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조윤 --> 세계적인 가상현실 게임 개발사 플리엔젤. 그곳의 임직원들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가상현실 게임 덕에 밤낮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임조윤 대리. 잠깐 나 좀 보지.”
국내 서버 게임 개발 2팀장 김유전. 그는 평소 팀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소문났지만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에 차디찬 냉기가 감돌았다.
“예, 팀장님.”
부름을 받은 임조윤 대리는 올 것이 왔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팀원들은 그가 끌려가자마자 한데 모여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임조윤 대리, 하지 말라는 거 기어이 하더니 결국 끌려가네.”
“그러게……. 왜 저렇게 고생을 사서 하는 거여 대체?”
“임 대리님도 아마 회사에 원한이 많으실 거예요. 회사 경비원으로 일하시던 임 대리님 아버지께서 안 좋게 쓰러지신 이후에 최근 돌아가셨잖아요…….”
임조윤 대리. 20살 이른 나이에 플리엔젤의 사원으로 입사해 9년째 장기근속하고 있는 개발팀원 소속 직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플리엔젤의 경비원으로 오래 근무해왔다. 그런데 2년 전 회사 직원과의 작은 다툼으로 인해 사고를 당한 이후, 내내 병상에 앓아눕다가 불과 몇 달 전 세상을 뜨셨다.
누가 보더라도 직원의 잘못으로 생긴 사고였음에도 회사는 그 일에 대해 함구하고 덮으려 했다. 그러나 임조윤 대리는 그런 부당함을 견디지 못하고, 지속해서 회사에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와 진상규명을 촉구해왔다.
2년간 그렇게 힘써서 임조윤이 얻어낸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일로 그가 싸움개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회사 임직원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어……?”
“꽤 유명한 일화인데 모르셨어요? 다른 부서에서도 꽤 시끌시끌했는데……. 임조윤 대리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냐, 사건이 어떻게 될 것 같냐. 그것 때문에 업무 공유 시스템이 마비될 정도라서 당시 그 일에 관해 얘기 꺼낸 사람 여럿 징계 먹었을걸요?”
“난 지사 출신이라 몰랐지. 그나저나 회사 입장에선 어지간히 껄끄러운 인물이겠구먼……. 우리 입장에선 회사가 잘못했다고 봐도…….”
능력이 충분하고 근속연수가 찼음에도 과장으로 진급 못 하고 대리로 남아있는 이유도 그와 동일했다. 뱉기엔 아깝고 삼키기엔 너무 뜨거운 존재라 회사에서도 별다른 수 없이 그를 대리로만 남겨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
김유전 팀장은 팀장실에 들어와 난 잘못 없다는 식으로 앉아있는 임조윤 대리를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미 자신의 말은 거의 안 듣는 수준이고 어떻게 말해야 그나마 하는 시늉이라도 할지 고민된 탓이었다.
김유전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왜 자꾸 플로어 쪽 로그 건드려? 이과장한테 지시 못 받았어?”
“받았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임조윤의 말에 김유전 팀장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차라리 못 받았다고 핑계라도 댔으면 조심하라고 다그치면서 넘어가면 될 일이었는데, 알고 있다면 명백히 지시 불응에 해당 일 아니겠는가? 이것은 충분히 징계감이었다.
그러나 팀장은 그의 얘기를 들어보고자 했다.
“뭐가 문젠데? 왜 그러는 거야 너?”
“팀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플로어 쪽 움직임이 최근 심상치 않은 거. 게임 전체의 3%에 해당하는 자금이 플로어 쪽에서 유동하고 있다고요. 말이 안 되잖아요.”
“네가 무슨 경제 분석 전문가야? 야 이 자식아. 너 개발자야 인마! 정신 차려! 자금 이동이야 매번 바뀌는 거고 우연히 그쪽으로 큰 길드들이 몰려간 걸 수도 있는 걸 가지고 왜 이렇게 유난이야? 그런 게 있었으면 운영팀에서 먼저 파악했겠지! 인마!”
“운영팀에서 쉬쉬하고 있는 거면요? 월드가 얼마나 큰데 그 자그마한 공간에서 그런 규모의 금액이 움직인다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전체 월드에서 따지면 플로어는 0.1%도 안 될 정도로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인만큼 이름난 길드조차 초대장 없이는 그곳을 함부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려 전 세계의 3% 자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그냥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그런 문제만 있었다면 의심이 가도 넘길 수 있었겠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들이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임조윤은 김유전 팀장의 책상 위에 자신이 들고 온 자료를 내려놓았다.
“최근, 플로어 한 지역에서 일어난 접속 기록 로그 전부 뽑은 거예요.”
김유전은 도끼눈을 뜨고 임조윤을 쳐다봤다. 이런 걸 왜 조사했냐는 낯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공식 인증된 기기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루트로 접속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접속 종료된 횟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요. 우리가 권장하고 있는 방법이 아닌데도요!”
“하아……. 임조윤 대리. 그만해라.”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허가되지 않은 비인가 프로그램이 가장 많이 잡히는…….
쾅! 김유전은 책상이 부서질 듯 세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라고! 이 자식아!!!”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듯 시뻘게져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심호흡으로 화를 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후우……. 조윤아. 그만하자 제발!”
“그만하라고요……?
팀장은 질린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대충 넘기려는 팀장의 태도에 임조윤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버젓이 보이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요?!”
“위에서 내려온 지시야. 그냥 눈감고 귀 닫아. 넌 그냥 너한테 주어진 일만 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민형태 그 인간이 지시한 거죠? 겉으론 깨끗한 척 속으론 음흉한 짓거리 다하고 다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여기 회사야. 호칭 똑바로 붙이고 말조심해. 내가 너 눈감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김유전은 임조윤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능력도 충분하고 실행력도 있고 줄만 잘 잡았으면 빠르게 승진해서 빛을 볼 수 있는 아이인데 눈앞에 닥친 불화에만 목매달고 있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조윤아. 너 최근 아버지 돌아가신 것 때문에 많이 힘든 거 하는 거 알고 있어. 네 아버지 일에 민형태 부장이 개입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가.”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인간 잘못이 맞다고요! 확실하다고요! 2년이 지났어도 내 머릿속에 그 장면이 하나도 잊히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왜들 그런 식으로만 말씀하시는 건데요!”
“그래서 할 만큼 했잖아.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잖아! 이 자식아!”
“삼촌은 화도 안 나시냐고요!!!”
삼촌이란 말에 김유전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아버지랑 등을 지고 혈연관계를 끊었다고 말씀하셔도 형은 형이잖아요! 아무리 밉다고 욕을 퍼부으셔도 한 핏줄인 건 변함없는 거잖아요!”
지난 2년 동안 임조윤은 혼자서 싸운 게 아니었다. 큰 기업을 상대로 일개 대리가 혼자서 싸워서 버틴 것은 그의 뒤에서 힘이 되어준 김유전 팀장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촌, 장례식장에 오신 거 봤어요. 숨어서 우시고 후회하시는 것도 다 봤다고요! 민형태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삼촌! 우리 아버지랑 다시 화해하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뭐? 어쩌겠다고? 뒤늦은 일에 복수라도 하겠다고? 야 조윤아. 정신 차려라. 응? 화나는 거 알겠는데 현실을 보란 말이야 이 새끼야……. 지금 네가 이런다고 해서 달라질 거? 아무것도 없어. 네가 그동안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바뀔 기미가 보였더라면 나. 너 끝까지 응원했을 거야. 그런데 없잖아. 태풍에 입김 분다고 그게 막아지니? 부탁이다, 조윤아…….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않겠냐? 너도 이제 자리 잡고 장가도 가야지. 그만하자 이제 우리. 너도, 나도 할 만큼 했다.”
“삼촌……!”
“그리고 앞으로 회사에선 예외 없이 팀장님이라고 불러. 소문 돌면 너나 나나 피곤해져.”
김유전 팀장은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 임조윤에게 건넸다.
“집 열쇠다. 네 집이다 생각하고 써. 매일 혼자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있지 말고, 한 달만 쉬고 회사 다시 출근하자.”
“지금… 정직 내리시겠다는 건가요? 무슨 사유로요? 타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제 앞으로 된 프로젝트는 모두 마무리했고! 자료 수집도 업무 시간 이외에만 했습니다. 제한된 자료를 긁어모은 것도 아니고요!”
“네가 정직당할 이유가 정말 없다고 생각하냐? 내가 하나하나 읊어볼까?”
김유전 팀장의 예리한 눈빛에 임조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남몰래 게임 안에서 데이터를 변조한 사실을 그가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너 생각해서 출장으로 처리할 테니까. 당분간 어디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머리 좀 식히고 와. 그렇게 하자. 조윤아.”
열쇠를 받아쥔 손아귀가 떨리고 있었다. 임조윤은 열쇠를 김유전 팀장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아니요. 정직이 아니라면. 전 회사에 나오겠습니다.”
임조윤은 김유전으로부터 발길을 돌렸다.
“너 그대로 나가면, 앞으로 나도 너 못 도와줘. 네가 지금 몰래 하고 있는 일 알면서도 덮어주고 있는 것도 더 이상 못 한다고!”
“그게 삼촌 뜻이라면……. 전 혼자서라도 하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억울한 한! 저 혼자 풀어드리겠다고요! 막을 테면… 막으십시오. 전 제 길을 갈 테니까요.”
그렇게 임조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팀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김유전은 답답함에 한숨만 내쉬었다…….
*
동료들은 팀장실 문이 열리며 퍼져 나온 냉랭한 분위기에 추위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임조윤 대리님……. 괜찮으세요……?”
“안에서 큰 소리 나는 것 같던데…….”
“소란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아무 일 아닙니다. 이과장님 저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어. 그래. 그래…….”
팀장실의 방음이 워낙 잘된 터라. 말의 내용은 잘 못 들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좋지 않은 말이 오간 건 확실했다.
“임 대리 징계 먹은 거 아니야?”
“에이 설마요.”
“김 팀장님 저렇게 화나신 거 처음 봤는데……. 저렇게 화내실 정도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 더 있는 거 아닐까요?”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들은 저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앞으로의 귀추가 어떻게 흘러갈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
‘민형태. 당신은 내가 반드시 우리 아버지 비석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게 만들 거야.’
사람을 죽였음에도 부장이라는 직위에 대한 회사의 관대로 여전히 떵떵거리며 사는 민형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저지른 행태들. 여직원 성추행, 공금 횡령, 프로젝트 완료 허위 보고 등. 임조윤이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수두룩했지만, 그의 투자 인맥과 능력 때문에 회사에서는 오히려 그를 받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역시 큰 한방이 필요해. 그 인간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한방이…….’
임조윤은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성열아. 너 요즘 하고 있는 작업, 조금 더 빠르게 안 될까? …어. 좀 그럴 일이 있어서.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회사는 아버지 일만 마무리되면 진작 나올 생각이었어. …… 그래, 다음에 연락하자. 응.”
통화를 마친 임조윤은 먼 산을 바라보며, 뜨겁게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 * *
쾅! 쾅! 김민철은 책상을 박살 낼 기세로 내려친다. 그의 얼굴은 누구한테 얻어맞은 건지 물감을 뿌린 듯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다.
“이런 씨X!!! 왜 갈수록 고객 만족도가 떨어지는 거야!!!”
“며, 면목 없습니다.”
“너, 내가 애들 훈련 제대로 시키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서 손님한테 욕을 들어 쳐먹게 만들어!!!”
나는 드웍프가 보내 준 김민철의 분노 폭발 영상을 보면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