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갑지 않은 경쟁자 --> 게임에 접속하니 해가 창창하게 뜬 아침이다.
“모두 기분 좋은 아침!”
“형님, 어쩐 일로 늦으셨네요?
“그럴만한 일이 좀 있었지!”
“뭘,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다른 이들에게도 나의 행복감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 자신도 주체 못 할 만큼 넘쳐나서 나눠주고 싶구나.
“뭘 님, 잠깐 저 좀 볼래요?”
일레이나의 모습을 한 하연이가 나를 부른다. 하연이를 바래다 준 뒤 집에 들어가자마자 게임을 접속했나 보다.
그녀를 따라 방에 들어가니, 갑자기 방문을 잠근다. 갑자기 문은 왜……? 하연이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연이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뭘 님?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요?”
“숨기는 거요? 아니요……?”
숨기는 게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그걸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그래요……?
하연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제가 사실 남자 공포증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실 남자랑 이렇게 말하는 거 되게 두려워해요.”
“아……. 그래요?”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짐짓 놀라는 척한다.
“근데, 저 지금 뭘 님 앞에서 말 편하게 하고 있지 않나요……?”
그것도 그렇네……. 게임에서는 증상이 비교적 덜 나타난다고 해도 남자랑 마주하는 게 아주 편하다고는 안 했는데…….
하연이는 테이블 앞에 앉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제가 유일하게 편히 말할 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딱 한 명 있거든요? 근데 뭘 님 앞에서도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
“아……. 글쎄요……. 신기하네요. 왜 그럴까요……?”
왠지 모르게 느낌이 싸한데……. 불길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촉은 의외로 자주 맞아떨어지곤 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건 아마……. 제가 뭘 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예?”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내가 강기단인 걸 알아챘나 싶었는데, 전혀 예상 밖의 전개가 일어난다.
“저 사실……. 어제 좋아한다던 그 사람의 고백 받아들였어요. 그 남자랑……. 관계도 맺어졌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랑 하는 동안에도 계속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서 관계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어느 순간 보니 하연이의 호감도가 100이 되어있다. 갑자기 왜……?
“저, 아무래도 그 남자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 원한다면 그 남자랑 헤어질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하연이가 상의를 벗기 시작한다.
“나, 그쪽한테 내 모든 걸 주고 싶어요……. 비록 게임에서뿐이라도…… 내 처음 받아 줄래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 모습도 나고 강기단도 나인데……. 왜 기분이 이상하지……? 왜…….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거지……?
그녀가 속옷만 입은 모습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위로 올라탄다. 얼굴이 가까워져 온다. 금방이라도 입술만 내밀면 닿을 것 같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어때요……?”
하연이의 호흡이 거칠다. 그게 느껴질 만큼 서로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 키스해줄래요? 기단 오빠?”
“어……?”
그 순간 하연이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방금……. 기단 오빠? 잘못 들은 건 아닌데…….
하연이가 내 볼을 붙잡고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오빠, 언제까지 나 속이려고 했어?”
뭐야……. 하연이 설마 다 알고……? 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안 거야? 미리 알고 있었나? 아닌데, 며칠 전만 해도 몰랐던 것 같은데……. 혼란스러움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이고 있을 때, 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사진이 도착했습니다.’
하연이가 보낸 사진이다. 외부 시스템 창을 열어서 사진을 띄워보니 낯익은 장소가 보인다. 우리 집에 있는 가상 현실 접속기 사진이다. 단순히 접속기가 있다는 걸로 유추한 거라면 변명이라도 가능하겠지만…….
접속기 외부 모니터에 내 캐릭터 정보가 그대로 떠 있어서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겠다. 아침에 주방에서 스파게티 만들어주고 있을 때 몰래 찍은 모양이다.
“오빠가 나 속여서 나도 오빠한테 장난 좀 쳐봤어. 기분이 어땠어?”
“저기, 하연아…….”
“응, 왜 기. 단. 오빠?”
“너 사진에 알몸…… 비쳐 보여…….”
“어? 아?! 아!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가상현실 접속기 외부 모니터에 반사된 하연이의 몸은, 다시 봐도 완벽하구나…….
그보다 내가 뭘인 걸 한동안 비밀로 하면서 하연이 좀 놀려주려고 했는데, 벌써 들키다니 아쉽다. 그래도 하연이가 했던 말이 장난이었다는 게 그렇게나 안심될 수가 없구나.
송하연……. 꽤 하는데……? 순수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한 방 제대로 먹었네.
*
하연이에게 들킨 뒤로는 모든 사실을 고하고 그동안 있던 일에 관해서는 어찌어찌 변명으로 잘 넘어갔다. 다만, 내 직업이 노예 상인이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여자를 안아야 하는 점은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다른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품는다는 건 마음에 걸리겠지. 그나마 할 거면 들키지 않게만 하라는 허락은 받았지만……. 어디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이라 이해는 해주면서도 정말 했다간 삐질 것 같단 말이지…….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엔 몰랐는데. 말하는 투를 보면 은근 질투를 많이 한다. 뭐 본인도 그런 자신의 성격을 이번에 처음 안 것 같지만…….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쮸웁-! 쿠웁! 읍-! 뭐가? 이거 별로야?”
“응? 아, 아니요. 좋아요, 아가씨. 그대로 계속하면 될 것 같아요.”
소중이를 맛있게 빨아주는 페로렌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연이 때문에 정말 참으려고 했지만, 기특하게 연습하겠다는 페로렌에게 거절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첫 경험 때 처참하게 실패한 펠라의 아픔을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배우는데요?”
“후릅-! 당연하지……! 나한테 이런 것쯤…….”
신체의 부족함을 노력으로 때우다니 진정한 노력파의 자세구나.
“슬슬, 나와요.”
“꾸웁! 웁! 응! 훕! 쮸압! 쮸압! 꾸압!”
나의 신호에 페로렌은 작은 머리를 잽싸게 왕복하며 요사스러운 뱀처럼 혀를 감아온다. 빠르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내 표정을 읽으면서 특별히 느끼는 부분을 찾더니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거기 좋아요……!”
노력형 천재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페로렌의 태도에 나는 감탄과 동시에 새하얀 백탁액을 쏟아낸다.
“꾸후우웁?! 끄욱-! 끄욱-! 크훅-! 푸화앗-! 콜록! 콜록! 하아……. 양이 너무 많아…….”
페로렌은 전부 받아먹기도 힘들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정액을 보면서 얘는 대체 뭔가 싶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래도 만족하는 듯하다.
“뭘, 기분 좋았어……? 어때? 이번엔 내 입만으로 사정했어.”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다는 얼굴로 활짝 웃는 페로렌. 귀엽네. 진짜.
“기분 좋았어요. 아가씨.”
“음……. 기분 좋았구나…….”
펠라 연습이 끝났음에도 페로렌은 방을 나가지 않는다.
“왜요? 아가씨?”
“응……? 아, 아니……. 뭘이 기분 좋았으면 됐어…….”
내가 이제 표정만으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경지가 된 것인가……. ‘이제 나도 기분 좋게 해줘’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보니 차마 그냥 내보낼 수가 없네…….
어쩔 수 없지…….
하연이 말대로 안 들키게만 해야지 뭐.
*
“아가씨, 매번 할 때마다 이렇게 잔뜩 쌀 거예요? 침대 다 젖었네. 우리 아가씨 정말 오줌싸개라니까?”
“그건, 뭘이……. 우으……. 그러는 뭘도 많이 싸잖아……!”
“에이……. 저랑 아가씨는 다르죠.”
“뭐가 달라? 너도 똑같아……! 너도 오줌싸개야!”
똑똑-! 페로렌과 정사를 마친 뒤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목적지 거의 다 왔어요!”
드웍프의 알림 소리에 슬슬 옷을 입고 준비한다.
*
선선하게 갈라지는 바람을 느끼며 뱃머리에 올라선다. 눈앞에 가까워지는 도시가 보인다. 검은 초대장에 적힌 그 장소. 왕국 전체가 부유하고 있는 땅에 만들어져 지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신비의 도시. 왕국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규모는 작지만, 볼거리는 많기로 소문난 레마테리어 왕국이다.
“이제 어디로 가냐……?”
정해진 장소에 도착은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비트급 우올로 한 대가 옆으로 다가온다. 검은 초대장을 건넸던 그 남자다.
“오셨군요. 이쪽으로 타십시오. 안내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제 동료들은…….”
“당신 혼자 갈 겁니다. 마스터께선 사람들이 북적이는 걸 안 좋아하셔서 말입니다.”
이거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막상 오긴 왔는데, 어떠한 정보도 없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가야겠지……? 여차하면 심연의 팔찌 발동하고 도망치면 되니까.
걱정스러운 동료들의 눈빛을 뒤로 한 채 이름도 모르는 사내의 뒤를 따라간다.
*
응……? 어떻게 된 거야? 어느새 잠들고 일어나니 이상한 장소에 와 있다.
“깨어나셨군요. 이곳의 위치를 드러내선 안 되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기절시켰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기절한 건지도 모른 채로 의식을 잃었다니……. 이 인간이 나쁜 마음 먹었으면 그냥 죽은 거 아니야……? 소름이 돋는다. 뭐 없어진 건 없겠지?
“저를 따라오시면 마스터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 걷는다. 어디 실내인 것 같은데, 여태까지 봐오던 느낌은 아니다. 지금껏 장소들이 거칠고 투박한 중세 판타지의 느낌이라면 여기는 더욱 날카롭고 정돈된 현대와 가까운 느낌이다.
이 게임에 이런 장소가 있었나……?
어쩐지 게임의 장르가 뒤바뀐 듯한 느낌을 받으며 계속 걷다 보니, 한 장소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꽤 낯이 익다……? 그도 날 알아보고는 소리친다.
“어? 당신! 뭘 이잖아요? 어? 근데 어떻게 여기 있지?”
나도 묻고 싶은 말이다. 처음에 나를 노예로 굴려 먹던 단발머리 남자인데. 이름이 아마…….”
“막스핀……?”
“나 기억하네요?”
“두 분이 구면이신가 보군요. 그럼, 여기서 인사 나누시다가 문이 열리면 들어가십시오.”
나를 데려온 사내는 그 길로 사라졌다. 막스핀은 나를 보면서 싱글벙글 웃는다. 여전히 정신상태가 이상한 인간이라니까.
“그때 왜 도망쳤어요……? 내가 그쪽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데.”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을 그렇게 굴렸습니까?”
“하하, 굴리다니요. 다 그쪽 성장시키려고 한 행동인데……. 당신은 그때의 일로 저를 싫어하시는 것 같지만, 전 여전히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전 여전히 당신이 마음에 안 드네요.”
“말해주지 않아도 여기까지 찾아온 거 보면 우린 운명적으로 얽혀 있는 거 아닐까요? 장담하나 하죠. 언젠간 우리가 같이 일하게 될 날이 올 거예요.”
끔찍한 소리 하고 있네. 어쩌다가 이 인간이랑 여기서 또 만나게 된 거야?
곧 문이 열리고, 우리는 열린 문을 따라 들어섰다. 길게 늘어선 복도 끝에는 하나의 테이블이 있고, 동그란 안경을 쓴 한 남자가 담배를 물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뻑뻑 피워댔는지 실내는 화생방 훈련장을 연상케 할 만큼 연기로 자욱했다.
“후우……. 아, 왔네. 길게 얘기 안 하니까 잘 들어. 질문이 있다면 끝나고 해. 둘 다 검은 초대장은 받았지? 거기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플로어로 올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거야. 15일 이내. 새로운 노예를 잡고, 팔아서 총합산 금액이 가장 큰 사람이 초대장에 이름을 올린다. 자, 설명 끝. 여기까지 질문?”
진짜 길게 얘기 안 하네…….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쌓여있구만…….
“저기……. 플로어라는 게 대체 뭡니까?”
“뭐……?”
내 질문에 그가 인상을 쓰며 되묻는다. 못 들었다는 의미가 아닌 물으면 안 될 걸 물었다는 표정이다.
“너 여기 데려온 애가 설명 안 해주디?”
고개를 끄덕이자 담배를 깊게 빨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