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죽음 --> “주인님……! 부탁하신 거 여기요.”
“아, 고마워.”
“더 필요하신 자료 있으면 말씀하세요……! 김민철한테 다 뺏어다 드릴게요.”
몇 주간 나는 여왕벌을 이용해 조직을 무너뜨릴 증거를 모으면서, 드웍프 복수의 일환으로 김민철의 사업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물통을 기름통으로 바꿔치기하거나 여인들을 세뇌해서 의도적으로 손님의 몸에 불을 붙이게 하는 등. 가계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했다.
어차피 몸만 파는 여인들은 대부분이 NPC이기에 보복당할 염려도 없고, 잘못도 그들을 훈련한 김민철의 부하가 받기에 크게 문제 일은 없다.
“너 근데 정말 김민철이랑 있는 거 괜찮아? 전에 알던 사이였다며. 원하면 나오게 도와줄게.”
“괜찮아요. 걔 그냥 전에 나 따라다니던 앤데. 우리 아버지 무서워서 나한테 심한 짓 못 해요. 그러니까 찌질이처럼 정체 숨기고 납치 사주나 하지……. 나한테 누군지 맞춰보라면서 으스대더니 내가 이름 부르니까 오히려 당황하면서 발뺌하던데요?”
사실 이 길드에 들어와서는 여왕벌부터 구해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김민철이 여왕벌한테 놀아나는 것 같다. 여왕벌도 그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에 그냥 놔두고 있다.
그보다 주인님……. 저랑 실제로 만나주시면 안 돼요……? 저랑 만나주시면 제가 같이 있는 동안 주인님을 왕자님처럼 모실게요.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최고급 술도 사드리고. 최고급 호텔에서 풀.코.스.로. 즐기게 해드릴게요. 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여왕벌은 보통 부잣집 딸이 아닌 것 같다. 말로만 듣던 금수저. 아니, 어쩌면 다이아 수저일지도 모른다. 전국의 땅값 높은 주요 지역마다 집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어느 정도 자산이 있는 건지 겁나서 추측도 못 하겠다.
한마디로 내가 전에 여왕벌한테 했던 행동. 잘못됐으면 난 진짜 감옥에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법조차 바꿀 수 있는 게 돈이니까…….
아무튼 그 돈이 많은 것 때문에 따라다니는 남자들도 많고 하지만, 실질적인 친구는 별로 없는 듯하다. 본인도 이제 그것에 질려가던 모양. 그래서인지 요즘은 나한테 집착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렇지만 여왕벌을 현실에서 만나 줄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 나 여자친구 있어.”
각인의 효과인지 뭔지 유저를 복종도 100까지 올린 적이 많지 않다 보니 이런 제안은 오히려 내가 더 부담스럽다. 더군다나 실제 바람은 절대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 내 신조.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짓은 못한다.
지금은 게임이기에 난잡하게 사는 거지. 어디까지나 게임은 게임일 뿐! 현실과 게임을 구분 못 하는 머저리는 아니다. 물론 게임치곤 너무 사실적이라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거절하는 듯한 내 말에도 여왕벌은 물러서고 싶지 않은지 자신의 장점을 필사적으로 어필한다.
“여자친구보다 제가 더 나을걸요? 저 몸매도 엄청 좋아요! 남자들이 환장하는 ‘자연산 D컵’인데……? 아마 사진 보여드리면 마음 바뀌실걸요?”
미안하지만, 하연이는 자연산 F다. 비빌 걸 비벼야지. 상처받을까 봐 굳이 말 꺼내서 칼질하진 않겠다.
“저, 주인님 생각하면서 사진 여러 장 찍어놨어요. 심플한 것부터 아주 진한 것까지……. 보고 싶으시죠……?! 말씀만 하시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됐으니까 돌아가라…….”
“아앙……. 주인니임……!”
자꾸 매달리는 여왕벌의 엉덩이를 토닥이면서 간신히 돌려보내고, 드웍프에게 말을 건넸다.
-‘이번에 김민철 조직 내부 평가 때 등급이 많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형님.’
-‘그래서, 너는 속 좀 시원하냐?’
-‘내 형님! 가끔 저한테 짜증 내긴 하지만 그래도 통쾌합니다.’
벤지 길드에는 머리 역할을 하는 수뇌부가 있고 그 밑에는 팔다리 역할을 하는 행동대장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매달 조직 평가를 거쳐 순위를 매기곤 했는데, 이중 가장 순위가 높은 행동대장은 조직의 윗사람과 대면할 수 있는 수뇌부에 들어가서 일할 기회를 얻곤 했다.
반면 하위권을 유지할 경우 퇴출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만약 조직에서 퇴출당할 경우 단순히 조직을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 정보를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끔찍한 입막음을 당한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끔찍한지는 내가 직접 당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딱 잘라서 말을 못 하게 될 정도로 끔찍하다고 하는 것 같다.
여기서 김민철은 행동대장에 속해 있는데, 현재 나의 지속된 방해로 인해 평가 점수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퇴출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것 때문에 김민철을 밀어주던 수뇌부의 인물도 곤란에 처했는지, 허구한 날 김민철을 찾아와서 부족한 실적에 닦달하고 화풀이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부족해…….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해.
나는 현재 김민철이 부탁한 납치 및 조교에 관한 일로 유저 한 명을 데리고 있다. 그녀를 이용해 이들이 실제 유저를 납치해서 인신매매한다는 증거를 파악한다면 김민철도 드웍프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후우…….”
그녀가 호흡을 조절하듯 가볍게 숨을 내쉰다.
“괜찮아요?”
물음에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다. 김민철이 부탁한 일이지만 내가 그녀를 데리고 있게 된 경위는 조금 남다르다.
“정말 괜찮겠어요? 실제로 납치당할 걸 알면서도 하겠다니…….”
“정말 괜찮아요. 저는 성열 씨 일을 돕는 것뿐이니까요.”
성열 씨가 대체 누구기에……. 다짜고짜 나타나서는 자신을 납치해달라고 하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벤지길드가 하는 납치에는 그 나름의 규칙이 있다. 상세한 내용까지는 잘 모르지만 그들은 주로 혼자 사는 사람, 성매매 업소 관계자, 정계에 영향력이 없는 사람을 위주로 납치 계획을 짜는 것 같다.
그들은 우선 납치대상의 캐릭터와 접촉해 세부정보를 알아내고 그들로 하여금 돈을 벌게 준다며 특정 장소로 꾀어내거나 하는 식으로 납치를 수행하는 듯하다.
그동안 정보를 모아서 이 정도까지 알아낸 바는 있지만, 최근 내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김민철이 나를 의심하는 같기에 더는 자세한 정보를 모으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 내 앞에 그녀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벤지길드의 납치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면서, 당할 일을 알고도 몸소 자신을 김민철에게 넘겨 달라고 한 그녀. 그렇게 해주는 조건으로 나에게 원하는 정보를 직접 얻어주겠다고까지 약속했다.
심지어 그녀는 내 각인 기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뭔지 그녀의 복종도는 시작부터 50%가 넘었다.
“그럼 들어갑시다.”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민철이 매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본다. 평소에는 환영하더니 요즘은 상황이 안 좋은 것도 그렇고 그리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말씀하셨던 여자 잡아 왔습니다.”
“아아……. 이제야 ‘겨우’ 한 건 하셨네? 오늘까지 아무것도 없었으면 면담이나 한 번 할까 했는데. 그래요. 좀 노력 좀 하자고요. 예?”
비꼬는 듯한 음색으로 다가와서는 내 뒤의 여자를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더니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근데 형씨. 내가 준 리스트에 이런 여자가 있던가……?”
나는 리스트를 펼쳐 보이며 정확히 적혀 있는 그녀의 아이디를 보여준다. 그러자 곧 의심을 거둔다.
“아아……. 미안. 요즘 신경이 예민해서 착각했나 보네. 그래요. 두고 나가요. 훈련은 잘 시켰겠지 뭐.”
그녀는 분명 납치 리스트에 아이디가 올라가 있다. 그러나 그 리스트는 김민철이 나한테 준 것이 아닌, 조금 전 여자가 나한테 준 것이다. 말하자면 조작 자료인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리스트까지 만들어서 나한테 준 건지. 혹시 잠입 경찰 뭐 그런 건가……?
그런 거라면 굳이 나를 이용할 필요는 없을 테고……. 뭐 하는 여자일까?
*
-‘지금 내부에 들어왔어요.’
-‘거기 잡혀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화 좀 나눠 볼 수 있나요?’
-‘근데 뭔가 이상해요……. 아무도 없어요. 뭔가 느낌이…….’
그녀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조금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
-‘뭘 씨. 혹시 제 신호가 끊기면 김성열이라는 남자를 찾아요. 제 이름은 강유정이고요. 반드시 김성열…….’
-‘이봐요. 이봐요?!’
그리고는 거짓말같이 그녀의 접속이 끊겼다. 조금 전 김민철에게 데려다줬는데 그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김성열…….”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더러 어떻게 찾으라고…….
“내 이름 불렀어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실루엣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단발머리의 마른 체격…….
“막스핀?”
“유정이랑 지금 연락 안 되죠?”
“당신이 김성열……?”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존재. 우연인지 운명인지 내 주변을 집요하게 맴돌던 남자.
“당신 정체가 뭐에요. 대체? 나랑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겁니까?”
“일단 앉을까요? 말씀드릴게요.”
그는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나에게 밝히기 시작한다.
*
막스핀은 사회부 소속의 김성열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플로어에 둥지를 튼 한지파. 그러니까……. 이 게임에서 벤지길드라고 불리는 조직이 벌이는 일에 대해 나처럼 정보를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정말 기자라고요……?”
“네. 못 미덥나 봐요?”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사실 못 미덥기도 했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가 왜 취재가 아닌 게임 속에서 이러고 있느냐는 것이다.
“현장 취재에는 원래 다양한 방법이 있는 거예요. 세상이 변했고 사람들도 거기에 맞춰 가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아, 그보다 그에게 해야 할 중요한 말을 깜빡했다.
“강유정이라는 사람이 잡혀가서 신호가 끊겼어요. 그 사람이 당신을 찾으라고 하던데…….”
“아마 벤지길드에서 유정이네 집으로 사람을 보내서 납치한 모양이네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 덕분에 놈들의 아지트가 어딘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납치를 당한 것 같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이 미친 인간은 정말 기자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혹시 사이코패스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납치당했다는 소리를 하면서 저렇게 웃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납치당한 거라면 구할 생각을 해야지! 그런 소리가 나와요?! 그놈들 악질이라면서요. 당신을 위해 그 무서운 일을 당했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요?!”
“너무 심각하게 그러지 마세요.”
“지금 안 심각하게 생겼어?! 이거 실제 상황이잖아요! 당신 뭐야? 정말 기자 맞아……?”
문득 그가 말한 것들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불신의 싹이 마음 한편에 돋아난다. 만약 그가 조직의 일원이면 어쩌지……? 그래서 그동안 내 주변을 맴돌았던 건가?
그가 실실거리며 웃더니 안색을 싹 바꾼다.
“그래요. 사실…….
그가 뜸 들이는 짧은 시간 동안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설마 김민철의 부하는 아니겠지? 만약 그가 한지파의 일원이라면 내가 그들의 정보를 모으고 있는 걸 이미 들켰다는 말이니까. 이 일을 빌미로 드웍프의 누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영 뜻밖의 말이었다.
“유정이 사람 아니에요.”
“예……?”
“유정이 프로그램이에요.”
프로그램……?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
“거짓말하지 마요! 분명히 유저라고 그랬는데.”
그가 나에게 뭔가를 보내준다. 강유정이라는 NPC 정보라는데 솔직히 봐도 뭔지 모를 정보와 코드의 나열이다.
“말하자면 유저인 줄 아는 NPC라고 할까요? 제가 게임사 측에 아는 사람이 좀 있어서 이번 취재를 위해 맞춤제작 NPC 좀 받았죠. 아, 이거 비밀인데 참……. 이건 둘만 아는 걸로 해둡시다.”
정말인가……? 쉽게 믿음은 안 가지만 나 하나 속이자고 NPC 정보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까…….
“그럼, 강유정이라는 분은 신경 안 써도…….”
“네, 거기는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을 위한 서프라이즈였으니까.”
거참, 기분 나쁜 서프라이즈네……. 난 진짜 사람이 납치당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내가 데려다준 여자가 실제로 납치당했다고 한다면 죄책감이 정말 컸을 거다.
“그보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어요.”
“그게 뭐죠?”
“지금 놈들에 대해하고 있는 조사 당장 손 떼고 그 길드에서 나와요.”
그의 얼굴에서 평소와 같은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다. 진지한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위험하니까 그렇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게임을 잘 못 하니까 당신을 키워서 제 보조로 써볼까도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이런 일에 일반인을 개입시키는 건 너무 위험한 발상인 것 같아서 지금은 접었어요.”
역시 위험해서인가……. 솔직히 그동안 벤지 길드를 조사하면서 느낀 바가 하나 있다면, 이러다가 진짜 목숨 잃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엔 드웍프를 보호해주자 하는 마음 하나 가지고 시작했지만, 깊이 팔수록 내가 감당할 범위를 넘어선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던 참이다.
차라리 이 사람한테 대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쪽이 더 빠르고 안전할지 모른다.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 모아온 자료를 넘기고 드웍프의 누나가 어딘가 감금당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내가 준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입을 연다.
“그렇단 말이죠……? 일단은 내가 최대한 찾아볼게요. 그 누나라는 분을 김민철이라는 녀석이 개인적으로 데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조직 차원에서 데리고 있는 건지 파악조차 안 되니까. 우선 찾아보고 알아내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안타깝지만, 당신이 모아온 정보는 전부 쓸모없어요. 이것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 없거든요.”
그는 건네준 자료를 내게 돌려주었다.
“그 자료는 들키지 않게 숨겨두든가 삭제해버리든가 하세요. 가지고 있어봤자 괜한 의심만 살지 몰라요.”
그동안 열심히 모은 자료가 전부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으니 조금은 씁쓸하다.
“그리고 이건, 내 연락처에요. 그냥 혹시나. 나중에 게임 쪽으로 어려운 부분 있으면 도움받고 싶은데 그래도 되죠? 거기로 문자 하나만 남겨 줘요.”
김성열 기자라……. 나는 그의 연락처를 기억하고는 품속에 쟁여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