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미트볼 파스타와 토마토 샐러드 (4/23)

3. 미트볼 파스타와 토마토 샐러드

합격 발표가 나올 때까지 일주일.

나는 예전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체력 단련하고, 아카데미 교과목을 예습했으며 저녁식사 후 창과 검을 수련했다.

제국에서 머물 곳이 없다는 마왕 놈의 사정을 듣고 그대로 내 저택에서 숙식하라고 했다. 마족이 아니라 사람도 먹고 자는 최소한 요건을 빼앗기면 삭막해진다.

삭막해진 저 새끼가 갑자기 마왕으로 각성해서 다 죽이고 다닐까 봐 그렇다. 굶거나 노숙할 생각이었다던 놈의 말에 안쓰러워져서 그런 건 아니고.

마왕 하나 더 추가되었다고 해서 내 일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혼자 하던 수련을 마왕 놈과 함께하게 된 것뿐이다. 내가 연무장을 달릴 때 놈도 달렸고, 교과목 예습은 데이벨을 포함해 셋이 문답을 하고 의견을 나누는 토론 형태가 되었다.

마왕 놈은 신의 경지에 오른 검술을 거리낌 없이 펼쳐 보였고, 저택에 상주해 있던 기사들은 본능적인 터부를 이기고 놈에게 전투적으로 대련을 신청했다.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온 마왕 새끼는 아직 마왕이 아닌데도 숙련된 기사인 톰이 경악할 정도로 강했다. 나는 안다. 놈은 톰과 대련할 때 몰래 제 몸에 디버프를 걸었다.

그래도 톰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일 정도면 순전히 검술만으로 얼마나 대단한 거냐. 심지어 저 새끼는 물공 캐가 아니라 물마공 올라운더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나는 마왕 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대련을 요구하고 또 요구했다. 일주일. 아니, 아카데미에 가서 몇 년 동안 놈과 대련하다 보면 실력이 더 늘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었다.

물론 내 실력은 늘었다. 저 미친 먼치킨 마왕 새끼 실력이 눈부시게 일취월장해서 그렇지.

“펠런 님의 재능은 엄청나군요. 일전에 혼 가문의 기사와 대련한 적이 있었는데, 그자보다 펠런 님의 검을 쳐내기 어렵습니다. 이것조차 완성되지 않은 검이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저 자식이 『굴러라 용사님』 최종 보슨데. 놈은 왕국에서 제대로 된 검술 사범을 만나지 못했고, 다른 형제들의 파벌싸움에 밀려 수업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놈이 체계적인 훈련을 받자 그 성장이 눈부셨다. 톰은 마왕 놈의 검술이 제국의 검인 ‘혼’ 가문의 검술과 비견될 만하다 격찬했다.

“그 마법사라는 양반하고도 이런 수련 안 했어?”

“…그는 왕국에 오래 상주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가 신생아 시절부터 검을 쥘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보호했을 뿐, 그 이후 이방인의 대처는 내 몫이었다.”

“…언제 검을 쥐었는데.”

“4세.”

미쳤군. 네 살 꼬마에게 검을 쥐게 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발표날 정오에 약속한 대로 영감님이 블리스에서 친히 올라오셨다. 양손 가득 블리스의 특산품이 한 짐이다. 자연산 버섯이며 고기며 먹을게 반이고 나머지 반은 제후국 내에서 출판된 책들이다.

내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한 영감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껄껄 웃으신다. 15세 꼬마에서 20세 청년으로 제법 많이 성장했지만, 영감님 눈에 나는 아직 불쌍하고 어린 손주인 모양이다.

놈이 이곳에 머물기로 한 후, 아카데미에 놈의 거처를 우리 저택으로 수정해 뒀다. 덕분에 마왕 놈과 내 합격 여부를 아카데미 측에서 저택 앞으로 보내왔다.

앞으로 짧게는 3년, 길게 잡으면 5년간 숙지해야 할 교칙과 일정. 거주할 기숙사 이름과 호실 등이 적혀 상당히 두껍다. 둔기로 써도 되겠네, 이거.

그리고 마왕 새끼와 나는 같은 기숙사 방을 쓰게 생겼다.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며 마왕 놈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합격 통지를 받을 주소가 같으니 당연히 너와 나를 친우라고 생각했겠지. 너는 블리스의 후계자고 나는 명색이 왕족이다. 편의를 봐주려 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굳이 너랑 나를 붙여…….”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뭐 상관없다. 내 사정이나 성격 다 아는 놈과 지내면 편하기야 하겠지. 수련도 쉬울 테고. 아예 면식 없는 상대와 지내는 것보다. 언제 내 목숨 노릴지 모르는 자칭 친구 놈과 지내는 게 더 위 아프고 즐겁지.

“하긴. 검술 대련하자고 날마다 네 기숙사 방 쳐들어갈 수고는 덜었네.”

일주일간 다섯 번 대결을 걸어 다섯 번 졌다. 스스로 몸에 디버프를 중첩으로 걸면 손속에 사정 두지 않아도 좋다는 걸 깨달은 마왕 새끼의 검은 날이 갈수록 묵직해졌고 날카로워졌으며 좆같이 빨라졌다.

내가 악착같이 앞으로 나아갈 때 놈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빌어먹을 천재들. 망할 천재들.

“시험이 끝나고도 여전히 정진하는 것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입학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 그렇지. 그래야 블리스의 후계자지. 너희가 대련하는 걸 보니 나도 오랜만에 검을 들고 싶어지는구나. 누가 내 상대를 해주겠나?”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할아버님.”

“허허, 이거 긴장해야겠는걸?”

퍽이나 긴장하셨겠다. 주름진 수염 사이 신이 난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으시면서. 놈과 내가 대련하는 걸 본 영감님이 오랜만에 피가 끓는 모양인지 직접 검을 들었다.

가장 먼저 나와 한 판. 일주일 동안 마왕 꿈나무에게 시달린 덕인지 영감님 검 궤적이 보여 처참하게 지진 않았다. 헛구역질하며 바닥에 나뒹굴긴 했지만…….

날이 상한 검을 내려놓고 다른 검을 드는 영감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젠장. 빌어먹을. 나는 분해 죽겠는데 우리 영감님은 흡족한 듯 빠르게 칭찬을 해치우고 마왕 놈과 대련을 시작했다.

“많이 늘었구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어. 그래. 좋은 친구를 사귄 모양이야. 어디, 너도 검을 한 번 들어보거라.”

손주 친구랑 예의상 놀아주는 것치고 영감님의 기세가 제법 강했다. 서로 간 보는 기색도 없이 검과 검이 격돌한다.

우리 영감님, 마왕 놈의 실력을 보는 게 대련의 목적이었구나. 그리고 몇 합 지나지 않아 영감님과 빌어먹을 마왕 새끼가 얼마나 나를 봐주며 대련을 해준 건지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다니엘 블리스의 무기는 검이 아니라 창이다. 그렇다고 그의 검술이 하수라는 말은 아니다. 검은 만병의 기본이기에 나 역시 창과 검을 함께 배우고 있다. 다니엘 블리스는 압도적인 제국의 창인 동시에 매우 강한 검사이기도 한 것이다.

찰나에 검과 검이 부딪히고 흘려 넘긴 후 내찌르고, 다시 상대를 거칠게 벤다.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수 합이 지나간다. 소나기처럼 빠른 검격이 급격히 느려지더니 기합과 함께 내디딘 발이 축이 되어 유성 같은 검과 검이 부딪친다.

쩌엉―!

내가 서 있는 연병장 구석까지 검풍이 솟구쳤다. 나는 이를 으드득 물고 눈이 시뻘게지도록 집중해 대련을 본다.

나라면 물결처럼 구불거리며 옆구리로 파고드는 검을 쳐내고 반격하겠지. 그러나 영감님의 한 수는 눈속임이다. 진짜는 검을 막기 무섭게 위에서 반원을 그리며 내려 긋는 검.

내 속도로 저건 막을 수 없다. 차라리 어깨를 내주며 안으로 파고들면……. 아니다. 상상 속의 내가 막지 못할 뿐 영감님은 여유 있게 막았다.

연병장이 땀과 먼지로 진탕이 되고 나서야 두 사람은 검을 내려놓는다. 땀에 흠뻑 젖고도 개운해 보이는 영감님과 호승심에 얼굴을 굳힌 마왕을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당연히 이 감정이 뭔지 안다. 질투심. 자격지심. 들끓는 호승심.

빌어먹을.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도 검을 휘두르고 싶다. 대등하게 맞서고 싶다. 놈이 봐준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다. 나는 아직 저들에 비해 한참 멀었다. 멀었고말고.

씻는 내내 놈은 골똘히 뭔가를 생각했다. 나 역시 놈과 영감님의 대결에서 본 검을 생각하느라 놈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영감님과 마왕 그리고 내가 함께한 첫 저녁식사는 검을 나누는 동안 깨닫거나 의문이 생긴 점을 묻고 대답하느라 단숨에 지나갔다. 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보다 압도적인 고수인 두 사람에게 질문하고 다시 질문했다.

위장이 아니라 심장이 허기진 듯 탐욕스럽게 영감님과 마왕 놈이 설명하는 묘리를 집어삼켰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은 제국의 창이고, 다른 놈은 세계관 최종 보스다. 고작 몇 년 배운 거로 두 사람 발끝이라도 닿길 원한다면 그거야말로 도둑놈 심보라고, 그렇다고 이해하며 넘어가기엔 내 자존심이 용납을 못 한다.

내 질문이 얼마나 처참하고 유치한 수준인 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얼핏 깨닫지만, 체면과 염치 따위 알 까보냐. 빌어먹을.

식사 후 영감님과 독대를 했다. 불을 밝힌 집무실은 낮과 다른 느낌을 줬다. 영감님은 검은 소파에 앉아서 맞은편에 앉은 나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 눈에 담긴 애정이 조금 부담스러워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기 올 때만 하더라도 작달막하고 비쩍 말랐던 아이가 벌써 이만큼 자랐구나.”

“할아버님께서 많은 지도 편달 해주신 덕분입니다.”

“그게 어디 내 재량이었겠느냐.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고, 또 그만큼 잘하는지 다 듣고 있단다.”

“잘 가르쳐주시고 잘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웃는 영감님 눈가가 약간 붉다. 하긴, 영감님도 안쓰러운 사람이다. 자식 둘 먼저 보내고 하나뿐인 손자를 10여 년 만에 찾았으니. 더군다나 영감님은 모르지만 나는 진짜 자허 블리스가 아니다. 음, 양심이 욱신욱신하다.

“사실 너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아카데미 입학 후, 서둘러 혼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단다.”

“결혼…입니까?”

“지금은 내가 블리스의 제후로서 너를 지지하고 있지만, 나는 너무 늙었어.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지. 네가 지지기반을 다지려면 되도록 빨리 네 뒤를 받쳐줄 수 있는 가문과 맺어지게 하는 편이 좋지.”

“…….”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만약 이대로 세상이 망하지 않으면 나는 아카데미 졸업한 후에 정말 자허 블리스로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차기 제후로서, 귀족 가문 여식과 혼인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수백만의 제후민들의 어버이로서 평생을…….

숨이 턱 막혔다.

창백하게 굳은 내 얼굴을 어떻게 읽은 건지 영감님이 씁쓸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지금은 그럴 생각 없으니. 너는 가서 학업에 열중하며 너 자신을 갈고닦는 그것만 신경 쓰면 된다. 네가 졸업하고 블리스에 오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꾸나.”

“그래도 되는 겁니까?”

“지금은 라울이 나를 돕고 있단다. 딸아이가 선택할 만큼 유능한 인재지. 내가 만약 불시에 떠난다고 하더라도 네가 준비될 때까지 라울이 섭정을 맡을 거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수무강하셔야 합니다.”

“나는 네가 정말 기특하단다. 그리고 안타까워하고 있단다. 말칸과 너를 달리 봐야 했어. 발품을 팔아서라도 좀 더 빠르게 너를 찾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도 충분히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영감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었다. 영감님이 뭘 시도하는지 알고 있다. 정을 붙이고 싶겠지. 하나 남은 피붙이니 좀 더 살갑게 굴고 싶겠지.

사제의 치료는 만능이 아니다. 외상은 기적에 가까운 치유력을 보여주지만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한다. 노쇠와 쇠약은 되돌릴 수 없고, 유행병 등에는 속수무책이다. 항생제도 없는 이 세상은 참 기적처럼 평균 수명이 현대와 비슷했다.

나이가 제법 있는 영감님은 뒤에 홀로 남을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안다. 알긴, 아는데. 영감님의 걱정은 애초에 내 몫이 아니다.

괜히 마음이 답답해져 고개를 돌렸다. 난 고작 내 앞가림 하는 것도 벅찬 소인배다. 내 영역 안에 들어온 이들도 밀어내는 판에, 내가 누구의 어버이가 될 수 있단 말이냐.

내 불안을 읽은 듯 되레 영감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내일은 준비할 것이 많겠지. 가서 쉬도록 해라.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닥치면 다 하게 되는 법이지.”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영감님에게 인사한 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속이 욱신거려 명치를 틀어쥔다. 밥 먹었던 것이 얹힌 느낌이라 영 기분이 좋지 않다. 한바탕 게우고 나서도 속이 지끈거려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은 입학 준비를 하기로 했다.

로열 아카데미는 성적이 좋은 근로 장학생의 전공 서적이나 그 외 필요한 물품을 모두 지원해 준다. 그래 봤자 보급품 수준이기 때문에 집사 노아와 함께 꼬박 하루 시간을 들여 물품을 사들였다.

영감님은 먼치킨 마왕 녀석의 물품도 함께 구매해 줬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학기 내내 시간이 나는 대로 나와 검술 대련을 할 것. 더하기, 방학 때마다 저택에서 숙식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영감님 속셈은 놈과의 대련이다.

“젠장. 질투 나네. 질투 나. 배 아파서 살겠나.”

“다시 말하지만 내가 검을 잡은 건 4세부터다.”

“머리로 아는 거랑 가슴으로 이해하는 거랑 전혀 다른 거거든.”

“너도 곧 네가 원하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거다.”

“내가 원하는 경지는 너랑 생사결 해도 이기는 건데?”

“…….”

“안쓰럽다는 듯 안 봐도 어렵다는 거 알거든? 젠장. 존나 열심히 수련할 거야. 어마무지 세져서 다 죽여버릴 거야.”

내가 새로운 장래 희망, ‘제2의 마왕’을 꿈꾸는 동안 구매한 물품들이 하나둘씩 저택에 도착했다. 인문학 수업을 듣는 동안 입을 가벼운 옷들. 체력 단련과 검술 수업을 위한 얇은 가죽 갑옷. 면도기를 포함한 생필품과 종종 읽을 책들. 신발과 하다못해 이부자리까지 챙겼다.

자취방 이사 가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 짐만 해도 짐 마차 한 대 분량이다.

영감님은 팔불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입학할 날이 다가오자 슬그머니 굳이 근로 장학생으로 들어가야 하느냐며, 지금이라도 기부금을 낼 테니 시종을 데리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어본다.

기부금 입학은 무능력의 상징이라, 블리스의 후계자가 굳이 그런 오명을 쓰며 입학하고 싶지 않다고 단박에 잘랐다. 뒤에서 오갈 가십을 감내하고 사교계 데뷔를 미루고 미룬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사교계에 관심 없는 건 나와 다를 바 없는 영감님이 이해해 줬다.

“제 입지가 공고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블리스의 이름에 흠결 하나 더하고 싶지 않습니다.”

“날 닮아서 그런 거니 뭐라 하지도 못하겠고. 그래도 말이다. 상주하는 시종이 아니면 괜찮지 않겠니?”

몇 번 양보와 사양을 했더니 영감님이 여간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상주하는 시종은 아니더라도 아카데미 내에서 하인을 고용해 청소와 세탁 등의 기본적인 생활은 도움을 받기로 했다.

우리 영감님 말씀이, 대신 그 시간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단련하라는 뜻이란다.

* * *

로열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 3동과 여자 기숙사 3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3동은 또 하늘관 바람관 별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늘관과 바람관은 로컬 아카데미 출신이나 기부금 입학자가 사용하는 관이다.

별관은 입학시험을 치른 녀석들이 쓰는 곳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별관이 제일 시설이 좋지 않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함께 온 하인들이 짐을 기숙사 방까지 옮겨줬다. 학기를 시작하려고 온 상급생과 신입생들로 복도가 북적북적하다.

그래도 로열의 이름은 어디 가지 않는지, 아니면 우리가 쓰는 방이 별관에서도 좋은 방에 속하는 건지 시설은 매우 좋았다.

가운데 거실을 포함해 각자 방이 하나씩.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우측에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 겸 화장실이 있고, 거실 한쪽에는 마법 화덕이 설치된 작은 부엌도 있어 가벼운 음식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완전 괜찮은데?”

“하늘관과 바람관은 거실을 포함해 방이 여섯 개다.”

“아니, 뭐 그렇게 많아.”

“작은 방은 귀족들이 데리고 온 시종의 방으로 사용되니까.”

아, 그렇겠군. ‘그럼 남은 방은 뭐야?’ 하고 묻자 마왕 놈이 짤막하게 드레스룸이라고 말한다. 방 하나를 채울 정도로 많은 옷을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나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짐을 정리했다.

건기를 지나, 조금 서늘한 날씨지만 니트 하나 껴입으면 추위를 모를 정도의 기온이다. 한참 열심히 책과 옷, 세면용품 등을 정리하고 나니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일하느라 대충 묶어둔 머리카락이 자꾸 목이며 등에 달라붙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일찌감치 마법으로 정리를 마친 마왕 놈이 책 수납을 도와줬다. 젠장. 마법 부럽다. 침대 위에 새 시트와 베개를 깔며 투덜거린다. 이왕 빙의할 것 마법 재능 넘치는 놈에게 빙의하면 좀 좋아.

“좋아. 다 했어. 연무장 가보자.”

“도서관이 아니라?”

“도서관 개장 시간이 지났거든.”

뒷정리를 마치고 청소까지 끝내자 저녁 시간이다. 가볍게 씻고 영감님에게 선물 받은 검을 쥐었더니 마왕 놈이 고개를 저었다.

“연무장 이용 시간도 이미 끝났다.”

“빌어먹을, 제기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검술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건 마왕 놈이다. 그리고 나는 고작해야 30위권 안에 들었다. 그나마 인문학 시험은 제법 등수가 높았고 창술만큼은 아카데미 안에서도 날 가르칠 수 있는 이가 없다. 그래도 종합 점수는 놈이 더 높은 게 확실하다.

식당의 수준은 나쁘지 않았다. 기본식으로 돈을 내지 않고도 빵과 스튜, 그리고 치즈와 생햄 등을 먹을 수 있었다. 빵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했으며 스튜는 제법 맛이 좋았다. 적당히 따듯한 잠자리를 포함해 당분간 지내는 게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지루하기 쉬운 입학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발의 후덕한 인상의 학장은 간결하게 말하는 미덕이 뭔지 아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평안하고 고요하리라 믿었던 내 아카데미 생활에서 재난은 첫 수업 시간부터 찾아왔다.

제국 역사학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우리 강의실로 상급생 몇 명이 찾아왔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 중 친척이나 동생이 있어서 얼굴이라도 보러 온 건가 했더니, 곧장 내 자리로 와 나와 내 옆에 앉은 마왕 놈을 번갈아 바라본다. 뭐야. 목표가 나였어?

“자네가 자허 블리스인가?”

영감님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말투로 점잔을 빼듯 느릿하게 입을 여는 게 웃길 만도 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상급생이 다가오기 무섭게 마왕 꿈나무 놈이 독 오른 뱀처럼 어두침침한 기세를 드러내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가오던 상급생이 마왕의 기세에 흠칫 놀라 서둘러 놈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저렇게 무서워할 거라면 왜 온 거야?

상급생의 이목구비와 머리카락 색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흑적색 머리카락을 가진 선배에게 고풍스럽게 인사한다.

“제국의 창, 블리스의 혈족임을 묻는다면 그렇소, 선배. 내가 자허 블리스요.”

“미래가 유망한 후배를 만나게 되어 기쁘군. 본인 제뉴어리 엑사 드로젠. 드로젠 왕국의 왕족일세.”

나는 저 자식을 안다. 소설 중반 부분 마왕의 과거 회상 장면에서 나온 드로젠 왕국의 멸망 파트에서 제뉴어리의 사망 묘사가 제법 처참하고 무시무시했으니까.

그렇구나. 네가 그 갈가리 찢어진 제뉴어리구나. 외전에서 마왕에게 좆같이 굴며 유년기부터 온갖 패악 다 부리다가 뒈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놈을 바라보자, 놈이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한다.

“우리 왕국의 일원이 자네의 저택에서 실례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어 사과의 말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네.”

돌려서 엿 먹이는 게 왕족답다. 마왕 놈이 우리 저택에 머무는 걸 비꼬는 것 좀 보라지. 나는 구겨질 것 같은 미간에 힘을 주고 웃는 낯을 풀지 않고 조곤조곤 물었다.

“아아, 성함을 들으니 알겠습니다. 제 친우인 펠런의 형님이시군요.”

“…엄밀히 말하면 형님이 아니라.”

“제가 저택 안에서 펠런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대단히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검술에도 조예가 깊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펠런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자네가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정말이지, 펠런에게 형님이시라면 제게도 형님과 같은 분이죠. 아니, 아예 가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펠런은 매우 뛰어나지만 노력할 줄 알고, 성실한 와중에 겸허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그런 의견이…….”

“물론 들으셨겠죠. 펠런이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것을. 물론 펠런의 형님이신 제뉴어리 형님께서도 매우 뛰어난 성적을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하하, 제가 당연한 말을 했군요. 물론 수석이시겠죠.”

“…이런 벌써 수업 시간이 다 된 모양이군. 난 이만 가보겠네! 나중에 좀 더 이야기하도록 하지.”

내가 제뉴어리 새끼를 엿 먹이는 모습이 기가 막힌 모양인지 등 뒤에서 마왕 놈의 기세가 점점 약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제뉴어린지 뭔지 쓰레기를 만나 심기 불편할 마왕과 눈 마주칠 자신은 없어서 허둥지둥 달아나는 제뉴어리 놈의 뒤통수를 노려본다.

상급생이면 나잇살깨나 처먹은 성인일 텐데 이간질하려고 온 꼬락서니가 철없다. 제대로 덤빌 자신도 없는 소인배 새끼. 다신 오지 마라, 이 새끼야. 보는 눈만 없으면 주먹을 먹였을 텐데.

수업 시간이 된 게 빈말은 아닌 모양인지, 제뉴어리 놈이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가 들어와 짧게 자기소개한 후 곧장 수업을 시작했다.

같은 학년이라고 모두 같은 수업을 듣는 건 아니다. 아카데미의 시스템은 대학과 비슷하다. 다른 게 있다면 학부가 나누어져 있지 않고, 강의 시간과 교수를 선택해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교수가 더 잘 가르치는지 그런 걸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다. 필수 교과목으로 지정된 강의는 무조건 듣기로 하고, 그 외 교양은 예법과 이종족 기본 언어 말고 들을 만한 게 없었다.

이종족 기본 언어학을 포함해 강의 계획서를 오로지 검술과 체력 단련, 개인 수련으로 채워 넣었다.

기본적인 창술은 톰으로 족하고, 블리스의 창술은 영감님에게 직접 사사했다. 오만한 말이 아니라 수습 창기사인 내가 보기에도 아카데미의 창술 강의 커리큘럼은 내게 한참 미진하다.

근로 장학생이니 교수의 일을 도와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근무지를 선택할 수 있어서 고민도 없이 체력 단련 교수의 일을 돕겠다고 했다. 강의 30분 전 먼저 도착해서 강의에 필요한 모래주머니나 철근 등을 옮기고, 강의가 끝나면 물품을 정리하는 정도다.

약속대로 주말마다 마왕 놈과 저택으로 돌아갔다. 잘 먹고 잘 쉬고, 주중에 있었던 일을 집사 노아나 제리에게 말한다. 영감님이 보낸 편지를 읽거나 답장을 써둔다.

영감님은 최근 들어 제후국 변방에 출몰하는 마물을 토벌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시다고 했다. 그런 대화가 오간 후라 유예기간이 생긴 것 같아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은 주제에 조금 안심했다.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 톰을 비롯한 여러 기사와 대련하고, 또 다른 기술을 배우거나 부족한 부분을 연마했다.

무조건 여섯 시간 이상 잔다. 푹 자지 못하면 찢어진 근육을 회복할 수 없고 피로가 쌓여 다음 날 수련에 지장이 있다. 밥도 잘 먹고, 틈틈이 휴식을 취하며 전공 서적을 읽었다.

입학 전, 공들여 짠 내 강의 계획서를 그대로 마왕 놈이 베꼈다. 하긴 왕족이나 귀족이나 들어야 할 과목은 한정되어 있으니 수업이 같을 만도 하다. 옆에서 놈을 감시하기도 좋을 것 같아 묵인해 줬더니…….

이런 제기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마왕 놈하고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큰일이다. 이러다 네가 마왕으로 각성하면 나도 좆되게 생겼어.”

“소설과 전개가 같다면 마족 각성까지 앞으로 5년 이상 남았다.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라.”

“마왕이 되지 않겠다는 선택은 없냐?”

“그건 내 마음대로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야 그렇지만. 기합이나 근성으로 극복해 봐.”

내 개소리를 잘도 받아주며 마왕 놈이 옅게 웃는다. 저 자식도 요 몇 주 사이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 많아졌다. 어찌 보면 독기가 빠지는 거니 나쁠 건 없다. 웃는 얼굴이 무표정보다 덜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대련 시간에는 가차 없다. 입학하고 아카데미 내에서 가장 많이 사제의 치료를 받은 신입생이 나라더라.

거의 날마다 출퇴근하는 게 민망해서 근육이 찢어지거나 멍이 드는 가벼운 상처는 근성으로 극복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마왕 놈과 대련하고 나면 항상 뼈가 부러지거나 혹은 살이 찢어진다.

가장 심하게 다친 건,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점이 다 터져서 힘줄 하나에 달랑달랑 매달린 두 팔을 봤을 때지.

출혈이 심해 눈앞이 시커멓게 변해서 잠깐 의식을 잃었는데 눈떠 보니 치료실이었다. 그래도 그날은 놈의 몸에 창이 닿았다. 크나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대단하다. 자허 블리스.

오후 체력 단련 강의가 끝나고 간단하게 식당에서 요기를 때웠다.

십여 명이 뛰고 구른 운동장을 정리하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덕분에 식당 안은 한산했다. 남은 메뉴 중에 미트볼 파스타와 토마토 샐러드를 수북하게 담아 남김없이 해치우고 몸을 일으켰더니, 역시나 오늘도 멀리서 간을 보고 있던 선배 한 무리가 다가온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블리스의 자허. 나는 글로리의 테넨이라고 합니다.”

“자허 블리스입니다. 저 역시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테넨 글로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업무용 환한 미소를 짓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까지 소국의 왕족, 귀족, 제국의 귀족, 거상, 기타 등등 다 나를 보러 왔지만 나와 같은 제후국의 후계자 후보가 온 건 처음이다.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 떡 벌어진 어깨는 방패의 글로리답다. 레이드 가서 탱 잘하게 생겼네. 보고 있으니 게임하고 싶다.

불현듯 치민 옛 시절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최고인 게 초면에 이렇게 웃어주면 이후 대화가 백이면 백 내게 유리한 쪽으로 진행된다.

역시나 테넨도 선 굵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나를 찾아온 동급생과 상급생들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내가 자신들의 파벌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거나, 그게 아니면 자허 블리스와 연줄을 목적으로 친분을 바라거나.

“현재 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인 제후국의 직계 혈족은 후배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입니다.”

제국의 황족들은 이미 장성해 어린 자식이 있을 나이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연배인 황족도 로컬에 다니고 있을 세대라, 로열에서 가장 높은 가문이 공교롭게 제국을 수호하는 여섯 가문이 되어버렸다.

방계를 제외한 직계 혈족은 창의 블리스는 나 하나, 방패의 글로리는 테넨 한 명. 지팡이의 라이트와 검의 혼은 자녀들이 나이가 어려 아직 로컬에 다니는 중이고 활의 원더는 상급생 중 남녀 쌍둥이가 재학 중이라고 했다. 마지막 한 명은 독의 미스트라고 했다.

“그도 당신과 같은 신입생입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지만요. 신청한 필수 강의는 같아도 시간이 겹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상급생이지만 테넨은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상하 관계를 따지기보다 존대가 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덩치에 맞지 않게 느리지만 조곤조곤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화술을 배웠겠구나 싶다.

“제후국의 혈족은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합니다. 제국을 수호할 명예와 의무를 진 자들의 교류라고 할 수 있지요.”

테넨은 내가 교류회에 참석하기를 원했다. 나는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지만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모임에 나중에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제가 블리스의 이름을 걸기에 부족합니다.”

“그동안 보아온 학업에 대한 열의는 이해합니다. 당신의 수련 시간을 빼앗지 않을 겁니다. 우선 합류한 후, 교류는 추후에 해도 좋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은 저의 사정을 봐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정진해 모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창에 대한 열의는 이미 우리 모두의 귀감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할 명분이 없다. 잠시 고민했지만, 순순히 합류하겠다고 대답했다.

이건 영감님도 입학 전에 여섯 가문 사이의 교류는 하는 편이 좋다고 언질을 준 적 있다. 내 고모 되는 에서스 블리스도, 아버지 말칸 블리스도, 그리고 멀리 보자면 영감님도 젊은 날 교류했었다고 하니 내 대에서 거절하기도 마땅찮은 것이다.

이름만 달아두는 거라면 합류해도 좋을 거다. 상대도 그걸 파악하고 그 부분만 찌르고 갔다. 힘없이 허허 웃고 있으니 마왕 놈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네 시종이 한 말이 아주 많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너는 교류에 서투르군.”

“…나 말고 친구 없는 네놈은 조용히 하세요.”

“너도 나 말고 친구 없잖나.”

자식이 뼈에 사무치는 말을 한다. 얄미워서 놈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 식당을 나왔다.

“귀족들과 대화 하다가 뒷골목 말투 나오면 천박하니 어쩌느니 소리 들을 거 아냐.”

“그런 말을 듣는다고 네가 굴할 것 같진 않다만.”

“나 말고. 우리 영감님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지.”

나는 영감님이 필요하다. 나를 온전히 도구 다루듯 했다면 나도 효율 따져가며 영감님을 대했을 텐데, 영감님은 나를 진짜 손주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만큼 내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다. 상황이 그러니 나도 최선을 다해 손주 노릇을 해야 했다.

“…정말이야. 폭주하지 마라. 영감님 성격에 너 마왕 되면 봐줄 거 같냐? 손주 친구의 어긋남은 자신 탓이라고 하시며 동귀어진하겠다고 덤비지.”

“그건 좀. 보고 싶지 않군.”

“그래 인마. 은혜를 받았으면 보은할 줄 알아야지.”

저녁이 대충 소화되고 마왕 놈과 연병장으로 향했다. 대련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과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으면 무조건 놈에게 덤비고 또 덤빈다.

대련 전, 마왕 놈이 스스로 디버프를 건다. 그게 아니면 나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래 봤자 항상 결과는 항상 내 패배지만…….

날이 뭉툭한 수련용 창을 양손으로 단단히 쥔다. 그래도 창을 들고 덤비면 마왕 놈에게 반격까지 가능하다. 사실 놈이 봐주고 있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하찮은 자존심이 목숨줄을 연명해 주지 않는다. 디딤발에 체중을 싣고 기합과 함께 창을 강하게 내찔렀다.

“죽어!”

“…속내 드러내지 말고.”

검면이 창날을 긁었다. 옆으로 흘려보낼 생각이었겠지만 창을 찌른 힘이 강해, 날이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드디어 유효타 먹이나! 이를 드러내고 내가 생각해도 참 비열하게 웃었다.

“근력이 상당히 늘었다.”

놈이 칭찬하며 건틀릿 쥔 주먹으로 가볍게 창날을 쳐냈다. 밖으로 빠진 창을 회수하기 무섭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간격을 벌린다.

창기사의 간격은 검사보다 넓고 길지만, 그만큼 너무 안으로 파고들면 반격이 어렵다. 다시 숨을 내뱉고 허리를 축 삼아 반원을 그리듯 놈을 벤다. 창날 끝에 가죽 갑옷이 긁히는 감각이 잡혔다.

오늘도 놈에게 유효타를 먹이지 못했다. 내가 죽어라 달려봤자 저쪽은 훨훨 날아간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놈과 나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포기할 이유는 될 수 없다.

목 안이 칼칼하다. 오늘은 크게 부러진 곳이 없어 신전의 신세는 지지 않을 것 같다. 코와 입 안에 모래 먼지가 꽉 찬 느낌이 달갑지 않지만, 놈의 말대로 실력이 향상한 것 같아서 즐겁다.

흥분으로 뒤통수까지 홧홧하게 열이 올라, 수통의 물로 입을 헹구고 잘게 나눠 마셨다. 이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숨을 고르고 곧장 연병장 땅을 정리한다.

아카데미 병장기 관리인에게 연습용 창과 검을 반납하고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마법 등으로 대낮처럼 밝던 연병장에서 갑자기 어두컴컴한 길을 걸으려니 눈이 침침하다. 아니다. 그냥 졸린 거구나. 하긴 오늘 놈의 갑옷에 창끝이 닿았다고 무리해서 날뛰긴 했다.

“씻고 바로 뻗지 마. 뭉친 근육을 풀어줘야 내일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소파에 드러눕자 마왕 놈이 내 어깨를 두드린다. 같이 대련하고 같이 씻어도 저놈은 멀쩡하다.

“저는 이제 글렀습니다. 대장님. 저를 두고 가십시오.”

“…부하를 버리는 대장이 어디 있단 말이냐.”

마왕 놈이랑 이 정도 농담 따먹을 정도로 친해졌다. 놈 말대로 아카데미 들어와서 한 달이 지났는데 내 친구는 이놈뿐이니까. 놈이 흔드는 대로 축축 늘어져 흔들거렸더니, 놈이 나를 들어 어깨에 걸치고 내 방으로 직접 운송해 준다.

놈이 나를 깨지지 않는 택배물 다루듯 침대에 고이 던져준다. 읍. 억. 운송은 빠른데 서비스 품질은 좋지 못하군. 옆구리가 아파서 부들거리다가 꿈틀거리며 베개를 찾아 기어갔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리자, 마왕 놈이 목덜미부터 차근차근 몹시 매우 아프게 주물러줬다.

“커억.”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참아.”

“어어어억! 이, 이 자식. 이방인인 나를 이 틈에 제거하려고!”

“이런, 들켰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해봤자 국어책 읽는 것처럼 들린다 인마. 그래도 마왕 놈이 이만큼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어디냐. 원작에서 마왕의 대사라고 해봤자, ‘죽어라. 다 태워라. 없애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처리해라.’뿐이었던 것 같은데.

어깨뼈부터 등허리 뭉친 근육이 아프지만 시원하다. 나도 요즘 마왕 놈에게 마사지 배우는 중이다. 잘 배워서 방학 때 영감님께 해드릴 생각이지만.

“근데 넌 어디서 이런 걸 배우……. 으…흣.”

불현듯 든 의문을 물어보다가, 등허리를 지나 단단하게 뭉친 허벅지가 눌릴 때는 너무 아파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트를 꽉 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진다. 숨을 잠시 멈췄다가 가늘게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마왕 놈을 본다.

“아이고, 죽는 줄 알았네. 어디서 배웠어?”

“…다른, 부하에게.”

놈의 얼굴이 붉다. 전등을 등지고 있어 그림자가 졌지만 그래도 알 정도로 붉다. 잠시 우두커니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놈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다시 허벅지를 누른다.

“아, 그거. 아파. 살살……. 흐…읍. 으응…….”

오늘 마사지가 유달리 아프다. 허벅지가 제대로 뭉친 모양이다. 무리하지 말걸. 이래서야 몸이 풀려도 내일 대련할 정도로 몸이 회복하진 않을 거다. 근육이 다시 아물 시간은 필요하다.

그래도 말이지 너무 아프다. 눈물 콧물이 나서 코를 훌쩍거리며 다리를 접어 놈의 등을 뒤꿈치로 가볍게 두드렸다.

뻣뻣하게 굳었던 놈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돌린다. 호오, 그렇군요. 신음을 듣고 그런 반응을 보였군요. 내가 눈치가 좀 빠릅니다. 이를 드러내 씩 웃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이고, 시원하다. 자 어서 더 해봐라.”

“…….”

놈이 머뭇거리며 허벅지를 피해 정강이를 누른다. 너무 티 나게 신음을 내면 눈치 빠른 놈이 알아차릴 것 같아서 그냥 아픈 걸 안 참기로 했다.

“아, 거기도. 뭉쳤나 봐. 흐으응.”

“…….”

“읏. 기분 좋아…….”

“…….”

“거기, 응. 좀 더 세게.”

당황한 건지 놈이 누르는 힘을 조절 못 해서 몇 번은 진짜 아픈 신음이 터졌다. 으아악. 끄악. 마사지가 끝나고 나니 나는 노곤한데, 마왕 놈은 역경과 고난을 맞은 것처럼 초췌한 얼굴이다. 은은하게 상기된 얼굴이 웃겨서 낄낄거리다, 몸을 일으켜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 이제 네가 누워.”

받은 만큼 준다. 놈과 내가 친구가 되려면 이건 중요하다. 늘 하던 대로 내가 받은 만큼 놈에게도 해준다.

“오늘은 내가 안 될 것 같다.”

“아니 그냥 누워서 근육 푸는 건데 안 될 게 뭐가 있어. 누워 인마.”

놈이 미묘하게 주춤거리더니, 어정쩡하게 내 침대에 누웠다. 거, 근육이 아니라 하반신이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속으로 히죽거리며 놈의 옆에 누워 목덜미를 덮은 검고 긴 머리카락을 한 줌에 쥐어 베개 위로 치웠다.

목에서 등으로 이어진 근육이 촘촘하고 단단하다. 창백하게 흰 피부에 잡티도 없다. 달리고 구르다 보면 잔 상처 한둘쯤 생길 만도 한데 놈은 그런 것도 없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너 진짜 몸 좋다. 같이 단련하는데 왜 차이가 나지? 너 나 몰래 뭐 먹냐?”

“…식당 밥 말고 먹는 것 없다.”

“그럼 타고난 건가. 부럽네.”

불현듯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뛴다. 놈을 처음 볼 때도 이랬지. 그래도 의도치 않게 놈과 친해지면서 급하게 심장 뛰는 게 조금씩 줄긴 했다.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놈과 대련할 때. 놈이 무방비하게 옆에서 목욕할 때. 가끔 나보다 먼저 잠든 모습을 볼 때. 그리고 지금처럼 경추라는 급소를 내게 보일 때 나는 놈에게 흥분한다.

확실하다. 이건 살의다. 죽여도 되지 않을까. 차라리 지금 처리하는 게 후환 없이 좋지 않을까 하고 충동적으로 치미는.

한숨을 내쉬고 놈이 내가 해준 대로 목덜미부터 주물렀다. 어깨를 지나쳐 등허리를 누를 때마다 완벽한 놈의 몸에 감탄한다.

자세가 어정쩡해 침대 위로 아예 올라와 놈의 다리 사이 자리를 잡았다. 엉덩이 위쪽 단단한 근육을 누르자 놈이 나처럼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삼켰다.

놈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하반신이 뻐근하다.

머릿속이 하얗다. 얼핏,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 지나갔다. 그다음 떠오른 말은 자승자박과 사면초가. 정신을 차리고 엉덩이는 피해서 허벅지를 꾹 누르자, 놈의 몸이 잘게 움찔거렸다.

면바지를 입고 있어도 보이는 놈의 엉덩이 윤곽이 참 봉긋하다.

거칠게 고개를 젓고 다시 허벅지를 마사지한다. 누를 때마다 놈의 몸이 움찔움찔 튄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고개도 들지 못하고.

내 호흡이 흐트러진다. 영감님에게 배운 블리스의 호흡을, 어떻게 했더라. 아니, 우선 마사지해 줘야지.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를 엄지로 꾹 눌러주니, 기어이 놈이 신음한다.

“…큭.”

숨이 답답하다. 바지도 답답하다. 하반신이 뻐근하다. 이젠 이게 마사지인지 모르겠다. 엄지로 짓누른 엉덩이 밑 살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손바닥 전체로 놈의 엉덩이를 쥔다.

놈이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그 바람에 엉덩이를 놓쳤다. 놈의 얼굴이 붉다. 놈의 검은 눈에 비치는 내 얼굴도 붉다. 나는 소스라쳐 엉덩걸음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건, 내가 미안.”

장난도 정도껏 해야 했는데 근데 이게 장난인가? 뭔가 홀린 것처럼 왜 일이 이렇게 된 거냐. 귀 안쪽에서 맥박이 둔중하게 뛴다. 마왕 놈의 얼굴을 보기 민망해서 시선을 돌렸다.

몸을 일으킨 놈이 내게 다가왔다. 장소가 묘하고 상황이 묘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야 내가 장난을 쳤고, 놈의 엉덩이가 너무 탐스러웠고. 나는 미쳤고. 내가 잘못했네. 내가 욕망의 화신이네.

놈이 내 어깨를 붙든다. 강한 힘이 아니다. 오히려 감싸 쥐듯 안은 손에 나는 고개를 든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검은 눈. 그 안에서 열 오른 내 얼굴이 일렁거렸다. 놈의 다른 손이 내 뺨과 목을 감싸 쥔다. 손바닥이 워낙 크니 내 왼쪽 얼굴이 놈의 손에 다 담겼다.

놈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을 것 같다. 온몸이 녹을 듯 뜨겁다. 닿은 자리마다 열이 오른다. 어깨를 쥔 놈의 손이 미끄러져 내 허리를 감싸 쥔다.

놈의 입술이 닿기 전, 나는 고개를 돌리며 한 손으로 놈의 가슴을 밀어냈다.

손에 닿은 놈의 가슴이 탄탄하다. 그보다 격렬하게 뛰는 심장의 움직임이 내 손에까지 느껴져 깜짝 놀랐다. 근육이 저렇게 두꺼운데 어떻게 맥이 느껴지지?

내가 자초한 일이고, 내가 개새끼니까. 놈의 폭주를 막는 것도 내 몫이다.

“내가, 잘못했는데. 아니, 잘못했어. 지나쳤어. 그렇지만 여기서 선은 넘으면 안 돼, 인마.”

“…왜?”

낮게 깔린 놈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존나 야하게 들렸다. 이 빌어먹을 몸은 그거 한마디 들었다고 속옷이 갑갑할 정도로 발기한다. 놈의 하반신도 나와 비슷한 사정인 걸 안다. 내가 경험 없는 것도 아니고. 알긴 아는데.

“좋아하는 사람하고 해야지. 친구랑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글러 먹었지만, 이대로 제대로 살다 보면 저 자식도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가정도 생길 거 아니냐. 그런 사람과 같이 행복해져야지. 지금 놈과 섹스해 버리면 내가 놈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다.

괜히 울적해진다. 지금만큼은 본능이 하반신에 붙어 있는 탓이다. 등허리를 쥔 놈의 손이 풀리지 않고 도리어 내 몸을 끌어당겼다. 뺨에서 목덜미 귓불을 어루만지는 굳은살 박인 손가락.

오싹오싹하게 닿은 자리가 기분 좋아서 나는 놈의 가슴을 더 강하게 민다. 나도 이럴 때 찬물 끼얹는 게 제일 괴로운 거 안다. 아니까.

“대신 손으로 하자. 손으로 해줄게. 원래 친구끼리 자위 정도는 괜찮아.”

침착하게 개소리를 짖어봤다.

“친구끼리… 자위라고?”

“키스는 안 되고. 섹스도 안 되고. 그런데 뭐. 손장난 정도까지는 넓게 봐서 괜찮을 것 같고. 아니, 너도 힘들잖냐.”

마왕인 건 둘째 치고, 나라는 친구 놈 만나서 이제 좀 마음 열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놈을 엉덩이 좀 봉긋하다고 탐하고 싶지 않다. 그야 물론 놈의 엉덩이 안에 넣으면 좋겠지. 신음을 듣는 것만으로 발기했는데 만지고 맛보면 더 좋겠지만.

가슴을 밀던 것을 풀고 놈의 바지 안에 손을 넣었다. 속옷을 밀어 올린 놈의 성기를 속옷째 쥔다. 손안에서 움틀거리는 제법 단단한 살덩어리를 손바닥 전체로 감싸 쥐고 얼룩이 생기기 시작하는 천 위를 엄지로 꾹 눌러준다.

“흐읏…….”

놈이 더운 숨을 내뱉었다. 자꾸 들썩거리는 놈의 허리에 나 역시 마른 침을 삼켰다. 원 그리듯 귀두 부근을 문질러주자, 천에 쓸려 불그스름한 성기가 비쳐 보일 정도로 젖는다.

슬슬 괴롭겠구나. 속옷을 마저 벗기자 거무스름한 수풀 사이 배까지 휘어진 성기가 튀어나왔다. 크기 좀 보라지.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와. 장난 아니네.”

여기서 로션은 가격이 좀 나가는 기호품이라 난 쓰지 않는다. 이럴 때는 좀 아쉽긴 하다.

귀두에서 선액이 흐르긴 해도 손장난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저걸 방치하고 욕실에서 비누칠하고 오기도 그렇고. 고민하다가 흘깃 놈을 올려다보고 몸을 숙여 놈의 성기를 문다.

“…뭘 하는 거냐?!”

“움직이지 마. 깨문다?”

머리 위에서 놈이 놀라고 있음을 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좀 맛이 간 상태인 것 같긴 하다. 남의 성기를 입에 넣었는데 역한 느낌은 없다. 나도 흥분한 탓인가. 잠깐 생각하고 혀로 놈의 기둥을 휘감아 부드럽게 빤다.

입천장에 닿는 놈의 미끈한 귀두에서 시큼 비릿한 맛이 났다. 그래도 잘 씻어서 그런지 냄새는 안 나네. 코에 닿는 음모가 간지러워 입을 떼고 혀를 뾰족하게 세워 닿지 않은 고환 위쪽 기둥을 핥았다.

벌어진 허벅지가 내 혀가 닿을 때마다 꿈틀거린다. 놈과 눈을 마주칠 용기는 없어서 다시 성기를 머금으며 나도 내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고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목구멍 가까이 머금어도 영, 반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존나 큰 새끼. 속으로 투덜거리며 느릿하게 조금씩 더 삼킨다. 놈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뒤통수와 귓바퀴. 제 것을 머금어 부푼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진득하고 긴밀하다.

놈의 손에 나도 머릿속이 어찔하다. 욕심을 부려 더 깊이 삼켰다. 내 것을 쥐고 흔드는 손길이 다급해졌다. 놈의 성기에 대충 침만 발라 흔들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펠라를 해주는 게 되어버렸다. 인제 와서 빼기도 그래서 슬쩍 입을 떼고 놈을 바라본다.

“가기 전에 말에. 입에 싸지 말고.”

놈이 더운 숨을 삼키며 고개를 짧게 끄덕거린다. 다시 성기를 머금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러기 무섭게 놈의 두 손이 내 등허리를,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손이 닿는 자리마다 전기가 튀는 것처럼 짜릿한 쾌감이 몰아친다.

내 몸이 자리 잡은 게 아까와 자세가 달라 놈의 다리가 내 다리 사이 꼈다. 놈이 슬그머니 발을 들어 올려 제 발등으로 내 성기를 압박하듯 누른다. 손으로 하는 자위랑 다른 감질나는 쾌감.

“하, 미안. 네… 발 좀 빌릴게.”

“…큭!”

놈의 성기를 입에 물고 낮게 그르렁거리며 놈의 발등에 내 성기를 비볐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기분 좋아. 놈의 발등이 내 선액에 흥건히 젖는다.

놈의 발과 내 성기를 겹쳐 쥐고 발가락 사이에 기둥을 문지른다. 눈을 감으면 눈 안 어둠 속에서 흰 별이 튄다. 자윈데. 이렇게 강하게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만, 나올 것. 같다.”

놈의 목소리가 죽을만치 듣기 좋다. 야한 새끼. 그릉거리며 좀 더 깊이 삼킨다. 괜찮아. 나도 곧 갈 것 같다.

놈이 당황한 듯 내 머리를 민다. 빌어먹을. 빼지 마. 네 신음이나 더 들려줘. 헛구역질하면서도 목구멍 안까지 삼키자 곧 놈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잘게 경련하는 성기에서 정액이 쏟아져 들어온다.

“우……. 흡.”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정액을 삼킨다. 그와 동시에 놈의 발등에 사정한다. 쾌감이 너무 강해서 숨을 멈추고 몇 번이나 사정한다. 귀에 이명이 울려서 간신히 성기를 뱉자, 놈의 성기가 기어이 남은 정액을 내 입과 턱에 뿌렸다.

손을 뻗어 씻고 나오며 가져온 수건으로 내 얼굴부터 닦았다. 그다음은 놈의 발이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저 웃는다. 열이 들끓어 붉어진 놈의 눈가에 젖은 수건을 던져줬다. 놈의 성기는 아직 단단해 보인다. 정력도 대단한 새끼인 모양이다.

“…한 번이면 됐지. 나머지는 욕실 가서 빼 인마. 너 씻고 나도 좀 씻어야겠다.”

놈이 망설이다 몸을 일으켰다.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나는 대자로 침대에 누워 눈으로 놈을 배웅한다.

“씻고 그대로 네놈 방 가세요. 오늘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지우기 힘들면 ‘친구랑 자위함.’ 그 정도 일이라고 생각하고.”

“…….”

놈의 침묵은 무섭기도 하지. 할 말 많아 보이는 눈을 하고 놈이 잠시 나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한 발 빼고 나니 열 오른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나는 침착하게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빌어먹을 제기랄. 내일부터 저 새끼를 어떻게 보지?

* * *

로열 아카데미 안에서 펠런 엑사 드로젠의 위치는 애매한 편이다. 드로젠 왕국의 왕족이지만 후계자 순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철저하게 외면받는 서자이며, 그렇다고 얕잡아 보기에는 검술 실력이 조교를 능가할 정도로 강하다.

소국의 왕족이니 종자나 시종으로 영입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인 데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그는 블리스 제후국의 유일한 후계자인 자허 블리스의 하나뿐인 친구이기도 하다.

자허 블리스 역시 사람들 입에 만만찮게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다. 아카데미 입학 직전 모습을 드러낸 그는 펠런 엑사 드로젠 외 다른 누구와도 깊이 교류하지 않았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동정 어린 소문들. 뒷골목에서 혼자 살아남는 강한 소년. 펠런의 어정쩡한 위치와 달리 자허는 제후국의 후계자이자,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성적을 보여주고 있는 재원이다.

그에 반한 이들이 자허 블리스와 교류를 원했으나 그는 특유의 정중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왕족과 귀족 가릴 것 없이 거절했다.

다만 저 관계를 단순히 친구 사이라고 여기긴 어렵다는 게 할 일 없거나 파벌싸움에 몰입한 재학생들 사이의 논쟁거리였는데, 자허 블리스와 펠런 엑사 드로젠은 그들 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자허 블리스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서, 다른 명문가의 자제들을 다 사양하고 드로젠의 서자와 어울리는 걸까.’

‘펠런 엑사 드로젠이 검을 잘 써서? 고작 그것만일까.’

‘설마 블리스가가 드로젠의 왕권 다툼에 개입하려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애초에 펠런 드로젠은 왕위 계승권이 없어. 그보다 천박한 이유겠지. 예를 들어, 펠런 드로젠 아랫도리 검도 잘 놀리는 모양이라든지.’

‘하긴 그 미모로 뒷골목에서 자랐으니 무슨 일인 듯 없었을까. 뒤를 쑤셔줄 이가 고팠던 건가? 나도 아랫도리는 제법 놀리는 데 말이야.’

음습하고 천박한 협잡꾼들은 그 둘 사이 성적인 관계가 있을 거라 스캔들을 풀었지만, 그 스캔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둘은 공공연하게 붙어 다니며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연무장에서 거의 붙어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련을 엿본 이들은 서로 자는 사이라면 절대 그렇게 목숨 걸고 처맞고 두들기며 대련하지 않을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하여 재학생들은 한 달이 지날 즈음 현실을 깨달았다.

‘뭐야, 평범한 검귀였잖아.’

‘다른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저 두 놈은 무도에 미친 것뿐이다.’

로열 아카데미의 제법 긴 역사에서도 검에 미친 이들은 종종 등장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숙식과 휴식을 취할 뿐, 이후 오로지 검에 몰두해 살았다. 그러고 보니 블리스는 제국의 창 아니던가. 제후인 다니엘 블리스가 일찌감치 펠런 엑사 드로젠의 실력을 알아차리고 손주의 검술 사범으로 영입한 것이리라.

‘소문을 들어보니 자허 블리스는 그의 별장에서 외출도 포기하고 직접 다니엘 블리스 제후에게 창을 사사했다더라.’

‘살롱이나 무도회, 카페에도 나타난 적이 없어. 그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거겠지. 면벽 수련이 따로 없잖나. 역시 검귀군.’

‘펠런 드로젠을 사범으로 직접 집에 모시다니. 드로젠의 왕위 다툼은 검 앞에서 무가치하다는 거겠지. 하긴 무의 극한을 쫓는 이들에게 권력이나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펠런이 블리스가의 식객으로 주소가 등록된 것이 드러나자 펠런의 검술 사범설은 더 확고해졌다. 검귀는 건들지 않는 편이 좋다. 많은 세월 종종 등장한 검귀들의 특징은 한결같다. 그들에게 최우선은 검의 끝을 보는 것이다. 자허 블리스의 최우선은 창의 끝이겠지만.

“이것이 지금 당신과 펠런 엑사 드로젠에 대한 소문들입니다.”

“검귀 꿈나무…….”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렇구나. 내 꿈은 검귀였어. 아니지, 창을 다루니 창귀인가. 창귀는 어감이 이상하니 그냥 검귀라고 통칭하자.

가벼운 사담으로 시작했던 대화가 흥미진진해졌다. 내가 아카데미 안에서 그런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그렇다고 창에 미친 게 아니라고 변명할 수 없는 게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들이 없다.

민망해하는 내 표정에 테넨 글로리는 짧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할 말, 못할 말 거르지 말고 들리는 평가는 다 말해달라 했더니 테넨은 참 솔직하게 다 말해줬다. 빌어먹을. 그래도 마왕 거시기에 환장한 놈보다, 무의 극에 환장한 놈이 더 멋있어 보이는 걸 위안 삼자.

“그래서 우리 역시 당신을 혈족 모임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로 만족했던 거고요.”

“부끄러운 이름으로 모임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검귀는 멸칭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중과 존경의 의미지요. 제국은 기사의 땅이며 모든 기사는 제국의 방패이자 검입니다. ‘검과 방패는 제국을 위해’. 검의 극한을 보고자 하는 기사를 어떤 기사가 낮잡아 보겠습니까.”

“검과 방패는 제국을 위해.”

“블리스와 혼 그리고 글로리는 북부 산맥의 마물로부터 제국을 수호하는 창과 검이며 방패입니다. 당신의 강함이 곧 제국의 전력이 될 테니까요.”

어쩐지 요즘 들어 말 거는 이들이 없다 했다. 그렇구나. 말 걸면 대련이라도 걸 줄 알았나. 아니, 그것도 좋긴 하지. 많이 싸울수록 경험은 느는 거니.

이런 점을 검귀라고 하는 걸까. 나는 침착하게 미지근하게 식은 차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테넨 글로리가 선량하게 웃으며 물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사람이 참 순하고 맑게 생겼다. 하긴, 제국이 마왕에게 초토화될 때 마지막까지 버티며 제국민들을 위해 싸운 사람이기도 하다. 결국, 죽지만.

짧게 헛기침을 하고 나는 가지고 온 무투회 예선 참가 신청서를 두 장 내밀었다. 마왕 놈도 같이 작성한 신청서다.

로열 아카데미는 1년 동안 총 네 번의 이벤트를 진행한다. 1학기 초에 열리는 ‘무투회’. 학기 말에 진행되는 ‘무도회’. 2학기에 치러지는 동아리나 모임을 위한 단체전 ‘수확제’. 그리고 마지막은 ‘승급 시험’이다. 바로 다음 달에 무투회가 한 주간 진행될 거다.

“아직 1학년이니 1년 더 기다린 후 참가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리고 무투회의 참가 신청서는 테넨 글로리가 맡고 있다. 테넨은 작년도 무투회의 준우승자였기에 올해는 참여할 수 없는 데다 이미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다. 내가 지금 필요한 것도 그거다. 기사 작위.

“여러 강자를 만나 창을 맞댈 기회입니다. 여건이 된다면 당연히 참여해야죠.”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는 제국에서 직접 작위를 준다.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는 이 작위가 명예직에 가깝지만, 블리스는 제국의 창이니만큼 황제가 임명한 기사 작위가 실용성을 가졌다.

준우승하면 나는 더는 영감님의 견습 기사가 아니라, 제국의 기사로 서임 받게 된다. 영감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겠지.

“참가 신청은 받겠습니다. 그런데 펠런 군은…….”

“아침 훈련이 있어, 제가 왔습니다. 녀석도 참가할 겁니다.”

무투회 일정을 보고 신청서를 내밀었더니 놈도 나가겠다고 했다. 신청서를 대신 내주겠다고 하고 놈이 다 쓴 걸 낚아채 왔다. 그게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의 끝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놈을 피하는 것도 있고, 놈이 먼저 말을 걸어도 단답하고 도망친다. 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놈을 보기가 어색하고 민망하다. 악순환인 걸 아는데 어쩌냐.

친구끼리 손장난 정도는 괜찮다니. 이성을 되찾고 나니 그만한 개소리가 없다. 내가 미쳤지. 그냥 욕망의 화신이었지. 다시 떠올리니 열이 올라 마른세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잘 마셨습니다.”

“벌써 가십니까?”

“오후 검술 수련을 할 시간이 되어서…….”

테넨 글로리가 아……. 하고 말꼬리를 흐리더니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지 마라. 진짜 내가 검귀 같잖아. 그런 거 아니다. 근육 회복을 위해 어제 쉬었는데 오늘도 쉬면 근 손실 올까 봐 그래.

서로 덕담 몇 마디 하고 테넨의 기숙사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오가는 이들의 제법 귀티 어린 얼굴들이 하나같이 낯설다. 학기 시작하고 이제 한 달이나 지났는데 이러면 내게 문제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차피 놈이 마왕으로 각성하면 다 죽을 목숨이다. 정 줘봤자 쓸모없다. 천운으로 놈이 약속을 지켜 각성하더라도 살육을 피한다면 몰라도.

생각하지 말자. 수련을 덜 해서 그런 모양이다. 몸을 써야 잡생각을 안 하지.

고개를 가볍게 털자, 등까지 자란 한줄기로 묶은 청자색 머리카락이 같이 흔들린다. 짧게 자르고 싶은데 요즘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장발이 유행하는 중이라 짧아지면 나만 튈 것 같다. 빌어먹을 귀족 놈들.

강의 끝나자마자 기숙사 들러서 경갑으로 갈아입어 둬서 다행이다. 오래 입어 부드럽고 잘 맞는 가죽의 질감. 냄새마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연병장 안에서 마왕 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서먹해도 할 건 해야 한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내가 내 발목을 잡을 필요는 없잖은가.

“신청서 내고 왔어.”

“대신 내줘서 고맙다. 그리고…….”

“몸 좀 풀게. 세 바퀴 달리고 올 테니까 기다려.”

마왕 놈의 말을 자르고 연병장을 가장자리 따라 가볍게 달렸다. 처음 한 바퀴는 가벼운 경보로 돌며 사지와 큰 관절들을 움직여 이완한다. 두 번째 바퀴부터 근육을 예열하고 스트레칭을 마무리했다.

잡생각도 같이 풀리면 좋을 텐데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할수록 속이 썩는다. 대련이다. 대련해야겠다.

“디버프 걸지 마. 오늘은 그대로 가자.”

“조절이 안 될 수도 있다.”

“죽이지만 마. 숨만 붙여둬. 날마다 봐주며 싸우는 게 무슨 대련이야. 애들 장난이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늘은 창 대신 날 없는 대련용 롱소드다. 한 손과 양손으로 번갈아 쓸 수 있도록 손잡이가 긴 녀석인데, 손잡이만큼 가드도 길고 손잡이와 일체화된 폼멜이 제법 무겁다.

손바닥에 쩍 달라붙는 가죽 손잡이를 가볍게 고쳐 쥔다. 놈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를 본다. 나도 내가 이상하다는 거 알아 인마.

내가 저 자식을 덮친 게 내 뜻이었을까.

호흡 가다듬고 곧장 검을 내찔러 놈의 상단을 내려쳤다. 놈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고 검만 비틀어 도려내듯 롱소드를 쳐냈다.

시발. 저건 톰의 특기지만 톰에게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위력이 다르다. 놈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다른 손으로 폼멜을 쥐고 손잡이를 축 삼아 검을 회수하는 게 정석인데, 검 회수하다가 내 팔이 탈골되게 생겼다.

“흐압!”

그 사이 놈의 검이 내 명치를 노렸다. 급하게 회수한 검으로 놈의 검을 막자, 그 충격에 내 손바닥이 터져 가죽 손잡이가 끈끈하게 피에 젖었다. 굳은살 박여봤자 아무 소용없다. 먼치킨 앞에서는.

놈의 검이 얼마나 빠르고 강한지 영감님과 대련하는 모습을 봐서 알고 있다. 디버프를 걸지 않아도 놈은 제 실력도 내지 않는 중이다. 지금도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잖은가.

이런 놈과 비견해서 내가 검귀란다. 이런 실력으로 수치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통증도 잊을 만큼 온몸에 피가 빨리 돌아 나는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기합을 외치며 놈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두른다.

“빌어먹을!!”

“호흡 흐트러진다.”

“알아, 새끼야!”

대련은 10여 분 가까이 이어졌다.

처참하고 엉망진창인 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조악하다. 그동안 놈의 두 다리는 처음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나는 거대한 산을 앞에 두고 날뛰고 발악하고, 비루먹은 개처럼 바닥을 굴렀다. 대련 내내 오로지 검만 쓰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발로 차고 팔꿈치를 휘두르며 가끔 돌도 발로 찬다. 물론 놈도 내게 주먹질하고 발차기도 한다.

어쩌면 원작 소설대로 전개가 흘러가게끔 누군가 수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나를 빌어먹을 새끼의 몸에 집어넣어 이방인 뭐시기로 만든 초월적인 존재라든지. 그래서 결국 다 죽는 거 아닐까. 영감님도. 노아 집사도. 제리도. 기사 톰도. 나도…….

“크악!!”

잡생각 하느라 놈의 주먹을 못 봤다. 알아차리기 전에 얼굴에서 우지직 소리가 나는 걸 들으며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곧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며 핏물이 코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얼굴을 후려치는 주먹에 코와 뺨이 찢어진 것이다. 코뼈는 부러지지 않은 것 같다. 곧장 몸을 일으켜 바닥에 핏물을 뱉고 다시 놈에게 덤빈다.

“대련 중에 다른 생각. 하지 마.”

놈의 눈이 매섭다. 수치스러워 어금니를 악물고 아래서 위로 비켜 가르듯 벤다. 놈이 간단히 검을 막았다. 허초다, 새끼야. 오른발을 축 삼아 왼발로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친다.

“죽엇!”

“…….”

놈은 피하는 대신 내 명치를 발로 찼다. 나는 피 섞인 위액을 토하며 몇 바퀴나 굴러 바닥에 나가떨어진다. 숨이 갑갑해 숨을 들이쉬다 핏물이 기관지로 역류한다. 내장과 호흡기만큼은 나도 단련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대로 엎어져 거칠게 기침하며 핏물을 토한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5년간 돈은 충분히 모았다. 이대로 자유무역 도시로 도망가서 신분 세탁하고 쥐죽은 듯 살다가 이종족이 사는 섬으로 떠날까.

“헉, 어…흐……. 흐.”

핏물로 시뻘게진 이를 드러내고 나는 실소한다. 잠자코 서 있던 마왕 놈이 내게 다가온다. 놈이 걸음을 멈추고 멀거니 서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놈을 노려본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 냉담한 표정. 놈의 머리 뒤에 뜬 초저녁 초승달이 마왕의 뿔처럼 보였다.

놈이 허리를 숙여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뻗어 놈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맞은 곳이 너무 아파 다리 힘이 풀렸다.

아니다. 차라리 맞고 나니 머릿속이 좀 맑아진 것 같다. 놈은 괜찮냐고 묻는 대신 나를 부축한다. 오늘은 사제님 신세를 지겠구나. 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싫은가?”

부지불식간에 놈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왕 꿈나무를 바라본다. 놈의 표정을 읽기 어렵다. 난 또 측은한 척할 줄 알았지. 뭐라고 입을 열려다 다시 핏물이 입 안에 고여 뱉고 나서 되묻는다.

“내가 왜 널 싫어해.”

이미 들은 말을 이해 못 한 척하는 것도 민망하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해야겠다. 대비하지 않고 가장 들키기 싫은 상대에게 속마음을 읽힌 탓이다.

그렇다. 나는 펠런 엑사 드로젠이 싫다.

마왕이 무섭다. 내가 이방인이라서 그런 건지 뭔지 몰라도 계기가 생긴다면 놈의 멱을 딸 것이다. 놈을 보면 심장이 뛰고 열이 오른다. 놈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된다.

고개 돌려 놈이 내 창의 간격 안에 서 있는걸 보이면 안심하고 만다. 그런 적수와 한순간 욕망에 휘둘려 놈을 물고 빨며 발정했다.

마왕이 싫다. 그리고 마왕을 동정한다. 세상에서 제일 쓰레기 같은 행동 중 하나가 남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정하는 건데 내 꼴이 지금 딱 그렇다. 놈이 소설에서 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멋대로 동정하는 거다.

실력도 명분도 없는 주제에 마음 혼자 그렇다. 놈에게 휘둘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심지가 흔들리니, 행동과 말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렇지만 너는 이미 나와 약속했다. 내가 먼저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놈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놈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놈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 죽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약한 건지, 아니면 놈도 나처럼 이 부조리한 상황에 휘말린 나를 동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르겠어. 시발. 왜 난 저 새끼 거시기를 빨며 발정한 걸까.

“약속을 잊지 마라.”

“…에에, 알아, 인마. 누가 안 지킨다고 그래. 나 너 안 싫어해. 내 친구 너뿐인 거 알잖아.”

흐트러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실실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놈이 알고 있다고 해서 나마저 놈의 장단에 맞춰 증오를 드러내 봤자 결과는 파멸뿐이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마왕 놈도 알아차린 서푼짜리 친구 연기를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 * *

기숙사 하늘관과 바람관 사이 빛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다. 아카데미 학생이나 교직원들을 위해 법황청에서 설치해 준 신전이다. 그리고 상급 사제가 있기에 나처럼 잘 처맞고 다니는 애들은 보건소로 사용한다.

사제님이 오시기 전에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대기한다. 이제 이 치료실이 기숙사 내 방보다 더 익숙하다.

내 방인 양 치료실 협탁 위에 있는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살폈다. 눈두덩이는 시퍼렇고 눈에 혈관이 터진 건지 흰자도 빨갛다. 광대부터 턱까지 찢어진 자리에서 아직 피가 흐른다.

입을 벌려 입 안을 살폈다. 잇몸이 치아에 찢기고 이도 몇 개 흔들렸다. 대련하면서 잡생각을 한 대가다.

“이렇게 보니까. 되게 많이 맞은 것 같다.”

발음이 샌다. 코가 퉁퉁 부어 뺨과 코의 경계가 없어질 지경이다. 아픈 와중에 내 얼굴이 너무 웃겨서 실실 웃자, 마왕 놈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 맞아. 내일부터 대련할 때 오늘처럼 디버프 걸지 말고 싸우자.”

“…너를 얕잡아 보는 건 아니지만 전력을 다하면 대련이 될 수 없다. 대련 때마다 사제의 신세를 지고 싶은 건가?”

“그렇다고 계속 봐주면서 대련하면 딱 그 정도 실력이 늘 거 아냐. 처맞다 보면 배우는 게 있겠지.”

“사제는 만능이 아니다.”

“외상에는 만능 맞아 인마. 숨만 붙여둬, 숨만.”

걱정하지 마. 나도 내일부터 검 대신 창을 들 거다, 라고 말했더니 놈이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 보니 무섭다 인마. 히죽거리며 놈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가 뗐더니, 놈의 뺨에 검붉은 피가 묻었다. 그러고 보니 손바닥도 터졌구나.

잠시 후 상급 사제께서 치료실로 들어왔다. 내 손가락을 붙여주신 다이널 사제님과 같은 상급 사제다.

빛의 사제가 들어오자 마왕 놈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장승인 척 내 정수리만 노려본다. 하긴, 대사제는 저 녀석을 축복하려다 마족 혼혈인 걸 알았다고 했지. 마족 혼혈인 것이 드러나면 아카데미에서 나가야 할 테니 주의할 만도 하다.

자주 봐서 익숙할 내 얼굴을 보는 사제의 눈초리가 새초롬하다. 그래도 내가 다른 귀족처럼 피로를 풀고 싶다든지, 근육통을 해결해 달라고 여기 오진 않았던 것 같은데.

“빛께서 늘 함께하시길. 얼굴이 아주 많이 갈렸군요. 오늘은 모닝스타로 맞은 겁니까?”

“빛께서 함께하시길. 검술 대련이었습니다. 며칠 안에 나을 것 같지가 않아서.”

걷거나 숨 쉴 때마다 명치가 칼로 찢는 것처럼 아픈 걸 보면 갈비뼈도 부러진 것 같고.

“상태를 봐야 하니 속옷만 남기고 다 벗어주십시오.”

가죽 갑옷과 그리브. 건틀릿을 먼저 벗고 피와 땀에 푹 젖은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사제가 내 몸을 보고 침음한다. 겉으로 봐선 얼굴만 처참한데. 역시 뼈도 부러진 걸까. 고민하던 차에 사제가 마왕 놈과 비슷한 맥락의 타박을 했다.

“사제의 치료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자허 블리스. 스스로 몸을 소중히 다루십시오.”

“대련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부주의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제님.”

사제의 기도가 끝나고 거짓말처럼 아픈 게 사라졌다. 대련하기 전처럼 근육도 아물었다. 이 정도면 한 번 더 대련해도 될 것 같은데. 입맛을 다시며 셔츠와 바지를 다시 꿰입었다. 차갑게 식은 눅눅한 셔츠를 다시 입으니 찝찝해서 죽을 맛이다. 가자마자 씻고 갈아입어야겠다.

대련 중에 갑옷이 좀 찢어졌다. 수선을 위해 관리인에게 맡기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자기 전에 내일 강의 들을 것 예습 좀 하고 자야겠다. 해가 저문 지 오래라 찬바람 좀 맞았다고 시원하다 못해 조금 춥다.

“그런데 너는 다치면 사제에게 치료받을 수 있나?”

“…빛의 신은 우리에게 이적을 보여주지 주지 않더군.”

“그럼 다른 신은? 너도 믿는 신 있어?”

상처가 사라졌다고 피딱지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귀가 간지러워 대충 긁자, 머리카락과 뺨에 엉겨 붙은 검은 피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옷을 벗는 동안 풀어 둔 머리끈이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는 신은 하나 있다. 마족에게 힘을 주는 신도 있다고 하더군. 마도사가 신을 부르고 싶거든 그 이름을 부르라 했다.”

그래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라고 마왕 놈이 말했다. 자가 회복도 가능하고 다른 것도 여타의 다른 사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할 수 있다.

그렇구나. 마족도 믿는 신이 있구나. 소설에서는 주인공 용사를 주로 보여주니 알 리가 있나.

“너 마왕이라며. 인간은 빛의 신을 모시고 다른 종족들은 땅, 바람이나 물의 신을 모신다고 하니까. 마족은 어둠의 신을 모시나?”

“잘 알고 있군. 그래. 우리는 어둠의 축복을 받는다.”

“그럼 어둠의 신을 모시는 사제가 치료도 하고?”

“빛의 신은 육체를 통해 내려온다고 하지. 어둠의 신은 영혼을 통해 내려온다. 그래서 정신에 관련된 마법이나 축복이 많다. 내가 버프나 디버프 사용에 능숙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응. 그래. 판타지 소설에서 무협 설정 나오고 시대 모를 동서양 뒤섞인 양식이 나올 때부터 알았지만 작가 놈 『굴러라 용사님』 정말 설정 대충 짰구나.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뭐 어때. 그런 소설에 코인 지른 내가 잘못한 거지.

이 자식이 용사 말고 다른 놈에게 다칠 것 같지 않다. 보통 괴물이어야 말이지.

놈의 성기를 물고 빤 날 이후로 함께 쓰던 욕실에 암묵적인 순번이 생겼다. 많이 더러워진 놈이 먼저 쓰고 상대적으로 멀끔한 놈이 마지막에 쓴다. 그래 봤자 대련 후에 만신창이가 되는 건 놈이 아니라 나다. 셔츠와 바지를 훌훌 벗고 욕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뒷골목에 살 때, 내 주변 사람들은 쉰을 넘기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 죽었다. 거의 질병 탓이었다. 돈이 없으니 사제에게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어디가 부러져도 마약을 질겅거리며 버텨야 하는 삶들. 항생제도 없고 깨끗한 물도 구하기 어렵다.

그런 곳에서 균과 바이러스에 대해 이해하는 현대인이 살려면 결벽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행히 여긴 얼음이 얼 정도로 날이 춥지 않아 어린 나는 날마다 찬물로 씻고 또 씻었다.

돈은 적게 줘도 신전에서 일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거다. 신전 안에서 봉사를 하다가 다치면 사제들이 간단한 치료는 해주니까.

더운물을 머리에 끼얹고 비누칠을 했다. 등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다. 욕실에 들어오기 전에 머리끈을 챙길 걸 그랬다.

한 움큼 머리카락을 쥐고 가볍게 잡아당긴다. 물에 젖어 시커먼 머리카락이 손안에 가득하다. 영감님도 숱이 많았지. 대머리가 될 걱정은 없을 것 같다.

“귀찮은데 그냥 짧게 칠까.”

“다른 귀족들은 긴 머리를 선호하더군.”

“…창 휘두를 때 걸려서 귀찮아. 그러고 보니 너도 머리 길잖아. 시야에 안 걸리냐?”

“걸려도 상관없을만치 강해지면 된다.”

깜, 짝이야. 빌어먹을 새끼. 투덜거리며 내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몇 사람이 써도 될 만큼 욕실이 큰 것과 별개로 훌훌 벗은 놈을 봐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놀란 티를 내기 싫어서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더운물을 몸에 끼얹고 비누칠한다. 되도록 놈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너니까 가능하지. 본인은 아직 그 경지에 닿지 않은 것 같구나.”

“노력해. 전력을 다해달라며.”

“…나쁜 새끼.”

말이나 못 하면 이쁘기나 하지. 세상에서 제일 얄미운 말이 천재가 하는 ‘왜 그걸 못하지’와 ‘이렇게 하면 되잖아’다.

아, 예 그러시군요. 비꼬는 얼굴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이죽거리니 놈이 다가와서 양 뺨을 죽 잡아당겼다. 물 묻어서 바로 미끄러지긴 해도 양쪽 뺨이 얼얼하다.

“그 정도는 생각하고 말한 것 아니었나?”

“내가 노력하는 거랑 별개로 네가 말하니까 재수 없어서 그래 인마.”

흘깃 놈을 노려보고 욕실 안, 벽에 걸린 거울을 보고 입을 벌려 안을 확인했다. 치료 전까지 흔들렸던 치아가 멀끔하다. 금이 간 곳도 완벽하게 아문 것 같고.

이 세계에 와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치과에 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도 돈과 권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빨리 씻고 나가자. 언뜻 비치는 놈의 피부가 희다.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등 근육과 목덜미에 착 달라붙은 걸 보고 있으니 아래가 불끈불끈하다.

내 빌어먹을 하반신은 왜 머리랑 따로 노는지 모르겠다. 괜히 숨이 가빠, 대충 몸을 문지르는 척 하반신을 가렸다. 나를 다지고 으깨는 놈에게 발정하다니 내 안에 마조히즘이라도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

내 목덜미에 마왕 놈의 손가락이 닿았다. 숨을 멈추느라 놈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놈이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쥔다. 단단한 손가락 마디가 목덜미에 닿자, 짜르르하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생각할 틈도 없이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자, 놈이 대담하게 머리카락을 내려놓고 그사이 드러난 목덜미를 날개 죽지까지 길게 훑는다. 몸이 움찔 떨려, 나는 앞으로 웅크렸다. 입을 열면 신음이 나올 것 같다.

다분히 성적인 의도를 가진 접촉이다. 기묘한 흥분과 더불어 나는 겁에 질린다. 원작에서도, 이랬던가.

아니다. 놈에게 치근덕거린 건 자허 블리스였다고 했는데. 아니면 내가 모르는 소설 속 내용 중에 이런 것도 있나. 작가가 묘사하지 않은 것뿐인가.

무엇보다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놈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놈이 눈치챌 정도로 놈에게 살의를 품고, 왜 몸을 허락하는 걸까. 왜 나는 놈이 만지는 게 싫지 않은 걸까.

“…으, 큿!”

등허리를 훑는 손이 두 개로 늘었다. 놈은 손가락 끝마디로 느긋하게 나를 해체할 듯 견갑골을, 척추를, 옆구리와 꼬리뼈를 어루만진다. 나는 앞으로 웅크려 헐떡거린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발등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밀어내야 한다. 밀어내야 하는데.

“친구끼리 손장난은 괜찮다고 했지?”

놈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거울 너머에 놈이 비친다. 열 오른 얼굴. 물에 젖은 몸. 목울대와 빗장뼈가, 가슴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거울에는 나도 비친다. 열이 올라, 욕망을 숨기지도 못하고 발정하는 자허 블리스가 있다.

옆구리를 지나쳐 두 손이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입을 열어. 놈에게 하지 말라고 해. 그러나 나는 침묵한다. 머저리같이.

놈이 휘청거리는 내 가슴과 아랫배를 붙든다. 놈의 손바닥이 지나치게 뜨겁다. 나는 겁에 질려 놈의 팔뚝을 움켜쥔다.

가릴 것이 없어지자, 반쯤 발기한 성기가 거울에 비쳤다. 수치스럽다. 끔찍할 정도다. 그러나 놈과 닿은 부위에서 겪어본 적 없는 쾌감이 느껴져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축 늘어진 내 등이 놈의 가슴팍에 닿는다. 놈이 고개 숙여 낮게 웃는다. 목덜미와 귓가에 놈의 숨이 닿아, 나는 움찔거리며 놈을 바라본다.

놈의 검은 눈에 내가 비친다. 겁에 질리고, 욕정하는 내가 있다. 아니 저건 자허 블리스다. 내 얼굴과 내 몸이 아니다. 그런데 느끼는 건 나라서, 나는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 쓰게 웃는다.

“내가, 거짓말했어. 이런 거 친구끼리, 안 해.”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알면서, 왜 너에게 욕정하게 되는 걸까. 내가, 내가 자허 블리스라서 그런가 봐. 나도 결국 그 새낀가 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웃었다. 놈의 웃는 얼굴이 서늘하게 차가워졌다. 열이 올라 후끈후끈한 손을 어깨 뒤로 뻗어 놈의 구겨진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미간 구기지 마.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처럼 보여.”

“넌 자허 블리스가 아니잖나.”

“아는데, 아는데도 그래. 너를 만지고 싶어. 개같아. 너를 핥고, 빨고, 네 안에 넣고 싶어.”

놈의 몸이 아까보다 더 뻣뻣하게 굳었다. 굳을 만도 하지. 친구인 줄 알았던 놈이 이런 욕망을 토로하면 누구라도 굳을 거다.

잠시 멈췄던 놈의 손이 다시 은근히 허벅지를 타고 미끄러져 올라와 내 성기를 감싸 쥔다. 신음을 참지 못하고 나는 낮게 목울음을 울며 허벅지를 벌렸다.

눈을 감으니 놈의 손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랫배를 감싸 쥐고 잠시 멈췄던 손이 다시 아래로 미끄러져 내 허벅지 안쪽 단단한 근육을 감싸 쥔다. 놈의 손등에 성기가 쓸려 나는 가쁘게 흐트러진 호흡을 내뱉었다.

“꼭, 네가 넣을 필요는 없다.”

“너, 행동하고 말하고 다르, 거든…….”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잖나.”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설득력 있다. 그렇지. 나쁜 짓은 아니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거린 건 놈의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성기를 위아래로 훑는 놈의 비누 거품 묻은 손에 이성이 날아간 탓도 있었다.

“으흣, 나…쁜 건 아닌데, 아… 거기, 너무 문지르지… 마.”

“조금만, 할 테니까…….”

놈이 좀 더 몸을 밀착한다. 틈 하나 없이 맞물린 등과 어깨. 내 엉덩이에 놈의 성기가 닿았다. 놈의 팔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발기한 성기가 놈의 손안에서 크기를 키웠다. 질척질척한 물소리에 고막이 유린당한다. 뜨거운 선액이 흘러넘쳐, 허벅지가 잘게 경련한다.

머리까지 욕정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면 내가 이럴 수 없다. 자꾸 끊기는 이성 가닥을 움켜쥐고 나는 최소한 내 행동에 변명이 될 법한 것을 찾았다. 그래. 놈과 몸 섞는 사이가 되면, 놈이 마왕으로 각성한 후에 나나, 블리스는 공격하지 않겠지.

조금 수치스럽지만 제법 설득력 있는 변명이다.

애초에 나는 놈의 심기를 크게 거스를 수 없다. 수틀려서 놈이 폭주라도 하면 어쩌고. 그렇게 생각하자.

생각해 보면 검 잘 쓰고 마법 잘 쓰는 공방 완벽한 먼치킨이 욕망에만 약한 거다. 좋아. 놈의 약점을 하나 찾은 셈 치자. 놈의 약점이 내 약점과 같다는 건 무시하고.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은 조금만 한다고 해놓고 내가 크게 저항하지 않자, 내 목덜미며 어깨를 입술로 문지르고 이 세워 깨물며 맛보기까지 하고 있다.

빌어먹을. 나만 당할 수 없다. 놈의 팔뚝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 대신 비누를 강하게 움켜쥔다. 물 먹은 비누가 손안에서 반쯤 으깨졌다. 거품 묻은 손으로 상반신을 조금 돌려 놈의 성기를 쥔다.

놈의 몸이 움찔 튄다. 흐트러진 숨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는다. 대련할 때도 성공하지 못한 걸 이 상황에서 성공하는구나. 대단하다. 자허 블리스.

“억지로 할 필요 없다.”

“나도… 으응, 너 만지고 싶어…….”

비음 섞인 신음이 듣기 이상해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반쯤 마주 본 자세로 놈의 성기를 훑었다. 한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 손을 위아래로 포개 두 손에 쥔다.

욕실 안이 너무 덥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쁘게 입을 벌려 호흡하며 놈의 성기를 쥐고 수음하듯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저걸 입에 넣었었다. 그때 내가 미쳤던 거다. 지금도 미쳤고.

놈의 것을 훑을 때마다 놈도 내 것을 훑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온다. 벌어진 입에서 예민한 귀두가 쓸릴 때마다 절로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놈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꾹 누르자, 온몸이 경련한다. 앗. 아아. 아, 거기. 거기 누르지. 마. 절정과 비슷한 쾌감에 고개가 뒤로 꺾였다. 놈의 상반신에 몸을 기댄다.

놈이 고개 숙여 내 목과 어깨에 입술을 비빈다. 닿고 있는데, 부족하다. 좀 더 깊이, 가까이 닿고 싶다. 쾌감이 완급 없이 곧장 치고 올라온다.

“나, 올 것 같. 읏. 으. 안 돼. 가, 가버리……. 으흐윽!”

눈앞이 희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몇 번이나 움찔거리며 사정한다. 허리 아래가 녹은 것 같다. 헐떡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는 도중, 낮은 신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멈춰 있던 손을 다시 놀려 놈의 성기를 훑었다.

가기 전에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으니 괴로울 만도 하지. 놈의 것을 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놈도 내 손 안에 사정한다. 손가락 사이 엉겨 붙은 정액에 실소한다.

그 와중에도 놈은 내 허리를 쥔 손을 풀지 않았다. 놈이 고개 숙여 어깨며 목을 이갈이하는 짐승처럼 질겅거리고 빤다. 쾌감이 지나간 몸에 닿는 감촉이 기분 좋아 밀 생각도 안 하고 축 늘어져 손에 여전히 남은 비누기만 문질러 닦았다.

자국만 안 남기면 되지. 뭐 어때. 놈 말대로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문득 생각이 이상한 곳에 닿아 나는 힘없이 낄낄 웃었다.

“이러다 버릇되겠네.”

“…버릇이 되어도 상관없지 않나?”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

“…대련하고 안 뻗는 날이라면. 그렇다고 대련을 봐주지 말고.”

놈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빌어먹을. 괜히 멋쩍어 놈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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