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실트의 왕국 -->
혼자서는 움직이기 힘든 몸을 비틀거리며 겨우 일으키자 에르나가 옆에서 붙잡아준다.
“정말이야…….”
에르나의 도움으로 미실트 앞에 선 왕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을 뻗는다. 어루만져지는 미실트의 볼. 그 살결을 따라 왕비의 손이 떨리는 게 보인다.
“내……. 내 딸……. 내 딸 미실트가…….”
왕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미실트의 눈동자가 짧은 주기로 깜빡인다. 잊고 있던 생각을 떠올리려고 하는 것 같다.
‘난 이 사람을 몰라. 그렇지만, 마주 보고 있으면 너무 슬픈 기분이 들어.’
미실트의 기분이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왕비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미실트는 눈물을 흘리는 걸까……. 왕비의 감정을 공감해서……? 그게 아니면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몸이 기억해서?
“미실트……. 정말 돌아왔구나……. 흐윽……. 내 딸이…….”
왕비는 미실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아이 때 잃어버린 자신의 첫째 딸. 아직 증거가 없었음에도 왕비는 확신하고 있었다. 미실트가 핏줄로 이어진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말이다.
그리고 그건…….
미실트도 똑같이 느끼는 듯했다.
‘기억 났어……. 이 목소리 기억 나……. 매일 같이 나를 불러주고 사랑해주던 분의 목소리야. 그래……. 이 목소리는 분명…….’
“엄……. 마…….”
미실트는 어눌한 말투로 왕비를 부르며 안는다.
“미실트……! 흑 미안하다……. 이 어미가 널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미실트는 자신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원망은 내비치지 않는다. 되려 아직까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 가득히 끌어안을 뿐이었다.
옆을 보니 에르나가 둘을 향해 뻗었던 손을 내린다. 둘이 포옹하고 있는 동안 친자확인 마법으로 결과 확인을 한 것이다.
에르나에게 모녀가 맞는지 조심히 묻자, 미소를 지으며 끄덕인다.
누구보다 이 소식을 가장 좋아할 사람은 미실트와 왕비겠지만, 이미 끌어안은 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둘의 모습을 보면, 굳이 결과를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미실트 씨가 왕녀였어요. 흐윽……. 아가씨 이거 너무 감동적이에요. 흑……! 엄마라는 말 제가 최근에 가르친 거잖아요. 이건 분명 운명이예요. 운명. 으흑…….”
“징그럽게 매달리지 마. 셀리안.”
셀리안은 페로렌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열한다. 귀찮은 얼굴로 셀리안을 밀어내는 페로렌의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다.
현실이나 게임이나……. 세상 좁다는 게 새삼 실감 난다.
지금 보니 왕비와 미실트가 많이 닮았었구나……. 여태까지 왜 그걸 깨닫지 못했을까……?
*
우리는 그 길로 왕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 나라의 왕녀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엔 상황이 다소 안 좋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국왕이 자신의 딸을 찾았다는 사실을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
“궁성의 문이 뚫렸어…….”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이지만, 궁성의 문은 파편을 이리저리 흐트린 채 다신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궁성안으로 들어오니 핏자국이 어지럽게 뿌려져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깊이 들어갈수록 쓰러진 적군들과 왕국 기사단의 시체가 바닥에 즐비해 있다.
별동대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계속 가다 보니 먼 곳에서부터 말소리가 들려온다.
“국왕님. 국민들 더 다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항복합시다. 어차피 우리가 이기는 건 시간 문제니까.”
“우리 선대가 피땀 흘려가며 일궈 놓은 이 나라를 너희처럼 근본도 없는 놈들에게 넘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왕과 몇몇 가신을 황금 갑옷을 입은 기사 단원 단 둘이 남아 2명이 지키고 있다. 다른 별동대원도 이미 목숨을 잃은 듯하다.
제테니어 길드원들은 국왕을 반원으로 둘러싸고 있다. 살펴보니 인원은 약 6, 70명 정도. 아마 저들이 제테니어 길드의 핵심 유저들이겠지.
“우린 여기까지 온 이상 왕국을 받아가야겠는데.”
노랑머리가 앞으로 나서서 왕에게 말한다. 그가 저들을 지휘하는 인물인 것 같다.
그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더니 모두에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최후의 통첩을 내린다.
“다들 마지막이니까! 함성을 내지르며 전군 돌격. 개시!”
“와아아아아아아!!!”
그들은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함성을 지르며 최후의 공격을 나선다.
그러자 우리 쪽에서 두 명의 인영이 적진을 향해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간다.
한 명은 별동대의 아주머니. 또 한 명은 미실트였다. 상대는 유저라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실트는 발에 휘감기는 빛무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적진을 휩쓸어 나간다. 투레스탄을 빙의하지 않은 미실트가 저렇게 강했나 싶을 정도로 적들이 맥을 못 춘다.
같이 튀어 나간 별동대 아주머니가 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원군 왔다! 퍼져서 몇 명은 뒤에 맡아!
“얘내 꽤 세니까! 다들 조심하세요!”
제테니어 길드의 몇 명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공격해 온다. 결국 유저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우리 미실트를 위해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주리라!
촤아악-! 왕비를 노리며 다가오는 적을 에르나가 단칼에 베어 행동불능으로 만든다.
“에르나. 나는 괜찮으니 저들을 지켜다오.”
“하지만, 저는 왕비님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괜찮으니 저들을 먼저 도와. 왕께 부탁해서 너에게 작위를 내려달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이니까. 아르멜데인 기사단 철칙. 1조 1항을 기억하겠지? ”
“아르멜데인 기사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저는 더 이상 아르멜데인의 기사가 아닙니다.”
왕비는 웃으며 에르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기사단 철칙을 모두 익히지 않은 거니? 1조 6항. 아르멜데인의 기사 작위는 왕 또는 왕의 대리인이 권한을 지우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된다. 네가 날 따라 나오겠다고 했을 때도 왕께선 너의 작위를 거두신 적 없잖니?”
아르멜데인 국민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아르멜데인 기사단의 첫 번째 임무인 듯했다. 비록 왕비를 따라 나오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르멜데인의 기사단이었다.
아마도 왕비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은 더 이상 아르멜데인 국민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서 왕과 내 딸을 지켜다오 에르나.”
왕비에게 시선을 둔 채 에르나는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영혼의 사슬. 묶여라.”
촤라라락-!
“으윽……!”
곧게 편 손가락을 꽉 쥐자 5명의 유저의 몸에 사슬이 걸린다.
“왕비님…….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비장하게 말하며 일어선다. 에르나가 오른손을 편 채 돌리자 자그마한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며 주황의 빛줄기가 뻗어 나가 적을 타격한다.
“으아아아악!”
한 명의 적을 타격했음에도 사슬에 묶여있던 모든 적이 동시에 타오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곧 그들의 체력이 금세 차오른다.
자세히 지켜보니 적진에 포진된 몇 명의 힐러가 부상당한 동료의 피를 채우고 있었다.
역시 힐러를 최우선으로 쳐야 해. 그렇지만, 강력한 원거리 딜러들이 힐러를 엄호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진영을 붕괴하는 게 효과적이다.
-‘진성각인의 효과로 ‘슬로이’를 불러옵니다.’
-‘진성각인의 효과로 ‘볼테이온’을 불러옵니다.
“마음껏 날뛰어라. 얘들아.”
“끼이이이이익-!”
“뭐야 저건?!”
“어디서 갑자기 몬스터가 나와?”
적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몬스터에 혼비백산이다. 볼테이온은 나타나자마자 거대한 날개와 부리로 적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아! 이게 뭐야 기분 나빠!”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슬로이는 근접 캐릭터 위주로 발을 묶으며 그들의 몸을 차츰 집어삼킨다.
타이탄도 소환하고 싶지만, 여기서 타이탄을 불렀다간 피아 구분 없이 짓밟힐 위험이 있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 몬스터들이 날뛰는 동안 페로렌에게 건네받은 아이셀을 꺼내 들고 아이즈의 공격을 아이셀에 누적시킨다. 현재 잠재 246.
아이셀에 누적할 수 있는 총 피해량은 14,760. 웬만한 고렙 유저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어마어마한 피해량이다. 다만, 높은 피해량만큼이나 피해를 누적시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와, 너 이쁘게 생겼는데?”
“꺄아아악! 이거 놔!”
뒤편에서 페로렌의 비명이 들려온다. 누가 사내새끼 아니랄까 봐 이 난리 통에서도 여자를 밝히고 있네. 페로렌을 구해주려 몸을 움직이는데.
“커억-!”
셀리안이 바이올린을 들고 유저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다. 저 바이올린 정말 단단하네…….
“우리 아가씨 건들지 마세요!”
그러나 그 정도 공격으로 유저가 쓰러질 리 없다.
“넌 갑자기 뭐야? 응? 너도 꽤 이쁜 데켁-!”
놈이 셀리안에게 손을 뻗는 순간 지팡이를 꺼내 들고 재차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공격권을 사용했기에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맞출 수 있다.
“뭘 님!”
“둘 다, 위험하니까 왕비님 모시고 피해 있어요!”
셀리안와 페로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슬슬 아이셀의 피해량이 차올랐다.
“아이즈, 이제 너도 가서 날뛰어.”
“아이!”
아이즈가 파이팅 하듯 주먹을 쥐어 보이며 적들 사이로 날아간다. 그럼 나도 슬슬 가볼까!
파싯-! 추진력 신발이 위력을 보이며 내 몸을 쾌속으로 날려 보낸다.
“하아아-!!!”
추진력을 받아 지팡이를 세차게 휘두르자, 앞의 적 여럿이 뒤로 나자빠진다.
공격권 3단계의 효과 덕에 지팡이를 넓게 휘두르면 앞으로 나와 있는 대부분의 적은 모두 타격을 받는다. 다만 공격마다 마력이 5%씩 소모해서 많이 사용하긴 어렵다.
수십 명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음에도 이정도 타격으로 행동불능 된 적은 없다. 다들 어느 정도 수준은 있다 이거지?
그럼 더 강력한 걸 선물해주지. 그들 사이에 공간을 만들 아이셀에 누적한 피해를 방출할 장소를 만들어 둔다.
아군이 맞지 않도록 살짝 방향을 틀어서!
파아아아아앙-!
아이셀에 누적된 피해가 방출되며 차가운 냉기가 바닥에 깔린다. 적들은 엄청난 강공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아이셀에 피해를 입고 죽은 적은 10명도 안 되는 것 같다. 분명 제대로 맞은 적이 있었음에도 살아남은 녀석들…….
“후우?! 죽을 뻔했네……. 내 마법 그냥 삭제됐는데……?”
“진짜 세네……. 막았는데도 반피 달았어. 무슨 저런 마법을 딜레이도 없이 써?”
“야, 이번에 판단 좋았다. 역시 우리 일류 탱커야.”
내 공격을 받고 당황한 것 같지만, 당황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예고 없이 빠르게 터져나가는 아이셀의 폭발을 자신의 마법으로 일부 상쇄시킨 저 마법사. 그 짧은 시간에 판단하고 동료까지 지켜내는 저 탱커.
결코 만만히 볼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근데 쟤 복장이 좀 특이한데? 무슨 특수 NPC 아니야? 쟤 잡으면 저 옷 떨구려나? 저 옷 꽤 멋있는데.”
나를 NPC로 알고 있어? 그때, 내 머리 한편에 잠자고 있던 잔머리 센서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디. 입 좀 털어볼까?
“들어라! 제테니어! 나는 오즈만 제국의 뮬린 공작이다! 아르멜데인은 나 뮬린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동맹국이다! 이미 아르멜데인을 침략하고 황폐하게 만든 너희 제테니어를 쉽게 용서할 순 없으나 네놈들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겠다.”
오즈만 제국이라는 말에 그들의 눈이 벌떡 뜨여진다. 오즈만 제국은 이쪽 대륙의 초강대국으로 공작급의 귀족이 다른 나라의 국왕보다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반응을 보며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 당장 항복을 선언하고 병사를 전원 물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곳으로 진격해오는 오즈만 제국의 최강 기사단 5천 명과 피의 혈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내 목소리를 들은 몇 명의 적이 수런거린다. 아마 그들도 오즈만 제국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것이다. 나라 정보 창만 열어봐도 항상 맨 첫 번째 떠 있는 이름이니까.
“저거 진짜면, 우리 항복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직 오즈만 제국하고 붙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글쎄……. 패키지 형이 어떻게 하는지 봐야지.”
그들은 저마다 노랑머리 사내를 바라본다.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보더니 곧 입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