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 햇살이 맑은 어느 날 아침. 페로렌은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침실로 들어섰다. 언제나 혼자서 잠들던 자신의 방이었지만 오늘따라 웬 사내 하나가 그녀의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를 깨우러 다가가는 페로렌의 발걸음은 어쩐지 가벼웠다.
“뭘……. 일어나. 식사해야지. 아직도 자……?”
뭘은 자신을 흔들며 깨우는 페로렌을 침대 위로 확 잡아당겼다.
“앗?!”
끌어안은 페로렌의 몸에선 은은한 로즈베리 향이 묻어났다. 움직일수록 강하게 끌어안는 뭘 때문에 페로렌은 옴짝달싹 못 하고 그대로 안겨 있어야만 했다.
“으, 숨 막혀 뭘. 이제 그만하고 빨리 일어나. 밥 먹어야지…….”
“으음, 향기 좋다. 이쁜 우리 아가씨. 우리 이제 부부잖아요. 여보라고 불러봐요. 아니면 안 놔줄래…….”
신혼의 깨소금이란 이렇게 달콤한 맛이었던 걸까? 페로렌은 어리광부리듯 말하는 뭘의 행동에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 그럼 너도 아가씨라는 호칭 말고 다른 걸로 불러줘…….”
“알았어요. 사랑하는 우리 여보. 당신도 빨리 불러 줘요.”
긴장된 얼굴로 한 차례 목을 푼 페로렌은 뭘의 귓가에 속삭였다.
“식사하세요. ……여보.”
스스로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여보라는 한마디에 페로렌의 볼은 앵두처럼 새빨개졌다. 하얀 피부 덕에 대비되는 홍조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뭘은 그런 페로렌이 사랑스러워서 더욱 세게 껴안았다.
“또 얼굴 빨개졌네. 마지막으로 뽀뽀해주면 일어날게요. 여보.”
“으휴……. 진짜……. 알았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뽀뽀해주면 일어나서 밥 먹어야 해?”
페로렌은 설레는 마음을 감싸 안은 채 눈을 감고 슬며시 입술을 내밀었다. 작고 보드라운 입술이 맞닿는 그 순간.
머리를 콩! 부딪히는 작은 충격에 페로렌의 달콤한 꿈은 한순간 흩어져 날아갔다.
‘아……. 안돼……. 좋은 순간이었는데.’
뭘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2달 여의 시간이 흘렀다. 페로렌에겐 여전히 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한 달 전까지는 어떻게든 잊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짙어지는 뭘에 관한 기억에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생생한 꿈이었는데 이대로 깰 순 없어. 잠들어라. 잠들어라…….’
오랜만에 좋았던 흐름의 꿈이었다. 그 때문에 페로렌은 잠에서 깬 직후부터 줄곧 눈을 감은 채 꿈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한 번 깨버린 잠이 다시 들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결국 잠들지 못한 페로렌은 다음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눈을 떴다. 그런데…….
‘어……?’
눈을 뜨고 보니 누군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올려다보니 그것은 분명 뭘이었다.
‘아직도 꿈인가?’
역시 그 생각이 가장 타당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은 뭘이 자신의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아무렴 좋았다. 그렇게 보고 싶던 뭘이 가까이에 있으니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페로렌은 살며시 손을 뻗어 뭘을 꼭 끌어안았다. ‘좋다’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곁에 있을 때는 몰라도 없어지고 나면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 순간이었다.
뭘은 살며시 눈을 떴다.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듯 자신을 내려보는 얼굴에 페로렌은 싱긋 웃었다.
“꼭 진짜 같네……”
이토록 생생한 꿈이라니 곧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했다.
“아가씨……? 나 왜 여깄죠……?”
“아가씨 말고… 아까처럼 불러줘……. 여보…. 라고…….”
“여보……?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아가씨 꿈꿔요?”
심상치 않은 뭘의 반응에 페로렌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손을 뻗어 뭘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그러자 뭘은 방이 떠나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오 아파……! 갑자기 뭐 하는 거예요? 아가씨?!”
믿을 수 없었다. 이 반응은 진정…….
“뭐, 뭘이야……?”
“예?”
“너……. 진짜 뭘이야? 진짜 뭘 맞아?!”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당연히 저죠! 제가 뭐 가짜도 있어요? 이런 말을 저번에도 했던 것 같은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에 페로렌의 굳어가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흐으윽…….”
페로렌은 울먹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뭘을 향해 뛰어가 그 품에 와락 안겼다.
“으아아아앙! 뭘……! 진짜 뭘이야……. 아으아앙…….”
난데없이 품에 안겨 오열하듯 눈물 콧물 쏙 빼는 페로렌의 모습에 뭘은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반사적으로 페로렌을 달래듯 등을 토닥여주었다.
* * *
부담스럽게 꽂혀 드는 여러 개의 시선이 밥숟가락조차 못 들게 한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사람 중에 셀리안이 가장 먼저 총대를 메고 묻는다.
“뭘님……. 어떻게 된 거예요……?”
역시 그 질문인가…….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그러니까 내가 돌아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 열심히 일하고 있던 내게 어느 날 임조윤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이성열의 지인이자 서비스를 종료한 플리엔젤의 개발자였는데, 내 덕에 아버지의 원한을 풀 수 있게 돼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왔다.
그는 나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극구 사양했다. 딱히 누군가의 원한을 풀 의도로 했던 일도 아니고, 내가 그에게 보답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간단히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던 와중에 내가 하던 그 게임이 다시 오픈할 거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거기서 나는 눌러둔 물욕을 다시 꺼내 보였다.
게임 개발자라면 죽은 내 캐릭터를 살리는 것쯤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에게 민폐 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어차피 퇴사하는 마당에 뭔들 못 해주겠냐는 시원스러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게임이 재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게임을 켰을 때 내 캐릭터는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복구돼 있었고, 페로렌의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된 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이 사실을 나를 둘러싼 여인들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으니. 에둘러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는 언제까지 붙어있을 건데요?”
페로렌은 내가 돌아온 경위를 설명하는 내내 한쪽 팔을 붙잡고 붙어있다. 이렇게 강아지 같은 구석이 있었나 싶네.
“그, 그야! 안심이 안 되니까! 아직도 돌아온 게 믿기지 않는데…….
“저 어디 안 간다니까요. 이제부터 아가씨 옆에 항상 있을게요. 그럼 됐죠?”
“안 됐어. 믿음이 안 가?”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요……? 그냥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페로렌은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연다.
“그러면……. 그러면……. 나랑 결혼해 줘!”
“예에?!”
페로렌의 돌발 고백에 나뿐 아니라 함께 있던 셀리안과 미실트, 테레이스까지 전부 놀라움에 말을 잊었다. 오직 테드만이 뭔가 알고 있던 듯 웃음 지었다.
“나랑 결혼해서 어디 가지 않겠다고 확실히 약속해줘.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페로렌이 나한테 결혼 신청을 하다니?! 세상 놀라운 일이다.
“빨리 대답해줘. …해줄 거지……?”
대답을 원하는 페로렌의 눈망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뙤록인다. 거절하면 왕왕 울어버리겠다는 얼굴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고민하던 찰나 셀리안이 가만히 있을 순 없었는지 식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난다.
“자, 잠깐만요! 아가씨! 치사하게 이러실 거예요? 이렇게 갑자기 선수 치는 게 어딨어요! 나, 나도 그럼 뭘님이랑 결혼 할래요! 나랑 먼저 결혼해요. 뭘님!”
“그건 안돼 셀리안! 내가 뭘의 첫 번째 동료니까 결혼도 가장 먼저 할거야!”
“나도……. 뭘이랑……. 결혼해……. 나도 뭘 사랑해…….”
페로렌에 이어 셀리안. 미실트마저 결혼을 누구와 먼저 하느냐로 식탁이 시끌벅적해졌다.
“저기……. 제 의견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요……?”
“결혼은 내가 먼저 할 거라니까!”
“서, 성관계는 아가씨보다 저랑 먼저 하셨거든요?!”
“미실트가……. 뭘과 제일 먼저……. 키스했어…….”
내 의견은 가볍게 무시당했다.
생각해보니까 결혼 약속은 체르엘이랑 가장 먼저 했는데……. 걱정이네……. 누구랑 먼저 하든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 같으니 말이야…….
나를 두고 열 올리며 싸우는 그녀들을 보니 앞으로 다사다난할 것이 눈에 훤하다.
걱정이야. 정말…….
* * *
그렇게 해서, 바로 여기까지가 그간 있었던 내 이야기다.
“야 이 사기꾼 자식아 거기 안 서!!!”
아 그러고 보니 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가에 관해선 얘기를 안 했구나. 그게 다 이유가 있다.
“형님! 이쪽입니다. 빨리 타십시오!”
나를 쫓는 이들을 피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우올로에 올라탄다.
“야 이 사기꾼 자식아!! 너 다음에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아오. 귀따가워라. 지들이 저지르는 일은 생각조차 안 하고……. 마음 같아선 다 쓸어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참아주마.
“하아……. 주인님…….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여왕벌. 너도 고생 많았다.”
“헤헤…….”
기분 좋은 듯 웃는 여왕벌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민성이에게 지시한다.
“민성아 일단 회관으로 가자.”
“또요? 성에는 안 가세요? 성주가 성에는 안 가고 허구한 날 돌아다니면 국민들이 뭐라고 안 해요? 평판 같은 거 신경 안 쓰십니까?”
“민성아, 너도 다섯 명이 넘는 와이프를 두면 알게 될 거야. 때로는 집에 들어가는 게 두려울 때가 있다는 걸……. 평판이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
이놈의 게임이 어디까지 가려나 다음 대규모 패치 땐 임신시스템까지 만들어서 플레이어에게 육아 스트레스까지 심어줄 생각인가보다.
앞으로 내가 성에 들어갈 일이 더더욱 줄어들 것 같군…….
“형님, 저는 오직 한 우물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 그게 현명한 방법이야.
길드회관으로 들어가니 문제의 그 양반께서 나를 반긴다. 바로 이분 때문에 내가 사람들한테 사기꾼으로 낙인찍히면서까지 그러고 다니는 거니까.
플로어에 있는 배후. 한지파 주태성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이성열의 뒷북에 그를 도와 또 다른 배후를 캐고 있다.
“기단 씨! 뭐 정보 좀 캐셨어요?”
“플로어에 내 얼굴이 쫙 퍼져서 이제 그것도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믿을 건 기단 씨뿐이잖아요. 이번에도 끝까지 도와줄 거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이성열 이 인간과 또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뭐, 사람 살리는 셈 치고. 도와줄게요. 대신, 이번에 성공하면. 뭐 해줄 건데요? 이번엔 밥 정도로 넘어가긴 어려울 걸요?”
“흐음 그러면……. 좋아요. 그러면 기단 씨가 눈 뒤집힐 만한 선물을 드릴게요.”
“제가 눈 뒤집힐만한 선물이 이 세상에 몇 개 없는데……? 뭔데요?
“아, 그게 뭐냐면요. 바로…….”
-‘외부 차단으로 게임이 꺼집니다.’
엥 뭐지?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게임이 꺼지다니…….
곧 캡슐 문이 열리고 눈앞에 아이를 안고 있는 아름다운 천사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오빠. 또 게임하고 있었어? 내가 서은이 기저귀 좀 사다 달라고 했어 안 했어?”
“아……. 그게 말이지……. 주문은 해 놨는데…….”
“지금 다 떨어져서 빨리 사야 된다니까! 물병 소독은? 했어?”
“급하게 일 좀… 하느라…….”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일이다. 나처럼 성을 보유한 성주는 게임에 접속해 있는 것 만으로도 한 달에 2천만 원의 수입은 그냥 들어오니까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많이 버는 것이다.
“오빠 접속 안 해도 돈 들어오는 거 알거든! 나 급한 미팅이 잡혀서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잠깐 세은이 좀 봐줘.”
하연이가 결혼하더니 아주 억세졌어……. 이게 다 나 같은 놈 때문에 고생해서 그렇지 뭐……. 그래도 패션디자이너로서의 꿈은 접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결혼 때문에 꿈을 포기했더라면 내 죄책감이 컸을 거야.
“하연아.”
“어, 왜?”
“그냥 가는 거야?”
입술을 내밀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깜빡했다는 듯 급히 와서 입맞춤한다.
“쪽! 우리 세은이도 쪽! 엄마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세은이도 엄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해야지.”
세은이 손을 잡고 인사해주니 하연이가 웃어주며 집을 나선다. 하연이의 시험이 끝났던 그날 모텔에서 생겨난 우리 사랑의 결실. 조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있다.
하연이가 보챘다지만, 나라도 조심했어야 맞는 건데 말이다.…….
그렇지만 후회는 안 한다. 이것이 내가 진짜 원했던 삶이니까. 오히려 그날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항상 꿈에서도 그리던 너무나 행복한 삶.
뭐 조금 자유롭지 않으면 어떠하리.
그것이 인생사는 재미인 것을.
“세은아, 아빠랑 비행기 놀이 할까요?”
“끄응…….”
“아…. 이 냄새는…….”
기다렸다는 듯 묵직해지는 세은이의 기저귀와 밀려드는 냄새조차 애 아빠가 된 나에게는 빠질 수 없는 인생의 재미지.
암. 그렇고 말고…….
“기저귀가 어딨더라? …아, 참…….”
다 떨어졌댔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