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실트의 왕국 -->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정말 미쳤었나 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눈을 뜨니 에르나가 눈길 가는 늘씬한 나신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그녀도 이제 막 일어난 건지 부스스하다.
“으흐으극!!”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니 온몸의 근육, 뼈마디가 비명을 지른다. 매번 에르나와 할 때마다 같은 패턴. 정신이 사라질 정도로 육체적 관계를 맺고 다음 날이 되면 언제나 석고대죄하는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이쯤 되면 내가 봐준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다. 어제는 얼마나 했더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횟수로만 따지면 신기록을 세운 것 같다. 아직도 아랫배가 아프다.
“후우……. 내가 졌습니다. 에르나. 나는 당신한테 못 이겨요. 내가 잘못했어요.”
“아닙니다! 제가 더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무서우니까 제발 그만해. 이 여자야…….
*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돌아가는 길. 뒤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뭘!!”
드디어 왔구나. 오랜만에 보는 나의 우올로! 그리고 나의 여인들! 하연이가 없다는 게 다소 아쉽긴 하지만 주말이라도 들어온댔으니. 그걸로 위안 삼아야지.
볼테이온의 몸을 돌려 우올로 가까이 다가간다. 다들 역시 놀란 모습이다.
미리 말은 해두었지만, 정말 이런 거대 몬스터를 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얼굴이다.
“뭘 니임! 그동안 보고 싶어서 혼났어요!”
“셀리안 별일은 없었어요?”
“네! 괜찮아요. 다들 건강해요!”
볼테이온에서 우올로로 건너오자마자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역시 셀리안이다. 페로렌과 미실트는 내가 타고 온 볼테이온에 더 관심이 가는지 나를 본 채도 안 한다.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이 있는데……?
“페로렌, 그 애가 전에 말했던?”
“아, 그렇지. 이 애가 테레이스. 여신 그레이아의 딸이야.”
여신의 딸 치고는 평범해 보이네? 별 다른 힘도 없어 보이고. 신의 딸은 신이 아닌가?
테레이스라는 소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안녕.”
음, 말이 조금 짧지만 보육원에서 자랐다니 이해해 줘야지.
“안녕. 꼬마야.”
“꼬마 아니야! 테레이스야!”
“그래, 미안, 테레이스.”
이 녀석 소리치는 거 보니 성깔이 보통이 아니겠는데……. 고작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벌써 조짐이 좋지 않다.
“근데, 그쪽 여성분은 누구?”
페로렌은 에르나를 보며 묻는다. 이후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 진짜 마도사라고? 나 마도사 처음 봤어!”
“저도요! 마도사… 실제로 보니 너무 멋있어요……!”
마도사가 특별한 거였나……? 히든 직업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어째 반응들이 심상치 않다.
들어보니 저쪽 대륙에서 마도사라는 직업은 히든 직업 못지않게 특별한 직업 중 하나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육체를 단련한 사람은 마력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마력을 공부한 사람은 육체적 능력이 게 일반적이다.
그런 와중에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 마도사라는 직업이 사람들의 로망으로 자리 잡는 건 당연하다고 한다.
두 가지를 배우기 어려운 거였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여인이었구만……. 그런 어려움을 겪다 보니 성격도 두 개가 된 건가?
“저, 저기……!”
에르나가 가진 두 가지 인격의 시초에 대해 생각하던 중 심각한 얼굴로 그녀가 입을 연다.
“미실트라는 분……. 혹시 저, 저……. 보신 적 없나요……?”
그녀는 설마설마 표정을 지어 보이며 미실트에게 더 다가간다. 미실트는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가오는 에르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혹시……. 저……. 몰라요……?”
자신을 모르냐는 말에 미실트는 고개를 젓는다.
미실트를 누군가랑 착각한 건가? 그게 아니면……. 미실트가 미실트가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
“에르나 왜 그래요?”
“국왕님……. 국왕님의 딸……. 국왕님의 잃어버린 첫째 딸 이름이 미실트에요.”
“예?!”
우올로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에르나의 발언에 깜짝 놀라 소리친다. 정작 미실트만은 잘 모르겠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의 얼굴을 살핀다.
“어린 시절 저는 미실트 왕녀님과 자주 놀아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얼굴의 형태를 분명히 기억합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앞에 계신 아가씨 얼굴에서 왕녀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가씨 실례가 안 된다면 몸을 좀 확인해봐도 괜찮겠습니까……?”
얼떨떨했지만, 몸을 확인하고 싶다는 말에 다들 말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만약 미실트가 진짜 왕녀라면, 그야말로 경사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미실트는 몸을 가린다.
“몸……. 내 몸……. 소중한 몸……. 낯선 사람 보여주면 안 돼…….”
미실트는 낯선 이에게 몸을 보여주는 걸 싫어한다. 누군가 그렇게 교육을 시킨 건지 나쁜 기억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건 중요한 사안이다. 내가 부탁하자 미실트가 마지못해 허락한다. 복종도가 100%는 아니어도 그간 지내오면서 꽤 친해졌기에 이 정도 부탁은 쉽게 들어준다.
에르나는 미실트의 몸을 확인한다.
‘없어…….’
처음엔 팔, 다음은 쇄골, 그다음은 허리, 골반 순으로 몸 곳곳을 확인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던 게 안 나오는 모양이다.
‘점도… 왕가의 문양도 없어……. 이렇게 닮았는데……. 제발……. 하나만……! 하나만이라도 나와줘……!’
에르나의 간절한 기분이 그대로 전해진다.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국왕의 잃어버린 첫째 딸을 찾는다면 쫓겨난 왕비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미실트가 왕의 딸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음에 에르나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떨군다.
“하아……. 왕녀님을 찾은 줄 알았는데…….”
많이 속상한 모양이다.
초점 없이 멍하니 바닥만 보던 에르나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든다.
‘아……! 흉터……! 그 흉터라면 아직 있을지도 몰라.
그러더니 허겁지겁 미실트의 웃옷을 쥐어 잡는다.
“죄송합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에르나는 미실트의 웃옷을 끌어 올리고 커다란 왼쪽 유방을 들어 올리더니 뭔가를 확인한다. 다소 무례하게 보이지만 미실트 크게 신경 안 쓰는 모습이다.
“……있습니다! 아가씨가 우리 왕녀님이라는 증거가 여기 남아있습니다!”
다들 에르나가 가리키는 흉터에 주목한다. 미실트의 가슴 아래에는 티도 안 날 정도로 희미한 흉터가 있었다. 완두콩만 한 붉은 흉터다.
“이 흉터는 왕녀님이 아기 때 왕비님께서 뜨거운 차를 드시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자국입니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남아있습니다……!”
저런 걸로 확신이 되는 건가 싶지만 에르나는 그저 감격스러운 얼굴로 미실트의 두 손을 맞잡는다.
“왕녀님……! 제 얼굴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저 에르나입니다……. 왕녀님과 항상 같이 있었던…….”
미실트는 역시 기억이 안 나는지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떠올려 보고 싶은 건지 에르나를 관찰하듯 시선을 떼지 않는다.
미실트는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내게 말해줬던 어린 시절은, 자신을 키워준 교황이 있었고, 그에게서 투레스탄의 천계 탑을 지키라는 명과 함께 지독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
그 외 항상 함께했었던 중년의 여인과 11명의 비슷한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 그것 말고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했었다.
지금 와서 유추해보자면 미실트와 함께했던 중년의 여인이, 미실트를 데리고 도망쳤다던 보모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무슨 이유로 한 나라의 왕녀를 납치했는지 모르겠지만, 빼돌린 뒤로도 계속 미실트를 돌봤던 모양이다. 그런 행동으로 봐선 돈이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자세한 이유는 본인을 찾아서 직접 물어봐야겠지만,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니 그렇게까지 하긴 어려울 것 같다.
미실트가 왕녀라…….
*
왕녀가 맞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법 있다고 한다. 몸에 새겨진 왕가의 문양을 확인하는 것. 궁궐에 있는 왕가의 고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 끝으로 부모와 자식이 함께 있을 때 친자 확인 마법을 걸어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중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 왕비를 찾았다.
그런데…….
“건물이 무너진다!”
“살려줘……!!”
“꺄아아아악-!”
인간, 이 종족, 짐승의 비명이 고막을 뚫을 듯 울려 퍼지고, 매캐한 연기와 새카만 그을음이 아름답던 도시를 뜨거운 지옥의 그림자로 덮어간다.
도시로 깊이 들어갈수록 펄펄 끓는 열풍이 살갗을 태울 듯 불어온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조금만 빨리 가주실 수 없겠습니까?”
에르나의 걱정스러운 기색.
“셀리안. 이거 설마…….”
“네……. 저번의 그자들일지도 몰라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페로렌과 셀리안.
불과 며칠 전까지 평화롭던 아르멜데인 왕국은 어느 전쟁영화 속 한 장면처럼 피폐해졌다.
에르나의 성화에 우리는 서둘러 왕비를 찾아 속도를 높였다.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 보이는 얼굴. 왕비를 걱정하는 기분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왕비님!
텅-! 에르나의 다급한 몸놀림에 낡은 문은 거침없이 뜯겨 나간다.
“왕비님 어디 계십니까?!”
에르나가 왕비를 찾아 애타게 부르짖는다. 그러나 왕비는 없다. 방이 넓지 않기에 굳이 들어가서 꼼꼼히 찾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에르나는 믿고 싶지 않은 듯 방안을 샅샅이 뒤진다.
“왕비님……. 왕비님……!”
사라진 왕비의 행방에 목이 메는지 가슴을 친다.
“왕비님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 왕비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셨을지도 몰라요. 포기하지 말고 주변부터 찾아봐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네……. 뭘 님 말씀이 맞습니다. ……분명 피신하셨을 겁니다. 왕비님은 나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아직 상태가 완전히 호전된 게 아니라 멀리 가진 못하셨을 겁니다.”
집을 나서니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에르나!”
항상 왕비를 돌봐주던 옆집 아주머니다. 그러나 오늘따라 복장이 심상치가 않다. 갑옷……? 그냥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황금빛 갑옷이다.
에르나도 그걸 느꼈는지 묻는다.
“아주머니……? 그 복장은 설마……?”
“설명은 나중에……! 왕비님을 따로 모셨으니 이쪽으로 오렴!”
우리는 그녀를 따라 거리를 조심스레 이동하며, 현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테니어라는 신생 길드가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다고 한다.
적군 병력은 1,000명 정도. 전쟁 인원치곤 많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게임상에서 1,000명은 웬만한 왕국의 병력보다 많은 수준이다.
콰쾅-! 공중에서 포탄이 떨어지며, 우리가 가려던 길을 가로막았다.
“이쪽으로!”
옆집 아주머니는 주저 없이 방향을 틀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그녀의 정체는 국왕이 비밀리에 조직한 별동대라고 한다.
별동대는 선대의 은퇴한 기사 단장이나 궁정 마법사들이 모여 국왕의 개인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였다.
그녀는 여태까지 국왕의 명령으로 왕비의 주변을 맴돌며 상태를 보고하라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사이가 나빠서 쫓아낸 게 아닌 만큼 왕도 남모르게 왕비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에르나는 그간 옆집 아주머니로만 알고 지내온 그녀의 정체에 다소 충격받은 듯한 얼굴이다. 그녀를 잠깐 봤던 나도 충격인데 몇 년을 함께했던 에르나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
“이쪽 문을 부숴!!”
왕비가 있는 곳에 다다르니 제테니어 길드의 5명이 열심히 문을 뜯고 있다.
그들을 본 아주머니는 앞으로 나서더니 수평으로 한 손을 휘두른다.
촤아악-! 살랑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5명의 병사의 몸이 단번에 걸레짝처럼 너덜거린다.
아무리 일회용 NPC라지만 왕국에 선전 포고가 가능할 정도로 수준 높은 길드의 조직원이다. 그런데 손짓 한 번에 적 다섯을 보내버린다고? 국왕의 별동대라는 것은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 거지? 놀랍기만 하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자 왕비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병마와 싸우랴 나라에 들이닥친 재앙과 싸우랴 몸도 마음도 힘들어 보인다.
“왕비님, 옆에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에르나…….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왕비님이야말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왕비님. ……먼저 왕비님께 보여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내게……? 누구를…….”
에르나가 소개하기도 전에 왕비의 시선은 미실트에게로 향했다. 왕비의 표정이 굳는가 싶더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린다.
“너……. 넌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