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셀 업그레이드 --> 갇혀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세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들은 노예 시장의 일손들이었다. 들어온 그들로 인해 방의 공기는 사뭇 긴장이 감돌았다.
일반적으로 음식을 나를 때나 단순 확인 차 들를 때는 항상 한 명이 관리했다. 그러나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는 말은 이번 목적이 단순 확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돌아다니며 노예들이 갇혀있는 철창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 여기. 얘도 올리고. 얘도 좀 됐지? 올려.”
그의 말에 뒤를 따라다니는 사내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 체크를 하며, 노예들의 상태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외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비좁은 통로를 쭉 돌던 사내가 일레이나의 앞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 순간, 일레이나는 간절히 빌었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부디 자신만은 아니기를……. 이번에 끌려간다면, 변태 같은 귀족의 씨받이 노예로 전락할 터였다.
갇혀 사는 생활로 돈을 벌 수 있다고는 해도 일레이나는 결코 그런 일은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게임을 접기엔 앞으로 돈 벌어갈 일이 막막했다.
새로운 계정을 파는 일도 생각해볼 법하지만 계정비도 만만찮고, 게임기도 대여해서 사용하는 마당에 또 다른 계정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키워 놓은 캐릭터가 아까워서라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다.
이윽고, 사내가 일레이나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뒤따라오던 사내에게 물었다.
“얘는 얼마나 됐지?”
“한 열흘 정도?”
열흘이란 말에 일레이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발……. 아니기를…….’
그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올려.”
일레이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차라리 진짜 무너져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토록 생각하기 싫던 일이 벌어지자 백린이라도 뿌린 듯 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옆에도 열흘 넘었는데?”
“거긴 좀 더 여유 있어.”
모든 노예를 확인한 사내들은 이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나갔다. 끌려나가는 노예들의 표정이 마치 도축되기 직전의 짐승 같은 표정 같아 보였다. 그건 일레이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곧 한 사내가 일레이나의 철창문을 열었다. 일레이나는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안 돼요……! 앗-!”
그러나 자신을 끌고 가려는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워낙 많은 노예를 다뤄 온 사람이기에 노예가 무슨 말을 하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뿐이었다.
사실 일레이나도 알고 있었다. 이곳에 갇혀서는 결국 팔려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건 너무 급작스러웠다. 지금 팔려나가는 일만 피하면 혹시 모를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한없이 냉정하고 각박한 일의 연속이었다.
“한 번만 더 저항하면 재워서 끌려갈 줄 알아.”
*
“일레이나……. 슬퍼.”
미실트는 강제로 끌려가는 일레이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두려움을 보았기에 미실트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미실트는 갑자기 머리에 찌르는 듯한 격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으으…….
배고픔을 제외한 웬만한 고통에는 아무 표정도 안 짓는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고통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모두 끌고 가!’
-‘로미나. 미실트를 부탁한다. 미실트, 우리 아가. 너를 해하려는 적들로부터 도망치렴……. 너는 절대 죽음을 맞이해선 안 돼. 너는 중요한 아이니까.’
-‘오지 마. 이놈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이거 놔! 제발! 안 돼!’
알 수 없는 환청들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미실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한 차례 크나큰 격통이 지나간 뒤, 몇 가지 단어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쁜 놈… 적……. 죽음.”
미실트는 반복적인 단어를 끊임없이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레이나가 끌려온 이번 경매는 노예 시장의 VIP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경매였다. 그런 만큼 노예들의 품질이 매우 좋은 편에 속했다.
일반적으로 외모가 뛰어나고 노예 등급이 높을수록 경매순서는 뒤로 배치되지만, 일레이나는 외모가 S+이라 하더라도 노예 등급이 낮다 보니 경매에 첫 번째 순서로 나오게 됐다.
일레이나는 중앙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그늘에 가려져 그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부분이 일레이나를 유독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게임을 하면서는 많이 느껴본 적 없던 두려움에 눈을 꼭 감았다. 이미 반 정도는 체념한 상태였지만, 이왕 팔린다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천사 같은 사람이 자신을 샀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경매가 시작되고 경매 진행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의 큰 소리에 일레이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이번 노예는 외모가 무척 뛰어납니다! 훈련만 시키시면, 엄청난 가치 상승이 기대되는 노예입니다. 경매는 3,500만 셀부터 시작합니다! 기본 단위는 100만 셀입니다!”
“5천.”
“5천만 셀! 시작부터 꽤 높은 가격이 나왔습니다. 좋습니다! 첫 번째 경매가가 좋으니 이 노예를 차지하기 위한 열띤 경쟁이 예상됩니다!”
경매에서 원하는 것을 낙찰받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심리 싸움이 필요했다. 경매 진행자의 말대로 경매가를 어느 정도 치고 올리는 것은 간만 보는 잔챙이들을 걸러내고 입찰자끼리의 경쟁을 심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이 전혀 먹히지 않는 존재들도 간혹 존재했다. 그들은 때로 무모하다고 생각될 만큼의 과감한 방법을 취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경쟁 자체를 붙일 수 없도록 단번에 큰 금액을 불러버리는 것이었다. 바로 이 사람처럼 말이다.
“3억.”
“3억……?! 아……! 3억! 무려 3억이 나왔습니다!”
훈련도 받지 않은 노예를 3억이나 주고 산다니, 간혹 조금씩 경쟁에 불이 붙어 가격이 높게 치솟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경매 초반부터 이렇게 큰 금액을 불러들이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경매 진행자도 드문 상황에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프로답게 곧바로 경매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 이후에 입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성장이 불확실한 노예에게 이 큰 금액을 지급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3억을 부른 남자는 승리의 미소를 얼굴에 만연했다.
일레이나는 그대로 낙찰되어 경매대에서 바로 내려갔다. 이후 사내는 경매장 뒤편의 방에서 노예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인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계서 내용이 맞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캘피언 님.”
3억이라는 큰 금액을 망설임 없이 사용한 캘피언은 욕심으로 가득 찬 뜬 눈으로 일레이나를 바라봤다. 인간으로서 S+외모 등급을 받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그녀는 확실히 S+이란 걸 실감케 하는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엄청나게 받을 수 있겠어.’
그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왠지 모를 고약함이 물씬 풍겨댔다.
“그럼 어디, 몸 정도만 확인해볼까?”
“그러시죠.”
그의 발언에 일레이나의 그늘진 얼굴엔 공포가 얼룩졌다. 근처 사내들이 일레이나를 양옆에서 결박하기 시작했다. 한껏 저항했지만, 여성으로서 근육질 남자의 힘을 차마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거부할 의사 같은 건 노예로 팔려나가는 신분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었다.
“아……! 제, 제발…….”
일레이나의 손발이 마구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목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 일레이나의 옷을 벗기기 위해 상의를 잡았다.
그때……!
“뭐야?! 끄아아악!”
외부에서 비명이 들려오더니 방문을 완전히 박살 내면서 사람이 처참한 꼴로 튕겨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숨은 쉬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몸이 뒤틀려 있었다.
“뭐 하는 녀석……. 어? 너……! 어떻게 네가 여길 나와 있는 거야?”
“적……. 죽음.”
익숙한 목소리에 일레이나는 고개를 들고 문 앞을 바라봤다.
“미실… 트……?”
놀랍게도 미실트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철창에서 나온 건지 또 문을 부수고 들어온 남자는 어떻게 한 건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잠시 후 일레이나는 그토록 바라던 기적이 바로 그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노예들이 여기까지 나오는……!”
콰악-! 일레이나를 잡고 있던 사내의 목이 돌려차기 한 방으로 갈대처럼 꺾여버렸다.
뒤이어 철장에서 탈출한 미실트를 잡기 위해 한 덩치 하는 사내들이 여럿 모여 방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방에 들어와서 서 있던 시간은 단 7초에 불과했다.
미실트는 그들 사이를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발차기 한 번에 그들의 목숨도 하나씩 가져갔다. 미실트의 발차기는 죽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미실트……, 구하러 와 준 거야……?”
눈물을 글썽거리던 일레이나는 고마움에 미실트를 끌어안았다.
“일레이나……. 슬퍼.”
일레이나가 흘리는 눈물은 감동과 안심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그렇지만 눈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미실트는 그녀가 두려워서 우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 괜찮아. 여기서 도망가자. 미실트.”
일레이나를 사기 위해 거액을 지급한 캘피언은 구석에서 굳은 얼굴로 그 자리에 있었다. 물론 지급한 금액이야, 노예시장에 청구하면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지만, 캘피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얼마 만에 발견한 특상품인데 도망치게 둘 순 없지.’
그의 눈은 방금 떠난 일레이나와 미실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차분해지는 바이올린 선율. 기나긴 하루만큼이나 늘어지는 하늘. 움푹패인 마음에 새살을 돋게 해주는 치유의 바람. 기분 좋게 와닿는 진한 행복감이 피부를 충만하게 적시는 이 시간.
산과 들을 거닐고, 물속을 헤엄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이 세상을 훌훌 떠나고 싶어라…….
“아이이……!”
다 좋은데……. 옆에서 정신없게 날아다니는 아이즈만 없으면 딱 좋겠군. 거의 잠들 뻔했는데 시끄럽게 구는 아이즈 때문에 잠이 확 깼다.
나는 시원하게 하늘을 가르는 우올로 갑판 위에서 셀리안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역시, 셀리안의 연주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군요.”
내 칭찬에 그녀는 사람을 녹이는 듯한 눈웃음으로 화답한다. 아이즈도 그녀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셀리안의 주위를 막 날아다니며 애교를 부린다. 얼음 가루를 폭죽놀이 하듯 터뜨리며 행복에 겨운 몸짓을 선보인다.
“아이즈, 셀리안 귀찮게 하지 말고 이리와.”
“아이!”
“커헉!! 콜록! 콜록!”
갑자기 아이즈가 내 입속으로 들어오더니 전신을 차갑게 식힌다.
“콜록! 뜨아악! 어서 나오지 못해?!”
이 녀석은 내 몸을 자기 집으로 생각하는지, 툭하면 몸속으로 들어와서 머물곤 한다. 이 녀석이 몸속을 돌아다닌다고 체온이 낮아지는 것 말고는 특별히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왠지 기분이 꺼림칙하다.
한참을 아이즈와 실랑이하던 중 페로렌이 다가온다.
“뭘……. 잠깐 내 방으로 좀 와볼래……?”
“콜록! 알았어요. 아가씨. 금방 갈게요.”
가까스로 아이즈를 체내에서 빼낸 뒤 페로렌의 방으로 향하는데 셀리안이 나를 부른다.
“아, 저기……. 뭘 님!”
그녀를 바라보자 머뭇거리며 바이올린의 선을 자근자근 누른다.
“오늘은……. 연주비 안 주셨는데…….”
“아…….”
몇일 전 나를 위해 연주하던 그녀가 이뻐 보여서 연주를 핑계로 키스를 진하게 한 번 했는데, 그 이후로는 연주해줄 때마다 그녀 쪽에서 연주비를 악착같이 받아 내려고 한다.
순수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 사랑꾼이라니까……?
“응, 츄웃……. 읍…… 츄웁. 쪽.”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제법 키스도 잘하고 말이야…….
“어우 덥다…….”
“아이?!”
그녀와의 키스로 달아오른 얼굴을 아이즈를 잡아 문질러 식히며 페로렌의 방을 찾아간다. 더울 때는 이 녀석이 꽤 유용하단 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