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말하자면 모든 일은 한 편의 판타지 소설에서부터 시작했다.
소설의 제목은 『굴러라 용사님』이었다. 내용은 마왕을 무찌르는 영웅 서사물이었고, 콘솔 게임이 떠오르는 제목과 다르게 분위기가 제법 무거웠다. 내가 기억하기로 소설 소개 글은 이러했다.
주인공이 많이 구릅니다. 호구라서 더 구릅니다.
고구마 주의. 적이 먼치킨.
결론은 해피엔딩.
‘역경과 고난’. 내 일이 아니라면 얼마나 즐거운 문장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후에 승리가 보장된 영웅 서사라면 더더욱.
작가의 설명대로 이 소설에 먼치킨은 최종 보스인 마왕뿐이었다. 주인공인 용사는 적에게 얻어터지고 온갖 역경에 휘말렸으며,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과 사기를 당했다.
근본이 선해 빠진 놈이라도 하드코어 난이도를 동료의 배신을 밥 먹듯 겪으며 10년에 걸쳐 공략하다 보면 천하에 둘도 없는 개새끼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용사 이놈은 보통 호구가 아니었다. 초특급 호구였다. 죽을 만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다신 속지 않겠다고 이를 갈아놓고도, 누가 조금이라도 잘해주면 금방 호구가 되는 꼴이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속은 거로 부족하냐, 그 새끼도 곧 너를 배신할 거야. 내가 낄낄거리는 중에도 아주 조금씩 용사는 성장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 용사는 최후의 전투에서 빛의 신의 가호를 받아 마왕을 쓰러트리고 승리했다. 싸우는 도중 처맞고 구르느라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말이다. 결국, 어떤 동료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채 용사 홀로 이룬 업적이었다.
뭐야. 결국, 이기긴 이기네. 목숨줄 질긴 거 봐라. 운빨 근성물이냐. 감탄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상념에 괜히 싱숭생숭해져, 나는 슬쩍 남은 편수를 확인했다.
후기를 빼면 남은 건 세 편. 후일담이 나오려나 상상하며 다음 장을 결제한 게 문제였다. 이 빌어먹을 작가는 써야 할 후일담은 쓰지 않고 마왕의 과거 이야기를 외전이라고 올려 뒀다.
어떤 약소국가의 서자로 태어난 마왕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에게 갖은 핍박과 폭력을 받았음에도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호구로 성장했다.
인간일 때 친구의 배신과 모략에 시달렸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모친인 왕의 명령으로 쓰레기 같은 오합지졸 기사들을 이끌고 마족들을 소탕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읽으면서 생각했던 거지만 이거 작가 취향이 호구인 것 같다.
글의 마지막은 자살과도 같은 행군의 끝에서 절망을 먹이 삼아 자신의 아버지였던 마족의 피를 각성하고 마왕으로 다시 태어나는 내용이었다.
뭐야 이 새끼. 맞수끼리 닮는다더니 용사 판박이네.
사실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었다, 라는 서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나는 찝찝한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아니 이게 뭐야? 알고 보면 마왕은 불쌍한 놈, 용사는 호구 새끼란다. 믿었던 동료는 하나같이 배신을 때리고 용사의 생사는 불분명한데, 후일담을 안 써서 독자들이 마왕이 쓰러진 이후 세계를 훔쳐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 작가야. 떡밥 회수는 왜 안 해. 빌어먹을 국왕이 권력 분산을 염려한 나머지 마왕을 쓰러뜨리고 귀환할 용사 처리한다고 암살자들 파견했잖아.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성직자 동료 새끼가 용사 음식에 조금씩 독 넣었다는 묘사는 왜 했는데. 이종족의 섬에 인간 군대 쳐들어간 건? 용사 도와준 다른 종족 친구들 다 죽은 거야?
그러나 내용은 그게 끝이었다. 후기가 올라온 게 작년 초였으니 근 1년간 업로드가 없던 작품이다.
연재 분량 300편 이상 되는 작품 중 완결 난 소설만 골라 봤던 내가 잘못한 건가. 후기를 찾아봐야 했나. 스포일러를 피하려고 별점과 선작만 체크한 내가 호구인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뭐 어때. 뭐라 해도 시간 때우기 좋은 소설이긴 했다. 내일 다른 거 읽지 뭐. 판타지는 질렸으니 퓨전 무협이나 찾아볼까 생각하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굴러라 용사님』 세상에서 눈을 떴다. 그것도 진짜 내 몸이 아닌 비쩍 마른 7살 고아 꼬마의 몸으로.
* * *
소설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성인이었던 내가 앙상한 꼬마의 몸으로 눈을 뜬 게 자그마치 7년 전 일이다.
거울을 보면 연한 청자색 머리카락에 노란 눈을 지닌 상당히 준수한 소년이 비친다. 좀 마른 데다 지저분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사나워 보이지만 말이다.
빙의 후 7년이 흘러 이제 15세가 되었다. 어찌 보면 회춘이라고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내가 들어온 세상이 『굴러라 용사님』 세상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 세계는 약 10년 후 마왕에 의해 멸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류는 다 죽어 나갈 것이다. 내가 지금 머무는 제국은 물론이고 주변 큰 국가도 다 멸망한다. 살아남는 국가는 극동 작은 공국 몇 개와 이종족들이 거주하는 섬나라뿐이다.
불길한 예언을 지껄이는 외눈박이 예언가 같지만 이게 내가 처한 현실이다. 남은 수명이 앞으로 10년뿐인데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심지어 미래도 불투명하다. 생각할수록 앞날이 막막해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움막 밖으로 나갔다.
멸망이 10년 후면 뭘 해.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 굶어 죽을 판인데.
여하튼 빙의고 자시고 사람이 당장 춥고 배고프면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게 되기 마련이다. 무슨 수를 써도 돌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고 혹시 하는 마음으로 쥐고 있던 희망의 불도 서서히 꺼져 갈 때쯤,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체득했다.
젖먹이였던 나를 주워 길러주신 움막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항상 보라, 제비, 애송이, 심부름꾼, 날치기였다. 별명은 차고 넘치게 많아도 하층민 출신이라 성은 없다.
빙의한 그때부터 15살이 된 지금까지 나는 고아였고, 소매치기였으며, 뒷골목의 제법 머리 잘 돌아가고 입 무거운 심부름꾼이었다.
“야 빌어먹을 보라. 너 이름이 자허냐?”
이른 새벽, 움막에서 나오자마자 난데없이 주근깨가 얼굴을 들이밀며 내게 시비를 걸었다. 내 이름이 자허긴 하다만, 주근깨 놈이 내 이름을 물을 이유가 없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부터 날 돌봐준 움막촌 할머니와 올해부터 인두세 받으러 온 하위 관리 말고는 아무도 날 자허라고 부르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주근깨 이름을 모르듯, 놈도 내 이름도 모를 거다.
“그건 왜 물어.”
“자허 맞나 보네……. 누가 너 찾아왔다는데? 또 무슨 사고를 친 거냐.”
“사고 친 거야 많지. 근데 최근에 들킬 만한 일은 없었는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던데. 미친소 놈도 너 찾는 사람들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고 하더라고. 여하튼 너 튀면 움막촌 다 쑥대밭 될 거 같으니 잠자코 기다려.”
“뭘 저질렀어야 덜 억울하지. 여하튼 도망갈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미친소에게 전해.”
나를 찾아다녔다는 주근깨의 말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놈이 말해준 내용이 심상찮다. 미친소가 얌전하게 굴었다고? 이 구역을 관리하는 미친소는 하급 관리가 와도 으름장을 놓는 막 나가는 놈이다. 더불어 으름장을 놔도 처맞지 않을 정도의 힘도 가지고 있다.
나를 찾았다는 놈이 중급 관리쯤 된다면 미친소도 설설 기겠지만 그런 놈들은 더럽고 위험한 뒷골목에 직접 찾아오지 않는다.
오늘 지나면 소리소문없이 뒈지는 거 아니냐며 주근깨가 날 보고 히죽거린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뭘 저지른 뒤면 차라리 이해나 하지, 요즘 들어 꼬리 잡힐 만한 짓을 한 적은 없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전문적으로 칼 밥 좀 먹은 녀석들 같다던데. 너 귀족 놈 주머니 턴 거 아냐?”
“요즘 신전 일 돕는다고 얌전하게 지낸 거 모르냐? 비켜, 가서 일해야 해.”
“그거야 알긴 아는데. 신전 가는 척하고 튈 줄 누가 알아.”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지금도 일하러 나가는 중이었는데 주근깨가 막는 걸 보면 오늘 일은 공쳤다. 젠장, 신전은 일을 구하는 데 까다로워서 무단으로 빼먹거나 하면 다음부터 일자리를 주지 않는데…….
나는 뒷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내가 최근 한 일을 되짚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엔 칼 밥 먹은 새끼들이 찾아올 짓은 한 적 없다.
“대놓고 자허라는 이름의 청보라색 머리 꼬마를 이 근처에서 목격했다고, 네 특징을 알고서 잘도 찾더래. 그래도 미친소 아래 있던 애 중의 하나가 움막촌 할머니가 돌보던 애라 그놈들에게 네 이름인 줄 알고 냉큼 대답했다더라.”
“미친소가 날뛰었겠는데?”
“자기에게만 말해야 하는 걸 외지인에게 술술 말했다고 길길이 날뛰긴 했지. 물론 그 자식들 안 보는 틈에.”
미래를 알아봤자 나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라 전혀 쓸모가 없다. 좆같네. 차라리 튈까.
머리를 열심히 굴려도 마땅한 수가 없다. 내가 가진 『굴러라 용사님』의 정보는 앞으로 10여 년 후에나 써먹을 수 있는 것들뿐이다.
솔직히 내 상황에 마왕이 강림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기껏 소설 속으로 들어왔는데 알고 있는 정보가 얼마 없어서 불행하다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거칠게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 걸까. 당연히 불행하지. 불행하고말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새끼를 왜 찾는 거야. 젠장.”
나는 고개 숙여 창백하게 거스러미 일어난 왼손을 바라본다. 지금 왼손에 남은 손가락은 세 개뿐이다. 두 개는 재작년에 빵을 도둑질하다가 들켜서 잘렸지.
손목이 잘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위안하는 대신 나는 함정을 파서 내 손가락 자른 빵집 주인 놈의 다리를 부러트렸다. 물론 그보다 더 심한 짓도 이곳에 떨어진 이후 아주 가끔 해봤다. 솔직히 말하면, 종종.
법과 문명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던 지난 생은 잊고 나는 빠르게 이곳에 적응했다. 여기는 그래도 상관없었고,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여도 관리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고, 먹고 살려면 상식과 도덕은 버려야 했다. 내가 법을 지키며 살았다면 일찌감치 굶어 죽었거나 나 같은 미소년의 엉덩이에 환장하는 새끼들에게 끌려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았을 거다.
찾아온 놈에 대한 정보를 주근깨에게 물어봤지만, 주근깨는 전혀 모른다는 눈치로 어깨를 으쓱했다. 직접 만난 건 미친소뿐인 듯했다. 빌어먹을.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최근 한 달은 뒷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신전에서 잡일을 했다.
신전은 해마다 건기와 우기에 청소를 도와줄 일용직 노동자를 구했다. 몸은 고달파도 음식과 돈을 떼먹히지 않고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신전에서 주는 것만큼 제대로 된 일은 이 근처에서 구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난 어제까지만 해도 성실한 노동자였지. 뭐지,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에서 날 고발할 일은 하지 않았는데.
해야 할 말을 다 전달해 놓고 주근깨는 제 영역으로 돌아가기는커녕 히죽거리면서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거다.
놈을 밀치고 달아날까 생각해 봤지만 그래 봤자 이 골목은 미친소의 앞마당이다. 분명 어디선가 나를 몰래 감시할 놈들이 있을 거다.
“사실은 말이지. 널 찾으러 온 사람들 말이야. 곧 여기 도착할 거야.”
“…개 같네.”
“그래서 미친소가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네가 뭘 알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서 말이야. 근데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혹시나 했더니 역시 아니었다. 주근깨는 내게 상황을 말해주기에 앞서 결국 나를 감시하러 온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야 도망칠 생각 없어. 사실 어디서 온 건지 아예 짐작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뭔데? 정말 널 찾아온 놈들이 누군지 알아? 왜 찾아오는 거야?”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냐?”
이번에는 주근깨 대신 내가 실실 웃었다. 주근깨의 콧잔등이 일그러지는 꼴이 우습다. 미친소 귀에 들어갈 게 뻔한 이야기를 내가 왜 주근깨 놈에게 해주겠냐. 그렇다고 놈을 놀리려고 허세를 부린 건 아니었다.
주근깨 놈이 나를 채근할까 말까 티가 나게 망설이는 사이 내가 사는 움막 근처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체구를 가진 무뚝뚝한 표정을 한 여자가 둘. 더군다나 둘 다 고리 갑옷을 입고 있어서 움막이 줄지어 설치된 넓은 공터가 순식간에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안 건지 헤매지 않고 곧장 내게 다가와 나를 내려다봤다.
“네가 자허인가.”
가장 앞에 서 있던 갈색 머리 여자가 내게 이름을 물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불리기 어려운 본명을 오늘 참 많이 듣는다 싶었다.
제국민 등록소에나 적혀 있을 내 이름을 부를 만한 사람은 하급 관리뿐이지만, 올해 상반기부터 내야 할 세금은 이미 냈으니 하급 관리가 여기까지 날 찾아올 이유가 없다.
그보다 하급 관리는 이 정도 위압감은 내지 못한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은 기세가 제법 무시무시하다. 설마 병사가 아니라 기사인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아는 걸 묻는 건 무슨 심보지? 그래. 내가 자허 맞아.”
‘야 너 미쳤어?’라고 말하듯 주근깨가 내 옆구리를 빠르게 찔렀다. 놈이 걱정하는 건 내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일 것이다. 내 알 바냐? 나도 내 목숨이 아까워서 이러는 거다.
만약 반말을 지껄이며 건방지게 굴었다고 놈들이 나를 제압하려 들면 곧장 꼬리 말고 달아날 속셈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내 하대에도 나를 흠씬 두들겨 패는 대신 묵인했다.
그렇기에 나는 오래전 폐기 처분한 가설 하나를 되살렸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따라와라.”
“잠깐 기다려. 가지고 와야 할 물건이 있으니까.”
어찌할 바 모르고 서성거리는 주근깨는 무시하고 다시 내 움막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챙긴다. 가지고 있는 게 얼마 되지 않지만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있었다.
면 주머니 안에 삭은 종이 한 뭉치를 밑바닥에 욱여넣었다. 숨겨둔 동화 세 푼, 혹시 모르니 이것도 챙기고,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부터 정리하자. 두 번째 판도, 그리고 세 번째 판도 이기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자허, 자허 블리스.’
내 기억이 맞았다면 외전에는 자허라는 이름을 가진 조연이 한 명 나왔다.
정식 이름은 자허 블리스. 제국을 수호하는 여섯 제후국 중 하나인 블리스의 후계자다. 제비꽃 같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을 가진 잘나빠진 미모의 소유자지만 성격은 음습하고 비열하며 악하다.
외전에서 역할은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 마왕의 하나뿐인 친구였지만, 알고 보면 제 안위를 위해 이간질과 박쥐 짓, 배신을 서슴지 않는 놈이었다.
이 새끼에게 크게 배신당한 마왕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그 대가로 외전 소설 말미쯤에 마왕에게 무참하게 죽는, 외전의 고구마와 사이다를 맡은 역할이다.
그러니까, 나도 자허고 그 새끼도 자허다.
이름과 머리카락 색 그리고 눈 색이 같다. 더군다나 잘생긴 것도 같다. 어쩌면 고아인 자허는 귀족 출신일 수 있다. 어쩌면… 악당 자허 블리스의 과거가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던 쓰레기였을지 모른다.
설정만 보자면 내가 그 자허 같지만 빌어먹게도 나는 이 가설을 오래전에 버렸다.
청자색 머리카락과 금안은 흔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볼 수 있는 조합이다. 사실 번화가를 돌아다니면 색상환표를 흩뿌려 놓은 것처럼 온갖 머리 색을 다 볼 수 있는 이 세계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그 잘나빠진 귀족 놈이라고 어떻게 생각하겠냔 말이다.
“좋아. 챙길 건 다 챙겼어.”
갈색 머리 여자는 내가 소중히 품에 안은 거적때기 같은 면 주머니를 보고도 별말 하지 않았다. 턱짓으로 따라오라 말하며 자연스럽게 두 기사가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앞뒤에서 내 퇴로를 막았다.
골목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갈색 머리 여자는 나를 마차에 태웠다. 화려함보다 실용성에 맞춘 듯 장식이라고는 마차 문에 덧댄 쐐기 모양의 창뿐인 튼튼한 사두마차지만, 시트는 제법 푹신했고 흔들림은 적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후에 창밖을 바라봤다. 내 옆에 앉은 갈색 머리가 짧게 혀를 차고 검붉은 차양을 내려 내 시선을 가렸다. 나는 피식 웃고 창에서 조금 떨어진 채 갈색 머리에게 물었다.
“나를 데리고 오라 명령한 분이 공손히 대하라 명하진 않으신 모양이지?”
“…그분 앞에서는 입조심을 하는 게 좋을 거다.”
“더럽고 냄새나는 양아치가 겁먹고 소심하기까지 하면 블리스의 제후께서도 못마땅하게 여길 것 같은데. 하다못해 기죽지는 말아야지.”
갈색 머리 눈에 이채가 어렸다. 내가 뭘 알고 있나 의아한 눈치에 나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뻔뻔한 낯짝과 달리 내 뱃속에서 희열이 뜨거운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놈들은 일부러 가문의 장식이 그려진 마차를 몰고 왔다. 쐐기 모양의 창은 여섯 제후국 중 하나인 블리스의 문장이다. 갈색 머리는 제후를 언급하는 내 말에 뭔 미친 소리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에서 나는 긍정을 읽었다.
정말 블리스가 나를 찾은 것이다.
“당신 역시 앞으로 당신이 모셔야 할 이가 소심한 겁쟁이라면 암담할 것 아닌가.”
“…뭘 알고 있는 거지?”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
틀린 말은 아니다. 앞으로 10년 후 제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사실을 말하고 있기에 내 눈빛은 단호했고 갈색 머리는 되레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찾은 건가.”
진짜 저런 말을 중얼거리는 놈이 있다니. 여기가 소설은 소설인 모양이다. 그래도 갈색 머리의 말에 나는 내 추측대로 상황이 흐르고 있음을 확신했다.
의미심장한 척 잘했어. 당신, 완전 식상하고 판에 박힌 한마디였지만 잘했다고. 아예 대놓고 블리스의 후계자 후보를 모시러 왔습니다, 라고 말해주면 더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