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성에서 생긴 일 --> 내가 훈련을 참관하기로 한 이유는 온종일 조교만 하려니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아서다. 이런 걸 보면 성인 배우들도 절대 쉬운 직업은 아닐 것 같다니까.
참관하다가 우연히 쓸만한 기술을 익히게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기술이라곤 공격권 하나밖에 없으니, 기사단의 훈련을 본다면 뭔가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런데,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그런 건 딱히 없을 것 같다. 특히나 오늘 훈련은 견습 기사단과의 합동 훈련이라 기본자세부터 하나하나 배우는 듯한데…….
“진짜 허술해 보이네.”
대체 저런 게 어디에 도움이 된다는 거지……?
“검을 잡을 줄 아시면, 연습용 목검으로 대련이라도 해보시겠습니까?”
지루한 훈련을 계속 보다 보니 무심코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었는데 옆에 있던 기사 단장이 그걸 들었나 보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에게 대련을 제의해온다.
“아무리 그래도, 단장님과 싸워 보라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을까요?”
기사 단장은 괜히 기사단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아니다. 뭐, 목검이니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괜한 호기에 나섰다가 부끄러운 꼴만 당할 수 있다.
“제가 아닙니다. 저희 견습 기사하고 말입니다.”
기사 단장의 말을 듣고 있던 왕녀는 나를 옹호하며 나선다.
“레이먼 단장, 무례는… 그만두게.”
그러나, 그녀 안에서 자꾸만 흘러오는 나의 아기 씨들 덕분에 목소리는 한없이 기어들어 간다. 그때 하나의 퀘스트 창이 내 앞에 떠오른다.
[퀘스트 발생! - 레마테리어의 견습 기사단] [난이도: 어려움]
기사단과 총 3번을 결투하여 쓰러뜨릴 때마다 2의 잠재를 얻게 되는 퀘스트 내용이다.
“하죠. 대련 한번 해보죠.”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기사 단장의 제안을 수락한다. 원래 같았으면 굳이 얻을 게 없기에 나도 할 생각이 없었으나, 빨아먹을 게 생겼으니 할 생각이다. 어차피 단순 대련이라 죽지도 않을 테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
내 승낙과 동시에 대상으로 즉석에서 대련장이 형성됐다. 우리 주변에 기사단이 자리를 뱅 둘러싸고 앉았다. 그중에 나와 상대할 사람이 한 명씩 나와서 맞붙는 식으로 경기가 진행되는 듯했다.
“왕녀님의 친우 분께선 검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여, 여기 있는 견습 기사들과 특별히 대련을 해주겠다고 하셨다. 자신 있는 견습 기사는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추고 전투를 준비하도록!”
나는 검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말이다.
이 녀석 내가 왕녀랑 친하다고 하니까 혹시 날 물 먹이려고 일부러 저런 소릴 하는 건가……?
견습기사단은 나와 같이 들어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수준 떨어지는 기사와 결투를 시키면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럴 의도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지면 쪽팔린 거고 이겨도 본전이라 이거지……. 오냐 결코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네 놈의 높은 코를 박살 내주마.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한 명의 견습기사가 패기 넘치게 앞으로 나선다. 나는 잠시 손을 들어 대련 시작을 늦춘다.
“잠깐, 무기를 바꿔도 되겠습니까?”
“연습 대련이기 때문에 살상 무기는 사용하실 수…….”
“목검이 무거워서 말입니다. 저한테는 막대기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나는 말을 하면서 조금 떨어진 나무 아래서 1m 남짓의 나무 막대기를 주워 왔다. 기사단 전원은 당혹스러운 눈치다. 아무리 같은 나무라지만, 목검의 강도와 막대기의 강도 차이는 극심하다.
그런데도 막대기로 상대하겠다는 것은 내가 자기들을 제대로 얕보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 때문인지 견습 기사단의 눈빛에 나를 짓밟겠다는 투지가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내입장에선 목검을 들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다. 게오르테드 지팡이술이 지팡이나 막대기를 들어야 적용되는 기술이기 때문에 목검을 드는 것보다 이게 훨씬 강하다. 그 사실을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것 같진 않으니 넘어가자.
“하나 더. 눈을 가리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눈을 말입니까……?”
이번엔 기사 단장뿐 아니라 왕녀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이번 건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얕보는 거 맞다. 나를 물 먹이려는 기사단장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생각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제대로 할 것이다.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나서 준비한 듯 자세를 잡자 ‘대련 시작’이라는 구호가 들려온다.
공격권을 생성한 뒤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이렇게 눈을 감으면 제3의 눈이 상대의 위치를 보여준다.
그가 움직인다. 약간은 주춤하는 모양이다. 아무 자세도 취하지 않은 내 모습에 왠지 겁을 먹고 있는 듯하다.
“힘내라!!”
기사단의 응원 소리와 함께 적의 공격이 시작된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디고, 천천히 공기를 가르며 목검이 수직으로 그어진다. 머리를 노리는 타격이다.
이런 일차원적인 공격은 간단히 막을 수 있다. 막대기를 그대로 밀어 올려 추켜올린 손목을 확 찌르자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목검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기세를 놓치지 않고 미간에 막대기를 들이밀자 겁먹은 듯한 호흡을 짧게 내뱉는다.
“헙……!”
그는 꼼짝도 못 한 채 그 자리에서 굳어있다.
“전투에서 무기를 놓친다는 것은, 죽음을 선고받은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계속하실 건가요?”
“제, 제가 졌습니다.”
견습기사가 너무도 쉽게 패배를 인정한다. 한 번의 부딪힘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거다.
확실히 눈을 감으면 더욱 세심하게 보인다. 상대 공격뿐 아니라 내 공격의 범위마저 신경을 쓰다 보니, 정신력은 더 소모될지라도 섬세한 판단이 가능하다.
이후 연속된 두 번의 대련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기사라 한들 한낱 견습생들은 도저히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여기 있는 견습생 전원이 덤벼도 이 정도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와, 저 사람 대단하다.”
“눈을 감고 어떻게 저렇게…….”
“저분이 단장님보다 강한가?”
기사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눈을 가리고 싸운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꽤 충격적인 장면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아무래도 견습기사는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 같군요. 그럼 혹시 저희 기사와 맞붙어 보시겠습니까?”
퀘스트 내용이 새로 갱신됐다. 기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 시 잠재 5가 상승한다. 단 한 번의 결투인 것 같지만, 기사단장의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강한 녀석이 나오는 것 같다.
이왕 시작한 거 기사단 정도는 밟아줘야 후련할 것 같다. 어차피 죽지 않는다면 손해 볼 건 없다.
“좋습니다.”
내 상대가 될 기사가 바로 앞에서 있다. 호흡이 조용하고 안정돼있다 보니, 견습기사보다는 그려지는 모습이 희미해 보인다. 그러나 주변의 소음이 있다면 그가 어떤 자세로 서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스윽- 두 번의 발돋움 후 점프. 나는 막대기를 올려쳐 상대의 목검을 맞받아친다.
“크윽?!”
딱-! 나무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짧은 신음이 들려온다. 나를 얕봤구나. 바닥에 넘어진 그는 일어나서 자세를 잡고 손을 턴다.
현재 잠재 164. 그것이 모두 힘으로 적용된다면 웬만한 고렙 유저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수치다.
그러나 조금 전의 수비로 인해 막대기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게 느껴진다. 부러진 것이다. 그렇지만 항복을 외치지 않는 한 경기는 멈추지 않고 진행한다.
“하아아압-!!”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땅을 박차는 그의 발이 보인다. 부드러우면서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그의 목검은, 강철이라도 자를 수 있을 듯 매섭게 휘둘러진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공격을 피한다. 막대기를 뻗어서 그의 2차 공격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부러진 막대기는 그의 몸을 쳐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뻗었던 막대기를 회수한 뒤 이어지는 공격을 흘려냈다.
“보이는 거 아니야? 어떻게 저렇게 피할 수 있지……?”
“고수들은 기를 조종해서 볼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아. 뛰어난 검사들이 오러를 사용하듯 말이야.”
오러…….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를 말하는 거겠지. 나도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런 짧은 막대기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텐데…….
마주 선 기사단과 수차례 공방을 주고받는다. 화려한 오케스트라처럼 수시로 바뀌는 검의 강약 조절이 움직임을 읽기 더욱 어렵게 한다. 확실히 견습 기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이다.
파악-! 묵직한 적의 목검이 막대기를 때리며 나를 밀어낸다. 막대기가 단단했더라면 밀리지 않았을 테지만, 부러지지 않고 최대한 공격을 흘리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후웅-! 득달같이 몰아치는 목검을 막대기로 짧게 쳐 막아낸다. 이번 적의 공격은 비교적 큰 동작이었다. 회수할 틈을 주면 안 된다. 나의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작은 틈을 크게 벌린다.
“읏!”
몸통으로 부딪히자 그가 뒷걸음질 치며 밀려난다. 그 틈을 노려 그의 배에 쐐기 박듯 막대기를 찔러 넣는다.
쐐액-! 그가 물러나는 속도와 내가 찌르는 속도. 막대기가 많이 짧아진 탓에 이대로면 제대로 찌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으로 한 걸음 더 나갔어야 했는데, 워낙 순식간에 부딪히다 보니 판단이 흐려졌다.
만약, 이 공격이 실패한다면 내 허점을 노리고 치명적인 공격이 즉시 들어올 것이다.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막대기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그때였다.
-‘파생 기술 ‘공격권’ 의 3단계 자질이 개화되었습니다.’
공격권 개화 메시지가 뜨면서 막대기 끝이 정말로 길어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막대기 끝이 기사단의 복부를 그대로 밀어치며 타격을 입혔다.
“크아아악……!
그리고 막대기가 조금 더 깊이 찔러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가 내 막대기 끝을 강하게 내리치며 산산조각냈다. 손끝에 얼얼함이 남아있다.
한 사내가 쓰러진 기사 단원을 향해 달려간다.
“부상자 발생! 전투 중단!”
부상자……? 기사 단장의 다급한 외침 소리에 나는 서둘러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쓰러진 그를 보니 복부를 막대기로 찔린 듯 피가 맺혀 있었다. 더 심했을 뻔했지만, 기사 단장이 끼어들어 내 막대기를 쳐내는 바람에 관통상까지는 면한 듯하다.
저렇게 피해를 줄 만한 길이는 분명 아니었는데. 뭐지? 나는 조금 전 있었던 개화된 능력을 떠올리고 당장 기술 창을 열어 확인했다.
[공격권]
- 공격권의 범위가 무기 길이의 세 배만큼 넓어집니다. 공격권 안에 적이 있으면, 무기 길이에 상관없이 공격하는 방향의 적이 피해를 받습니다. 해당 자질을 발동시킬 경우, 공격 시마다 마력이 5%씩 소모합니다.
자질 개화 조건이 뭐였는진 모르겠지만, 좋은 기술을 얻었다. 안 그래도 원거리 근접 위주로 싸우던 나에게 단비 같은 기술이 아닐 수 없다. 피해당한 기사에겐 미안하지만, 대련에 참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그 짧은 시간 나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던 위험한 공격을 감지하고 막아낸다니, 확실히 기사 단장이라는 직책은 역시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보다.
*
왕녀를 조교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9일이 흘렀다. 프리지아의 여체 분석 덕분에 성기교는 전부 빠르게 마스터했고, 일반기교는 기존에 왕실에서 착실히 배워온 왕녀 덕에 굳이 추가로 가르칠 필요는 없을듯하다.
덕분에 왕녀의 노예랭크는 난생처음 보는 S를 달성했다. 엄청난 기교를 자랑하던 프리지아조차 A+이었건만……. 이제 복종도 100을 찍고 나면 슬슬 경매에 올려볼 생각이다. 각인이 아니었다면 S급 노예를 이렇게 쉽게 얻기도 힘들었겠지.
“왕녀, 오늘따라 더 예쁜데?”
“아응……! 그따위 말로……! 앗! 흐웃!”
-‘체르엘의 호감이 1 상승했습니다. (현재 23+)’
체르엘의 경우는 이상하게 복종도 수치 중에 호감도가 제일 늦게 오르고 있다. 성격 문제인지 뭔지……. 덕분에 나를 향한 반응은 여전히 쌀쌀맞다.
애정이 100이다 보니 관계 중엔 스스로 매달려 오긴 해도, 그건 애정이 0일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특별히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가끔 좋다는 말을 스스로 외치는 것 빼고는……?
“아앙-! 앗! 아! 여긴! 누가 올지도……!”
“이 와중에 누군가 오기를 바라는 거야? 왕녀 당신 말도 안 되는 변태잖아?”
지금은 왕궁의 한 산책로에서 치마를 걷어 올린 왕녀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온다면 바로 들킬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난날 반복적으로 지켜본 결과 이곳은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산책로다.
“꺄윽! 윽 흐아앗! 변태라니! 아니야-! 그렇지… 않……! 끄히읏! 이 나쁜 인간……! 당신…! 언젠가 반드시…… 끄윽! 천벌을 받게 될 거다! 끄하아앗!”
“내가 당신을 노예시장에 올린다고 해도 그런 식의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제발! 그만……! 정말 누군가 올 거야아! 하윽!”
왕궁의 산책로는 많고 좋은 길목은 많기에 굳이 이런 외진 곳을 택해서 돌아다닐 왕성 관계자는 없을 것이다.
“체르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는 분명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 지금 뭣들 하는 거지?!”
“어……. 어머니…. 흐윽…….”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드니 눈앞에 왕비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