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123화 (122/147)

<-- 마검사 에르나 -->                               “방금 뭐라고 하셨죠? 빛을 살린다고요?”

“그래, 빛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망치로 못 할 것은 없어.”

상당히 혹할 말이다. 비르미스의 망치. 대장장이의 신이 써온 물건이니만큼 지금 당장은 별 볼 일 없지만, 빛인지 뭔지 그가 말하는 대로만 한다면 ‘신화 아이템’이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신화 아이템은 모든 아이템 중 가장 높은 등급을 뜻한다. 이 세계 신들이 썼다는 물품 중 하나로 아이템 개수가 제한되어있고,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그 가치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비르미스의 망치가 내 건 아니지만, 드웍프가 가지고 있어도 나한테 도움 될 수 있으니까.

“빛을 살릴 수 있나요?”

“물론, 단 조건이 있어.”

역시 조건인가……. 만약 신화급 아이템이라면 쉬운 조건은 걸지 않겠지. 일단 들어볼까……?

“무슨 조건이죠?”

“그쪽의 비르미스 님을 닮은 놈. 이름이 드웍프랬나? 네 놈이 내 제자가 되어라.”

“좋습니다. 데려가십시오.”

망설임 없이 대답하니 옆에 있던 드웍프가 버럭 소리친다.

“아니 형님!!! 생각이라도 하고 말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 몸이라고요!”

벨라프의 대답과 내 대답 사이에는 0.02 초 정도의 지연시간이 있었다. 그게 생각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려운 조건인 줄 알고 겁먹었는데 이 정도라면 간단하기도 하지. 신화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면 싸게 먹히는 것 같은데, 이런 내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아직 한참 멀었다.

“야, 민성아. 잘 생각해 봐. 네 무기 신화급 아이템일 수도 있잖아. 그러면 그게 보통 일이 아니야. 눈 딱 감고 저 양반 제자 돼서 대장장이 노릇 좀 하다가 망치 완성되면 나오면 되잖아.”

“형님, 저 정말 싫어요. 저 변태 같은 사람 제자가 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습니다!”

극구 거부하는 드웍프의 모습에 벨라프가 나서서 자신의 제자가 될 필요성을 어필한다.

“평생 여기서 살라는 거 아니야. 길어야 한 달이다. 비르미스의 망치를 다루려면 좋든 싫든 내 가르침이 어느 정도 필요할 거야, 전부 가르치려면 한 달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몸뚱이라면 한 달 동안 내 가르침을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말이야.”

“봐봐. 평생도 아니라잖아. 너 잘 배우고 오면 빚 절반 탕감해준다.”

그럼에도 싫은 건 마찬가지인지. 계속 고개만 젓는다. 그렇다면 별수 없네.

나는 드웍프의 의견을 묵살하고 가게 안쪽으로 그냥 밀어 넣는다.

“민성아 조금만 고생하자!”

“아악! 형님!”

“먼저 가장 기본적인 강철과 교감하는 법부터 알려주마.”

“아아악! 싫어요! 끼아아아악!!!”

드웍프를 사지로 몰아넣고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가려는데, 한 여성이 내 옆을 지나쳐 가게로 들어온다. 얼핏 그녀를 보는데 자연스레 걸음이 멈춘다.

부정 않겠다. 이뻐서 멈춘 거 맞다.

“안녕하세요. 벨라프 씨!”

“뭐야? 바쁜데 왜 또 왔어? 설마 또 무기 수리해달라는 건 아니지?”

그녀는 벨라프의 물음에 말없이 웃으며 자신의 망가진 무기를 꺼내 놓는다.

“이번에 돈은 가져왔어?”

“아, 저 그게……. 돈은 없고…… 이 팔찌를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낡은 갑옷에 낡은 검. 그러나 그녀가 내민 팔찌만은 영롱한 빛을 발한다. 귀중품 감정엔 일가견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잘 만들어진 수제품이다.

“음……. 귀해 보이는데. 정말 이런 걸 팔겠다고? 수리비도 없어서 장신구도 팔 지경이면서 왜 자꾸 무기는 망가뜨리는 거야? 그 무기도 이제 명이 다해서 고쳐 봤자 금방 망가질 거야. 그건 무기한테도 실례라고. 차라리 새 걸 하나 사는 게 어때?”

“그렇지만 새 무기를 사면 여왕님 약값이……. 그냥 고쳐주십시오.”

“또 그놈의 여왕님 타령이군……. 일단 알았으니까 이건 그냥 집어넣어. 이번 수리는 단골한테 주는 혜택으로 할 테니까.”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데……. 어차피 페로렌이 오는 동안 할 것도 없으니 시간이나 때워 볼까?

“저기, 벨라프 씨. 수리비 제가 댈 테니까 이 여성분 장비 전부 다 수리해주세요.”

“음, 네가?”

어차피 5억도 넘게 있는 데 수리비 정도야 가뿐하니까. 부자 노릇 좀 해보자.

*

그녀의 이름은 에르나. 아르멜데인 왕국의 기사 출신으로, 왕국의 유일한 마검사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곳 아르멜데인 왕국의 왕비인 사모이나를 따라 5년 전 이곳에 왔다고 한다. 왜 왕비가 왕실이 아닌 왜 이런 허름한 장소에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녀는 첫째 공주를 빼돌렸다는 황당한 누명을 쓴 채 왕족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왕과 사이가 각별했기에 나라에서 완전히 쫓겨나진 않은 모양이다.

비록 에르나에게는 파문당한 전 왕비를 끝까지 보좌할 의무가 없었지만, 왕비를 따라 힘들게 사는 건 자신이 선택한 일인 듯했다.

“아, 이제 곧 왕비님이 계신 곳입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모험가님. 혹여 성함을 알려주신다면, 이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제 이름 뭘입니다. 제가 좋아서 한일이니 빚은 됐습니다. 대신……. 왕비님을 한번 뵙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왕비님을요……?”

사실 제삼자가 파문당한 왕비를 보자고 한다는 것 자체가 꺼려질 수도 있는 부탁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흔쾌히 허락해 준다. 아마 대장간에서의 내 작은 선물이 그녀의 신뢰도를 끌어올린 듯하다.

안에 들어서니 왕비의 병세가 실로 나빠 보인다. 원래 몸이 약했던 왕비는 왕실에서 나온 뒤 그 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이 먼지투성이에 벌레도 들끓는다.

“왕비님 저 왔습니다. 약초를 사 왔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에르나는 앞에서 사 온 약초를 뜨거운 물에 넣고 잘 으깨더니 병상에 누워있는 왕비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는다.

“콜록! 콜록!”

“조금만 참아주세요. 왕비님.”

냄새부터 느껴지는 약초의 쓴 기운에 왕비는 기침으로 토해내지만, 에르나는 반강제로라도 삼키게 한다. 보는 사람도 고통스러울 정도지만 저렇게라도 먹이지 않으면 왕비의 병세가 악화하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어쩌다가 왕비가 신관도 부르지 못한 채 저러고 있는 거지? 약초보다는 신관이 더 효과적일 텐데…….

그녀와 잠시 이야기하면서 궁금했던 이유를 물으니. 신관도 병을 낫게 할 수 없었단다. 그럼에도 약초보다는 효과가 뛰어나겠지만 금전적 부담 때문에 더는 부를 수도 없는 듯했다.

사실 이 집도 집이라기보다는 판자 몇 개를 쌓아 올린 정도에 불과하다. 한눈에 봐도 생활고에 크게 시달림을 알 수 있다.

“왕비님 죽 먼저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녀는 장작불에 올려놓았던 죽을 왕비에게 먹이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어! 괜찮아요……?”

에르나가 넘어질 뻔한 걸 간신히 붙잡았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정말 오래 굶었는지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휘청거리면서도 왕비에게만큼은 헌신하는 모습이다. 기사단 출신이라면 혼자서도 먹고 살 만할 텐데 이런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왕비에게 헌신하는 이유가 뭘까?

“왕비님은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그건 왕비님을 보좌해온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공주님을 모시던 보모만 찾을 수 있다면, 왕비님은 진상을 밝히고 왕궁으로 다시 돌아가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왕비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그것이 이러한 그녀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 같다. 말투는 딱딱해 보여도 정에 약한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왕비는 평생 왕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그게 가능했다면 5년 동안 이런 누추한 곳에 누워 있진 않았겠지…….

잠시 후, 누군가 낡은 문을 열고 그녀를 찾아왔다. 에르나도 아는 사람인지 그녀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반겼다.

“아주머니!”

“왕비님은 좀 괜찮으셔?”

그녀는 근처에 사는 민간인인 듯하다.

“죽을 쑤어 드렸는데, 통 못 드시네요.”

“왕비님 드리려고 신선한 음식을 좀 싸 왔어. 내가 돌봐 드릴 테니까 에르나는 가서 일 봐. 그리고 이건 감자인데. 오늘도 왕비님 챙기느라 제대로 못 먹었을까 봐서.”

아주머니는 바리바리 싸 온 감자 두 개를 에르나에게 건넨다.

“매번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잘 먹겠습니다.”

우연찮게 에르나와 친해져서 시간 날 때마다 왕비님을 돌봐 주는 모양이다. 이런 인연이 벌써 몇 년째 이어져 오고 있단다. 참 좋은 분 같다.

에르나는 아주머니가 들어온 즉시 집을 나섰다. 그녀는 왕비를 병세를 호전시킬 밀레민이라는 치유의 꽃을 찾으러 매일 같이 집을 나선다고 한다. 밀레민은 몬스터가 출몰하는 맹기리온 숲 어딘가에 나온다는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도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나오긴 했지만, 계속 따라다닐 만한 명분이 없다. 거기다 그녀가 가려는 사냥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고…….

그렇지만…….

“같이 가시죠. 저도, 거기 볼일이 좀 있어서…….”

“아, 혹시 ‘볼테이온’을 잡으려고 하는 건가요? 최근 볼테이온이 여행자를 습격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퇴치 의뢰를 받으신 겁니까?”

“볼테이온……? 아, 네, 네. 그럼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렇다고 하자. 지금 당장 할 게 없어서 따라다닌다고 하면 진짜 없어 보일 테니…….

*

숲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시장에 들러서, 체력 물약 2개와 재생 물약 10개를 샀다. 체력 회복 물약은 처음에 공짜로 받은 걸 제외하면 지금 처음 사는 건데,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가격이 비싸다. 단번에 50%의 피를 채워주는 게 무려 개당 천만 셀이다.

재생력 향상 물약은 300만 셀로 체력 물약보다 조금 더 저렴하지만, 이쪽도 비싸긴 마찬가지다. 재생 능력은 10분간 지속하며 10초당 200씩 채워준다.

물약값이 이러니 사람들이 힐러를 찾아대지…….

꽤 큰 출혈이지만, 지금은 아이셀도 없고 비상시를 대비해 이 정도는 비축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물약 상점에서 포션을 사고 있는데, 에르나가 와서 병에 담겨있는 검은 가루를 가리킨다.

“맹기리온 숲에 들어가시려면 저‘연조 파우더’로 무기를 코팅하시는 게 좋아요. 몬스터들의 피가 강산성을 띠어서 무기가 쉽게 부식되거든요.”

가격은 5만 셀로 무척 저렴하다. 그러나 에르나는 그 정도의 돈도 없는지 나에게 권유만 할 뿐이다.

“당신 것도 같이 사줄게요.”

“예? 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

“무기 부식되면 수리비가 더 나오잖아요. 그러지 말고 아예 필요한 거 다 골라요. 제가 사드릴게요.”

망설이는 것 같다. 아무래도 처음 만난 사람이 이런 호의를 베풀면 경계가 심하기 마련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이거 공짜 아니니까. 나중에 왕비님 낫고 돈 벌기 시작하면 그때 갚으면 되잖아요?”

“감사합니다. 뭘 님 이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물건을 고르면서도 미안한지 내 눈치를 살펴 가며,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간다.

“눈치 보지 말고 팍팍 집어요.”

……라고 말은 했지만, 조금만 덜 팍팍 고르라고 할 걸 그랬나 싶다. 내 물약값과 그녀가 필요한 물품을 계산하고 나니 무려 8천만 셀이라는 거금이 소요됐다. 내 물약값을 제외하고서라도 무려 3천만 셀 가량의 아이템을 더 구입한 것이다.

NPC가 유저의 돈을 이렇게 부담 없이 사용해도 되는 거야……?

물론 계산할 때 거절할 수는 있었지만, 자존심이 있지 멋없게 무를 수도 없고……. 이왕 지른 거 쿨해지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