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101화 (100/147)

<-- 왕성에서 생긴 일 -->                               이거, 난감한데…….

아무리 왕비가 나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이라면 변명의 여지 없이 왕녀를 강제 간음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괜히 장단 맞춰 노예시장 얘기까지 꺼냈는데…….

짝-!

왕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어루만지지도 못한 채 왕비를 쳐다봤다. 무척 화가 난 얼굴이다.

“방금 한 말은 무엇이며! 우리 체르엘이 왜 울고 있는 건가! 자네! 더군다나 신성한… 왕궁 안에서 내 딸한테 이런 추태를……!”

왕비는 힘없이 늘어지는 체르엘을 품에 안았다.

“용서할 수 없어……!”

“자, 잠시만요. 왕비님 이건……!

변명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왕비의 명에 따라 삽시간에 왕궁에 상주하는 수십 명의 기사단이 이 장소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왕녀를 좋아한다는 기사단장도 있었다.

수십 명의 기사와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기사 단장까지……. 이 상황에서 이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탈출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한순간의 실수로 이런 상황을 만들다니…….

조금 조심하는 건데…….

이대로 도망은 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러면 그동안 왕녀의 조교 결과는 전부 무용지물이 되는 거다.

“레마테리어 기사단은 들어라……!”

왕비는 기사단에 명령 하달을 위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이 분노에 차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생각하자, 생각해……! 이 상황을 타개할 말이 뭐가 있을까.

“당장 저 저자를……!”

“자, 잠깐……!”

어……? 왕비의 명령이 기사단에 떨어지기 전 불현듯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내 눈에 왕녀의 모습이 망원경으로 보듯 확대돼 보이면서 시야가 한순간 깜깜해지는 것이 아닌가?

눈을 뜨니 내가 조금 전 보던 광경과는 다른 장소에 와있었다. 정확히는 장소는 똑같았지만 서 있는 위치가 달라졌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

“내가 왜……?”

내 모습이 반대편에 서 있었다. 거기다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여성의 것처럼 변해 있었다.

“왕녀야, 왜 그러니……? 혹시, 어디가 안 좋은 거니?”

왕녀……? 분명 왕비가 나를 감싸 안은 채 그렇게 불렀다. 몸을 내려다보니 정말 평소와는 다른 묵직한 가슴의 무게가 느껴졌다.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이 만져보니 분명 여자의 가슴이었다. 그리고 이건 왕녀가 입고 있던 옷인데……?

내가 왕녀로 변했어……? 갑자기 왜……?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직시하고 나부터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잠깐만요!”

나는 왕녀의 품에서 벗어나 기사단의 틈을 비집고 내 몸으로 달려갔다. 내 몸은 그저 멍하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모습을 이렇게 보니 기분이 참 묘하다.

나는 다가오는 기사단을 뒤로 물리고는 왕비에게 말했다.

“조, 조금 전 일은 어머니가 오해하신 거예요……! 어머니 말씀대로 저, 이 사람 사랑해요.”

“하지만, 조금 전 말은 그게 아니었잖니……! 노예 어쩌고 하는 얘기를 다 들었다!”

“그……. 그건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해야 더 흥분돼서…….”

말을 들은 왕비의 얼굴이 빨개져서는 기사들을 향해 급히 소리쳤다.

“뭐, 뭣들 하느냐! 다들 귀를 막고 돌아가지 않고!”

소집했던 기사단이 다시 돌아가자, 왕비는 우리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정확히 왕녀가 된 내 손을 잡았다.

“그런 얘기를 남 앞에서 하면 어떡하니……! 체르엘!”

“그렇지만, 얘기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오해하셨을 거잖아요…….”

왕비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자신이 상상하던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자네에겐 미안하게 됐네……. 속 사정도 모르고……. 그럼 둘이 좋아하는 건 확실한 거니……?”

왕비가 내 몸을 향해 물었지만, 내 몸은 여전히 내 얼굴을 계속 응시할 뿐이다.

“……그럼요! 어머니!”

혹시 의심할지 모르니 말 못하는 내 몸을 대신해 대답한다.

“후우……. 그래……. 이후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나는 머리가 아프니 조금 들어가 쉬어야겠다. 그리고……! 아무리 서로 좋아한다고 해도 외부에서는……. 자제하도록 하렴!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했으면……!”

“네 어머니…….”

남사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기도 싫은지 고개를 돌려서 홱 떠난다.

“휴우…….”

다행히 잘 넘어갔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다시 한번 시야가 흐려졌다. 어느새 나는 내 원래의 몸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을까……?

“내, 내가 왜 그런 말을……? 좋아할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왕녀도 조금 전 상황을 기억하는 듯하지만, 자신이 직접 얘기한 것처럼 느끼는 모양이다.

재밌는 기술이었는데, 기술 창에도 없고 발동 조건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중에 개화될 기술인지도 모르겠네.

*

우리는 다음 날. 왕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혼사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에 집안에 인사만 드리고 돌아오겠다는 핑계로 왕궁을 빠져나왔다.

만약 왕이 있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여기 왕비는 왕을 휘어잡고 있는 모양이라, 왕이 없어도 얘기가 술술 풀렸다.

왕궁을 빠져나온 이후로는 체르엘의 호감을 조금 더 높여서 복종도 93%까지 끌어올렸다. 이왕이면 100까지 찍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더 이상은 시간이 모자라서 안 되겠다.

나는 지금 왕녀를 데리고 노예시장 앞에 와 있다. 드디어 그녀를 판매하는 그날이 온 것이다.

“왕녀. 말했다시피 나는 당신을 노예시장에 생각이야. 부디……. 좋은 곳으로 팔려가길 바란다.”

왕녀는 내 말에 많이 놀란 눈치다.

“나를 정말……. 팔 생각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대만의 성노예로 쓴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날…….”

왕녀가 고개를 떨구고 구슬피 울음을 터뜨린다. 언제나 이런 상황이 오면, 가슴 아프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잡자마자 바로 파는 건 차라리 괜찮지만, 며칠간 살을 비비고 정을 나눈 사람을 어찌 그리 쉽게 떠나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노예 상인이라는 길을 택한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노예 시장에 무거운 발을 들여놓는다.

*

“자네 정말 미쳤나……?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지 말고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몇 푼 더 얹어드릴 테니까. 부탁 좀 할게요.”

“차라리 보호종을 받고 말지! …이 나라의 왕녀라니……! 하아… 세상에 기절초풍할 일이로구만……. 나 오늘 겪은 거, 못 보고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그냥 돌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하아……. 망했다. 기껏 단단히 마음먹고 팔아넘길 생각이었는데, 노예시장에서 안 받는단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다른 도시까지 가기에는 시간도 없는데…….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린다고 했더니…….

“이런……. 뭐가 생각처럼 잘 안 되시나 봐요?”

한편에서 조롱하듯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막스핀이 다가온다.

“이야……. 한나라의 왕녀를 조교하시다니, 저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왕녀 정도 되면 어떤 노예시장에서도 받아주지 않을걸요? 전쟁 날 걸 감수하고 돈 몇 푼에 왕녀를 거래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과시하듯 손 위에서 찰랑찰랑 던졌다 받기를 반복한다.

“이제 시간도 없는데 어째요?”

“하하……. 방법은 언제나 있죠. 설마 플랜B도 안 세워 놨을까 봐요?”

“아, 그렇구나. 역시, 당신이라면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그럼 마지막 날까지 힘내봅시다!”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인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인상이 저절로 써진다.

“하아…….”

플랜B는 개뿔이……. 왕녀한테 몰방했는데 그런 게 어딨겠어…….

나는 노예시장의 전용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왕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멀뚱히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팔아버릴 것 같은 말과 달리 시장에서 그냥 나온 게 이해되지 않는 눈치다.

“당신, 왕녀라서 좋겠어! 아주. 자국민들이 왕가에 대한 신뢰가 아주 충만한 모양이야. 하아……. 어쩜 노예 감정도 안 해 주냐…….

노예 시장에 팔지 못한다는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환하게 웃어 보인다.

“저, 정말인가? 나는 그럼……. 그대만의 성노예로 남을 수 있는 건가?”

호감도가 오르다 보니 이제는 그런 쪽이 더 좋은지, 자연스럽게 성노예를 자처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다.

“아니, 이제 당신은 필요 없어졌으니, 돌아가.”

막스핀 말대로 왕녀는 팔기도 힘들 것 같고, 실패나 다름없는 퀘스트는 이쯤에서 빨리 접는 게 오히려 현명한 방법일지 모른다.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자…….

그런데 돌아가라는 내 말에 기뻐해야 할 왕녀는 놀라서 되묻는다.

“돌아가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말 그대로야. 나는 목적이 있어서 당신을 협박했던 거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됐으니 당신을 놓아주겠다는 말이야.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왕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 옷깃을 쥐어 잡는다.

“그럴 리가 없다! 너는 나를 평생 성노예로 쓰면서 평생 굴릴 생각이 아니었느냐?! 그러다가 이 몸을 임신시켜 아이 셋을 낳게 하고, 그 아이들을 잘 키워서 좋은 가문과 맺어주는 것이 너의 최종 목적 아니었느냔 말이다!”

망상도 참 디테일 하네……. 지금 누구 때문에 괜한 시간을 날렸는데, 팔자 좋은 소리나 하고 있고…….

“잘 들어. 왕녀. 처음엔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이제 당신 나한테 손톱만큼도 쓸모없어. 제발 거지 같은 망상 좀 그만하고! 이제 당신 좋을 대로 하고 살아. 그럼 부탁인데, 이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줄래?”

스트레스받으니까 또 괜스레 화가 올라온다. 그녀가 내 말이 괴로운 듯 울먹거린다. 이 여자만 아니었어도 다른 귀족을 낚아서 팔 수 있었는데. 왜 그때 내 앞에 나타나서는…….

내 말에도 왕녀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한다. 네가 안 가겠다면 내가 간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왕녀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곧 뒤에서부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왕녀가 내 등을 꽉 껴안는다.

“안 된다……! 가지 말거라…….”

그녀의 손을 풀려 하자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다.

“망상이 아니다……. 나는…. 그대가 좋다……. 비록 처음은 그게 아니었을지언정……. 지금은 그대가 나를 떠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구나……. 떠나지 말거라. 내 곁에 있거라.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내 곁에 있어 다오…….”

-‘체르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체르엘의 은총〉

체르엘의 은총을 받을 경우. [왕가의 기품] 효과를 받습니다. 왕가의 기품은 특별 능력치 [기품], [매력] 7에 해당하는 효과를 받습니다. 왕가의 기품 효과를 발동시킬 경우 특별 능력치 기품, 매력과 중복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고백과 함께 호감이 폭증하며 은총을 내려받았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진짜…….

이대로 잠깐 있으니 금세 또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도 쓸데없이 독한 말할 건 아니었는데, 뭐가 됐든 더 큰 잘못을 한 건 내 쪽이 아니던가? 욱하는 성격 좀 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녀의 손을 풀고 돌아서 그녀와 마주 본다.

“왕녀. 말했다시피 당신은 나한테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나를 위해 왕비님 말씀 잘 듣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멋진 왕녀가 되도록 해. 그렇게 하면 머지않아 당신을 다시 만나러 올 테니까.”

왕녀를 데려갈 순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세상엔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왕녀가 그런 사람이다.

내가 데려가서 아까운 왕가의 운명을 썩게 하느니, 지금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왕녀에게도 나에게도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도 왕녀는 현재의 마음이 더 중요한지 부정만 한다.

“결혼이라니……. 그런……. 그런 건……. 그런 건 그대가 아니면 난…….”

“아니, 해야만 해.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 그게 당신한테 원하는 내 마지막 부탁이니까.”

인연을 떼 놓기 위해서는 더 냉정해져야만 한다. 나는 그녀와의 짧고도 강렬했던 추억을 기억하며 마지막 깊은 키스를 나눴다.

*

이후로는 그녀를 달래서 성으로 잘 돌려보냈다. 돌아가기 가기 싫어했지만, 왕비 말 듣고 있으면 언제든 각인 전용 기술을 통해 만나러 오겠다고 하니 그것을 위안 삼고 돌아가기로 했다.

각인이 참 무섭긴 무서워. 사람 마음을 그렇게까지 홀려놓는다는 게……. 왕녀가 조금 특이케이스긴 해도.

후우……. 퀘스트를 실패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 좀 해봐야겠다. 피곤하니 일단 돌아가서 좀 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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