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흰 빵과 생햄
미친 척하고 일과를 모두 수업과 수련으로 채웠다. 일과가 단순해지니 시간의 흐름도 단순해졌다. 계절이 바뀌고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할 무렵, 호흡하다가 내 몸 안에서 순환하는 거대한 흐름을 인지했다.
영감님 말씀이 맞았다. 온전히 인지하고 나니 그 흐름을 호흡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들이쉬고 내쉬며 자연스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무협지에서나 봤던 기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기의 흐름이 처음부터 내가 가진 것처럼 편해지니 창을 다루는 것 역시 흐름 속에서 인지할 수 있었다. 눈을 감아도 창이 내 손끝에서 길게 뻗어 어디에 있는지 인지했고, 휘두르기 전에 궤적을 읽었다.
“이제 입문에 들어갔구나.”
오랜만에 별장을 찾은 영감님이 내가 이룬 단계를 보고 크게 기꺼워했다.
창을 쥐기 시작한 지 만 1년, 저택에 들어온 지 2년이 된 시점에서야 간신히 다다른 첫 발자국이었다.
“피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야. 이대로만 하면 블리스의 이름을 내세워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으니 정진하겠습니다.”
내 성취가 생각보다 빨라, 영감님은 한동안 블리스로 내려가지 않았다. 1년에 걸쳐 블리스가에서 가문 비전으로 내려오는 창술의 모든 초식을 때려 박듯 내게 전수했다.
전수를 빙자한 혹독한 수련이 끝난 후 토하고 기절하는 게 일상 같더니 점점 쓰러지는 빈도가 줄었다. 그즈음 체력이 붙어 기사 톰의 허락하에 저녁식사 이후 체력 단련에 더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제후인 영감님이 1년씩이나 블리스를 떠나도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직접 묻거나 하지 않았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다른 사람 앞가림까지 할 수 없다.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뜯어먹어야 했기에 의식을 잃고 신물을 토해도 다시 일어나 악착같이 영감님이 전수해 주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덕분인지 창끝에 흔들림이 사라졌다. 눈을 감아도 내가 들고 있는 창끝은 정확하게 표적을 겨냥했다. 내가 인지하는 공간이 점점 더 늘었다.
초식을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련하며 자연스럽게 초식을 운용하고, 그에 더해 변초를 섞어 창을 다루는 데 익숙해질 즈음 예법 수업이 끝났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예법 수업이 제일 배우기 난감했다. 인문학은 외우면 되는 거고 승마와 창술과 검술은 몸을 쓰면 되는 거라 비교적 쉬웠다. 새로 가정교사를 초빙해 특별히 배운 예법 중 특히 안목 수업은 배울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영감님 말로는 블리스 가문이 대대로 안목이나 예법에는 유독 약했다고 했다.
“하긴, 나도 뭐가 더 좋은 건지 찾기 어렵더구나.”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조금 더 정진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단다. 숨을 돌리는 시간은 필요하니까. 창대가 너무 단단하면 금방 부러지지.”
함께 먹고 자는 생활이 몇 개월 동안 이어지자 칼날 같았던 영감님의 기세가 아주 조금씩 누그러졌다. 대하기는 편해졌을지 몰라도 도리어 나는 영감님과 대화가 불편해졌다.
어차피 영감님은 몇 년 후에 죽을 사람이다. 상대가 다정스레 대한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대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영감님에게 되도록 정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가정교사 데이벨과 함께한 인문학 수업은 오히려 내 생각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 3년 만에 로컬 아카데미 졸업생 정도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오오, 전직 수험생 대단하다. 놀랍다.
내가 블리스 저택에 들어온 지 만 3년이 흘렀다.
그 사이 키가 제법 컸다. 내 전속 시종인 제리와 거의 비슷할 정도고, 체격은 내가 훨씬 더 크다. 그동안 창술과 검술은 일류 기사의 초입에 다다랐고, 궁술과 마술은 중급 기사의 수준이었다.
아쉽게도 자허 블리스는 몸 쓰는 일보다 머리 쓰는 일을 더 잘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까 원작에서도 잔머리 잘못 굴리다가 뒈졌지.
인문학 수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내 이름 앞으로 연극이나 오페라, 살롱과 전시회 개막을 함께하십사 초대장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안목 수업을 가르쳤던 예법 교사가 알음알음 내 이야기를 흘린 듯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블리스의 후계자가 돌아왔으니 쟁점이 되는 게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다.
어차피 귀족 자제들은 15세가 지나면 사교계에 데뷔를 할 수 있게 된다. 예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늦은 나이에 데뷔할수록 예법이나 교양을 늦게 깨우친 것이 되어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변명하듯 예법 교사가 넌지시 말해줬다.
조롱거리 되지 뭐.
아니 내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인데 남의 이목 따위 신경 쓰게 생겼냐? 어차피 미루고 미뤄도 아카데미 졸업하고 나면 사교계에 나가야 하고, 어차피 그때 나는 이미 돈 싸 들고 자유무역 도시로 도망가서 머리 염색하고 이름 바꾸고 느긋하게 이종족들의 섬으로 갈 수 있는 배편을 찾고 있을 거다.
내 앞으로 오는 초대장은 내게 보고하지 말고 거절 편지를 써달라고 노아에게 부탁했다. ‘제안은 감사하나, 일신상의 문제로 참가가 어려우며 기타 등등’.
그렇게 사교계 데뷔도 미룬 채 하는 일이 수련, 다시 수련. 그 일을 계기로 예법 교사는 추가 계약을 맺지 않고 수업을 끝마쳤다.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인문학 수업의 복습과 책 읽기가 전부였지만 영감님은 오히려 내 편이 되어 ‘기사로서 마음가짐이 한결같구나.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렴.’이라고 내 편을 들어줬다.
괜히 기사가 아닌지 전투 민족의 피가 흐르는 것 같은 톰과 다른 기사들 또한 영감님과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동안 면벽 수련 가까운 생활을 유지하자, 유일하게 곁에 있는 시종 제리가 외출을 하지 않겠냐 애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산책을 권하던 것이 날이 추워지고 해가 두 번 바뀌도록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자, 갈수록 심해졌다.
제발 외출 좀 하시고 바깥 공기도 쐬고 다른 분들과 교류 좀 하라며 은둔형 외톨이 둔 보호자처럼 나를 바라보는데 아주 약간 양심에 걸리기도 하고 좀 그렇다. 나는 슬쩍 딴청을 피우며 제리의 시선을 피했다.
“오늘까지 읽어야 할 책이 남아서……. 주말에 갈게, 주말에.”
“그거 지난주에도 하셨던 말이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말 되자마자 창 들고 나가셔서 이틀 내내 훈련하셨잖아요.”
“아니… 나갈 이유도 없고. 딱히 살 것도 없고. 거기다 1년 후면 입학시험이고.”
『굴러라 용사님』 세계는 사계절이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그 단어가 내가 알고 있던 계절의 강렬함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겨울은 조금 쌀쌀한 정도고, 봄은 비 쏟아지는 우기에 가깝다. 여름 역시 견딜 수 있을 만치 조금 덥다가 끝이다. 가을은 반대로 건조하다.
사계를 셔츠와 바지 한 벌로 생활이 가능한 데다 꼭 걸쳐야 한다면 니트 한 장이면 충분한 세계다. 그러니 움막에서 먹고 자고 생활해도 얼어 죽거나 쪄 죽지 않았지.
내 방 안의 낡은 가구는 집사가 천천히 내 취향에 맞춰 무채색 가구로 교체해 줬다. 가끔 재봉사가 저택을 찾아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몸에 맞춰 옷도 새로 재단해 준다. 장을 볼 필요도 없고 새로운 인쇄물이 나오는 대로 즉각 도서관에 들여오는 데다, 교류할 친구도 없다.
설마 내가 주근깨나 미친소를 다시 만날 것도 아니고.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시험이 1년도 남지 않았는데 외출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이유는 타당한데 의식해서 생각해 보니 몇 년째 은둔하고 있는 느낌이긴 하다. 아니, 그래도 말이야. 전쟁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쉴 수가 있나.
기사 톰의 말에 의하면 내 수준은 이제 간신히 일류에 닿았다고 했다. 그걸로는 한참 부족하다.
이제 톰과 대련하면 열에 네다섯은 이길 수 있다. 배운 시간에 비해 높은 경지에 올랐다며 과연 블리스의 혈족이라고 톰은 감탄했지만 나는 안다. 소설에서 일류 기사는 마왕을 만나면 썰리거나 불타거나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죽는 엑스트라들이다.
품위 유지비로 다달이 들어오는 돈은 노아에게 부탁해 금으로 환전 후, 마법 주머니에 넣어뒀다.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아 확인할 때마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제법 돈이 모였다.
“밖으로 나가야 친구를 만들지요. 하다못해 외부에서 오는 살롱 초대 정도는 받으셔도 되잖아요.”
“아직 작위도 없고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어린놈이 살롱 출입하는 거 아니다.”
“그러다가 아카데미 가셔서 혼자 지내시면 어쩌려고요. 가뜩이나 도련님은 로컬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고, 기부금 입학도 아니셔서 걱정인데.”
“…….”
“근로 장학생으로 들어가실 거라면서요. 제국 귀족들이 얼마나 텃세가 심한데요. 우리 도련님은 블리스의 후계자시니 감히 대놓고 척을 지실 분들은 없겠지만.”
1년 사이 제리의 키를 추월했다. 동그란 제리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로열 아카데미 들어가서 기죽을까 봐 걱정되나 본데 동급생에게 시비 걸리는 정도는 내 인생에 걸림돌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까짓것 시비를 걸면 받아쳐야지.”
“그러지 말고 교류를 하세요. 살롱이 아니더라도 무도회나 야유회 초대장도 종종 오잖아요?”
“그거 내 앞으로 온 게 아니라 할아버님 앞으로 온 거잖아.”
“돌려서 보내신 거죠, 뭐. 도련님이 다니엘 제후님의 스콰이어로 등록되어 있으니, 기사의 승인 없이 종자의 방문을 요청할 수 있나요.”
“…친구는 아카데미 가서 만들어도 돼.”
결국, 핑계를 찾지 못하고 나는 도망치듯 목검을 쥐고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뒤에서 ‘도련님 그러다가 아카데미에서 점심 혼자 드세요오.’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리지만, 알까 보냐? 맛있는 밥은 혼자 먹어도 맛있기 마련이다.
간단한 셔츠와 바지 차림을 하고 연병장을 달렸다. 이미 톰에게 오전에 연병장을 쓰겠다고 언질을 줘뒀기에 지금 연병장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느긋하게 근육을 예열하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외전의 자허 블리스가 블리스가의 권력만 믿고 깝죽거리는 멍청이면서도 어떻게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나 의아했는데 시험에 합격점을 받지 않아도 아카데미에 들어갈 방법이 있었다.
보통은 로컬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시험 없이 로컬의 추천을 통해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다. 로컬 출신 귀족의 경우 열이면 열이 추천 입학이다.
그다음 많은 게 시험 입학이다. 로컬이나 로열 아카데미의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인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머리 좋은 녀석들은 입학시험에 도전한다.
합격하면 로열에 다닐 기회가 생기는 데다,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면, 등록금 등을 면제받는 대신 수업 시간 외 아카데미의 일을 도와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기부금 입학이 있다. 도저히 성적이 되지 않아 로컬에서도 추천장을 받지 못했거나, 입학시험에서도 떨어지면 거액을 아카데미에 기부한 후 후원자 명목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 아마 원작의 자허 블리스도 기부금을 주고 들어간 거겠지.
수업 성적이 좋다는 가정교사 데이벨의 보고에 우리 영감님 입가가 실룩샐룩 좋은 티를 숨기지 못했다. 듣고 보니 블리스 가문은 무신 집안이라 머리 쓰는 일은 그리 능숙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기초만 어느 정도 가르친 후, 기부금 입학을 생각하고 있었던 영감님으로서는 시험 입학도 충분히 통과할 거라는 말이 기꺼웠겠지. 그래서 준비해 둔 기부금은 수업 열심히 들은 보상으로 내 마법 주머니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시험에 높은 성적으로 합격해도 등록금을 낼 수 있다면 굳이 근로 장학생으로 아카데미 일을 돕지 않아도 된다.
우선 시험에 합격하는 게 최우선이지만 귀족 가문 후계자에게 일을 시켜도 얼마나 시킬까 싶어 합격하면 근로 장학생으로 지내겠다고 이미 영감님에게 말해둔 상태다.
물론 그 경우에도 등록금은 내 마법 주머니에 들어가겠지만.
등이 후끈해질 때까지 연병장을 돈 후, 가볍게 입술을 축일 정도로 물을 마시고 목검을 휘둘렀다. 내부에 철 심지가 박힌 목검은 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법 묵직해 휘두르는 맛이 있었다.
그래도 창이 좋다.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가 창을 든 순간 훨씬 넓어진다. 그만큼은 내 영역이다. 앞으로 5년 안에 마왕은 죽이지 못해도 마족과 싸워서 이길 수준은 되어야 했다.
로열 아카데미 강의에도 검술과 무투술, 체력 단련 및 기초 군사학은 있었다. 체력 단련 외에는 선택 과목이지만 영감님은 전부 들었으면 하는 눈치고 나 역시 몸을 단련할 수 있는 강의는 다 들을 작정이다.
영감님과 나의 이해가 일치하니 이렇게 화목할 수가 없다. 물론 졸업하자마자 돈 싸 들고 튈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티 낼 생각도 없고 말할 용기도 없다.
미쳤다고 다니엘 블리스에게 ‘앞으로 5년 내 마왕이 강림해서 제국이고 블리스고 다 뒈집니다. 영감님도 같이 튀죠.’라고 말하겠냐. 미친놈 소리 들으면 다행이고, 내 말을 믿어도 제국의 창이 될 놈이 도망부터 칠 생각이냐고 경멸당하겠지.
하지만 내가 도망치면 영감님도, 노아 집사님도, 제리도, 톰도.
‘생각하지 말자.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마음이 심란하다. 감정이 흐트러지니 호흡도 흐트러진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내렸다. 생각하지 말자. 내 살길을 열어야 한다.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고 이놈도 챙기고 저놈도 챙기다 보면 다 못 챙기고 나도 죽는다.
“젠장. 골치 아프네.”
목검을 연무장 구석 간이 병기고에 납검하고 땀에 젖은 몸을 간단히 씻었다. 더운물을 몸에 끼얹고 나니 몸이 한결 가볍다.
머리를 비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제 읽다 만 『제국 발달사 - 종족에 따른 문화의 차이가 이끈 연맹의 쇠락』을 마저 읽었다. 시험에 필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내가 앞으로 사는 데 필요하다. 인간 외 종족의 문화나 생태에 대해 이만큼 자세히 서술된 글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도련님은 문관이 되고 싶으신 거예요?”
“아니. 기사가 되고 싶은데?”
“제가 아는 분 중에 도련님처럼 책을 가까이하시는 기사님은 없었거든요.”
네가 아는 기사라고 해봤자 우리 가문 기사밖에 더 있느냐고 말하는 대신 주방장이 공부하며 틈틈이 먹으라고 만들어준 버터 쿠키가 든 봉투를 제리에게 건넸다.
난 이제 괜찮으니 네 숙소로 돌아가서 다른 사용인들과 같이 먹으라는 뜻이었는데, 녀석이 봉투를 풀며 내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는다.
“근로 장학생은 시종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면서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근로 장학생이 사용하는 기숙사 방에 사용인용 거처가 없는 거지.”
“그게 그 말이죠. 그럼 전 여기서 뭘 해요? 3년간 도련님이 방학 때마다 오시는 거 기다리면서 급료나 축내요?”
“노아에게 잘 말해둘 테니 내가 없을 때는 집사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며 제리가 테이블에 납작 엎드리고 내게 눈을 흘긴다. 귀족 가문에서 흔히 후계자에게 붙이는 동갑내기 시종은 시종 겸 친구의 역할도 함께 한다. 그러니 다소 건방진 말을 써도 그것을 무례라고 꾸짖거나 체벌하지 않았다.
광대의 목을 치는 왕은 폭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쓴소리를 할 이는 필요하다는 요지라고 한다. 그러니 녀석이 내게 살갑게 굴어도 귀족인 나는 정색하고 밀어낼 수 없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종알거리는 제리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 이제 일도 아니다. 쿠키 하나를 꺼내 제리의 입에 구겨 넣어주고 나는 마저 책을 읽었다.
마지막 1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블리스 저택에서 보낸 5년 동안 나는 제리를 따라잡을 정도로 컸고 자투리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여섯 시간 이상 수련해도 구토하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붙었다.
블리스의 창술은 속이 깊은 우물이었다. 초식은 간결했고 단순했으나, 파면 팔수록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즐겁다. 자허 블리스의 몸이 천재인 건지, 아니면 이 몸에 들어온 내가 천재인 건지 스스로 성장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다.
입학시험 당일, 새벽같이 일어난 나는 가볍게 연무장을 달리며 몸을 풀었다. 그래 봤자 아침으로 먹은 건 버터 바른 흰 빵과 생햄 그리고 과일 주스 한 잔뿐이었다. 차린 음식이야 많았지만, 더 먹고 싶어도 위장이 쪼그라든 듯, 목구멍 너머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젠장, 심란할 때는 몸을 움직이면 나아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손도 대지 못하고 물린 접시를 바라보며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생각보다 시험에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더 먹으면 탈이 날 것 같군요.”
“도련님께서 시험에 부담감을 가지실 거라고는…….”
“저를 믿고 신경 써주신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내고 싶습니다.”
“…도련님의 성실함은 제후께서도 높이 보시는 바입니다만 부디 몸이 상할 정도로 무리하지는 마시길.”
“유념하겠습니다, 노아.”
제후 앞에서 첫 만남부터 뻔뻔했던 내가 시험 하나에 식사를 물리느니 어쩌느니 하는 게 집사가 보기에 신기했던 모양이다. 내 헛소리를 들은 집사가 감동 어린 눈으로 나를 본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 점수 따기 좋은 말을 덧붙였을 텐데 오늘은 그럴 여유조차 없다.
솔직히 말하면 수능 보는 것 같다.
무게로 따지면 수능이나 입학시험이나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않아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다는 거다.
그걸 알지만, 이해와 감정이 늘 일맥상통하는 건 아니어서 수능을 한 번 겪어본 속은 쉽게 진정되지 않는 것 같다. 이걸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지.
결국 이런 일로 사제를 부르기도 뭣해, 로열 아카데미로 가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욱신거리는 위장을 달래야 했다.
‘수석 차석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은 내야 하는데.’
내 목표는 아카데미 입학이 아니다. 아카데미 졸업까지 최대한 자금을 마련하고, 생존에 필요한 창술과 검술을 집요하게 수련해야 한다.
영감님에게 용돈을 뜯으려면 내가 아카데미에서 그만한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어떻게든 아카데미 교수들의 눈에 들어, 기술 하나라도 더 배워야 내가 살 수 있다.
마왕과 마족들의 전쟁을 빙자한 학살극은 멀리서 읽어야 심심풀이 판타지 소설이지, 직접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만한 비극이 없는 것이다.
영감님은 블리스에서의 업무가 바빠 다음 주에나 별장에 올 수 있다고 했다.
이생 저생 합하면 내가 산 햇수만 근 불혹에 가까운 나이지만 영감님이 어린 손주 취급하는 걸 민망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사람이 좀 뻔뻔해야 잘 살 수 있다. 영감님을 이용하는 건 양심에 찔렸지만 내가 뛰어나면 나만 좋냐. 영감님도 좋지.
상념이 길어졌다. 쓸데없는 영역까지 생각 가닥이 늘어지는 게 달갑지 않아 생각하는 걸 포기한다. 대신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구경하는 데 집중했다.
길을 걷는 이가 조금씩 늘기 시작한다. 대부분 내 또래다. 아마 수험생들이겠지.
다행히 별장에서 로열 아카데미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마차는 30분 만에 시험장에 도착했다. 블리스 가문의 문장을 알아본 경비병이 절차 몇 가지를 생략해 준 덕분에 빠르게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권력이 좋긴 좋다.
로열 아카데미는 규모와 성질이 블리스가의 별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원이나 연무장을 낀 크고 작은 건물만 수십 채며, 운동장 하나가 장원을 포함한 우리 저택만 한 곳도 있었다.
하긴 제국뿐만 아니라 제후국과 그 외 왕국에서까지 내로라하는 재원들은 다 모이는 곳이다.
로열 아카데미의 입학 기준 나이는 무조건 20세다. 그래서 영감님이 인두세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나를 찾은 걸 거다. 로열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블리스의 후계자가 될 수 있으니까.
검술이나 체력 단련 등 몸을 쓰는 아카데미 생활을 견디려면 그만한 체력과 지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재수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존재하는 게 기부금 입학이겠지.
시험을 치를 건물도 아카데미 곳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시험을 보는 건물은 추첨을 통해 랜덤하게 결정되는 모양이었다. 운이 좋게 내가 시험을 치를 건물은 아카데미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부분 내 또래로 보이는 청년들 사이에서도 블리스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는 제법 눈에 띄었다.
하긴 제국을 수호하는 여섯 가문 중 하나다. 황족이나 왕족이 아니고서야 마차를 막을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런 위치에 있는 놈들은 이미 로컬 아카데미에서 추천받고 프리 패스로 입학하겠지.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는 와중에 태연한 낯을 가장하고 나는 마차 밖에 내렸다. 뒤따라온 시종 제리가 한 걸음 뒤에 공손히 서서 나지막이 속삭인다.
“오는 동안 열심히 봤지만 역시 도련님이 제일 예쁘고, 잘생기셨습니다.”
“…음. 어. 고맙긴 한데. 우리 무도회 온 거 아니니까 그게 중요하지는 않을걸.”
“괜찮습니다. 몸도 도련님이 제일 좋습니다. 분명히 도련님이 1등 할 겁니다.”
분명히 응원이라고 하는 말일 거다. 내가 듣고 복장 터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없을 거다. 그 증거로 제리는 제 주인이 제일 잘생겨서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제리를 흘겨보는 대신 허허 웃으며 녀석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괜찮다. 시선이 끌리지 않은 걸 보니 누가 들은 것 같지 않다.
“217회 로열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를 수험생들은 시험장 입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여주십시오.”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한 건 수험장 입구까지라 제리는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시험이 진행되는 시간이 제법 길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녀석을 네가 무슨 수험생 아들 둔 부모냐. 보통 부모도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는다. 끝나면 마차 타고 돌아갈 테니, 저택으로 돌아가서 집사 일이나 도우라 설득해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 오긴 오랜만인 것 같다. 괜히 싱숭생숭해 주변을 둘러본다. 노란 머리, 흰 머리, 갈색 머리, 주홍 머리. 나 같은 청자색 머리도 하나, 둘. 그야말로 총천연색 집합이군.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의 청년들이 보이는가 하면 수염 덥수룩한 장년처럼 보이는 노안도 한 명 보였다. 5년 사이 키가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다 고만고만하다. 그래, 괜찮다. 작은 키는 아닌 게 어디야.
시험장을 잘못 찾은 수험생이 없는지 확인을 마친 아카데미 관계자가 입장을 허가했다.
건물 안에서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났다.
아무도 내 근처에 다가오지 않는다. 수험생이 북적거리는 복도를 걸으면서도 부딪히지 않아 수월하긴 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다들 시선을 피하는 것이 영 기죽은 어린애들 같다. 그야 애가 맞긴 하지. 여기 있는 녀석들 전부 20세일 텐데.
아치형으로 휘어진 계단식 바닥에 간격을 둔 책상마다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자허 블리스. 수험표에 적힌 숫자와 이름을 확인하고 내 자리에 앉자, 불이 꺼져 있던 마법 등에 푸른 불이 들어왔다.
결과만 말하자면 시험은 제법 어려웠다.
그렇다고 모르는 문제가 나오지는 않았다. 아는 걸 비비 꼬아서 문제지. 언어학. 사회학. 기초문학. 점심식사 후 역사학 시험이 끝나고 시험장을 나와 실기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검술 및 체력 측정은 정해진 시험관과 대련 형태로 진행된다. 심화 시험을 선택한 이들은 이후 추가 시험을 봐야 했는데 나는 창술을 선택해 한 번 더 시험을 치렀다.
수더분하게 생긴 시험관의 실력은 기사 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찌르는 창의 궤적은 단순하고, 속도는 눈에 보일 정도며, 무게가 가벼워 빗겨 흘리거나 도리어 맞받아칠 수 있을 정도다. 덕분에 수월하게 승기를 점할 수 있었다.
근 5년, 몸과 혼을 갈아 준비했던 시험이 끝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본 서녘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모르는 문제는 없었다. 실수가 없었다면 이론 시험은 성적이 제법 나올 듯했다. 검술은 다른 수험생의 대련을 보지 못해 내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창술은 다르다. 시험을 위해 받은 창은 평소 다루던 것에 비해 길이나 무게가 짧고 가벼웠지만, 곧장 익숙해져 처음부터 내 것인 양 다룰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공용 마차를 이용할 생각으로, 마차가 대기하고 있을 시험장 밖으로 나가며 나는 히죽거렸다.
창의 블리스라 해도 5년 동안 수련한 거로 시험관에게 대거리할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말이다. 시험관의 놀란 눈을 보면 으레 있는 일은 아닌 듯했다. 나중에 내 세상에 돌아가면 창술이나 검도 배워볼까.
곧장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험을 끝마치고 나니 간신히 해방감이 들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느긋하게 제리 말대로 필요한 물건도 사고 싶었다.
크게 돈을 쓸 생각은 없다. 어차피 필요한 건 집사에게 부탁하면 거의 구할 수 있다. 그래도 내 눈으로 보고 구하고 싶은 물건도 있는 거다.
제발 근로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기부금 입학을 해야 할 정도로 수준 미달은 아니길 바란다. 최소한 마왕 놈과 같은 방은 쓰고 싶지 않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이상하다. 마차를 타고 번화가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정작 마차를 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밍기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나 자신이 의아하다.
그러다 문득 십여 미터 멀리서 한눈에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찾았다. 그렇다. 기어코 찾아내 그것을 응시한다.
위장이 욱신거렸다.
그렇구나. 나는 나가고 싶어서 서성인 것이 아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위장을 쥐어짤 것 같았던 불안함도 결국 시험 탓이 아니다. 나는 저것을 찾고 있었다. 아침에 마차 밖을 보면서도, 시험장에 들어가면서도.
사자 갈기처럼 사방으로 뻗친 검고 긴 머리카락. 주변 수험생들보다 머리 하나 큰 장신에 정복이 가리지 못한 크고 단단한 몸. 멀리서 봐도 기세가 사납고 난폭해 수험생 누구도 근처에 다가가지 못한다.
흘깃 봐도 불길하며, 접근하기 싫은 생리적인 공포로 주위를 물들이는 괴물.
그것의 이름은 펠런 엑사 드로젠. 드로젠 가문의 서자이자, 나중에 먼치킨 마왕이 되는 괴물이다.
마왕 꿈나무에게 접촉해 봤자 내게 하등 이득 될 것이 없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건 무시하는 거겠지. 그걸 아는데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목줄 하지 않은 맹수를 앞에 둔 것처럼 온 신경이 저것에 쏠려 한 걸음 내딛기조차 쉽지 않다.
저것이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거나 나를 적대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내 꼴을 보라지. 등줄기를 타고 차갑게 식은땀이 흐르고 기껏 영감님이 전수해 준 호흡은 흐트러져, 겁먹고 꼬리 만 하룻강아지와 다를 바 없다.
‘저것을 죽이자.’
한계에 몰린 사고가 극단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여긴 목격자가 너무 많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놈을 죽여봤자, 나 혼자 살인마가 되는 결말밖에 없다. 나는 여생을 감옥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면 몰래 죽이거나 죽일 만한 이유를 만들어.’
뒷골목에서 구르며 썩고 곪은 내 음습한 생존 본능이 내게 속삭인다. 놈을 인적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 그리고 멱을 따. 방심하게 만들어. 빵집 뒷문에 허방다리를 만들 때처럼.
‘저 괴물이 너스레를 밟고 균형이 무너지면 달려들어. 그리고 근육을 끊어.’
난폭하고 저열한 충동에 눈가에 열이 몰린다. 안 돼. 나는 홧홧한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차를 타자.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도화선에 불이 붙지 않은 폭탄을 일부러 건드는 건 멍청한 짓이다. 안전하게 처리할 자신이 없으면 무시하는 게 제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지독한 충동에 나는 급하게 팔을 들어서 내 팔뚝을 으드득 깨물었다.
치아가 깊게 팬 자리에서 시뻘겋게 핏물이 올라왔다. 욱신거리는 팔뚝을 소매를 길게 내려 가렸다. 통증이 밀려오자 조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여긴 안 돼. 죽여도 목격자나 증거를 찾지 못할 방도를 찾아.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면 관청에서 고용한 마법사가 증거를 물고 추적해 올 거다.
마차를 타야 하는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시선을 돌려 흘깃 다시 그것을 본다.
그것은 처음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 마차가 오는 대로를 본다. 저를 찾아올 마차를 기다리고 있나. 한숨을 내쉬며 마차 타는 걸 포기하고 아카데미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저것이 먼저 내 시야 밖으로 떠나는 걸 봐야겠다. 그래야 극단적인 충동으로 놈에게 덤벼 내 앞날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 같다.
이윽고 해가 진다. 가로수만큼 높은 가로등이 동시에 불을 밝혔다. 제국의 수도는 불야성이다. 오가는 수험생 한둘씩 사라지고 거리가 한산해졌다.
어깨에 두른 케이프를 고정한 가문 특유의 창 문양을 용케 알아차리고 지척에서 서성거리는 놈들이 몇 있었지만, 내 기세가 제법 흉흉했던 모양인지 말도 붙이지 못하고 떠났다.
마지막 마차가 저놈과 내게 탈 건지 물었지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차가 떠난 후에도 놈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대로를 바라봤다.
난폭하고 흉악한 기세는 여전하다. 뱀 앞의 개구리. 고양이 앞의 쥐처럼 생리적인 공포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이건 본능의 문제다. 놈의 혈관에 흐르는 마족의 피가 인간과 척을 지고 있는 거다. 물어뜯은 팔뚝을 다른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고 통증에 집중한다. 놈을 공격하지 말자.
놈이 흘깃 시선을 돌려 나를 본다. 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굳이 놈의 이목을 사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굴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다.
뒷골목에서 근 10년, 그리고 블리스가에서 5년간 단련한 내 본능은 지금이라면 붙어볼 만하다고 속살거리고 있었다. 미친 소리지. 오늘처럼 내 본능을 믿지 못한 적이 없다.
그리고 놈이 내게 다가왔다.
어금니 꽉 물고 하반신에 힘을 준다. 한 자세로 몇 시간 서 있었더니 근육이 조금 저리긴 해도 싸우기에 몸 상태가 나쁘지 않다.
좋아. 처리하자. 아니면 죽여버려도 좋고. 선빵은 양보하자. 대신 나는 네놈의 목숨을 가져가겠다.
이쯤 되면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것 같아, 나는 놈이 한 첫 물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돈이 없나?”
“…뭐.”
“마차를 빌릴 돈이 없는지 묻는 거다.”
사고가 정지한다. 무슨 말인지 되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데이벨에게 배운 처세술 덕분이다.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는 차라리 입을 다물 것.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대화에 먼저 자신의 패를 보이지 않을 것.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놈이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은화 두 개와 동화 한 개를 꺼내 내민다. 내 얼굴만 한 큼직한 손바닥 위에 앙증맞아 보이는 동전 세 개가 부조리 연극의 한 장면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난…….”
“괜찮아. 이거면 밖에서 노숙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러니까… 마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놈이 미간을 구기고 나를 본다. 뭐야 시비를 걸 생각인가.
아니다. 시비 걸 거면 아무리 봐도 호주머니 바닥까지 긁은 것 같은 쌈짓돈을 노숙하지 말라며 내밀지 않았겠지.
어쩌면 시비일 수도 있다. 놈의 어투는 아무리 좋게 봐도 초짜가 연극 지문을 처음 읽는 것처럼 딱딱하고 어색하다. 내가 마왕이라는 인물을 몰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투만 봐도 초면인 상대에게 말을 걸 정도로 넉살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 내가 실례했군. 나는 펠런이다.”
“…자허.”
놈이 순순히 사과하며 동전을 거둬들였다. 부지불식간에 이름을 말하고 아차 싶어 입을 다문다. 내 경계를 읽은 놈이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치 약자를 앞에 둔 괴물 같은 여유에 뻣뻣하게 굳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 자식이 누굴 측은하게 여겨. 그래도 놈에게 물어볼 기회다. 나는 놈에게 여기서 미적거리는 이유를 물었다.
“너는, 너도 마차 기다리냐?”
“그래. 하지만 예상대로 오지 않을 것 같군.”
해가 저물었을 뿐 밤은 깊지 않다. 나는 느리게 호흡하며 머릿속이 맑고 명료해지길 기다렸다. 마차가 오지 않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놈은 마차를 기다렸다. 그만큼 기다려서 안 오면 그냥 안 오는 건데 왜 지금까지 기다린 거래?
멍청한 건지 외골수인지 모르겠지만, 놈이 드로젠 왕국 내에서도 질시와 억압을 받았다는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잠시 말없이 도로를 보던 놈이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너는 수험생인가?”
“그래. 너…도지?”
외전에서 이렇게 만났나? 잘 모르겠다. 10여 년 전 한 번 읽은 소설을 어떻게 완벽하게 기억하겠어. 소설 내용을 암호로 적어두긴 했지만 내 기억이 바탕이니 제대로 쓴 건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마왕 새끼는 자허 블리스를 능지처참할 정도로 싫어했다. 뭐, 처음부터 싫어하진 않았던가. 모르겠다. 자허 새끼가 마왕에게 집적거리다가 나중에 뒈지는 것만 안다. 이런 놈이 뭐가 쓸만해 보인다고 치근덕거렸던 걸까.
대화가 끊겼다. 녀석은 침묵이 익숙한 눈치였고 나도 굳이 녀석에게 말을 걸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 마차나 타고 저택으로 돌아갈걸. 뭘 굳이 확인하겠다고 놈을 관찰하다가 이 사달이 나게 만들어.
그럼 적이 눈앞에 있는데 꼬리 말고 도망치랴?! 이성과 본능이 격렬하게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블리스가의 문장보다 먼저 마차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팔을 흔드는 제리가 눈에 띄었다.
“아이고 도련님! 왜 아직 여기세요!”
반갑다 제리. 고맙다 제리. 마왕 녀석과 어색하고 기묘한 대치를 풀어줘서. 고맙다. 고맙긴 한데.
“도련님 공용 마차 빌리는 법 모르신 거죠. 아니, 설마 말도 못 걸고 아직 여기 계실 줄 몰랐죠.”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노아 집사님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마차 하나 못 타시겠냐고 그러시는 걸 설득하고 설득해서 여기 온 거라고요. 그래서 제가 외출 좀 하시라고. 사람과 대화도 하고 친구도 만들고. 교류 좀 하시라고 한 거잖아요.”
“네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종일 도서실 아니면 연무장. 또 도서실. 공부만 죽어라 파고. 그러니까 마차 잡는 법도 모르죠.”
“…제리 그만.”
좋아. 자허 블리스는 죽었다. 사인은 수치며 범인은 그의 시종인 제리 머튼이다.
“저녁 안 드셨죠? 주방장님이 도련님 시험 끝나신 거 축하한다고 잔칫상을 준비했어요. 어서 가요.”
첫 심부름 성공한 어린 자식 보듯 대견하게 보지 마. 내가 영혼 나이는 네 두 배다. 얼굴에 시뻘겋게 열이 올랐다. 이게 무슨 망신이냐. 아니, 그렇다고 제리에게 타박을 놓을 생각은 없다. 저 아이가 저렇게 굴 수 있게 방조한 내가 잘못이지.
“그런데 저분은 누구세요?”
제리가 목을 길게 빼고 난데없는 소란에도 목석처럼 서 있던 마왕 놈을 응시한다. 네가 말하는 저분이 소국이라고 하지만 한 왕국의 왕족인 걸 알면 네가 그렇게 목을 뺄 수 있을까.
“…펠런이래.”
“세상에 도련님…….”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제리의 두 눈이, 가로등 불빛이 부서질 정도로 촉촉하게 반짝거렸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온몸으로 전율하던 제리가 냉큼 달려가 앞으로 몇 년 후에 자신의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 원흉에게 허리를 숙여 절한다.
“저희 도련님 친구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 버리고 만 것이다.
마차는 내 속도 모르고 가로등 불빛 형형한 대로를 달렸다. 나와 제리. 그리고 인세에 다시 없을 재난을 일으킬 마왕을 태우고. 여섯 명은 태울 수 있는 마차에 고작 세 명이 탄 것뿐인데 숨 막힌다. 갑갑하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창밖을 노려보지만, 자꾸 제리가 말을 건다.
“그렇구나.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시험 보러 드로젠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래.”
“도련님도 펠런 님도 대단하세요. 같이 합격하시면 동문이 되시는 거네요.”
아니 이런 동문 필요 없어.
“그렇게 되겠지.”
“두 분 모두 합격하실 거예요. 제가 감이 좋거든요. 아카데미 안에서도 저희 도련님 잘 부탁드릴게요. 저희 도련님은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수련도 열심히 하시고. 성실하시고. 저희 아랫것들에게도 너무 잘해주시고…….”
“…제리. 그만.”
편두통이 도진 것처럼 머리가 욱신거렸다. 더불어 물어뜯은 팔도 아프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우리 제리는 생리적인 혐오감도 없는 녀석이었나. 이 흉흉한 기세는 전혀 읽지 못하는 건가.
내 옆자리 앉아서 먹이를 발견한 새끼 새처럼 찌약거리는 제리의 입에 제발 그만 말하라는 심정으로 제리용으로 가지고 있던 쿠키를 밀어 넣어줬다. 우물거리며 쿠키를 맛보던 제리가 활짝 웃는다.
“보세요. 우리 도련님께서 이렇게 자상하시답니다.”
“…그래 보이는군.”
그만둬. 학기 초에 집에 친구 데리고 온 자식 어필하는 부모님처럼 굴지 마. 나도 멋쩍고 저 마왕 놈도 멋쩍어하잖아.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모르겠다는 눈치잖아.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폭풍처럼 제리의 질문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간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왕 꿈나무와 같이 블리스가의 마차에 앉아 저택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도련님 시험 잘 보셨어요? 합격자 확인은 언제 한대요?”
“잘… 봤지. 보기야. 합격은 일주일 후. 등록된 주소로 합격자만 우편을 보낸다고 하던데. 발표하고 아카데미에서 직접 확인도 가능하고.”
“그렇구나…….”
말끝을 흐리던 제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내가 제리에게 데면데면하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 제리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도 녀석은 굴하지 않고 항상 성실하게 나를 신경 쓴다. 그게 시종인 제리의 의무라는 걸 알기에 간신히 녀석을 밀어내지 않았다.
“방학 때마다 올게. 주말에도 올 거고. 마차 타고 30분 거리잖아.”
“괜찮아요. 전 기다릴 수 있어요. 훌륭한 제후가 되시기 위해 공부하러 가시는 거니까요.”
입대하는 첫 아이를 둔 부모님도 제리보다는 덜 극단적일 거 같다.
몇 년간 열심히 짜둔 내 계획은 초장부터 실패다. 만약에 수업을 같이 듣더라도 친분을 쌓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플랜 B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집사 노아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보다가 뒤따라 내린 마왕 놈을 보고 흠칫 놀랐다. 소설에서도 그랬다. 인간은 마족이나 마물에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낀다고 했다. 내 친구라고 생각하자마자 마왕 놈에게 친근감 있게 구는 제리가 이상한 거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시험을 치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따뜻한 물을 받아뒀습니다만, 이분은?”
“펠런이야. 그러니까……. 이번에 같이 시험 봤어.”
“도련님의 친우분이십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리자, 제리가 노아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살거리듯 제법 큰 목소리로 마왕을 친구라고 소개한다.
이런 제기랄. 이대로 헛소문이 계속 퍼지게 놔뒀다가는 저 자식이 마왕 되면 나도 인류의 공적이 되게 생겼다.
“아, 아아. 그렇군요! 환영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펠런 님. 부디 제집처럼 생각해 주시고 편히 머무시길 빌겠습니다. 방은 도련님의 옆방으로 준비해 놓을 테니. 아아, 이렇게 기쁜 일이.”
…은둔형 외톨이 아이가 밖에서 친구 데리고 온 걸 목격한 부모님이냐아아!!
목덜미가 뻐근하다. 두통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문제는 이 빌어먹을 마왕 놈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당분간 신세를 지겠다.”
“도련님의 친구분이면 제게도 도련님이십니다. 부디 편하게……. 우선 씻고 오시면 저녁을 세팅해 놓겠습니다.”
마른세수하고 비척거리며 2층 욕실로 걸어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오늘 봤던 시험보다 지금이 더 기력을 소모한다. 하다못해 놈이 ‘펠런 엑사 드로젠’이라 자신의 성과 신분을 드러내기만 했어도 놈이 블리스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을 거다.
자허 블리스가 펠런 드로젠을 초대한다는 것은 ‘블리스가는 드로젠 왕가의 왕위 다툼에서 펠런에게 지지 표명을 하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니 드로젠은 초대하지 않는다. 놈이 제 성을 밝히면 이렇게 간단하게 거절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놈은 펠런이다. 나 역시 내 이름을 자허 블리스가 아닌 자허라 소개했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니 가문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놈이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이상 내가, 놈이 왕족인 걸 알아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허 블리스인가?”
웃통을 벗다 말고 등 뒤의 묵직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왕 놈이 목에 두르고 있던 검은 케이프를 벗으며 내게 묻고 있었다.
아니, 넌 왜 여기 있어? 라고 물으려다 미간을 짚었다. 맞다. 친구라고 생각하고 제리가 같이 욕실에 집어넣었지. 왜 제리를 말리지 않았을까. 내가 결국 마왕을 만나 미치고 만 걸까.
“그렇…지. 너는 펠런이고.”
“제후국의 후계자가 성도 없는 평민을 친구라 소개해도 괜찮은 건가. 심지어 사용인들은 네 행동에 익숙해 보이고.”
“그거야 너도 그렇잖아.”
평민인 척할 셈인가. 그런데 연기 진짜 못한다. 어느 평민이 제후국의 후계자라는 걸 알고서도 그렇게 말 놓겠냐.
“너는…….”
놈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 위압감이 불곰을 앞에 둔 것처럼 무시무시하다. 셔츠를 벗다 말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놈을 마주 노려봤다.
놈을 죽이고 싶다. 그러면 편해지겠지. 이 빌어먹을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놈 아닌가.
하지만 놈을 죽이면 나도 좆된다. 죽은 놈의 수급을 들고 이 자식은 앞으로 마왕이 되어 인류를 멸망시킬 놈입니다, 라고 외쳐 봤자니까. 내가 저지른 살인 현장 검증을 한 마법사는 내 이마에 미친놈 딱지를 붙일 테고, 영감님은 미친놈에게 변호사를 붙여주지 않겠지.
잠시 나를 노려보던 마왕 놈이 고개를 돌렸다. 덤비려고 생각해 보니 이기지 못할 것 같았냐? 속으로 이죽거리며 나는 훌훌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다 벗은 마왕 놈이 따라 들어와 더운물을 받아 능숙하게 제 등에 끼얹는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놈의 어딘가로 향했다. 그건 본능이며 호기심이었고, 약간의 승부욕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왕은 거기도 마왕이었다.
마왕 각성도 안 한 놈이. 하… 참. 나도 키 크면 몸도 더 커질 거고. 아니. 잊자. 잊고 밥 먹자.
역시 일과는 샤워로 시작해서 샤워로 끝마쳐야 한다. 대련하느라 쌓인 먼지와 복잡한 속내를 더운물로 씻고 나니 한결 개운하다. 피딱지가 진 팔뚝의 상처를 대충 물로 씻고, 쓰고 있던 붕대로 잇자국을 감췄다. 어차피 이런 상처는 며칠 지나면 사라질 거다.
마왕 놈은 내 옷 중에 맞는 옷이 없어서 영감님 옷을 빌려줬다. 그래도 영감님이 최근 방문한 적이 없어서 영감님도 안 입어본 새 옷이라 괜찮을 거다. 품이 대충 맞는 건지 멀끔한 얼굴을 한 놈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와… 오늘 미쳤다.”
열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산해진미로 가득하다. 거대 랍스터 버터구이부터 각종 덩이뿌리로 속을 채워 오븐에 껍질 바싹하게 구운 닭.
뼈가 그대로 붙어 있는 스테이크와 치즈가 흘러넘치는 감자. 소스를 끼얹어 촉촉하게 구운 어린 양고기. 기름 안에서 자글자글 끓는 새우와 관자. 꿀과 버터를 발라 구운 빵.
전생에서 생일상이라도 이렇게 차려본 적 없는데.
얼굴이 풀려 헤헤 웃으며 냉큼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마왕 놈도 내 맞은편에 앉는다.
제국의 예법이 엄한 편이라 집사 등 사용인들과는 겸상할 수 없었기에 누가 나랑 같이 밥을 먹는 건 영감님 말고는 마왕 놈이 처음이다. 뭐 상관없다. 저놈은 제사상 미리 받는 것뿐이다.
부드러운 버섯 크림 수프를 맛본다. 그리고 곧장 오리고기를 가져와 능숙하게 살점을 발라 맛본다.
“예법이 능숙하군.”
“…블리스니까?”
“하지만 가끔 말투나 행동에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이 보인다.”
“5년짜리 블리스니까.”
경박한 말투 쓴다고 돌려 말하기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바닷가재를 한 덩어리 접시에 가져와 살점을 작게 잘라 입 안에 넣었다.
“내가 이 저택에 들어온 건 5년 전 일이야. 그전까지 수도 뒷골목에서 양아치 노릇 하며 살았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유년기 시절부터 15년. 예법을 익혔다 하나, 오래된 습관은 세월이 지나도 고치기 어려운 거겠지.”
“…그건 처음 듣는다.”
“그래? 제법 알려진 가십거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다못해 뒷골목 출신인 나도 블리스가의 가주에게 직계 후계자가 없다는 정보는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출신이나 아버지 일도 입이 심심한 호사가들 사이에선 씹기 좋은 땅콩 같은 거라는 것도 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 죽일 놈에게 뭔들 말해주지 못할까. 죽이고 싶다고 곧장 적의를 드러내는 멍청한 짓은 할 생각 없다. 의아한 기색 어린 마왕 놈의 검은 눈을 마주 바라보며 씩 웃는다.
“그래도 나는 자허 블리스야. 다니엘 블리스의 유일한 적손이자 블리스 제후국의 차기 제후지.”
“그렇군.”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까지 말투는 좀 고치려고 했는데 뭐, 성적 좋고 예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개성이라고 생각해 주지 않겠어?”
마왕 놈은 대답하는 대신 느긋한 손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하긴 네가 뭘 알겠냐. 피식 웃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차 삯 주려고 했던 놈이 생각보다 거물이라 놀랐냐?”
“그렇지 않다. 다만.”
잠시 뜸을 들이던 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검고 흉흉한 기운. 아직 마왕으로 각성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각성하면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네 행동과 성격은 그들에게 들은 것과 다르군.”
“……?”
“자허 블리스라고 했지. 20세에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다. 방을 쓰는 동안 호시탐탐 나와 몸을 섞고 싶어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고 하지.”
“무슨……!”
“그 후 앙심을 품고, 제뉴어리 엑사 드로젠과 모의해 누명을 뒤집어씌워 퇴학시킨 후 사람을 부려 나를 납치하려 했다. 목적은 내 몸이었지만 상황을 알아차린 내가 간신히 탈출했다고 했던가.”
생각이 멈췄다.
“이후 등장은 한동안 없다가, 내가 마왕으로 각성한 후 블리스 제후국을 멸망시킬 때 능지처참당해 죽는다.”
아찔한 추락감에 나이프를 쥐고 있던 손이 핏줄 도드라지도록 힘이 들어갔다. 팔뚝에 너무 힘이 들어가 감아둔 붕대가 시뻘겋게 피에 젖었다.
놈의 말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보다 먼저 본능처럼 놈을 적으로 인지하고 반응한다.
적의 상태를 본다. 놈은 뿔이 없다. 눈이 붉거나 마족 특유의 마기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저건 아직 인간이다. 저 정도면 아직 처리할 수 있다.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들끓는 살의에 당장이라도 몸이 튀어 나갈 것 같은 걸 손바닥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손을 단단히 쥐어 가라앉혔다.
놈은 내가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다. 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대충 그런 설정이라고 하던데, 맞나?”
“무슨 미친 소리 하느냐고 물어볼 상황은 아닌 것 같네.”
“너 역시 책을 읽었겠지. 제목은 『굴러라 용사님』이고, 내가 악역이라고 했던가. 마지막은 빛의 신이 강신한 용사에 의해 내가 죽는 결말이라 하더군.”
놈이 손을 들어 가볍게 휘저었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식당 안의 흐름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마법에 대해서는 자질도 없고 배운 적은 없지만 5년간 빡세게 수련했던 보람이 있었던 건지 곧장 반응한다.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나 양손에 나이프를 쥐고 놈을 견제하며 거리를 벌렸다.
“식당 안의 대화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것뿐이다.”
“…난 너랑 비밀 이야기 할 이유가 없는데?”
“소설 속 자허 블리스는 입학시험이 끝나고 내게 접근했다지. 내 처지를 알고 도와주겠다며 합격 발표가 나올 때까지 이 저택에서 신세를 져도 좋다면서.”
“…….”
“제국에 어떠한 연고도 없는 나는 자허 블리스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한밤중에 놈은 내가 머무는 손님방에 들어와 나에게 안아달라 말했다고 그러더군.”
“어떻게 그런 내용을 알고 있는 거지. 소설을 읽었나?”
“이방인들에게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방인이 누군데?’라고 물어볼 뻔했다. 젠장, 마왕이 순순히 말해줄 리 없는데.
지금 놈은 대화가 아니라 경고하고 있다. 이미 정황을 알고 있으니 수 쓰지 말라는 식의 경고인 걸까. 목덜미로 차게 식은땀이 흐른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기억나지 않는 유년기를 제외하면 가장 첫 기억은 4세 때다. 고작 둘뿐인 기사 중 한 명이 나를 죽이려 들었고 내 배를 뚫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기사의 손에 즉사했지.”
“허…….”
“내가 태어난 첫해부터 매년 이방인이 등장했다. 모르는 인물일 때도 있었고, 측근인 경우도 있었지. 6세에 간신히 죽이지 않고 이방인을 생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자의 입에서 소설에 관한 내용을 들었다. 외부에서 책을 읽고 이 세계에 들어와 나를 죽이겠다는 목적을 가진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명명했다.”
놈은 친절하게도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의문을 풀어줬다. 나 말고도 이 세상에 떨어진 놈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적극적인 놈들이군. 누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것도 힘들어서 뒷골목에서 구르고 있었는데. 그건 그렇고…….
“이방인?”
그 물음에 마왕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남은 이야기를 풀었다.
“마지막으로 이방인을 만난 건 13년 전. 내 이부형제인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 안에 들어온 이방인이 그러더군. 너는 앞으로 자라서 마왕이 되어 이 세계를 파괴할 테니 그 전에 자신이 숨을 끊어주겠다고.”
13년 전이면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 떨어진 해다.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고 놈의 행동거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놈이 말해준 정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매년 등장한 이방인들, 13년 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어거스트에게 빙의한 이방인. 그리고 나. 나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 놈에게 물어봤다.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은 어떻게 했어. 죽었, 으면 언제 죽였어?”
“그는 모종의 사고로 13년 전 사망했다고 드로젠 왕국은 공식 발표했었지.”
죽였구나. 그리고, 내가 왔어. 그런 거였어. 한 번에 한 명의 이방인. 먼저 온 이방인이 죽으면 그다음 이방인이 오는 거야.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는 자들이 소설 속 인물의 몸에 들어가서 어떻게든 마왕을 죽이려고.
불현듯 가정 하나를 떠올렸다.
자살하면 돌아갈 수 있나?
아니, 아니다. 충동적인 행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지 말자. 놈이 한 말은 ‘이방인이 죽었다.’였다. 죽은 이방인의 혼이 어떻게 되었는지 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돌아갔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대로 사라졌거나 다른 세상으로 떨어졌거나 하는 확률도 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본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차고 서늘한 무표정. 검은 눈동자는 미동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이방인인 건 어떻게 알았어?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한 행동이 소설과 다르긴 하겠지. 난 원래 자허 블리스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니까. 그래도 너도 그럴 거 아냐. 다른 사람에게 들은 소설 내용으로 내가 이방인이라고 확신하진 않았을 테니까.”
“보통 인간은 나를 보면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살의를 보내지 않는다.”
“살의?”
“이방인들은 본능적으로 날 보면 죽이고 싶어진다고 하더군.”
분명히 거리가 멀었고 살의는 처음 본 순간만 품었다. 불특정 다수의 수험생이 밀집한 공간에서 놈이 내 살의를 읽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놈이 나를 특정했다면 말이 달라진다. 뒷덜미가 서늘한 기분 나쁜 긴장감에 나는 미간을 구겼다.
빌어먹을 제기랄이다. 원작 소설에서도 먼치킨이었던 마왕 놈이 심지어 미래도 알고 있는 것 같다. 하드코어 난이도 위에 왜 더 높은 난이도가 존재하는가. 사망 플래그를 알아버린 마왕을 어떻게 공략해서 처리하라고. 그리고 난 이제 어디로 도망치라고.
“그래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뭐지?”
“우선 말해두고 싶군. …너를 위협할 생각은 없다.”
“지금 네놈이 한 말을 다 듣고도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믿는 게 좋아. 어차피 지금 여기서 널 죽여봤자, 또 다른 이방인이 찾아와 내 목숨을 노리겠지. 불시에 측근에게 찔리는 것보다 감시할 수 있는 상대가 명확한 편이 나로서도 다루기 편하다.”
뭐 이 자식아? 어이가 없어 놈을 노려본다. 대놓고 나를 감시하겠다는 뜻이잖아.
“그리고 넌 다른 이방인들처럼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지 않았지.”
“아니, 뭐. 목격자도 많았고, 그리고 딱 봐도 네가 더 강한데 덤볐다가 내가 죽으면 어쩌라고.”
“보통 이방인들은 그런 생각 없이 달려들더군. 굶주린 들개처럼.”
놈을 보자마자 치밀었던 살의를 기억한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억누르려고 하면 억누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처음뿐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을 봐도 불편하고 무섭긴 해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은 들지 않았다.
골치 아프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래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내게 이런 정보를 푸는 이유가 뭐야. 그냥 감시로 끝내도 되는 거 아냐?”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마왕 놈이 딱 잘라 말하는 내용에 내 귀를 의심했다. 인간을 증오한다고 대륙에 존재하는 인간종을 다 쓸어버린 놈이 뭐가 어째? 소설 말미쯤 가면 인간종보다 마족과 다른 이종족의 개체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리고 인간을 학살할 생각도 없다.”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
명치가 아프다. 몇 점 못 먹었는데 얹힌 모양이지. 뭐 어때. 저승 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탭댄스라도 추고 있는 심정인데 까짓것 죽어서 안 아픈 것보다 살아서 위장 아픈 게 더 낫다.
젠장. 차라리 한바탕 싸우는 게 나을 것 같다. 골치 아프게 머리 굴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데.
“좋아, 네가 말해준 것도 있으니 믿을게. 믿긴 하는데, 정작 내가 한 질문에 대답 안 하고 있잖아.”
“너와 대화를 하고 싶다.”
“지금 하는 건 대화가 아니라 말다툼이냐?”
“앞으로도, 아카데미 안에서도. 그리고 이왕이면 꾸준히 너와 교류하고 싶다는 뜻이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그래도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 스트레스에 약한 몸뚱어린데 오늘 하루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지난 13년 동안 가장 큰 것 같다.
갑자기 눈앞에 등장한 최종 보스가 교류하고 싶다는데 어쩌지. 거절하면 죽일 것 같은데. 애초에 교류를 빙자한 감시일 것이 뻔한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검은 사자 같은 체격을 가진 놈이 무슨 비 맞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뭐지. 내가 미쳤나. 손등으로 잠시 눈을 비빈다.
“보통 인간종은 나와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하더군. 배척하거나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너는 살의를 보였지만 이후에는 지금처럼 나와 동등하게 대화를 하고 있잖나.”
“이게 지금 동등한 대화로 보이면 네 눈깔이 삔 건데?”
“그럼 앞으로 동등한 대화를 하겠다고 하고.”
“그게 네가 하라고 되는 거면 참 좋겠다. 그치. 무서워하는 거 전혀 안 보이지? 막 상사가 부하에게 편하게 대하라고 하는 그런 느낌인 거 모르지? 하여튼 피식자 생각하는 척하는 포식자가 제일 나빠. 아주.”
놈이 잠시 침묵하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뭐, 왜. 나 지금 긴장해서 덜덜 떨고 있는 거 안 보여? 제기랄. 덤비라고 제발. 차라리 속 시원하게 싸우고 마왕을 죽이게 해줘. 홧홧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한 몸에 호흡까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울화통인가.
“내가 너를 겁먹게 했다면 미안하다.”
“아, 젠장. 그러지 마.”
“…가겠다. 네가 괜찮다면 아카데미에서 만나면 조금 더 대화했으면 좋겠다.”
“…미치겠네. 진짜.”
“걱정하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다. 나는 단지 네가 누군지 알고 싶었던 것뿐이다.”
놈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손짓하는 놈의 손길에 기묘하게 고정된 식당 안의 흐름이 유동적으로 변화했다. 잘은 몰라도 놈이 걸었던 마법이 풀렸음을 깨닫는다. 쥐고 있던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나는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야. 너. 나가지 말아 봐. 시발. 거기 있어 봐.”
“…나가지 말라고?”
“잠깐 생각 좀 하고. 알았어? 일단 기다려.”
피도 눈물도 없는 인류 학살극의 장본인 어디 갔냐. 아니면 이것도 연기냐? 난 ‘알고 보면 사연 있는 악당’ 싫어한다. 그런 거에 측은지심 느끼기 싫다. 바꿔 말하면, 나는 ‘사연 있는 악당’ 같은 상황에 매우 약하다.
“알았어. 일단. 대화하자. 할 테니까. 네 자초지종부터 들어보자고.”
* * *
드로젠 왕국은 마경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변경의 작은 국가다. 그래 봤자 지난 수백 년간 마경 안의 이종이 왕국을 침범한 적이 없었고 마족을 포함한 이종족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생물이었다.
물론 바다 건너 이종족과 인간이 공존하는 왕국이 있긴 했다. 그러나 마족은 아니었다. 폐쇄적인 그 종족은 자신들이 인정한 특정 종족들이 아니면 교류하지 않았고 그 카테고리에 인간은 들어가지 못했다.
드로젠의 국왕 ‘글로리아 엑사 드로젠’은 그녀의 여름 별장에서 젊은 정원사를 만나 휴가 한철을 보냈다.
정원사는 그녀를 처음으로 거절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거절과 경계는 빠르게 허물어져 둘은 사랑보다는 미적지근하고, 집착이라기엔 모호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여름 휴가가 끝난 후 정원사는 도망쳤고 글로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깨달았다.
국서 아타난 사이의 두 자식이 아니더라도 이미 서자가 둘 있었다. 자식은 많을수록 좋지. 글로리아는 제법 아껴줄 요량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태어난 펠런은 왕가의 혈통 중 유일하게 사제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이유를 묻는 여왕에게 대신관은 독대를 요청했다. 그리고 대사제는 여왕에게 말한다.
“마족은 어둠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 마족 혼혈에게 빛의 축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여왕과 빛의 신전은 아이의 정체를 함구했다. 여왕의 입지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글로리아의 증오는 사라진 마족 정원사를 대신해 온전히 펠런에게 쏟아졌다.
어린 펠런은 이유를 알지 못해 그저 속절없이 당했다. 돈에 욕심 많은 유모의 손에 의해 간신히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왕의 증오를 받는 서자의 미래는 하나뿐이었다. 방치와 학대로 펠런은 차츰 망가졌다.
부서지고 망가진 펠런은 유년기 모든 시절 동안 암살 위협을 받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곁을 지켜줬던 마법사 한 명이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죽었을 거다.
그리고 펠런은 이부형제의 몸에 들어온 이방인을 포함해 몇 명의 이방인에게 자신이 어떤 파멸을 맞이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말 그대로 예언이었다.
소설 속에서 펠런은 마왕으로 각성한 후 드로젠 왕국을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증오는 가장 강한 힘이었고 혈족에게 어떠한 애정도 남아 있지 않은 마왕의 힘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이었다.
인간계를 거의 지배하에 두었을 때, 마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미스트워커를 만났다. 미스트워커는 전대 마왕의 서자였으며 드로젠 왕국에 파견된 밀정 중 한 명이었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도 증오는 무뎌지지 않았고 자기파괴에 가까운 증오에 휘둘려 미쳐버린 마왕은 최후의 순간 빛의 신을 받아들인 용사의 검과 마법 아래 쓰러졌다.
물공 마공 다 쓰는 먼치킨 처리할 때, 물리 공격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교훈이 담긴 이야기다.
“지난 13년간 더 이방인이 찾아오지 않았기에 어거스트가 마지막 이방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험장에서 너를 발견했다.”
“아, 젠장. 시험 보지 말걸. 그냥 한량으로 살걸.”
역시 마법도 배워야 할까. 하지만 난 마법에 재능이 없다.
블리스가 역시 마나를 다루긴 한다. 하지만 그건 호흡을 통해 체내 순환시켜 신체를 강화하고 인지 범위를 늘리는 정도뿐이다. 손에서 불을 뿜고 중력을 역전시키며 죽은 자의 혼백을 되돌려 언데드 군단을 만들지는 못한다.
빌어먹을 먼치킨 새끼.
두 분 함께 드시라며 제리가 가져온 차로 목을 축이고 마왕 놈을 슬쩍 노려봤다. 놈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두 손으로 찻잔을 쥐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우수에 찬 눈매가 내 나이 또래 같지 않게 깊다. 놈을 볼 때마다 속 깊은 곳에서 열이 치민다. 이대로 멱을 따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놈은 이미 마법을 쓸 줄 안다. 속수무책이다.
꿈과 희망이 가득했던 내 방 안에 최종 보스를 초대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쉰다.
이 멍청한 마왕 새끼는 이방인이자 적인 내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놨다. 용사 놈을 보며 호구 중의 호구라고 생각했는데 마왕 놈도 용사와 맞수 아니랄까 봐 호구 짓도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물론 나는 자허 블리스가 아니지만.
“너. 절대 누가 돈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지 마라.”
“지금의 나는 사유재산이 없다시피 하다. 아까 네게 보여준 은화 정도가 전부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어휴, 근데 넌 드로젠에서 제국까지 와놓고 왜 가진 게 그것뿐이야. 그걸로 앞으로 일주일간 잠은 어떻게 자고 밥은… 시발.”
“노숙하면 된다.”
“넌 좀… 하…….”
놈은 나를 믿고 제 이야기를 다 털어놨다. 미친놈 아니야, 이거? 배신과 모략을 당할 만큼 당해놓고 보자마자 살의를 날리는 놈에게 또 속으면 어쩌려고. 내가 이방인이라며? 구겨진 미간이 풀리지 않아 나는 적수를 노려보듯 놈을 바라보며 결국 입을 열었다.
“내가 두 가지 질문을 할 건데 제대로 대답해 주면 나도 내 사정을 이야기해 줄게.”
“질문?”
“첫 번째. 너 용사를 어떻게 했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확실한 걸까. 놈이 말을 해도 내가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고 말한 놈이 용사를 처분했는지에 대해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대충 짐작은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용사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조금 식은 차를 다시 한 잔 마시고 나는 구겨진 미간을 엄지로 슥슥 문질러 풀었다.
“두 번째, 언제까지 나를 감시할 건데? 설마 평생 할 건 아니잖아.”
“교류에 기한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시적인 제약을 걸고 교류하는 건 친구끼리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나는 너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아니 시발. 그렇게 우울한 표정 짓지 말라고. 너랑 나랑 만난 지 고작 반나절이라고. 이제 막 밥 한 번 먹고 간식 한 번 먹었다고. 나는 애초에 네 취미가 뭔지, 좋아하는 건 뭔지, 장래 희망이 뭔지 하나도 모른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는 내 상황을 놈에게 설명했다.
“13년 전 일이야. 아침에 눈을 떴더니 다른 사람 몸 안에 들어 있었어. 그게 자허 블리스의 몸이었던 거고. 진짜 자허 블리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
“영혼이…….”
“바뀐 건지. 아니면 빙의인지 몰라. 근 10년간 내가 할 수 있는 짓은 자살 빼고 다 해봤는데 돌아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체념하고 살고 있었고.”
조금 놀란 기색 어린 검은 눈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놈이 정말 놀란 건지 놀란 척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를 죽이겠다는 생각은 못 하고 살았어. 그냥 내 앞가림 하나 하고 살기도 벅찼거든. 그렇게 살다가 5년 전에 블리스 저택에 들어왔고.”
“…….”
“사실 너 만나기 전까지는 열심히 돈 모아서 마족 침공 일어나면 곧장 튀려고 했지. 그런데 오늘 시험 보고 나오는데 널 보자마자 아, 저 새끼 죽여야 하는데 하고 살의가 일더라? 근데 사람도 많고 죽이기 어렵겠다 싶어서 포기했는데 네가 말을 걸더라고. 그리고 이후는 네가 본 대로고.”
“…그렇군.”
“…그런 거지.”
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어. 괜히 이것저것 준비한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질 정도라, 나는 서둘러 덧붙여 말한다.
“지금은 널 봐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냥 귀찮고 무서운 정도야.”
대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찻주전자가 비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목이 타서 계속 퍼마신 탓이다. 마왕 놈에게 내 방에서 걸어준 방음 마법 풀어달라 말하고 제리를 불러 차를 한 잔 더 부탁했다. 제리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쿠키와 케이크가 가득한 쟁반을 가져왔다.
“방금 진수성찬을 먹었는데 뭘 또 먹어.”
“에이, 도련님들 두 분 다 성장기잖아요. 많이 드셔야 키도 쑥쑥 자라죠.”
“마음씨가 고맙긴 한데 내가 성장기면 너도 성장기니까 이거나 가져가.”
제리가 제일 좋아하는 코코넛 쿠키 주머니를 손에 쥐여주려 하자 제 몫은 이미 챙겼다며 뒷주머니에 찬 쿠키를 내게 보여준다. 그래,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저 녀석은 어디 가도 잘 먹고 살 거 같다.
제리가 나가고 다시 침묵이 짙게 깔렸다. 내가 내보일 수 있는 정보는 이미 놈에게 공개했고 놈 역시 거의 패를 다 깐 것 같다. 의중을 숨기고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대화하다 보니 진이 빠진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이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이가 둘이 되면 변수가 너무 많아진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놈이 대륙을 박살 내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물론 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단순히 나의 방심을 유도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더 캐내고 싶은 속셈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결국, 이건 패를 반쯤 공개한 상태에서 하는 카드 게임이다. 문제는 공개한 저쪽의 패가 내가 숨긴 패를 합쳐도 더 점수가 높다는 것. 가끔 드러나는 것을 제외하고 놈의 표정을 읽기 어렵다. 포커페이스는 저래서 골치가 아프다.
“진짜 이름은 뭐지?”
“…허?”
“그 몸에 들어오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듣고 싶다.”
“그냥. 잘 먹고 잘 살았어. 끼니때마다 밥해서 먹고 밤 되면 자고, 해 뜨면 일하러 가고.”
“이름은?”
“…자허는 아니야.”
놈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내 진짜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건 마지막 남은 내 정체성이다.
그걸 또 어떻게 생각했는지 놈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무표정한 척하는데 그 와중에 얼핏 보이는 감정 조각이 적나라해서 기가 막힌다. 척 보면 안다. 저거 일부러 짓는 거다. 어디서 약한 척이야 마왕 놈이.
“여하튼, 정리하자. 넌 앞으로 마왕 될 생각 없다고 했지?”
“제국을 파괴하거나 살육을 저지르지 않을 거다.”
“좋아. 그럼 됐네. 너는 너대로 잘 지내고, 나는 나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제후 되고.”
“너대로?”
“여기서 한 대화는 너나 나나 좆되기 딱 좋은 내용이니 서로 약점 잡은 셈 치고, 서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각자 인생을 즐기며 살면 되겠네.”
“…….”
“뭔, 배신당한 것처럼 날 보냐. 난 네 친구가 아니야. 그렇다고 말했잖아. 막말로 난 오늘 널 처음 봤고, 말이지.”
“앞으로, 친구가 되면 될 것 같다.”
“너 혼자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친구면 그냥 세상 사람 다 친구겠다.”
“혼자 희망 사항이니 네가 부담된다면 거절해도 좋다. 그렇다면 그저 너를 이방인으로 두고 감시만 하겠…….”
“아, 좋아. 알았어. 친구 한다, 해. 대신 조건이 있어.”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까딱 노선 하나 잘못 타면 지상 최강의 마왕에게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면 더더욱. 사람이 융통성 있게 살아야지 너무 혼자 살면 부러지기 십상이다. 특히 목이라든지, 척추라든지. 아 젠장. 빌어먹을.
“조건?”
놈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나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걸 네가 지키나 보자. 못 지키면 역시 안 되는 거였다며 튀면 되는 거고, 지키면 나도 안전하고 영감님도 안전하고 여하튼 다 안전해진다.
“먼저 덤비는 놈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마.”
속된 말로 선빵 때리지 말라는 말이다. 물론 때릴 의도가 확실하다면 맞기 전에 조져도 좋고. 무조건 맞고 살란 말은 아니다.
어떠냐. 내가 내걸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너른 조건이다.
놈이 피식 웃는다. ‘무슨 조건인가 했더니.’ 하고 중얼거리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일단 그거면 된다. 놈이 미쳐 날뛰는 전조 증상으로 선빵만큼 확실한 게 또 있을까.
“네가 지키지 않으면 난 바로 튈 거야. 물론 비밀은 네가 약속 안 지켜도 남에게 털어놓을 생각 없으니 서로 깔끔하게 남남 하자고. 알았지?”
“…그래.”
저놈과 친구 되기 싫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어 마왕 꿈나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저 새끼가 아무리 친구 하나 사귀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멍멍이인 척해도 저게 불곰 새낀 줄 나도 알고 놈도 안다.
저 자식이 정말 나를 친구 삼고 싶어서 저렇게 행동하는 건 절대 아니다. 알고 있던 정보와 다른 변수를 곁에 두고 관찰할 속셈이겠지.
내가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걸 놈은 알고 있다. 그러니 수틀리면 내가 죽는다.
내 심정을 제리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친구 좀 만들고 사회생활 좀 하라고? 친구 사귀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다. 빌어먹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제리도 집사도, 심지어 기사 토멀린과 영감님까지 바라고 원했던 내 첫 친구가 생겼다. 게다가 영감님은 기특하고 고맙다며 내게 선물과 함께 편지도 보내셨다.
그렇다. 다들 내 첫 친구를 좋아했다. 나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