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성에서 생긴 일 --> “하아……. 그 새끼 진짜…….”
흰색 연기가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꼬부라지며 피어오른다.
“그……. 하……. 간단히 설명하면, 그냥 너 하는 거에 따라서 돈 많이 벌 수 있어. 네가 상상하는 거 이상으로. 머리 아프니까 그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 못 하겠다. 궁금하면 이겨서 플로어에 직접 들어가 봐. 자, 해산.”
왠지 심하게 귀찮아하는 표정이다. 유저인 것 같은데, 게임을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의무적으로 한다는 느낌이랄까? 왠지 아저씨 냄새가 확 풍겨와서 반말을 찍찍 뱉어도 별말 하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플로어라……. 내가 상상하는 거 이상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그렇게 설명하니 더 궁금해지는데…….
“이제 우린 경쟁자네요? 잘해봅시다. 뭘 씨.”
옆에서 막스핀이 손을 내민다. 악수를 받지 않은 채 그에게 묻는다.
“그쪽 플로어에 대해서 뭐 알고 있는 거 있어요?”
“글쎄요? 안다면 누구보다 잘 알고, 모른다면 또 너무 몰라서 탈이죠.”
“예, 뭐. 그러시겠죠.
그냥 말해주면 덧나나?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어. 이 인간은……. 도움도 안 될 인간 더 이상 상종하지 말아야지.
그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편에서 그가 소리친다.
“하나 말해주자면 만약 당신이 플로어에 가게 되면 항상 낮은 곳을 경계하세요. 욕조의 물은 밑에서부터 차오르기 마련이니까요,”
낮은 곳을 경계하라고? 아까부터 이해 못 할 소리만 계속 늘어놓네.
“그래도 이번엔 내가 이길 테니 당분간은 안전할 거예요. 나한테 고마워하세요.”
으……. 저 깐족거림. 반드시 콧대를 박살 낼 거야. 그래야 저 음흉한 미소가 사라지겠지.
*
[퀘스트 발생! – 플로어로의 초대][난이도: 어려움][경쟁]
당신은 플로어에 입장할 수 있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경쟁자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여 플로어 입장권을 쟁취하세요.
〈목표〉
1. 15일 간 노예를 판매하여 상대보다 높은 판매 수익을 올리세요.
〈보상〉
플로어 입장권
앞으로 15일……. 그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노예를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항상 해오던 건 인신매매단 털기인데, 주변 지리를 모르니 정보 수집하는데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고.
“드웍프, 뭐 좋은 수 없겠냐?”
“음……. 글쎄요……. 없네요.”
“야,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좀 하면 덧나냐?”
평소에는 좋은 아이디어를 잘만 쏟아내더니, 요즘 들어 좀 나태해진 것 같단 말이야? 하여간, 빠져 가지고…….
우올로 갑판 한곳에 놓인 테이블에 얼굴을 올려놓는다. 시야에 보이는 건 맑은 하늘과 앞에 있는 도시. 이쁜 내 동료들. 문득 옷을 제작 중인 하연이와 눈을 맞추니 환하게 웃어준다.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훈련도 안 시킨 하연이의 가치는 노예시장에서 무려 1억을 호가했다. 그렇다면 굳이 많은 노예를 잡아서 팔 필요가 없다는 거다.
양보다는 질! 잠재력인 높은 인간을 찾아 훈련시킨 뒤 판매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지 모른다.
게다가 눈앞의 레마테리어 왕국은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장소. 저기라면 충분히 괜찮은 노예를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음 목적지는 자동으로 정해졌다.
* * *
레마테리어 왕국의 제 3 왕녀. 체르엘. 딸만 있는 레마테리어 국왕의 막내딸로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왕비를 빼닮아 미모만큼은 왕녀 중 단연코 1순위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왕녀의 조금은 남다른 성격 탓에 왕비는 시집보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체르엘 왕녀. 뭐 하고 있니?”
“아, 잡초를 뽑고 있었어요. 어머니.”
“그런 것은 정원사를 시키면 될 것을 어찌 왕녀가 그걸…….”
“정원사를 부르러 가는 동안 잡초가 자라면 땅속의 유익한 영양분을 빨아먹을 것이고, 그 때문에 이쁜 꽃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 시들어버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왕궁은 결국 끔찍한 잡초밭이 될 테고, 사람 키만큼 자라버린 잡초는 왕궁의 모든 사람을 집어삼킬 테죠! 결국 잡초는 인간의 양분마저 빨아먹을 식인식물로 바뀌어 레마테리어 왕궁에 영원한 그늘을 드리울 거라고요. 어머니!”
바로 이런 성격이었다. 뭐 하나가 눈에 들어오면 걱정을 과할 정도로 크게 부풀려서 현실로 벌어질 것처럼 미리 대비하는 것 말이다.
그녀의 증상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는 그녀가 7살 때 발생한 일이었다. 왕국에 몬스터가 쳐들어와 마을 주민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나라의 왕녀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며, 검술을 연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녀로서 간단한 취미로 여러 가지를 거쳐 갈 순 있지만, 남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검술이라니……?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레마리테리어 왕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보를 고집했고 지금에 와서는 기사단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상당한 검술 실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강한 여인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게 이 시대의 현실.
왕녀는 이미 다른 왕국 왕자들의 눈 밖에 나서 혼기 찼음에도 데려가려는 이가 없었다.
“왕녀의 손이 이게 뭐니?”
왕비는 손수건을 들어 왕녀의 흙 묻은 손을 털어주었다. 매일 검을 잡은 손 답게 군데군데 상처로 가득했다. 애지중지하는 딸인 만큼 왕비는 속상한 마음뿐이었다.
“체르엘. 이제 곧 오늘부터 왕국에 큰 축제가 열리는 것 알고 있지? 그렇게 되면 왕성 일부를 개방해서 많은 사람이 들어올 텐데 그때도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될까 걱정스럽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일 안 일어나도록 할게요.”
“꼭, 약속해야 한다?”
확신에 찬 모습으로 손가락을 거는 체르엘. 그럼에도 왕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약속은 이미 공신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아…….’
타들어 가는 왕비의 속도 모른 채 왕녀는 자리에 앉아 땅에 핀 잡초만 하염없이 뽑아 댔다.
* * *
거리엔 악사들이 나팔과 피리를 불며 분위기를 띄우고, 하늘엔 우올로를 개조한 공중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나무 깎아 만든 자전거를 탄 남자가 거리를 지나고, 하늘에선 이름 모를 다색의 꽃잎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린다.
레마테리어 왕국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대축제. 이날만큼은 온 국민이 거리로 나와 축제를 즐기며 편히 쉬어 가는 하루를 보낸다.
“아저씨 저거 주세요!”
“와, 이거 맛있다!”
“퍼레이드 하나 봐! 저기도 가보자!”
사람들의 웃음소리. 다채로운 활기로 가득 찬 거리.
참 묘한 곳이구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정말 판타지 세계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그래……. 이 게임은 이런 치유되는 분위기가 참 좋았어.
“미실트 그거 맛있어……?”
“뭘 님! 저기 보세요. 엄청 아름다워요!”
그동안 잊고 지나온 부분들을 새삼 떠올리며 나도 조금은 축제를 즐겨본다.
눈으로 훑어보며 거리를 걷는데, 하연이가 옆에서 말을 걸어온다.
“오빠, 나 신기한 거 발견했어.”
“뭔데?”
“잠깐만 있어 봐.”
-‘일레이나 님께서 얼굴 공개를 요청하였습니다.’
“얼굴 공개?”
“응! 수락해줘.”
하연이의 요구대로 시행한다. 눈으로 보이는 변화는 딱히 없다. 그러나 하연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기뻐하는 눈치다.
“와, 진짜 되네?”
“뭐 한 거야? 이게 뭔데?”
“나 이제 오빠 얼굴 볼 수 있어. 캐릭터가 아니라. 오빠 실제 얼굴.”
“오, 그런 기능이 있었어?”
매뉴얼을 찾아보니, 실제로 있었다. 친구로 설정된 사람만 가능한 기능인데, 외모 공개요청을 해서 수락받으면 자신한테는 그 사람의 캐릭터 얼굴이 아닌 실제 얼굴이 보이는 것이다.
머리카락이나 아이템은 게임 속 내용 그대로 유지되고 얼굴만 실제로 바뀌는 듯하다.
“사실 그동안 오빠 얼굴이 달라서 뭔가 죄짓는 기분이었거든…….”
아, 그래서 애정 표현을 피했던 건가?
“오빠도 할래?”
“어……?”
살짝 머뭇거리자, 하연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나를 쳐다본다.
“왜? 이 얼굴이 더 좋아……? …나만 오빠 좋아했구나……. 어쩔 수 없지 그럼…….”
“아, 아니 그럴 리가 있어? 시, 신청할 게 받아줘.”
일단은 받고 해제하는 쪽으로……. 하연이보다 일레이나가 좋아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연인이 옆에 있는데 다른 여자를 안는다는 게 껄끄러울 뿐……. 물론 일레이나가 하연이라지만 기분이 그냥 그렇단 말이지…….
“됐다. 나 제대로 보여?”
하연이가 바짝 붙어서 팔짱 낀다. 이를 보고 있던 페로렌이 질투하듯이 소리친다.
“두, 둘이 언제 그렇게 가까워진 거야?”
“어? 아, 우리 실제로 사귀…….”
사귄다는 말을 내뱉기 전에 하연이의 입을 틀어막는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소곤소곤 말한다.
“현실 이야기는 말하면 안 돼 하연아. NPC들은 혼란스러워해.”
사실 거짓말이다. 현실 이야기 말해도 꿈 얘기로 치부하거나 알아서 잘 판단하면서 큰 반응 없이 넘어간다.
다만 여기서 페로렌이 우리 관계를 알면 호감도가 떨어질 것 같기에 서둘러 막았을 뿐이다. 페로렌의 복종도를 100찍을 때까지만 비밀로 해두자…….
이럴 땐 여자가 많은 것도 참 문제야…….
*
그나저나 슬슬 대상을 물색해야 하는데……. 누가 괜찮으려나……? 빨리 찾아야 15일 동안 훈련하고 팔고 할 텐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경매에 올린 다음에 안 팔린 채로 15일 지나면 나 그냥 지는 거 아닌가……? 이거 시간이 엄청 촉박하겠는데……?
일단 노예 잡고 훈련하는 시간까지 10일로 잡고 5일 동안 팔리길 빌어야겠다. 정 안 되면 중개인한테 밑돈이라도 찔러 줘야지 뭐…….
노예 가치는 외모, 명성, 훈련, 잠재 정도에 따라 금액이 정해진다. 훈련은 내가 시키면 되고, 잠재는 얼마나 높은지는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으니, 내가 중점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외모와 명성. 이게 가장 중요하다.
명성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주로 귀족들이나 상인, 유명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장들이 높은 편이다. 그 사람들은 자고 일어나면 명성이 오른다고 하니 뭐…….
그게 아니면, 다른 종족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문득 옆을 지나쳐가는 엘프를 보니 왜 엘프녀라는 소리가 나왔는지 알 법도 하다.
아니야, 엘프는 아직 안 돼.
이 세계에서 엘프를 함부로 잡아서 판매했다가는 모든 엘프의 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희귀종인 엘프는 보호단체가 따로 있는 모양이라 아주 은밀하게 거래하지 않는 이상 노예시장에 올리는 순간 내 목숨은 쥐도새도 모르게 날아갈 거라고 중개상이 했던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래서 노예시장에서도 뒷거래 아닌 이상 웬만하면 꺼린다고…….
그때 주변 시민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질인다.
“오늘부터 왕성을 개방한다고 하는구먼!”
“작년에 한번 가봤는데, 왕비님께서 어찌나 아름다우시던지…….”
왕성? 왕성이라면 유명 귀족들이 들락거릴만한 곳이 아니던가……. 거기다. 바로 거기야! 왕성에서 적당한 귀족 하나를 꼬셔서 훈련한다면 막스핀을 앞지를 수 있을 거야.
*
“형님, 저기 사람 너무 많은데, 그냥 여기는 포기하시는 게……?”
왕성에 도착하니 드웍프 말마따나 입구부터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내가 봤을 때, 한 3일 정도는 걸려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지만, 이건 무조차 바오밥나무처럼 두꺼우니 썰 엄두도 안 난다. 다른 곳 알아봐야 하나?
음……? 그런데 저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