 인마. 다른 거 해 다른 거.”

“그렇다면.”

놈이 엄지로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놈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아랫입술이 벌어지고, 짓눌렸다. 가볍게 놈의 엄지를 문다. 나는 놈이 우승을 빌미로 내게 고백할 줄 알았다. 아니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키스를 요구한다든지.

“우승하고 말해야겠군.”

“다시 말하지만 들어줄 수 있는 소원만이야.”

나는 물고 있던 엄지를 놓아주고 놈의 허리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죽겠다. 씻고 바로 뻗게 생겼네.

시계의 알람이 울리기 전에 습관대로 눈을 떴다.

아이고, 몸이 무겁다 했더니 진짜 무거운 게 나를 누르고 있었다. 허리를 휘감은 묵직한 팔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창밖이 희미하게 밝은 걸 보니 새벽이다. 좋아, 새벽 스트레칭을 하러 가야 하는데.

내가 언제 잤더라. 욕조에서 깜박 졸았던 것 같은데 눈 떠보니 침대 위다. 그것도 베개도 잘 베고 이불도 허리까지 잘 덮었다. 옷을 입은 기억이 없는데 면티에 속옷, 더불어 바지까지 잘 입은 거 보면 마왕 놈이 다 해준 거 같다.

착한 녀석 같으니. 그래서 지난 밤 내 침대에 슬그머니 기어 들어와 잠든 놈을 용서하기로 했다.

전야제와 무투회, 그리고 우승자 축하연을 포함해 장장 열흘에 걸쳐 진행되는 무투회는 제법 큰 이벤트에 속했다. 그래서 무투회 참가자는 오늘부터 열흘간 강의가 없다. 빈 강의 시간표를 확인하고 아직 곤히 자는 놈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배고파.”

저녁을 안 먹고 자서 그런지 뱃가죽이 홀쭉해진 기분이다. 밥 먹고 소화시킨 후에 근력 운동해야지. 가볍게 기지개 켜며 테라스로 걸어갔다.

바닥에 닿는 대리석이 그렇게 차갑지 않다. 어제보다 날이 조금 더 풀린 것이다. 마른세수하는 손에 수염이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나이가 스물이 넘었는데 아직 수염이 안 자라. 나는 낄낄거리며 내 턱을 문질렀다. 아침마다 면도할 귀찮음은 덜어서 좋긴 한데.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마시고 침실로 돌아왔다. 놈은 그사이 잠에서 깬 건지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나를 보며 옅게 웃고 있다.

“배고프다니까. 안 일어나지?”

“일어났다. 씻기만 하면 된다.”

“그럼 씻어 인마. 뭉그적대며 침대에서 뒹굴지 말고.”

놈이 허리까지 덮은 내 이불을 확 걷어 발치까지 끌어내린 후, 씩 웃었다. 이불에 덮여 있던 놈의 복숭아뼈 도드라진 발이 잘생겼다. 왜 잘생긴 놈은 발바닥도 잘생겼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내 발을 본다. 음. 발가락 하나까지 완벽하군. 부위마다 잘생길 수도 있지.

내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뒤따라오는 마왕 놈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 놈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힘은 나보다 더 세서 버티면 안 밀릴 것 같아도 놈은 순순히 뒷걸음질 쳐줬다.

나는 고개를 젓고 단호하게 놈을 막았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빌어먹을 욕정의 노예 같으니.

“말하는데, 앞으로 무투회 끝날 때까지 접촉은 안 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지?”

“미친놈아, 허용은 무슨 허용이야.”

“아예 널 만지지 않고 살 수는 없잖아.”

“그럼 악수?”

“포옹은?”

“좋아, 포옹까지. 그런데 포옹하고 바로 풀어야 하는 거야.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면 터트려버린다?”

어딜? 이라고 묻지 않고 놈은 순순히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거긴 단련하지 못하겠지. 아닌가. 단련 가능한가? 혹은 보호 마법을 중첩으로 건다든지. 하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길이길이 간직해야 할 크기와 굵기긴 하다.

“알아들었지. 씻으면서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같이 씻어도 돼. 그거 아니면 따로 씻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나중에 씻는 게 나을 것 같다. 점점 더 버티기 힘드니까.”

뭘 더 버티기 힘든지 묻지 않고 나는 방긋 웃으며 욕실 문을 닫았다.

아카데미가 외부인에게 공개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시험 일정을 포함한 입학식과 졸업식 정도 되어야 굳게 닫힌 정문을 열까 말까다. 무투회 전야제에서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다. 다만 관계자만 까다로운 본인 확인을 거친 후 들어오는 게 가능하다.

집사 노아가 이날을 위해 신경 써서 보내준 코디네이터들은 들어오는 길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 떨었다. 더불어 그들의 입은 아카데미의 웅장함에 대해 감탄하더니 곧장 주제를 전환해 내 외모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입이 쉬지 않던 서너 사람이 동시에 붙어 나와 마왕 놈의 머리를 세팅해 줬으며 심지어 얼굴에 스킨이랑 기초 화장품도 발라줬다.

괜히 얼굴에 뭘 바르는 게 싫어서 색이 들어간 분가루를 묻히는 건 극구 사양했더니 좀 아쉬워하는 거 같았지만 내 알 바냐. 얼굴 무거운 거 질색이다.

마왕 놈도 화장은 거절했다. 하긴 난 화장 안 해도 잘생긴 얼굴이고, 저놈도 화장해 봤자 사람들은 무서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자 방에 들어가 코디네이터의 도움을 받아 예복을 입었다.

뒤로 단정히 묶은 머리카락이 평소와 다르게 윤이 났다. 짙은 남색 소매에 달린 검고 만질만질한 커프스단추에 지문이라도 묻을까 봐 손도 못 대겠다. 하긴 얇은 실크 장갑을 끼고 있으니 만져도 지문은 안 남겠구나.

남색 셔츠에 바지와 조끼 코트는 흰색이다. 목을 두른 흰 실크 크라바트에 작은 진주로 장식한 검은 카메오. 아직 작위가 없어서 실크해트는 쓰지 못하고 굽 달린 구두는 반들반들 광이 났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숨 멎을 정도로 잘생겼다. 코디네이터와 그의 어시스트들이 탄성을 지를 만도 하다. 후하하.

“오랜만에 입는 것 같다.”

“아, 나도. 차라리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말지, 이렇게 입어서 어디다 써먹…….”

맞은편 방에서도 마왕 놈이 예복을 입고 나왔다. 나는 하던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멀거니 놈을 봤다.

놈이 잘생긴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 잘생겼다. 평소에 귀신처럼 풀어 헤친 머리카락을 단정히 이마 뒤로 넘겨 고정했는데 이목구비가 확 산다. 거기다 놈이 입은 스리피스 슈트가 허허. 이것 참.

내 본능이 말하고 있다. 이대로 둘이 같이 입장하면 누가 봐도 커플이라고 오해할 게 뻔하다고. 소문에 확인사살 하는 거라고. 아오 빌어먹을, 왜 하필 나랑 맞먹게 잘생기고 그러냐 너는.

수고해 준 코디네이터들을 돌려보내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평상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크게 불편하진 않다.

전야제에 입장할 시간이 되면 시종들이 알아서 부를 테지. 나는 저녁밥 대신 간식거리로 놔둔 초콜릿을 코팅한 반건조 포도를 질겅거리며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절대 너랑 같이 입장하면 안 되겠다.”

“그럼 혼자 입장하라는 거냐.”

“나한테 밤마다 엉덩이 뚫린다는 소문 듣고 싶으면 같이 입장하든가.”

“그거 감수하면 같이 입장해도 되는 건가?”

요 입! 입! 소파에서 일어나 한걸음에 다가가 놈의 양 볼을 쭉 잡아당겼다. 놈은 순순히 내 손에 뺨을 맡겼다. 아픈 티도 내지 않으니 더 얄밉다.

“감수할 게 따로 있지. 그런 소문을 자처하려고 들어?”

“너나 내 나이에 애인이 있다는 소문은 문제 될 게 없다만?”

“그렇다고 대놓고 오해를 살 필요는 없잖아.”

놈이 미간을 구겼다. 잘생긴 얼굴 꼭 그렇게 구길 필요는 없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 놈의 미간 사이를 꾹꾹 눌러줬다.

“난 그런 오해 받는 거 싫어 인마.”

“…….”

놈의 검은 눈이 서글퍼 보이지만 어쩌겠어. 이 자식이랑 사귀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언젠가 이 자식은 각성하고 마족이 될 거다. 어쩌면 소설처럼 마왕이 될지 모르지. 그러면 나는 마족의 전 애인, 더 나아가서 마왕의 전 애인 타이틀을 달게 된다.

그걸 감수할 정도로 내가 놈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인류의 적 타이틀을 감당하기에 너무 약하다.

“그렇다면 다른 이와 입장할 생각인가?”

“뭐? 싫어. 너도 아닌데 다른 녀석들하고 왜 입장해?”

이름 아는 놈은 적고, 가까이하는 놈은 더 적다. 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놈의 구겨진 미간이 조금 펴졌다. 꾹꾹 누른 보람이 있는 것 같아서 마저 살살 문질러줬다.

“그럼 내가 다른 사람과 입장하는 건.”

“어……? 왜? 그러지 마. 혼자 입장해. 나도 혼자 입장하는데 너도 그래야지.”

좋아. 이제 미간이 완전히 펴졌군. 기세만 감출 수 있으면 나와 비교해도 괜찮은 얼굴인데 말이지. 흐뭇하게 웃으며 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입장만 따로 해도 돼. 입장하면 어디서 시간이나 보내고 있어. 그러다 나 입장하면 바로 나 있는 곳으로 와. 나도 혼자 멀거니 서 있는 거 싫으니까. 어차피 첫 춤은 꼭 안 춰도 되니까. 우린 먹을 거 쓸어버리자. 아, 절대 술은 마시지 말고.”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술 안 마시겠다는 말을 참 거창하게 한다. 술은 근육에 최대의 적이야. 알겠지? 마셔도 무투회 끝나고 마시자고. 너 우승. 나 준우승. 마시기 딱 좋은 변명 아니냐.”

그래 넌 인류 최강 해라. 난 아카데미 한정 인간 최강 하련다.

이윽고 시종이 찾아와 우리 기숙사실 방문을 두드려 입장할 시간을 알렸다. 이래 봬도 나는 제후국의 후계자고 놈은 왕자라, 전야제 입장 순서가 제법 뒤에 있다. 순서로 따지면 놈 다음이 나일 것이다.

연회장으로 꾸민 대형 홀까지 거리가 있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사각형의 좁은 창문을 통해 든 가로등 불빛이 마왕 놈의 얼굴에 음영을 짙게 만든다. 잠시 헛기침을 하고 놈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타박하느라 아직 말 못 했는데. 그, 옷 잘 어울려.”

“너도, 내가 본 누구보다 멋있다.”

놈은 절대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놈이 아니다. 유일한 친구인 내가 잘 안다. 그래, 내가 좀 멋있긴 하지. 실룩거리는 광대를 가라앉히려고 간신히 노력하며 나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자식, 보는 눈이 있군.

마차가 도착하기 무섭게 더벅머리 하인이 문을 두드린다. 대연회장 문은 활짝 열렸고 마왕 놈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놈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 주름 잡힌 장갑을 고쳐 꼈다. 두어 번 더 누군가 입장하고 곧 같은 하인이 다시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5년 전 영감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정도로 긴장했던가. 나는 마른 입술을 잘근 물고 턱을 당기며 고개를 들었다. 옅은 미소를 잊지 말자. 내 신원을 확인한 연회장 문 앞의 시종이 내 입장을 알렸다.

“블리스의 자허께서 입장하십니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 있다가 갑자기 대낮처럼 환한 연회장에 들어갔더니 눈이 좀 침침하다. 부드러운 연주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문장이 아닌 한 덩어리 소음처럼 느껴졌다. 예법 시간에 배운 대로 가슴에 손을 가볍게 얹은 후 떼며 연회장 안의 만인에게 인사한다.

소리가 줄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만 백여 쌍에 가깝다. 개인은 사라지고 내 의식에 들어오는 것은 집단이다. 알 까보냐.

태연하게 느린 걸음으로 중앙 홀을 벗어나, 사람이 적은 스탠드바 쪽으로 걸어갔다. 저들 딴에는 낮게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렸다. 문장이 아닌 뭉뚱그려 뭉개진 단어들.

자허. 자허 블리스. 검귀. 제후께서……. 미스트가에서……. 드로젠.

걷는 걸음을 집요하게 쫓는 시선들.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시야는 먼 곳을 바라보되 특정 누군가를 향하지 않는다. 잠시 귀가 먹먹하더니 소리가 조금 줄었다.

쪽팔리게 이런 데서 기절하지 말자. 새끼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태연하게 걸었다. 이윽고 등 뒤에서 내 뒤로 입장한 테넨 글로리를 호명하고, 나는 인파를 피해 칵테일바 쪽으로 이동했다.

빌어먹을 마왕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찾아온다며. 느리게 주변을 훑었지만 검은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알아서 찾아오겠지.

목이 타서 프런트 안에서 펀치를 만들고 있는 바텐더에게 음료를 주문했다.

“술이 들어가지 않은 거로. 차가운 음료 한 잔.”

“아, 예. 예!”

귀족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바텐더가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나보다 더 긴장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 웃었더니 먹먹했던 귀가 조금 뚫린 듯 소리가 다시 크게 들렸다. 음, 나도 바텐더 못지않게 긴장한 모양이다.

한참 뭔가 덜그럭거리며 만들던 바텐더가 손잡이 없는 유리잔을 내민다. 투명한 얼음이 시원해 보이는 주황색 음료를 단번에 비웠다.

조금 쌉싸름하고 상큼한 과일 향. 오오, 이거 맛있다. 이건 마왕도 좋아할 것 같아서 나도 한 잔 더 마실 겸 추가로 두 잔을 더 시켰다. 근데 이 자식은 어딜 가서 안 오는 거야.

테넨 글로리와 그의 파트너가 춤을 추기 위해 메인 홀로 나가며 잠시 스쳐 지나갔다. 가벼운 눈짓으로 인사하고 고개를 돌렸다.

테넨 글로리처럼 얼굴만 아는 이들과 눈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모든 참가자의 입장이 끝난 건지, 입학식 때와 같은 옷을 입은 총장이 무대에 나와 축사를 시작했다. 대충 무투회의 선전을 비는 입학식 때와 다를 바 없는 짧고 간결한 축사였다.

축사가 끝난 후 곧바로 무투회 예선전 대진표를 공개했다. 참여하는 인원만도 백여 명에 가까워서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마법 문자를 한참 찾은 후에야 내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허 블리스는 B-3 조. 다행히 우리 조에서 마왕 녀석의 이름은 발견할 수 없었다. 녀석은, 그러니까… D-1조였다. 예선전에서 만날 일은 없겠군.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예선에서 무참하게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진표 확인이 끝나자, 다시 은은한 연주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좋아.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몰라도 나타나지 않는 마왕 놈을 찾아 나서야겠다.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내게 말을 거는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간단한 자기소개 뒤에 얼핏 비치는 나에 대한 호기심이 부담스럽다. 빌어먹을, 이래서 사교계 데뷔도 안 한 건데. 일행을 찾고 있다고 양해를 구한 후에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예법 시간에 배운 대로, 간신히 사람들을 물리고 인적 없는 테라스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홀로 통하는 유리문은 열어둔 상태라 밖에서도 마왕 놈이 나를 찾아올 수 있겠지.

가지고 온 주스를 홀짝거리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방금처럼 내게 접근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파트너를 두고 다른 이에게 춤을 신청하는 건 무례이기도 하고, 나처럼 테라스 안에 머물면 대화를 걸지 않는 게 예의기도 하니까.

“파트너도 없이 홀로 입장한 건가. 블리스.”

“당신도 참… 대단하다.”

그걸 무시하고 접근하는 제뉴어리 같은 놈도 있고. 나는 인상을 구기며 내 잔을 비웠다. 뒤로 꺾인 손가락이 덜 아팠던 모양이지. 젠장,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 걸 그랬다. 난 늘 마음이 약해서 문제다.

겉치레 존나 좋아하는 놈이니 파트너 없이 왔을 리가 없는데, 파트너는 어디다 버리고 내게 말을 거는지 모르겠다. 난간에 음료 잔을 내려놓고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손을 푼다. 좋아, 착하고 마음 약한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다. 이 새끼가 건들면 으스러트리자.

“제후국의 후계자가 테라스에만 머물러서야 쓰겠나. 지난번 무례는 내가 용서할 테니 본인과 깊은 대화를 나눠볼까.”

“광증은 사제도 치료 못 한다더냐? 짖지 말고 꺼지라고… 했…….”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든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의식이 멀어진다. 시발, 상황을 알아차리고 정신 차리기 위해 내 혀를 으적 물지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누군가 붙드는 것만 깨닫고 모든 것이 암전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고분고분 말을 들었으면 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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