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랍스터와 스테이크
제국의 수도는 매우 크다. 왕과 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중앙이 가장 치안도 좋고 건물도 화려하다고 들었다.
그다음 잘나가는 영역은 행정구역과 상가가 있는 내성. 여기까진 나도 들어가 본 적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외성은 인구도 제일 많고 땅도 제일 넓게 차지한 거주 구역이다. 외성 밖은 노점과 거주 구역이 넓게 성벽을 둘러싼 형태로 발달 되어 있다. 내가 살던 움막도 여기, 외성 밖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인가마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갈색 머리는 내가 풍경을 볼 수 있게끔 차양을 다시 올려줬다. 다른 지역에 영토가 있는 영주라 할지라도 제국 내에 별장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블리스 역시 한 나라를 다스리는 가문이니 당연히 중앙에 있는 블리스가의 별장으로 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마차는 반대로 외성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설마 이대로 국경 너머 제후국 블리스까지 갈 생각은 아니겠지. 우리 어디 가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다. 침착한 척하자. 여유 있는 척해야 한다. 속에서 들들 볶는 내 조바심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는 호수를 낀 오솔길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마부는 오솔길 끝에 오롯이 선 푸른 지붕 저택을 향해 마차를 몰고 있었다.
잠시 후 간신히 마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기지개를 켰다.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한 시간 내내 앉아 있었더니 허리와 등이 다 뻐근하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다. 기사로 추측되는 저자들은 나를 부른 이의 눈이자 귀다. 앞으로 한동안은 혼자 있을 때조차 허투루 움직이지 못할 거다.
저택 현관 앞에서 백발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데리고 온 이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나 복장을 보아서 나를 부른 높으신 분은 아니다.
흐트러짐 없는 올백 머리와 꼿꼿한 자세. 교본에 그린 것 같은 집사다. 그래서 나는 고개 조아리지 않고 도리어 집사로 보이는 노인에게 다가가 태연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제후를 뵙기 전에 우선 몸을 씻어야겠소. 갈아입을 옷과 신발은 준비해 뒀겠지.”
하대에 가까운 내 요구에 노인은 도리어 허리를 숙여 절했다.
“이 저택의 관리를 맡은 노아라 합니다. 마땅히 요청한 사항을 준비해 뒀으니 시종을 따라가면 됩니다. 다만 그전에…….”
역시 집사 맞네. 집사 노아는 말끝을 흐리더니 내게 손을 내밀어달라 부탁했다. 집사의 손에는 가느다란 바늘과 속이 빈 시약 통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집사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일부러 내민 손가락이 몇 없는 내 손을 보고도 집사는 별 반응 없이 내 손가락을 찔러 핏방울을 시약 통에 받았다. 아마도 제후가 먼저 지시한 사항이겠지.
퇴로는 막혔다. 내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선을 넘고 말았다.
여기까지 와서 사실 나는 자허 블리스가 아니었다고 결론이 나면 쪽팔리는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내 목이 날아간다. 그것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씻고 보송보송해진 상태에서.
암울한 끝을 상상하고 서글퍼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당당히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시종을 뒤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좋아. 지금까진 괜찮았어. 여기까지 와서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못 먹어도 고다.
저택은 정말이지 컸다. 밖에서 봤을 때도 이 세계에서 보기 어려운 4층 건물이라 놀랐는데 안은 더 화려하다. 정중하게 안내해 주는 시종을 따라, 2층 계단을 올라가 곧 따뜻한 물이 가득 찬 목욕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속옷 하나 남김없이 훌훌 벗고 욕실에서 물을 끼얹어 몸을 씻었다. 다행히 목욕 시종이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욕실에 펌프가 아닌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개판이구먼. 이 세계관.
나는 낄낄 웃으며 샤워기를 틀었다. 스펀지로 몸을 문지르자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비누를 주워 문질러도 한참 거품이 나오지 않아 몇 번을 헹구고 다시 비누칠을 반복해야 했다. 헹군 물이 맑아진 후에야 나는 탕으로 들어가 몸을 풀었다.
근 10년 만의 더운물 목욕이다.
“와 시, 죽여준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물론 거짓말이다. 하고 싶은 거야 많다. 이왕 잘 사는 놈의 집에 왔으니 맛있는 것도 먹고, 누가 덮치거나 목을 썰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 없이 부드러운 침대에서 자고 싶다.
아니, 우선 치킨이 먹고 싶다. 치킨에 콜라나 달걀 풀어서 끓인 얼큰한 라면, 하다못해 찬밥에 김치도 좋다.
이대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다. 손톱 밑에 묵은 때까지 벗긴 후, 아쉬워하면서도 욕탕에서 일어났다. 하도 비누로 벅벅 문질렀더니 손발이 다 쪼글쪼글하다.
욕실에서 나오자 미리 준비한 건지 속옷과 셔츠 그리고 바지와 신발까지 가지런히 개어져 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나는 커다란 전면 거울 앞에 섰다. 제멋대로 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겼다. 그동안 제대로 거울을 보고 살았던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내 몸이 조금 낯설다.
자잘한 상처투성이 얼굴에 못 먹고 자라 뼈마디가 도드라진 앙상한 몸은 빈 쭉정이처럼 보이겠지. 열다섯 살치고 너무 작은가. 그래도 원판이 잘생긴 미소년이라 그런지 더러운 때를 벗기고 나니 제법 모양이 난다.
물기 남은 손가락으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윤곽을 그려본다.
“씻고 나니 확실히 잘생기긴 했네.”
이곳에서 떨어지고 얼마 후 간신히 지필묵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외전과 본편에서 확실히 기억나는 것들만 골라 적었다.
여기 오면서 가져온 종이 뭉치가 바로 그거다. 내가 정말 자허 블리스일까 싶어 준비한 것. 앞으로 10년 후, 마왕이 강림한 세상을 대비한 내 나름의 대비책들.
친구도 이웃도 없는 곳에서 비참하게 도둑질이나 하며 살다가 죽고 싶지 않아서 잊지 않으려고 매달린 기억들이 소용이 있을까.
“주인께서 기다리십니다. 이쪽으로.”
나를 욕실로 안내했던 시종이 욕실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내가 혼잣말하는 거 들었을까. 자기애가 넘쳐흐르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거 아냐? 여기서는 뻔뻔하게 나가야 덜 민망하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시종을 따라 또다시 복도를 지나고 회랑을 돌아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빌어먹게 큰 집이군. 구조를 상상했을 때 1층 중앙으로 보이는 커다란 방문 앞에 선 시종이 잠시 대기한 후 세 번 문을 두드렸다.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시종이 문을 열고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안으로 어서 들어가라는 암묵적인 요청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빛바랜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장신의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노인을 봤다. 노인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노인이 작게 입을 달싹거렸다. 확실히 노인과 내가 들어간 육체는 닮았다. 누가 봐도 피가 이어졌음을 알 만큼.
노인 앞에 놓인 거대한 나무 책상 좌우로 나를 데리고 온 갈색 머리와 노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집사가 서 있었다.
자, 그래서 핏방울까지 가져가서 내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자허 블리스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뒷골목 소매치기 꼬마인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노인이 헛웃음을 쳤다.
“내가 왜 너를 부른 건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지. 어디서 들은 말이 있어 허세를 부리는 거냐. 아니면 눈치가 빠른 거냐.”
“후계자를 찾던 것 아닙니까?”
“후계자라?”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특징 없이 청보라색 머리카락에 노란 눈을 가진 청소년을 찾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눈치가 빠른 거다?”
“제가 틀리진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래, 나는 잃어버린 내 핏줄을 찾고 있었던 것이 맞다. 그리고 많은 아이가 이 저택에 발을 들였지. 자그마치 햇수로 2년이다. 네가 이 다니엘 블리스의 하나뿐인 후계자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느냐?”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허, 전제가 잘못되었다?”
“양친께서는 제가 두 분의 얼굴을 기억하기 어려운 어린 시절 타계하셨고, 저를 돌봐주신 할머님은 제 출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유품은 받은 바 없으니 출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죠. 당신에게 전한 제 말은 모두 추측뿐입니다.”
“어디 계속 말해보거라.”
“저를 이곳에 초대한 것은 당신이며, 목적이 있는 것도 당신뿐입니다. 여기서 혈연임을 주장해야 하는 건 저입니까? 아니면 당신입니까?”
“내가 너를 데리고 왔으니 근거 또한 내가 찾아야 한다?”
“근거는 이미 찾으셨잖습니까? 혈액을 통해 직계를 확인할 수 있는 마법이 있음을 압니다. 마법을 통해 확인하셨기에 고작 고아인 저를 직접 대면하신 것 아닙니까?”
손끝이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이미 아는 정보에 사실과 추측을 끼얹으려니 안 돌아가는 잔머리가 핑핑 돌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렇다고 내가 사기 치고 있다고 이실직고할 수는 없잖은가. 미간을 찌푸린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어정쩡한 표정을 한 제후를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강녕하셨습니까. 할아버님.”
노인의 주름진 미간이 꿈틀거렸다. 태연한 낯을 하고 뻔뻔하게 노인의 시선을 마주 바라봤지만, 위장이 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외전에서 자허 블리스는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에 멍청이다. 그런 놈이 죽을 때까지 블리스가의 후계자로 남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허 말고는 후계자로 내세울 만한 혈족이 없다든지.
노인이 나를 건방지고 잔망스럽다고 생각하든 말든 내가 자허 블리스가 맞았다면 이 정도는 막 나가도 상관없다는 말이 된다.
내가 읽었던 판타지 소설을 보면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항상 자신만만하고 영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차피 여기도 소설 속인데 영리한 척이라도 보여줘야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흠, 제법 머리가 돌아간다는 말이 맞는군. 블리스는 블리스라는 말인가.”
그거 이미 당신 옆에 있는 갈색 머리가 비슷하게 했던 대사다. 뻔뻔한 영감님 같으니. 자기 얼굴에 금칠해도 유분수지. 블리스의 제후, 다니엘 블리스는 형형한 금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
“조금 더 상세한 대화를 하고 싶으시다면…….”
나는 느릿하게 말끝을 늘어뜨렸다. 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의아한 눈으로 영감님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뻔뻔하게 턱을 들고 마저 대답했다.
“정오가 지났으니 오찬을 함께 들며 할아버님과 대화를 나눌까 합니다. 추측이 틀렸다 하더라도 저는 블리스 제후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 온 객이니 그 정도 대접은 받을 수 있겠죠.”
“…하하하!”
기어코 영감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배고프다고 돌려 말한 게 마음에 들었나. 보자마자 제후쯤 되는 높으신 분에게 뻔뻔하게 밥 달라고 말하는 게 재미있었나 보지.
그렇지만 배고픈 건 사실이다. 난 성장기고, 어제저녁부터 굶었다고. 손님 모시고 끼니때 밥도 안 주는 귀족 집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영감님이 몸을 일으켰다. 뒷골목에서 들었던 자투리 정보를 모아보자면 이제 일흔 줄이 넘었을 텐데 체격과 신장이 옆에 대기한 갈색 머리 기사 못지않다. 역시 창의 블리스. 괜히 무사 집안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 식당으로 가자꾸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는 거리낌 없이 영감님 옆에 서서 걸었다. 나와 영감님 뒤로 집사 노아와 갈색 머리가 뒤따라온다.
그들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걷지 않고 영감님 옆에서 나란히 걸었던 게 정답이었다. 아무래도 이 영감님 내가 건방진 쪽이 마음에 든 듯했다. 날 보며 실룩거리는 안면근육을 숨기지 못하는 영감님을 바라보며 나는 궁금했던 걸 묻는다.
“블리스 가문의 인장이 걸린 마차는 일부러 보내신 겁니까? 제가 추측할 수 있도록?”
“그런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기사들의 임무를 방해하는 이가 없도록 엄포를 놓는 효과도 있었겠지.”
확실히 그건 그런 것이 미친소가 꼬리를 말 정도면 효과는 대단했다.
“교육은 받았나?”
“독학으로 제국어의 읽기와 쓰기, 그리고 지금 듣고 계신 대로 말하기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외는 배운 바 없습니다.”
“앞으로 배워야 할 것이 많겠군.”
“앞으로 배우게 해달라 요구할 것이 많을 겁니다.”
제국어를 쓰고 읽는데 익숙할 만하지. 『굴러라 용사님』이 국내 소설이라 그런지 제국어도 한글이거든. 제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 쓰는 언어도 한글일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는 지금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최소한 글은 쓸 줄 안다는 말에 영감님이 진중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긍정적인 반응이길 빌며 나는 태연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식당에 도착하고 다니엘 블리스 제후가 상석에 앉았다. 집사와 기사는 식당 앞까지 뒤따라온 후 식당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긴 테이블을 따라 의자만 12개가 넘는다. 나는 영감님과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아 빈 접시와 포크 나이프 세트를 살폈다.
이윽고 시종들이 수프와 부드러운 흰 빵을 가져와 우리 앞에 세팅했다. 영감님이 먼저 숟가락을 드는 걸 확인한 후 나도 숟가락을 들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테이블을 앞에 뒀더니 과거의 습관이 튀어나와 “잘 먹겠습니다.”라고 입 밖으로 말했다. 영감님이 수프를 뜨다 말고 허허 웃으며 “그래, 잘 먹거라.”라고 대답한다. 모르는 척 좀 해주지. 그걸 또 대답해 주냐. 민망함에 얼굴이 다 붉어졌다.
옥수수를 갈아 넣은 건지 수프가 달달 짭짤했다. 젠장. 너무 맛있다. 음미하며 맛보고 싶은데 입에 머금기도 전에 목구멍에 하이패스 단 듯 거침없이 식도로 내려간다.
빵을 집어 좌우로 찢자, 치즈처럼 속살이 쭉쭉 늘어진다. 갓 구워 따끈한 흰 빵에서 사람 잡을 정도로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겼다.
한 입은 아무것도 묻히지 않고 먹어본다. 푹신한 흰 빵도 수프처럼 소리 없이 사라진다. 안 돼, 젠장. 느긋하게 맛보게 해줘. 요동치는 뱃속으로 빵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최대한 천천히 씹어야 하는데… 결국 세 번 씹고 삼켰다.
다음은 잼이다. 과육이 살아 있는 부드러운 노란 잼을 작은 숟가락으로 떠서 빵 위에 얹어 먹는다. 와 미친. 상큼 달곰한 데다 과일 향이 살아 있다. 뜨끈한 빵 위에서 차갑게 녹아내리는 잼이 신의 한 수다.
빵 옆에 있는 발사믹 소스는 외면한다. 이것도 맛있지만 내 취향은 버터 더하기 잼이다.
그리고 이건 꼭 해보고 싶었다. 수프에 빵 찍어 먹기. 고소함 더하기 고소함은 최강 고소함이라, 옥수수 수프가 결 따라 촉촉하게 젖은 빵은 삼키기 아까울 정도다. 빵이 든 바구니를 텅텅 비우고 아쉬운 마음에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이후 도착한 건 내 얼굴만 한 스테이크다. 으깬 감자와 깍지 콩.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꾸덕꾸덕한 치즈와 브라운소스. 오오. 그리고 랍스터 님. 내 손목만 한 크기의 랍스터 님.
이곳에 떨어지기 전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봤던 것 같은 메뉴다. 맛은 그래서 짐작이 간다. 짐작이 가서 더 환장하겠다.
자잘한 톱날이 달린 육류용 나이프로 고기를 자른다. 나이프를 대기만 했는데 고기가 부드럽게 잘렸다. 미친. 손가락이 세 개뿐이라 나이프를 놓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염려가 없는 부드러움이다.
잘린 단면에서 뜨끈한 김이 난다. 고기 냄새다. 오오, 축복받은 고기 냄새. 침착하게 한입 크기로 자른 고기 위해 으깬 감자와 소스를 얹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서툴고 조잡하지만, 모양이나마 갖췄군. 식사 예절은 어디서 배웠지?”
말 걸지 마. 이 육체는 태어나서 처음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중이야,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입 안의 고기를 음미하다 삼켰다. 이가 닿기 무섭게 부드러운 크림처럼 으깨지는 고기에서 육즙이 흘러넘쳐 포근포근한 크림 포테이토와 섞여 숨넘어가게 맛있었다. 하… 최고다.
“신전에서 소정의 대가를 받고 우기와 건기에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습니다. 기본적인 식사 예절은 사제님들을 보며 배웠고, 지금은 할아버님께서 쓰시는 도구를 따라 쓴 것뿐입니다.”
“그런 것치고 제법이군.”
“교육을 받는다면 더 완벽해지겠죠.”
남의 일인 양 태연히 말하며 나는 썰어 둔 고기를 한 점 더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치즈와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였더니, 풍미가 폭발한다. 치즈 최고. 아스파라거스 최고. 어쩌면 난 이 고기를 먹기 위해 지금까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버텼던 게 아닐까.
아니다. 내게는 아직 랍스터 님이 남아 있다. 뜨거운 살은 희게 익었고 그 위로 허브 뿌린 짭짤한 버터가 지글지글 끓고 있다. 처음 먹은 기름진 음식에 내 뱃속이 지진 난 듯 꾸르륵거리고 있지만 알까 보냐. 죽어도 랍스터 님은 먹고 죽으련다.
침착하게 나이프로 흰 살을 가른다. 무슨 랍스터가 잘 익은 포도처럼 써는 감촉마저 탱글탱글하다. 이미 껍질과 분리를 해놓은 듯 살캉살캉한 살을 포크로 찔러 손쉽게 들어 올렸다.
입 안에 넣자 풍부한 해물 특유의 향을 허브 버터가 감싸며 춤을 췄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짭짤한 맛이 거의 맛의 축제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던 스테이크와 달리 랍스터 님은 씹는 내내 탱글탱글하셨다. 입 안에서 눈길 밟는 소리가 난다. 뽀득뽀득 뽀드득. 내가 육류보다 해물을 좋아했던가. 이젠 잘 모르겠다. 그냥 맛있는 건 다 좋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반 이상 남겼다. 더 먹으면 토할 것 같아서다. 빌어먹을 위장. 아쉬운 마음으로 시종이 가져온 상큼한 음료로 입가심을 했다.
나로서는 『굴러라 용사님』에 떨어진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영감님이 보기에 아쉬웠나 보다. 남은 음식에 영감님이 아주 조금 떨떠름함이 묻어 나오는 어투로 물었다.
“입맛에 안 맞던가.”
“더 먹으면 구토합니다. 이미 배앓이는 예정이고요. 맹물과 보리빵만 먹던 위장에 기름이 들어가면 어떠한지 아실 테죠. 맛이 너무 좋아 과식했습니다. 이 또한…….”
“먹다 보면 더 완벽해지겠지.”
내 말을 가로채고 영감님이 허허 웃었다. 전보다 안온해진 반응에 나도 옅게 따라 웃는다. 손주가 잘 못 먹어서 아쉬웠나. 그렇게 짐작해 보면 진짜 친할아버지 같은 반응이긴 하다.
“이제 당신께서 말할 차례입니다. 저를 부른 이유와 목적을 듣고 싶습니다.”
“목적이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영감님이 식사를 멈추고 그릇을 물렸다. 곧 시종들이 들어와 테이블을 정리해, 빈 테이블에 남은 건 두 잔의 음료뿐이다. 잠시 생각하는 듯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영감님이 입을 열었다.
“블리스가는 지난 200여 년간 한결같이 황제께 충성한 가문이다. 200여 년간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았고, 타락하지 않았지. 그러나 내 대에 와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영감님의 말을 경청했다. 윗배가 우르르 꾸르륵 요동을 치긴 했지만, 아직까진 버틸 만한 정도의 고통이었다.
“내겐 두 자식이 있었다. 아들놈은 속을 썩였지.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하는 짓이 도를 지나쳐 가문의 이름을 빼앗고 쫓아냈다. 그대로 집을 뛰쳐나가 멋대로 살다가 멋대로 죽어버렸다.”
“…….”
“딸은 성실했어. 후계자로 손색이 없는 녀석이었지. 결혼한 후 후사가 없는 것이 단 한 가지 문제였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었는데……. 재작년 큰 유행병이 돌았을 때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신심 깊은 사제도 그 병만큼은 치료하지 못하더구나.”
재작년은 참 좆같은 해였다. 제국 내에 역병이 돌아 벌이도 시원찮았고 뒷골목에서도 여러 명 크게 앓다가 떠났다. 내가 손가락 잘라 먹은 해도 그 해다.
맥락을 들어보니 영감님이 말하는 그 쓰레기 같은 아들놈이 내 아버지인 모양이다.
“쓰레기 행태를 버리지 못한 아들놈을 피해 녀석과 혼인한 이가 임신한 몸으로 도망쳤다는 소식 또한 들었다. 원할지 모르지만 도움을 주기 위해 행적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끝이었지.”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네가 일을 돕는 신전의 신관 중 한 사람이 우리 측에 제보를 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연배와 특징이 비슷한 아이를 한 명 알고 있다고 말이다.”
말인즉슨 후계자로 선점한 딸이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그나마 피가 이어진 나를 찾았다는 말이 된다. 친족 중에 대를 이을 만한 연배의 이가 없었겠지. 우연과 우연이 맞물렸나.
아니다. 쓰레기 같은 자허 블리스를 위한 작가의 설정이 준 안배일 것이다.
“철저히 배워야겠군요. 자허 블리스로서 이름을 알리고자 한다면.”
“교육열이 높은 건가. 아니면 나 듣기 좋아하라고 하는 소리인가. 나는 입에 단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싶었다면 할아버님 앞에서 입을 열지도 않았을 겁니다. 추측이 틀렸다면 당장 귀족에 대한 무례를 물어 치도곤을 맞아도 될 법한 행동들이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말하자면 저는 눈치가 빠르고 욕심이 있으며 하고자 하는 열망을 숨기려 하지 않는 오만함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흠…….”
“할아버님께서 단순히 잃은 피붙이가 그리워 소식을 듣자마자 저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자허는 블리스의 이름을 이을 만한 가치와 자질을 가진 사람이겠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
“그 대신 제가 요구하는 것을 주셔야겠습니다.”
“뭘 원하지?”
“가지고 싶습니다. 제가 마땅히 배워야 했던 모든 지식. 블리스의 창술. 저는 너무 오래 굶주렸습니다. 집어삼키게 해주십시오.”
“오만하구나. 블리스를 삼키겠다?”
아니 창술, 창술 말이야. 누가 앞으로 10년 후에 망할 블리스를 먹겠대? 나는 못 먹고 토할 정도로 과식하지는 않을 거다. 창술만 내놔. 내 몸 내가 지키게, 라고 영감님 보는 앞에서 말할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오해하게 내버려 두자.
“그걸 원해서 저를 부르신 게 아닙니까?”
“…그래 좋다. 네가 네 가치를 보여준다면 원하는 대로 주마. 로컬 아카데미는 입학 나이가 지나서 갈 수 없으니, 내가 직접 너를 가르치겠다. 그러니 우선 5년 후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어디 네가 방계의 다른 후계들과 다른 점이 있는지 보자꾸나.”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나는 턱을 들고 영감님의 눈을 응시했다. 원작 자허가 어떻게 이 영감님 밑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식대로 빌붙을 거다.
지난 10년간 뒷골목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 기회가 왔는데 인제 와서 뒷골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차피 제국은 마왕이 각성하면 망한다. 아니, 애초에 블리스 제후국은 ‘제국의 창은 불의에 꺾이지 않는다.’라느니 어쩌느니 깝죽거리다가 제국보다 먼저 망한다.
앞으로 몇 년. 블리스가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건 다 얻어먹고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운 후, 마왕을 피해 다른 나라로 튈 거다.
전쟁 좆 까라고 해. 난 마왕과 싸울 생각 없다. 그 먼치킨을 어떻게 무찔러. 숨어서 용사가 승리할 때까지 가늘고 길게 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허 블리스라는 이름은 놓칠 수 없다.
“간신히 얻은 배움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마땅치 않다고 여기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자허 블리스였으며, 앞으로도 자허 블리스일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생존 전략이었다.
* * *
점심식사가 끝나고 결국, 탈이 났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너무 많은 기름기가 들어오자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식은땀이 줄줄 나오고 배가 욱신거렸지만, 광대가 실룩거리며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집사 노아가 눈가에 미미하게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내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렇다. 내 방이 생겼다. 이제 움막에서 웅크리고 추위와 더위에 떨며 자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욕심을 부리긴 했지. 그래도 후회는 없……. 으윽… 배야.”
내가 머물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한 게 틀림없다. 방은 크고 깨끗했지만, 가구들은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쓰레기였다는 아들의 방이었을까. 말만 들었던 그가 내 아버지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난 생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긴 했어도 자허의 생을 온전히 내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느닷없이 소설 속에 들어왔으니, 또 몰라. 느닷없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잖아. 여긴 침대도 있고, 방에 딸린 화장실도 있고, 좋긴 하네.’
영감님이 치료를 위해 사제를 부르겠다고 말하는 걸 넙죽 고맙습니다, 라고 받아들였다. 고작 배탈 하나 고쳐주겠다고 치료가 가능한 고위 사제를 부르는 건 아닐 거다. 아무리 제후라고 해도 신전에 함부로 알력을 쓰긴 어려울 테고. 아마도…….
‘손가락을 고쳐주겠지.’
식사하는 내내 손가락 세 개 남은 내 손을 흘깃거리며 바라보던 영감님 시선이 생각나서 히죽거렸다.
『굴러라 용사님』에서는 포션의 개념이 없었다. 있어봤자 자양강장제뿐이고 포션 대신 사제가 치료를 도맡았다. 물론 그놈도 끝에 용사를 배신한다.
고위 사제님은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하는 것 빼고 외상은 다 치료할 수 있다. 손가락 정도야 금방 재생시켜 주지 않을까.
다음 날은 배탈을 핑계로 내 방에 누워 있었다.
먹다가 탈이 나면 역시 굶는 게 제일이라 온종일 먹은 게 물이 전부였다. 영감님은 확실히 바쁜지 오전에 한 번 내 상태를 보러 왔다.
오늘 저녁에 사제가 방문하기로 했다는 말에 조금 들떴다. 그래도 내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짬을 내 방문한 영감님이 내가 누워 있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묻고 갔다.
예를 들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와 뭘 하며 지냈는지 등등. 숨길만 한 것도 아니어서 전부 이실직고했다.
근력 체력 없는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야 한정적이다. 간단한 잡일과 청소, 막노동도 하고 소매치기도 했었고 남의 저택 담도 종종 넘었다. 어차피 영감님이 사람 풀어 추적하면 다 들통날 이야기다.
내가 소매치기를 좀 하긴 했어도 먹고 살자고 움직였지, 선량한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다. 물론 내 손가락 잘라간 빵집 주인 놈 이야기는 별개다.
잠시 짬을 내 대화라고 할 수 없는 내 생존 보고를 들은 것을 끝으로 영감님은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
해 저물 즈음 도착한 눈매 주름 깊은 사제님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빛께서 함께하시길. 살펴본 바를 그대로 말하자면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순수한 치료만으로 재생이 어렵습니다.”
배탈은 치료할 수 있었지만 뭉툭하게 잘려서 이미 아문 손가락은 치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미 상처가 다 나아 육체가 사라진 부분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라 했다.
“물론 다른 방법을 쓰면 재생할 수 있지만…….”
“재생시킬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써야지요.”
사제님을 모시고 온 덩치 큰 기사가 덤덤히 대답했다. 어제 날 데리고 저택에 왔던 기사 중 한 명이다. 영감님은 밀린 업무가 많아 집무실에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토멀린 울프라고 소개했다. 짐작했던 대로 톰은 기사였고 영감님의 명령에 따라 잠시 내 호위를 맡기로 했다.
“아문 상처를 절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치료를 받을 때 잘려나간 손가락이 함께 재생하게 될 겁니다.”
아마도, 라고 사제님은 말끝을 흐렸다. 확신을 못 하겠다는 뜻이구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확률이 얼마나 될지 몰라도 그게 뭐 어려운 일일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린 후 왼손을 내밀었다.
“자르세요.”
이 세계에는 항생제도 마취약도 없다. 사제가 다 해먹기 때문이다. 마약으로 마취약을 대신할 수 있겠지만 고귀하신 블리스가가 내게 그런 걸 허용할 리 없다. 환경과 생활양식은 현대인이었던 내가 살기 크게 불편함이 없을 정도인데 묘한 곳에서 고지식하다.
생각해 보면 복식과 관념은 근대 유럽에 가까운데, 상하수도 시설은 21세기 뺨치고, 심지어 샤워기나 양변기, 시멘트까지 있다. 왜 아직 증기기관이 나오지 않았나 이상할 정도다.
하긴 뭐, 어차피 소설 속 세상이다. 작가의 고증 한계겠거니 싶다.
토멀린이 흠, 하고 묵직한 숨을 내쉬고 검을 뽑았다. 경호하는 위치다 보니 톰은 내 방 안에서도 검의 패용이 가능하다. 나는 내 명령을 기다리는 톰을 잠시 바라본 후 고개 돌려 사제님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자르는 것이 가장 효율이 높습니까?”
“…아문 상처와 최대한 가깝게 절단하는 게 좋습니다.”
“설명은 들었겠지요? 사제님께서 준비를 마치시면 바로 자르도록 하세요.”
톰을 향해 소설에서 봤던 귀족 놈들처럼 말해봤다. 그래 봤자 흉내 내기지만, 앙상하게 마른 데다 병약해 보이는 어린 도련님이 자르느니 어쩌느니 하는 모습이 자극이 컸던 모양이다. 사제님은 내 어색한 존대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뭘 놀라고 그러시나. 이보다 험한 일도 많이 겪어봤는데, 없어진 손가락 재생이 가능하다면 손가락이 아니라 팔뚝이라도 자르겠다.
“준, 비됐습니다.”
더듬거리며 사제님이 대답하자, 톰이 숨을 들이마시며 내 손등을 잘랐다. 워낙 솜씨가 뛰어나 통증은 얼마 없을 줄 알았더니 미친. 아파서 신음이 절로 나온다.
어금니 뿌드득 물며 신음을 참자 곧장 사제님이 치료의 노래를 부른다.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며 없어진 새끼와 약지가 재생했다.
오. 역시 판타지. 배도 안 아프고 미미하게 몸에 남아 있던 근육통이며 이따금 욱신거리던 갈비뼈도 이제 안 아프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왼손을 들어 올린다.
“감사합니다. 제대로 자랐네요.”
“고통스러운 치료였을 텐데도 잘 버텨주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한 것이 있나요. 이곳으로 다이널 사제님을 인도해 주신 신의 안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위 사제쯤 되면 본편에서도 출현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이널 사제라,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그래도 본편에 나오는 놈들을 만난 것보다 더 기쁘다. 용사를 배신하는 본편 사제 놈에 비견할쏘냐.
나는 손을 쥐었다 펴보며 낯선 감각에 웃었다. 히죽거리는 내 모습에 사제님이 그제야 표정을 풀고 함께 웃는다.
완치는 되었지만 이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문 앞에서 사제님과 짧게 덕담을 나눈 후 침대에 누웠다. 사제님을 마차 타는 곳까지 배웅하는 건 톰의 몫이었다.
손이 생기고 의식주도 보장받았다. 그렇다면 영감님이 나를 후계자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잠이 들 것 같지 않아서 내 움막보다 더 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손을 쥐었다 펴보며 괴리감을 지우려 노력했다. 그런 나를 보며 톰이 무뚝뚝하게 축하를 건넸다.
“치료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도련님.”
“축하할 건 그것뿐이 아니죠. 돌아오신 것도 함께 축하해 주십쇼.”
습관처럼 툭툭 정제되지 않은 말이 튀어나온다. 뭐 어때. 아직 아무것도 안 배웠으니 내가 신경 쓸 것도 주의할 것도 없다. 그래도 영감님이 내가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다.
“할아버님께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주세요. 물론 아침 문안 때도 내가 직접 감사드리겠지만.”
제법 급이 높은 사제님을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해, 제후와 닮은 노란 눈의 제비꽃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을 치료하게 했다.
다이널 사제는 신전으로 돌아가 블리스 제후에게 후계자가 존재함을 알릴 것이다. 비밀리에 예절 교육도 좀 받고 다른 상식도 배우고 나서야 외부에 내 존재를 공개하지 않을까 했는데. 이제 막 하루가 지났는데 우리 영감님 추진력이 몹시 빠르다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수확도 서두르고 싶어 하지.’
앞으로도 마음 편하게 지낼 일은 요원할 것 같다. 피곤해서 일찍 누워야겠다고 말했더니 톰이 편히 쉬시라며 묵례하고 방 밖으로 나간다. 앞으로 몇 년은 배우느라 골머리가 썩겠구나. 나는 킬킬 웃으며 침대에 드러누워 뒤척일 일 없이 금세 잠들었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가볍게 몸을 씻고 있으려니 시종이 방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 주근깨와 비슷한 덩치와 키지만 눈매가 훨씬 더 순하다.
“이름이 뭐지?”
“제리 머튼입니다.”
웃지 않기 위해 잠시 천장을 노려봐야 했다. 기사인 톰과 시종인 제리. 이름 까먹을 리는 없을 것 같다.
나이를 물어봤더니 나와 같은 15세라고 했다. 하지만 키도 저 녀석이 더 큰 데다 이미 변성기가 오기 시작한 건지 목소리가 제법 굵직하다. 그래 봤자 순둥순둥한 눈매며, 바짝 긴장해서 얼타는 모습이 동갑 같아 보이기도 하다.
뭐 나도 잘 먹고 잘 자고 많이 움직이면 금방 키가 클 거다. 영감님도 장신에 거구였고 외전에서도 자허 블리스가 작다는 묘사는 없었다. 그러니까 부럽다고 생각하면 지는 거다.
아침식사는 영감님과 함께 먹었다. 사제님을 불러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곧장 음식에 집중했다. 하루하고 반나절을 꼬박 굶었더니 출출하다.
그래도 내가 또 배탈이 날 걸 걱정해서 그런 건지 아침이라 간소한 건지 오늘 식사는 묽은 토마토 수프에 표면에 소금을 뿌린 후 구운 버터 빵과 스크램블드에그가 전부였다.
스크램블드에그는 버터와 우유를 듬뿍 넣어 촉촉하고, 부들부들해 포크 대신 숟가락으로 떠서 먹어야 할 정도였다. 숨은 맛으로 치킨 스톡을 넣은 건지 감칠맛이 죽여준다.
버터로 촉촉하게 젖은 입 안에, 껍질이 버터 때문에 바싹하게 구워진 소금 빵을 결 따라 쪽쪽 찢어 밀어 넣자 온몸에 버터로 고소하게 녹는 것 같다.
입 안이 좀 느끼하다 싶으면 그때 토마토 수프를 먹는 거다. 껍질 벗겨 부드럽게 익은 상큼달달한 토마토에 가늘게 찢어져 들어간 소고기. 거기다 살짝 매콤한 것이 기름진 맛을 단번에 잡아준다. 새콤달콤에 고소짭짤을 번갈아 맛보니 중간에 멈출 수가 없다.
“배탈 같은 일로 연달아 사제를 부를 수 없으니 자허, 네 위장이 적응할 때까지 자극 없는 음식만 먹도록 해라.”
“덕분에 배는 물론 손의 상처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님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블리스의 창술은 손가락 세 개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았구나.”
판단을 유보했던 건가. 괜히 입맛이 떨어져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붙지 않았으면 좆될 뻔했다. 쫓겨나진 않았겠지만 이름뿐인 후계자가 되었겠지. 피붙이라고 봐줄 줄 알았더니 까탈스러운 영감님이다. 젠장.
생각했던 대로 영감님은 곧장 내 교육에 힘쓰라 명령했다. 영감님 따라서 나도 블리스 제후국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닌가 했는데 내가 아직 블리스의 이름을 달기 부족하기에 앞으로 교육과 거취는 이곳, 영감님네 별장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영감님은 별장에서 한 달 동안 블리스의 직계에만 내려오는 창술의 기초 식과 기본 검술을 가르쳐준 후 블리스로 돌아갔다.
영감님이 자리를 비울 때는 내 고모가 되는 에서스 블리스의 남편인 라울 미스트가 임시 섭정을 맡는다고 했다. 대리도 하루 이틀이지 영감님은 너무 오래 제후국을 벗어날 수는 없는 듯했다.
하긴 영감님이 돌봐야 할 이는 나뿐만이 아니다. 저렇게 보여도 제국을 수호하는 제후국의 왕이신 거다.
그래서 주어진 일정은 다음과 같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식사 후 예법, 언어학, 역사학을 배운 후 점심을 먹고 곧장 기본 근력 운동, 창술의 기초, 검술의 기초. 저녁식사 후에는 자유 시간이다.
이게 잘 짜인 커리큘럼인지 알 수 없어 처음 한 달은 시키는 대로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주 5일 수업하고 마지막 2일은 휴식 시간까지 준다.
왠지 공부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저녁식사 이후 미진했던 부분을 복습하거나, 가정 교사에게 부탁해 읽어야 할 교양서적을 찾아 읽었다.
이 세계의 풍습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 건축양식과 의복을 비롯해 음식 재료와 사람들 생김새만 서구의 것일 뿐, 예법과 상식은 근현대에 가깝고 문법과 어휘는 그냥 대한민국이다. 하긴 그러니 내가 적응하기가 쉬웠지.
다만, 적응이 쉽다는 거지 일정까지 쉬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에 나는 가정교사에게 물었다.
“제가 5년 후에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하는 게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도련님.”
“좀 더 수업을 늘려도 될 텐데요.”
“이미 저녁 휴식 시간에 도서관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블리스의 후계자답게 의욕도 매우 높고 학업에 적극적이십니다. 적합한 휴식은 머리가 더 잘 돌게 하니, 도련님의 수업은 이 정도가 적합합니다.”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귀족을 위한 학교다. 상인이나 노동자 계급은 나오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 하지만 왕족이나 귀족에게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관문이다.
제후나 귀족이 되기 위해서 로열 아카데미 졸업장은 필수인 데다 심지어 제국의 황족들도 모두 로열 출신들이니 그 권위는 말 다 했다.
각 국가에 있는 로컬 아카데미가 13세부터 19세 사이의 청소년을 가르치는 중등 교육 과정이라면, 로열 아카데미는 20세 이상의 청년들을 위한 대륙 내 유일무이한 고등 교육 기관이다.
그만큼 로컬 출신이 아니라면 시험 봐서 입학하는 게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도전한 미친놈이 내 가정교사다.
우리 영감님도 속일 만큼 머리 좋은 사기꾼인지, 아니면 근성과 노력이면 다 된다고 믿는 열혈 바보인지 애매모호할 정도다. 그래도 가르치는 대로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걸 보면 천재적인 족집게 강사 아닌가 싶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족집게 가정교사님과 한 달째 점심식사를 같이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바로 퇴근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해서 식사를 거절해도 된다고 말했더니 오히려 점심값을 굳혔다며 기뻐했다.
하긴, 우리 별장 주방장 솜씨가 어마어마하긴 하다. 어디서 돈 주고 사 먹고 싶어도 사 먹지 못할 음식뿐이니.
지금도 짭짤하고 달짝지근한 소스를 발라 껍질을 바싹하게 구운 오리고기를 맛보며 강의 시간을 더 늘려야 하지 않겠냐 묻자, 수업 내용도 잘 따라오고 있다며 교사가 칭찬했다.
수긍하는 척 버터와 우유에 푹 젖은 빵 푸딩을 스푼으로 잘라 입에 넣었다. 카라멜라이즈한 표면이 바삭 달달한데 숨긴 맛으로 희미하게 도는 약간의 시나몬 향에 물릴 일이 없다.
역시 맛있는 건 최고야. 씹을 새도 없이 스르륵 녹아버리는 단맛에 마음마저 노곤해지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블리스라 잘 배우는 게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대학 입시 준비한다고 하루 4~6시간 자고 공부했던 수험생의 영혼이 들어 있는 거라 가능한 것 같다.
예법과 언어학 그리고 역사학 모두 한 명의 가정교사에게 강의를 들었다.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이 족집게 강사의 이름은 데이벨 블랑. 변방 국가의 자작이지만, 작년에 로열 아카데미를 차석 졸업한 인재 중의 인재라는 소개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국가로 돌아가서 입신양명해야 했겠지만, 귀국 대신 보수 좋은 과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제 고국 드로젠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아서요. 왕께서 병상에 드신 것이 너무 길어진 탓이지요. 정치 싸움이 변질하여, 지금에 와서는 실력보다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차라리 때를 기다리며 제국에서 돈을 버는 편이 좋지요.”
솔직한 사람이다. 그나저나 어디서 들어본 국가의 이름이다 했더니 드로젠이다. 저기가 어디냐면 마왕이 태어난 나라다. 그리고 마왕이 되기 전 서자였던 그를 핍박한 나라기도 하다.
본편 소설이 ‘가장 먼저 소국 드로젠이 사흘 만에 멸망했다.’라고 시작해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당신 정도의 인재라면 제국에서도 충분히 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그것을 위해 가정교사 일을 맡은 것도 있습니다. 도련님을 무사히 5년 후 로열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시킨다면 블리스의 관리 자리를 주겠노라, 제후께서 약속하셨거든요.”
영감님 대단하네. 하나뿐인 손자를 아카데미도 보낼 겸, 로열 아카데미 차석 졸업생도 데리고 가겠다 이거지. 작게 감탄한 후 식사를 마쳤다.
가정교사를 배웅한 후 소화를 시킬 겸 『제국 연대기 - 화약 무기의 확산에 의한 근대 국가 발달의 원동력』을 읽었다. 그것을 본 시종 제리가 아부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하길래 허허 웃고 말았다.
“도련님은 쉬지 않으시네요.”
“아니, 충분히 책 읽으며 쉬고 있는데?”
“보통 쉰다고 하면 소설을 읽거나, 산책하거나, 낮잠을 주무시지요?”
아냐. 네가 대한민국 수험생을 못 봐서 그래. 더군다나 나는 일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귀족 후계자들은 10대 초반부터 각 나라에 설립된 로컬 아카데미에 입학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거기다 그놈들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을 거 아니냐고.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인재와 고위 귀족 후계자들이 득실득실한 로열 아카데미 가서 뒷골목 양아치인 거 티 나면 좆되는 건 나다. 젠장, 긴장했더니 옛날 말투 다시 나오는 거 봐라.
외전에서 자허 블리스는 마왕 꿈나무와 같은 기숙사 방을 쓴다.
난 절대 그 빌어먹을 인간 불신 먼치킨과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거나, 입학하더라도 외전의 자허 블리스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입학해야 한다.
영감님이 나를 후원해 주는 이유를 생각하면 전자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후자뿐이다. 외전의 자허 블리스는 꿈도 못 꿀 형태로 입학하기.
마왕과 같은 방을 쓴다니……. 나는 내 성격을 안다. 놈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시한폭탄 처리하는 심정으로 놈을 처리할 것이다.
젠장.
두 손으로 책을 움켜쥐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속이 시커멓게 썩어간다. 내가 굳이 성격을 억눌러야 할까. 미친 척하고 마왕 각성하기 전에 놈을 처리할까.
아니다. 죽이다가 실패해서 놈이 마왕으로 각성하면 내가 죽는다. 그리고 아무리 제후국보다 힘이 약한 변방 국가 서자 출신이라고 해도 왕족을 처리하다 들통나면 나도 좆된다.
역시 처음 계획대로 배울 수 있는 것 다 배우고, 얻을 수 있는 재물 다 얻어서 로열 아카데미 졸업하는 대로 졸업여행 간다고 영감님 속이고 도망치는 게 제일이다.
놈이 각성한 후에, 근 10년에 걸친 마왕과의 전쟁 속에서도 마왕의 손이 닿지 못했던 국가를 안다. 내 목표는 거기서 용사가 마왕 처리할 때까지 버티는 거다.
돈과 권력이 생긴 지금부터 소설 속 용사를 찾아 놈을 후원해서 하루라도 빨리 마왕을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쓰려면 지금 자유무역 도시 어딘가에 있을 용사를 찾아야 한다.
문제는 용사로 각성하기 전 녀석이 어떤 모습인지, 이름은 뭔지, 정확히 어디서 사는지 묘사가 두루뭉술하다. 그것뿐인가? 용사로 각성하고 나서도 용사는 그저 용사로 불렸다. 하다못해 마왕 놈도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마왕이 자신의 피를 인지하고 각성할 때, 용사도 빛의 신의 가호와 계시를 받는다. 마치 어떤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거미 인간이나 미국 대장처럼 일반인에서 영웅으로 역변하는 놈을 지금 시점부터 찾을 방법이 있다면 당장 나부터 알고 싶다.
“무술 수업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도련님.”
“늘 고마워, 제리.”
내 한숨 소리에 잠시 물러났던 제리가 경갑을 가지고 돌아왔다. 목덜미를 덮은 청자색 머리카락을 새의 꽁지처럼 질끈 묶었다. 긴 셔츠와 바지, 무두질한 가죽을 잘라 만든 보호대 및 그리브와 건틀릿을 착용한다.
제법 묵직한 가죽 갑옷에서 가죽 손질용 약품 특유의 고릿한 냄새가 났다. 이건 적응 못 하겠네. 목에 모서리가 쓸리는 어깨 받이를 가볍게 고쳐 입고 연무장으로 내려가자, 기사 톰이 가볍게 묵례한 후 곧장 단련을 지시했다.
내 훈련은 톰을 포함한 두 기사가 돌아가며 봐줬다. 영감님이 짬을 내 방문하는 날이면 그날 훈련은 직접 영감님이 봐주기도 했다.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평소와 다르게 관절이나 장기, 근육에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이 있으면 바로 말해주십시오.”
“없습니다. 괜찮아요. 그럼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순서는 아시겠죠. 달리십시오.”
체중에 갑옷의 무게를 더해 몸에 걸리는 부하를 더한다. 근육이 찢어지는 만큼 몸은 더 강해진다. 이것을 위한 가죽 갑옷 착용이다.
가볍게 몸을 풀고 곧장 연무장을 달렸다. 한 달 동안 잘 먹고 잘 움직였더니 근육과 살이 제법 붙었다. 그래 봤자 앙상한 쭉정이가 보통 몸이 된 것뿐이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도련님. 자세가 흐트러지면 관절이 상합니다. 의식하십시오.”
“알고 있, 후욱. 있습니다.”
호흡을 천천히 내쉰 후 마신다. 무릎이 상하지 않게 보폭을 일정하게 맞추고 등이 땀에 푹 젖을 때까지 달렸다. 그 후 수분을 보충하고 잠시 쉰다. 몸이 식을 때까지 쉬어서는 안 된다. 그 후 곧장 창술 수업이다.
블리스가의 창은 마상용 쐐기형 창이 아니라 언월도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검신이 두껍고 단단한 어린애 키만 한 장도에 검신보다 긴 손잡이를 달아, 휘두르면 그 소리가 바람을 베듯 날카롭고 내려찍으면 두개골과 숨통을 단번에 부술 정도다.
그녀들이 말하길, 나는 아직 블리스의 창을 들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그야 당연하지. 고작 한 달 배운 거로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 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좀 분했다.
이런 거로 분해 봤자 톰이 바라는 대로라는 거 아는데, 분한 건 분한 거라 시키는 대로 구르고 달리고 휘두르고 내지르는 중이다.
솔직히 나중에 전쟁이 벌어지면 데이벨에게 배운 인문학이 아니라 얼마나 잘 도망가느냐와 얼마냐 잘 싸우느냐가 생사를 판가름한다.
숨이 턱에 차 쓴 물을 두어 번 토한 후, 미지근한 물로 입을 헹구면서 나는 자신에게 합리적인 이유를 말했다. 공부는 못하면 그냥 못하는 거야. 그런데 약하면 넌 몇 년 후에 뒈져.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망할 마왕 새끼다.
놈의 과거사가 안타까운 건 안다. 그래도 나를 좆되게 만들 놈까지 동정할 수 없다. 팔다리가 달달 떨려도 이 정도는 괜찮다. 아직 움직일 수 있다. 지금은 뭐가 서투르다고 손이 날아가거나 목을 잘릴 일은 없다.
살아야 내 세계로 돌아갈 기회를 찾든지 할 것 아닌가. 난 남이 구르는 걸 안전한 곳에서 팝콘 먹으며 구경하는 게 좋지, 내가 구르는 건 싫다. 그러니 굴러도 편하게 배울 수 있는 지금 구른다.
이 악물고 창을 내찌른다. 다시. 무뚝뚝하게 외치는 톰의 말에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맘 같아서는 저녁식사 후 더 배우고 싶지만, 지금은 근육이 덜 여물어 더 움직이면 뼈가 상한다며 톰이 만류했다.
“지금이야 그렇죠. 몸이 완성되면 원하시는 대로 더 훈련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빨리 그리되었으면 좋겠군요.”
흐뭇하게 웃지 마. 기특하게 여기지 마. 악으로 이 악물고 한 번이라도 더 창을 휘둘렀다. 결국, 오늘 예정했던 훈련에서 조금 더 훈련한 후, 반쯤 기듯 후들거리는 몸을 끌고 욕탕으로 들어가 씻는다.
가장 기본이 되는 몸의 기초를 만드는 데 반년이 걸렸다.
거울에 비치는 몸이 처음 여기 왔을 때와 비교하자면 제법 사람 꼴이 난다. 이제는 기름진 걸 먹어도 속이 뒤집히지 않았다. 그뿐이랴, 다 내 뼈와 살로 갈 모양인지 먹는 양도 두 배 이상 늘었다.
욕조 안에서 반쯤 졸다시피 하다 기어 나왔다. 피곤해도 쉴 틈이 없다. 눅눅하게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바로 호흡법을 단련했다.
제국을 수호하는 여섯 가문 중 하나인 창의 블리스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대신 기를 운용해 신체를 강화할 줄 알았다.
직계 자손에게서만 이어지는 이 호흡법은 오로지 블리스의 혈족에게 맞춰져, 호흡법을 단련할수록 블리스의 육체를 보다 강인하고 튼튼하게 담금질한다고 했다.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기 전 영감님이 독대하며 알려주신 호흡법이다. 못해도 하루 한 시간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수련한 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평소에도 이 호흡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했다.
그 ‘때’라는 건 블리스의 혈족이라면 누구나 알게 된다고 말이다. 판타지가 아니라 무협 소설에서 나올 법한 설정이지만 깊게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하면서도 이게 도움이 되나 싶다. 외전의 자허 블리스는 마왕을 배신한 대가로 정말 처참하게 깨졌다.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만 믿고 노력은 전혀 안 한 쓰레기일지 몰라도 놈 역시 고작 5년 집에서 공부해서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간 놈이다. 재능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영감님이 달마다 보내주시는 용돈은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아두기로 한다. 어차피 옷이나 비품들은 모두 집사 노아가 사들여 줬다. 배울 게 너무 많아 저택 안에 들어온 이후 승마 수업을 빼고는 저택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노아는 내 승마 수업을 위해 말을 한 마리 더 들여오길 원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어차피 격일로 한 시간씩 배우는 거, 살아 있는 생물을 내 것이라고 들여오기가 부담스러웠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