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141화 (140/147)

<-- 길드전 -->

“놀랐어? 이 에르나님이 힘 좀 썼지.”

“무슨 수로 이걸……?”

“텔레포트.”

대마도사나 쓸 수 있다는 텔레포트. 단순 마검사로서는 평생 노력해도 텔레포트를 사용할 마력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에르나는 몸속에는 실제 두 개의 자아가 있었다. 한 명은 본래의 마검사 에르나 또 한 명은 정체불명의 악마. 그 악마의 마력은 인간이 쉽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텔레포트 같은 고차원의 마법도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모양이다.

에르나가 이런 몸이 된 경위는 조금 독특하다. 본래 마검사로 전직할 때는 정제되지 않은 마나를 직접 만지며 계약을 해야 한단다.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고도 불안정해서 주변에 다른 사물을 두면 안 되는데, 그녀가 마검사로 전직 계약을 하던 도중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악마가 마력에 이끌려 에르나를 건드리는 바람에 그녀 안에 악마가 봉인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에르나의 계약을 진행했던 대마도사가 악마를 떼내려 했지만 그 악마가 워낙 강력했던 탓에 실패했고, 단순 봉인해두는 데 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아까 일로 본래의 에르나가 힘을 빼앗기면서 봉인된 악마가 풀려났고, 지금은 그 악마 상태의 에르나가 나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본래의 에르나는 살아있다고 한다. 그녀가 죽으면 악마도 죽기에 현재는 공생하는 관계인 듯하다.

그러니까 농담으로 했던 두 개의 인격이 진짜였다는 거지…….

“자기 때문에 텔레포트로 마력 많이 썼으니까 나중에 충전해 줄 거지……?”

충전이란 말에 무심코 에르나의 시선을 외면한다. 에르나 본래 성격이 제어할 때도 그 정도였는데, 악마 본인께서 직접 등장하시면 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

어느덧 전투력은 9만 대 11만으로 2만 차이로 앞당겼다. 저들의 지원군도 우리 멜티어 함대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제 곧, 그가 말했던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단 한 번.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 그때를 위해 준비한다.

“뒤로 빠지자!”

“형님! 왜요? 지금 우리가 밀고 있는데?”

“일단 하라는 대로 해. 다들 피해 안 받게 안으로 들어가 있어요!

숨 막히는 긴장감. 전장만을 주시한다.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 변화를 눈치채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곧 예견된 일이 벌어졌다.

“공격해라! 다들 죽여!! 사방이 적이야!!!”

쾅! 쾅! 쾅! 아군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집중포화 당한 멜티어 함대는 무려 3척이나 반파되어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VAC-00902011 아이템을 꺼내 든다.

그 사내에게서 주운 아이템. 바로 이때를 위한 것이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칩을 사용한다.

-‘VAC-00902011를 사용합니다.’

그 순간 시야가 검어진다. 그리고 다시 앞이 보이기까지는 무척 짧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는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아군을 공격하던 우올로도 다시 적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전세를 밀어 나가고 있다.

“됐다…….”

초대장 남. 그가 건넸던 아이템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 것이다.

*

초대장남과 싸우기 위해 갑판 아래로 내려왔을 때였다.

포탑이 떨어지면서 생긴 구멍으로 내려오니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기름 냄새가 콧속을 쑤시고 들어온다. 무기에서 기름 같은 게 흘러나오는 것 같다.

놈은 어딨는 거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청각에 의존하여 놈의 위치를 찾는다.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 제대로 찾기가 어렵다.

저쪽인 것 같은데……. 인위적인 발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만들어내는 듯한…….

소리가 나는 방으로 걸어 들어가니 그가 의자 끝에 걸터앉아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며 묻는다.

“이 그림을 보면 당신은 뭘 느끼나요……?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나요……?”

“뭐 하자는 거야?”

“그냥 당신이 했던 말에 대해 생각 좀 해봤어요. NPC도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 말이죠. 전에도 한 번 이런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던 것 같아요.”

그가 피식 웃는다.

“이제야 제가 실패작인 이유를 알 것도 같네요.”

“실패작?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싸우다 말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전에 제 이름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그랬지.”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VAC-00902011이라는 코드만 갖고 있을 뿐.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풀자면 저는 백신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 퍼져있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당신도 알고 있겠죠?”

백신…….

“그 바이러스는 유저뿐 아니라, 우리 NPC들이 태어난 이 세계의 자원을 갉아먹는 끔찍한 흉재입니다. 바이러스들이 점차 증식하게 된다면 언젠가 이 세계는 사라지고 말 거예요.”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완드를 빙글빙글 돌린다.

“그리고 저는 그런 바이러스를 해결하기 위해 초기에 만들어진 백신입니다. 한 개발자가 제 안에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행동 코드를 삽입하고 그대로 따랐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게 있더군요.”

“느껴지는 것?”

“감정이요. 살고 싶다는 감정.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코드가 제게 삽입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게 감정이 맞는지도 사실 모르겠습니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가슴을 움켜쥔다. 그 표정에선 아련함마저 느껴진다.

“바이러스를 치료하면 치료할수록 제 수명이 줄어드는 게 느껴집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죽기 싫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누구나 죽기 싫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요. NPC는 인간과 다릅니다. NPC는 저마다 만들어진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스스로 만들 수 없는 존재들이에요. 그런데, 저는 스스로 원해서 원래의 목적을 거부하고 살고자 하는 목적을 만들었죠. 그리고 나선 제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해결해주길 바라면서 떠넘겨왔어요. 내가 나의 목적대로 당신을 플로어에 데려온 것처럼요.”

그가 나를 플로어로 이끌었던 건가……? 살고 싶어서? 김민철에게 나를 보냈던 이유도 그건가……?

“제가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선택조차 프로그래밍 된 것일지도 모르죠…….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저를 만드신 분은 모든 상황을 염두에 뒀을 테니까요.”

그를 만든 사람은 이성열이 현재 도움 받고 있는 그 지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오래전 바이러스를 치료하려다 실패했단 소리를 들은 적 있으니까.

“하지만 예정된 일이었다고 해도 전 당신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어요. 당신과 막스핀 둘 모두에게 말이죠. 그리고 이제 곧 제가 원하던 목적 앞에 두 분이 다다르겠네요. 전 당신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바이러스 배포자들을 처단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태어난 이 세계가 보전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가능할까 염려됩니다. 당신은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거든요. 이 싸움에 참전한 대다수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있어요. 전세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이러스가 숙주의 행동을 제어할 거고 당신과 동맹 맺은 모든 유저는 아군을 적대시하겠죠.”

“뭐?!”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이었다는 건가……?

“그렇지만,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바이러스의 행동 제어 코드를 차단하는 아이템을 제가 가지고 있거든요.”

“그럼 그걸 나에게 줘! 그럼 네 목적을 달성할 수 있잖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한다.

“싫습니다.”

“싫어……? 네가 진짜 백신이라면 바이러스 발동을 막아야 할 것 아니야!”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당신에게 백신을 드리면 전 사라지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전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만약 백신을 차지하고 싶다면, 제 목숨을 직접 거둬가십시오. 당신이 그걸 할 수 있을지 어떨진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손에서 굴리던 완드를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기대, 두려움, 설렘 등의 조화되지 않는 감정들이 그대로 담겨 전해져 온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전세가 뒤집히기 전에… 저를 쓰러뜨리고 백신을 가져가세요. 그게 당신이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가 완드를 든다. 이내 뜨거운 불길이 무섭게 치솟기 시작한다.

*

다시 생각해도 참 이상해……. 그런 NPC를 처음 만나봐서 그런가 아직도 기분이 묘하다니까…….

“형님 방금 뭔가 화면이 깜빡이지 않았습니까? 나만 그랬나?”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이제 승리만 생각하자. 얼마 안 남았어.”

* * *

바이러스가 발동할 때가 되었음에도 아무 소식이 없자, 그란테는 현식을 호출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란테의 마음에 영 들지 않는 말뿐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말씀대로 했는데, 정말 안됩니다. 저희도 한다고 해봤는데.”

“죄송하다, 안된다, 해봤다. 현식 씨는 그런 말 말고는 나한테 할 말이 없나?”

“죄송……. 아…….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알겠어. 남은 전투라도 신경 써서 잘해. 현식 씨가 잘해줘야. 내 사업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믿는 바가 아주 크다는 거 항상 잊지 말고.”

그란테는 별말 없이 현식을 돌려보냈다. 사실 그가 잘못한 일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란테조차도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었다.

‘왜 바이러스 발동이 안 된 거지?’

본인이 직접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대다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다. 그런데, 적들은 너무도 멀쩡하게 제테니어 부대와 싸우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난장판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란테는 로그아웃을 하고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민부장님, 또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다른 건 아니고 사소한 부탁 하나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 *

7만 vs 7만

드디어 제테니어와의 전투력 차를 따라잡았다. 멜티어의 막강한 화력으로 밀어붙이니 순식간이다. 이제 저들은 곧 성까지 퇴각할 거다. 그때부터는 최종 전투만 남는다.

그런데 좋은 흐름의 물길을 급작스레 끊어 놓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안녕하세요. GM입니다. 현재 벨란트 산맥 근처에서 게임이 강제 다운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해당 문제를 수정하기 위해 30분 뒤부터 1시간 30분간 긴급 서버 점검이 있을 예정이오니 게임 진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안전한 장소에서 로그아웃을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지사항을 참고해주세요.’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긴급 서버점검?”

“이게 뭐죠……? 길드전 중인데 웬 점검?”

게임이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나. 이런 거대한 행사가 치러지는 와중에 긴급점검이라고?

이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것을 증명해 보이듯 사방에서 원성이 터져 나온다.

“야 GM! 이 미친 인간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이거 진짜 점검하면 문의 전화 때린다.”

“이거 제테니어가 돈 쳐먹인 거 아냐?”

확실히 타이밍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아무리 긴급점검이라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점검을 진행한다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 * *

해당 문제는 플리엔젤사의 직원 임조윤도 뒤늦게 알아챘다.

‘민형태 이 미친 인간이 운영팀이랑만 상의해서 긴급점검을 때려?’

임조윤은 어이가 없었다. 게임상에서 셧다운 문제가 발생하면 관련 문제는 예외 없이 개발팀에서 처리했다.

때문에 이번 점검 건 역시 개발팀과 회의 후 진행했어야 절차가 맞는 것인데, 민형태 부장은 뜬금없이 발생한 셧다운 문제를 혼자 찾아내서는 독단적으로 개발팀을 제외한 뒤 운영팀과 회의하여 긴급 점검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부장이라지만 제멋대로 이런 짓을…….’

분노의 키보드 타이핑, 임조윤은 서둘러 문제가 발생한 벨란트 산맥 지점의 로그를 긁어모았다.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고 왜 긴급점검을 했어야만 했는지.

‘잠깐……? 뭐야 이거?’

시스템 오류 로그를 살펴보던 임조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단 체크해 놔야겠어.’

모든 정보 수집을 빠르게 마친 임조윤은 즉시 민형태 부장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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