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실트의 왕국 -->
“저 말 거짓말이야! 아르멜데인 동맹국 중에 오즈만 같은 거 없었어!”
노랑머리가 모두에게 소리친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기색이다.
확신이 없다는 거지? 그럼 더더욱 몰아붙인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돌아가라! 지금 무기를 집어넣고 돌아가는 자들은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평생 오즈만 제국의 노예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수적으로는 그들이 우세함에도 길드원 전원이 강한 건 아닌지, 막강한 우리 전력에 싸움의 균형은 서서히 맞춰지고 있다.
아직 바깥에 적군이 많다고는 해도, 뱀의 머리가 이곳에 있는 이상 저 노랑머리만 항복하면 나머지도 전부 항복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서 고개를 조아려라 노랑머리.
그는 진땀을 흘리며 동료를 바라보더니 곧 명령을 내린다.
“이번 전투에 이기면 개인당 1억 셀은 지급받을 수 있어! 지원군이 오기 전에 국왕만 잡으면 게임 끝나! 빨리! 국왕부터 쳐. 얘들아!”
어……?! 이게 아닌데…….
분산된 전력이 돈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혀서 한순간 집결하며 국왕을 향해 달려든다.
이런……!
“볼테이온!”
“끼이이이이악-!
급히 볼테이온을 부르자 거대한 날개를 휘두르며 국왕에게 돌진하는 적들을 밀어낸다.
“아이 씨! 저 몬스터 뭐냐고!”
혼란을 틈타 볼테이온에 올라탄 뒤 국왕에게 향한다.
“국왕님!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국왕은 머뭇거리지만, 별동대 아주머니가 국왕님께 믿어도 된다고 소리치자 일단은 올라탄다.
저들이 인질로 삼을 만한 가신들은 성에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저들은 지금 내 말에 반쯤 속아 넘어갔기에 국왕을 최우선으로 쫓을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국왕을 미끼로 삼아 성에서 끌어낸다. 그다음은 내가 유리한 싸움으로 이끌기만 하면 된다.
“가자 볼테이온!”
“끼이이이악!”
큰 날갯짓으로 땅을 박차고 단번에 날아오른다.
“도망 못 가게 잡아!!”
“뭘 님! 조심해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4, 5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주문을 영창한다.
-‘‘꿈속의 걸음’에 걸렸습니다. 반경 5m 내의 아군 이동속도가 1분간 400% 감소합니다.’
이동속도 감소 디버프가 들어옴과 동시에 볼테이온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그리고 곧 한 개의 거대한 가시가 땅에서 빠른 속도로 솟구친다.
사사삭-!! 빠르게 솟아오르던 가시가 볼테이온의 복부를 찌르기 직전 가시가 썽둥-! 썰려 나가며 그대로 부러졌다.
자세히 보니 황금 갑옷을 입은 별동대 기사 하나가 자라나는 가시를 단칼에 썰어낸 것이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다. 그 뒤를 이어 마법을 영창중인 마법사 몇이 더 있다.
곧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먹구름이 몰려든다. 이거 왠지 불길한데……. 가시를 잘라낸 별동대 기사가 다음 마법사를 처리하려고 하지만 악착같이 방어하는 탱커에 가로막히고 만다.
“재현이 형! 한 방에 보내 버려!”
무슨 마법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한 방에 저승 구경할 수 있는 마법인가 보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엔 없다. 하지만 이놈의 느려지는 마법 때문에 빨리 도망갈 수가 없다.
풀릴 때까지 몇 초 안 남긴 했지만, 그 전에 저들의 마법이 먼저 직격할 것 같다.
그런데 곧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지더니 몰려들던 검은 먹구름이 눈 녹듯 사라져간다.
“아아아악!!!”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법사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머리를 쥐어 잡는다.
“뭐야? 니들 갑자기 왜 그래?”
머리를 쥐어 잡던 마법사 한 명이 소리친다.
“마법 기술 쓰지 마! 이상한 디버프 걸렸어!”
아름다운 선율로 적들에게 디버프를 건 주인공은 역시나 셀리안. 그녀를 바라보니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나를 향해 윙크한다. 하여간 이쁜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이 음악 소리! 저 바이올린 든 여자 공격해!”
놈들이 금방 원인을 찾아냈다. 셀리안을 공격하게 둘 순 없다.
“슬로이! 아이즈! 셀리안을 지켜!”
슬로이와 아이즈가 셀리안을 보호하는 동안 에르나와 미실트를 비롯한 아군이 적들과 피 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다.
지금은 저들에게 맡겨두고 일단 국왕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자.
“걔들이랑 싸우면서 전력 소모하지 말고 빨리 국왕부터 쫓아!”
*
성벽을 넘어서니 거의 100대에 가까운 우올로가 산개해서 성을 향해 진격해 온다. 아무래도 녀석들이 지원을 요청한 것 같다. 솔직히 아래 있는 녀석들만 봤을 때는 충분히 이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저걸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대체 어느 길드이기에 이렇게 규모가 큰 거지……? 저 정도라면 확실히 이름이 알려져 있을 터.
“자네, 북쪽 문으로 가주게……! 저들을 막을 방법이 있네!”
국왕이 그렇게 말하는데, 저걸 무슨 수로 막는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는 것도 사실.
국왕의 말대로 북쪽으로 향한다.
*
-‘셀리안! 다들 무사해요?’
-‘네. 저희는 괜찮아요. 황금 갑옷을 입으신 분이 왕성의 포탈로 안내 해주셔서 그걸 타고 간신히 도망쳤어요.’
-‘다행이다. 끝까지 잡히지 말고 잘 도망 다녀요.’
-‘네. 대부분 뭘 님을 쫓아갔으니까. 저희는 괜찮을 거예요. 부디 몸조심해주세요.’
왕궁에 포탈이 있었다면서 그거나 타고 도망칠 것이지 왜 궁에 남아서 이런 수모를 겪는 거야 이 국왕은?
“나의 국민이……. 이렇게…….”
국왕은 난리가 난 도시를 내려다보며 침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며칠 전 부자 도시라고 했던 말이 무색할 만큼 도시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네! 속도를 올릴 수 없겠나?”
“예 알겠습니다!”
볼테이온은 놈들과 싸우면서 상처도 많이 입었고, 지치기도 지쳐서 속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는 날개를 더 빠르게 움직인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 우리는 우올로 함대에 완전히 포위당했다. 적선으로부터 노랑머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즈만 제국의 공작님! 당신이 정말 오즈만 제국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국왕을 잡아가야 합니다. 얌전히 돌려주지 않으시겠다면 우리는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끝인가…….”
국왕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자신을 저들에게 보내 달라고 한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걸 직감한 모양이다. 확실히 상황이 좋지 않다. 그렇지만 내게는 상황을 뒤집을 만한 비장의 카드가 있다.
다만 그게 여기서 쓴다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낼 수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어쩌지……?
“5초 내로 항복 의사를 밝히고 국왕을 보내지 않으면 공격합니다.”
그의 말과 함께 초시계는 흘러간다.
“5”
비장의 카드를 지금 써야 하나?
“4”
아래는 아직 잡혀있는 시민이 있다.
“3”
타이탄을 부르면 분명 많은 사상자가 나겠지…….
“2”
으,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1”
시민들이 죽는 걸 감수하고 타이탄을 소환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한 번의 포격에 이어 수백 발의 포격이 제테니어의 우올로 함대를 가차 없이 포격한다.
“와주었구나! 멜티어 함대……!”
멜티어 함대? 포격이 날아온 곳을 보고 입이 저절로 벌어져선 다물어지지 않는다.
“저게…… 뭐야……?!”
어마어마한 크기의 우올로 4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뒤에 더 있는 게 아니라 딱 4대가 전부다. 그중 한 대는 유독 눈에 띌 정도의 크기다. 100m? 아니 그보다 두 배가 더 큰 200m는 될 법한 크기의 우올로다.
“아르멜데인의 전사들이여! 국왕님을 지켜라!”
한 번의 포격에 이어 수백, 수천 발의 화력이 제테니어의 함대를 향해 우수수 쏟아진다.
파아아아앙-! 쾅! 쾅! 쾅!
단, 4대의 우올로로 100대가 넘는 제테니어의 함대를 압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적중률은 또 어찌나 높은지 실수라도 잘못 떨어지는 공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국왕을 데리고 포위를 빠져나가자. 지금이라면 이쪽에 신경 쓸 여유는 없을 터.
예상대로 제테니어는 이쪽으로 눈길도 안 준다.
커지는 피해에 뒤늦게 반격을 시도하지만, 이미 포위 진형을 잘못 잡고 있던 터라 피해는 극심해져만 간다.
“한 대씩 집중포화로 무너뜨려!”
무슨 오기로 저러는 건지 제테니어의 지휘자는 삽시간에 우올로 부대 절반을 잃어놓고 후퇴를 외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멜티어 쪽으로 기운다. 예견된 결과였다. 멜티어 우올로 한 대가 제테니어 우올로 15대와 동시 교전하는 수준이니 애초부터 상대가 되질 않는다.
결국 그들이 먼저 백기를 들고 후퇴를 선언한다.
“후, 후퇴! 후퇴해라!”
어쩌면 저 인간은 제테니어의 길드 마스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만약 저렇게 무능한 인간이 저렇게 큰 길드의 마스터라면 아마 돈으로 길드원을 매수한 건 아닐까 싶다.
*
아르멜데인의 침략을 무사히 막아낸 뒤 우리는 국왕의 초대를 받고 왕궁에 입성했다.
“도와준 영웅을 이리 푸대접하게 되다니……. 왕국 꼴이 아니라 정말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초대해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수도를 침략당해서 그렇지, 큰 전쟁도 아니었고 왕국에 돈이 많다 보니 종전 후 도시는 비교적 빠르게 복구되고 있었다. 무너진 마을이 스스로 복구되는 걸 보니 게임은 게임이구나 싶다.
“그래, 본래 이름이 뭘 이라고 했던가? 어쩌다가…….”
왕은 말끝을 흐리더니 왕비를 흘끗 바라본다. 왕비를 마음에 두고는 있으나, 쫓아낸 입장에서 함부로 언급하기가 껄끄러워 보인다.
“어쩌다가 전 왕비와 함께 여기 오게 되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아, 그건 제가 말씀드릴 게 아니라, 전 왕비님께서 직접 말씀드릴 겁니다.”
왕비가 나서서 왕에게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미실트가 왕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정말……. 미실트라고……?”
왕의 목소리가 떨린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걸 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이리 와 보거라.”
미실트가 다가가자 왕은 미실트의 얼굴을 잡고 찬찬히 살핀다. 눈, 코, 입. 하나하나 깊이 담아두듯 꼼꼼히 살핀다. 그리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왜……. 왜 이제서…….”
왕이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왕의 눈엔 눈물이 고여 내리흐른다. 왕이 팔을 뻗어 미실트를 끌어안는다. 성급하지 않게 천천히 미실트를 안고 토닥여준다.
“이 아비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나타난 게냐……. 으흑, 흐윽흐……!”
“아빠…….”
부녀가 상봉하는 모습을 보며 왕비도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
그날 이후 아르멜데인 왕국에는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전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식과 왕녀를 찾게 된 것에 대한 행사였다.
피해당한 자들은 나라에서 모두 피해 보상금을 지원했으며, 도시가 복구되는 동안 모든 이에게 잠잘 곳과 먹을거리를 무료로 지원한다는 통 큰 행사였다.
또한, 미실트의 환영식도 열렸다. 비록 나라에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대한 잔치를 치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잃어버린 왕녀가 무사히 돌아온 일을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비록 오늘은 조촐한 식사 대접이 전부지만, 다음에 오게 되면, 자네에게 후한 대접을 하겠네. 그간 내 딸을 잘 보살펴주어서 정말 고맙네.”
내가 미실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보살폈다고 하기엔 뭐하지만 사실대로 얘기했다간 목이 날아갈 테니 가볍게 묵례만 한다.
“그리고 왕비……. 내 그대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것 정말 미안하네.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아네만……. 이 못난 왕이 다시 그대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지 않겠는가.”
왕비는 말없이 왕의 손을 잡는다. 다만 왕비 입가에 띤 미소가 승낙의 의미를 대신 전달하는 듯했다.
“고맙네. 왕비.”
잠시 뒤 왕궁의 시녀가 다가와서 국왕의 귀에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이고는 나갔다.
“우리 미실트가 예쁘게 꾸미고 나오는 모양이구나.”
왕은 시녀가 나간 문을 쳐다봤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