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135화 (13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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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무성한 대륙. 우올로에서 가까워지는 대륙을 향해 크게 숨을 들이쉰다. 파릇파릇한 산하의 향기가 벌써부터 코끝을 자극한다.

“하아……. 좋구나.”

미실트의 고향인 아르멜데인 떠난 지 근 한 달. 지긋지긋한 사막 대륙을 벗어나 원래 나의 대륙으로 돌아왔다.

“마이 프레셔스!”

깡-! 깡-! 깡-!

걸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드웍프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 정확히는 아이셀의 조율을 돕기 위해 비르미스 망치로 아이셀을 내려치는 작업을 하는 중인데, 왜 굳이 저런 소리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벨라프가 쟤를 단단히 망쳐 놓은 것 같은데…….

“그쪽으로 바늘 끝을 넣어봐. 응! 그렇지! 미실트 솜씨 정말 좋다. 이정도면 신부수업도 금방 배울 것 같은데?”

“응……. 미실트 좋은 신부.”

반대편에서는 오랜만에 접속한 하연이가 미실트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있다. 글도 배우면서 이제는 저런 것도 섭렵하는구나. 하연이는 미실트가 왕녀라는 사실을 듣고는 농담 식으로 왕족의 재단사로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겠다며 좋아했다.

“와…….”

인기척이 느껴져서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에르나가 있다. 그녀는 왕비의 명령으로 미실트를 보좌하는 임무를 받고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대륙여행을 처음 하는 에르나는 그저 우두커니 다가오는 땅만 바라본다.

“에르나, 이쪽 대륙 처음 본 소감은 어때요?

“아, 뭘 님. 그게……. 기분이 이상합니다. 설레는 기분도 있고, 두려운 기분도 있고……. 이게 어떤 기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기분이든 아마 좋은 쪽일 거라고 생각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끝으로 페로렌과 셀리안 테레이스는 테이블에 앉아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페로렌과 셀리안은 수다를 떨고, 테레이스는 페로렌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며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저쪽도 의외로 죽이 잘 맞는 조합이라니까.

그나저나 성열 씨가 뭔가 한다고 나를 불렀는데, 왜 연락이 없지? 거의 다 왔는데.

*

이게 다 뭐야……? 성열 씨를 만나러 그의 길드 건물로 왔는데, 대부분 파손되어있고 길드원의 시체가 즐비해 있다.

“크으윽……. 얘들아… 일어나. 이렇게 죽으면 안돼……!”

한쪽에서 앓는 소리가 들린다. 그쪽으로 가보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동료를 챙기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너, 너는? 네가 왜…….”

게임 초반에 나를 그렇게나 괴롭혔던 놈이다. 이름이 뭔지는 기억 안 나는데 15명씩 붙어 다니는 이상한 녀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설마 복수하러 온 거냐……?”

만나자마자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 보니 본인도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사실 별일 없을 때 만났다면 복수라는 거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리 좋은 시기가 아닌 것 같다.

항상 붙어 다니던 동료인지 형제인지 모를 애들이 전부 죽어가고 있는데, 거기에 칼을 들이민다고 속이 시원하진 않을 것 같으니까.

“여기 왜 이 꼴이야? 막스핀 어딨어?”

“제테니어……. 놈들이 쳐들어와서 형님을 데려갔어…….”

제테니어……? 또 제테니어? 그놈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설마 내 정체를 알아내고 성열 씨를 잡아간 건……? 아니야……. 나랑 관련 있다는 건 모를 텐데……. 뭐지……?

뭐가 됐든 이성열이 잡혀갔다는 건 조금 불길한 생각이 든다. 최근 벤지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는 것 같던데, 뜬금없이 제테니어 길드에 습격당해서 잡혀갔다는 건 어쩌면 그놈들도 벤지 길드와 연관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려줘. 니네 형님 찾아올 테니까.”

* * *

한편 제테니어 길드에 잡혀 온 이성열은 피로 온몸을 샤워하다시피 한 모습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이성열은 힐링 포션을 꺼내 들었다. 떨어진 체력을 조금이라도 보충할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속박 상태 때문인지 손에만 쥐고 있을 뿐 마시지 않았다.

그란테는 이성열의 힐링포션을 빼앗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대부분의 아이템은 소유권 문제로 남이 쉽게 사용할 수 없는 반면 포션과 같은 소모성 아이템은 강탈이 어렵지 않았다.

“아, 미안. 내가 목이 말라서 말이야.”

그는 어울리지 않는 잔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기자님 참 대단하신 것 같아. 요즘 기자는 물불 안 가린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란테는 이성열 캐릭터의 단발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손으로 건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에 이성열도 질 수 없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럼요, 물이나 불 속에서도 안 죽는 벌레 놈들이 이렇게 득실거리는데 특효약을 죽이려면 내가 직접 뛰어들어야죠. 안 그래요?”

이성열은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란테 같은 놈들이 원하는 것이란 걸 이성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크으……. 기자라 그런지 역시 패기가 넘쳐. 난 그런 사람들을 참 좋아해. 남자란 자고로 깡다구가 있어야 해. 우리 김성열 기자님처럼.”

그란테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다른 유저와 달리 그는 처음부터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근데 기자님. 이거 아무 소용없는 거 알지? 기자님 생각으론 우리가 뭐 불법적인 일 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캐고 다니는 것 같은데, 그거 다 헛수고야. 우리 불법 저지르는 거 아니라고. 최근에 우리 쪽 애 한 명이 잘못해서 들어간 건 있지만, 그건 그놈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우린 상관없는 일이야. 그건 기자님도 잘 알 텐데?”

이성열은 김민철 사건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 꺼낼 줄 알았다는 듯 한껏 비웃었다.

“정말 상관없었으면, 나를 잡아 올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그쪽도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죠.”

그란테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머리를 긁적였다. 귀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투영된 행위로 보였다.

“그리고 말입니다. 사람 너무 물로 보지 마세요. 제가 당신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내가 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주태성 씨?”

자신의 이름이 김성열 입에서 나오자 그란테의 표정에서 여유롭던 미소가 급격히 사라졌다. 그란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네. 날 놀라게 할 생각이었으면 제대로 성공한 것 같아. 내가 기자님을 너무 얕잡아 봤어. 역시 작년 한 해 기자상을 휩쓸어 가신 기자님다워. 그런 사람을 몰라보고 내가 대우를 너무 안 해준 것 같지? ……야 너 무기 좀 하나만 줘 봐.”

그란테는 부하에게서 소모품 단검 하나를 받아들었다.

“기자님은 혹시 이것도 알고 있나 모르겠네.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조금 재밌는 게 있거든? 난 말이야. 게임에서 사람들이 고통 못 느끼게 하는 거……. 통각 제어시스템이라고 하나? 그걸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그의 손에서 단검이 현란하게 돌아가더니 김성열의 눈앞에서 그대로 멈췄다.

“이런 가상의 칼에 찔린다고 해도 당하는 사람은 진짜 칼에 찔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 말이야. …한 번 해볼까?”

그란테는 겁 잡는 자세를 확 바꾸더니 그대로 내리찍었다. 푸욱-! 단검이 김성열의 허벅지를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커헉?!”

‘이건 무슨……!’

그란테는 김성열의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휘적거렸다.

“끄아아아아아악!!!”

김성열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목이 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김성열은 벤지길드가 사용하는 바이러스에 대해 어느 정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미 강제로 로그아웃되는 기능은 막혔고 가현실에서 느껴지는 현실적 고통은 이것이 진짜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아프지? 그래, 많이 아플 거야. 나도 젊을 때 몇 번 맞아봐서 알거든? 칼 한 방 맞고 나면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성열 씨가 그랬으면 좋겠어. 조금 겸손해졌으면 좋겠다고. 깡다구 있는 건 좋아하지만, 겸손할 줄 모르는 인간은 싫어하거든?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 김성열이 신조로 삼는 말이었다. 언제나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하아아으윽……. 크흐……. 흐흐흐흐, 이거 어쩝니까……? 겸손을 모르는 건 내 천성이라 바꿀 수도, 바꿀 생각도 없거든요……? 어차피 당신 말고도 날 싫어하는 사람은 많아요. …한두 명 더 생긴다고 뭐 달라지겠습니까?”

김성열은 그간 사건 취재를 많이 다니면서 협박, 폭행 등을 수도 없이 겪어왔다. 물론 칼에 찔려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지만, 게임상에서 고통쯤이야 견뎌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고통이 견뎌낼 수준 이상으로 넘어가면 아무리 정신력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푸욱-! 푸욱-! 두 번, 세 번, 이어지는 칼질에 김성열은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커억! 아그으으으윽……! 크으으윽……!”

이제 체력도 거의 마지막을 보였다. 기껏해야 한 번 아니면 두 번 버틸 체력. 그러나 전투 캐릭터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기술도 없는 게 김성열의 상황을 더욱 암울하게 했다.

그란테는 정신을 반쯤 놓은 김성열의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통각 제어시스템을 푼 상태에서 캐릭터가 죽으면 어떻게 되게? 궁금하지? 퀴즈 아니니까 알려줄게. 기자님은 그냥 게임하다가 운 나쁘게 죽은 사람으로 뉴스 한 면에 실리게 될 거야. 기자님이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대도 환상통이라는 게 평생남아서 괴롭다고하더라고. 근데, 더 억울한 건 뭔 줄 알아? 증거가 없어서 용의자도 못 잡는다는 거야.”

“으으으…….”

죽음이 더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화면이 빨개지고 시야는 점점 좁아졌다. 김성열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해야 할 게 눈더미처럼 쌓였는데, 여기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몸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눈 똑바로 떠. 그러니까 사람이 겸손을 배워야 한다니까. …… 그게 천성이라면 다음 세상엔 부디 겸손할 줄 아는 천성을 가지고 태어나세요. 기자님?”

그란테는 칼을 들었다. 지금 이성열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는 이에게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일 말고는……..

“…나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그만 지켜보고… 나 좀 도와주시죠?”

김성열은 그런 말을 내뱉은 뒤 눈을 감았다.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은 있었지만 눈을 감는 것은 최소한의 자기방어 수단 중 하나였다.

“응?”

그란테가 김성열의 말에 의문을 품은 그 순간.

챙-! 들고 있던 칼이 무언가에 부딪혀 날아갔다. 그와 함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란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열이 눈을 뜨니 칠흑보다 깜깜한 어둠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으윽?! 이거 뭐야!”

그란테 부하들의 당혹 섞인 들리고 이성열은 누군가 자신의 곁에서 묶인 몸을 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묶였던 몸이 자유를 찾고 나서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자신을 업은 채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 * *

“후우……. 진짜 덕분에 살았네요. 기단씨 타이밍 좋았어요. 놈들이 날 죽이기 일보 직전이었거든요. 이제 칼에 찔렸던 기단씨 기분을 조금 알겠어요.”

“죽을 뻔했다면서 웃음이 나와요?”

“질질 짜는 것보다 낫지 않나요?”

간신히 김성열을 구해서 우올로로 대피했다. 근데 이 인간은 죽을 뻔했다면서 여전히 실실거린다. 위험을 즐기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라니까.

“그나저나 정말 괜찮은 거죠? 놈들이 심는 바이러스라는 게 통각 시스템을 제어한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사람을 죽게 할 정도라는 건 저도 처음 알았어요. 만만하게 볼 게 아니라 흉기나 다름없네요.”

“네, 그래서. 우리도 그 바이러스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박수!”

알아듣기 힘든 말을 왜 저리 해맑게 하는 거야? 바이러스를 이용한다고?

“저도 최근 놈들이 퍼뜨리는 거랑 비슷한 바이러스를 입수했거든요! 물론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바이러스로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예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기단 씨 싸이코에요?”

아니 바이러스가 흉기라니까 그걸 이용하겠다며……? 그럼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로 사람을 싸이코 취급하나 그래?

“사람을 죽이겠다는 게 아니고, 이걸로 한지파 보스 주성태의 아지트 정보를 알아낸다 이거죠. 놈들이 어디서 접속하는 건지 게임사 측에서는 그 정보가 안 잡힌대요. 근데, 놈들도 거기에 인맥이 있으니까 제재를 안 당하죠. 그럼 결국 우리가 직접 찾아내야겠죠?”

“그럼 뭐 어떻게 하는 건데요……?”

“잠깐 회의 좀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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