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81화 (81/147)

<-- 페로렌의 고백 -->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예쁘게 차려입어요.’

페로렌은 백작가의 차남 데모즈 펠러의 말 한마디에 온갖 치장을 마친 뒤 별장의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늘.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데모즈 펠러의 부모를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순간이 올 것이다. 만약 두 분이 페로렌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약혼식이 진행될 분위기였다.

‘너 정말 후회 안 할 거야?’

“그럼, 나 후회 안 해.”

‘이게 네가 바라는 거야?’

“당연하지! 여자로 태어나서 좋은 남자,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서 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게 어딨다고?”

‘근데 너… 왜 한 번도 웃지를 않아?’

마음이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던 페로렌은 허를 찌르는 듯한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닫았다.

“왜……. 일까……? 난 왜 웃지 않는 걸까……?”

기뻐야 할 날임에도 거울 속의 자신은 어찌 된 일인지 한 번을 웃지 않았다. 페로렌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상했다. 웃음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가식적인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 웃음은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그날의 파티 이후로는 줄곧 이런 웃음이었다는 걸 페로렌은 알고 있었다.

‘네가 웃을 수 없는 이유를 내가 알려줄까? 지금 당장 방문을 열어봐.’

페로렌은 마음이 하는 소리에 방문을 열었다. 활짝 젖혀진 문 앞에는 정말 그녀의 말대로 페로렌이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서 있었다.

“얘 때문이라고……? 내가 웃을 수 없는 이유가?”

페로렌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마음속에 있는 그녀의 말대로 문 앞에 있는 존재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으니까 맞는 말을 한 것 같긴 하다.

“꽤……. 오랜만이네요?”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곧, 참을 수 없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페로렌 아가씨……? 갑자기 왜 우는 거예요?”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듯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해. 이젠……. 목소리도 들려. 흐윽……. 나 정말 미쳤나 봐.”

눈앞의 존재는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페로렌 눈앞에 나타났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지어는 목욕을 할 때조차 자신을 씻겨 주겠다며 나타나곤 했다.

그저 환상일 뿐이지만 이제는 목소리까지 전부 선명하게 재연되고 있음에 페로렌은 얼굴을 가리고 오열했다. 자신이 그를 보며 이렇게까지 기뻐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미친 게 아니야. 페로렌, 그게 네 감정이야.’

“이게 정말……. 내 감정이라고?”

‘그래……. 너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눈앞의 남자를 좋아하고 있어. 어쩌면 그걸 넘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지…….’

페로렌은 눈앞의 남자를 올려 봤다. 열흘 전 그렇게나 싸웠는데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렇게 안심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느꼈던 침울했던 감정이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한순간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네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그가 나타나면 하고 싶던 말을 전해. 그도 그걸 기다리고 있어.’

“정말 그럴까……?”

페로렌은 마음속 그녀에게 되물었지만 더 이상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페로렌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릴 때였다.

‘뭘이 나타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 그건 바로…….’

페로렌은 그의 앞에 말없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뭘…….”

“어?!”

“뭘! 보고 싶었어. 흐으윽……. 보고 싶었어.”

“아, 아가씨……?!”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뭘!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왜 이제 나타난 거야! 으아앙!”

연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눈앞에 보이니 진짜로 눈물이 맺히며 숨겨왔던 감정이 드러났다.

“아가씨? 왜 이래요, 갑자기?!”

“으앙! 흑, 뭘의 냄새도 이제는 싫지 않아! 으흑…….”

처음에는 그토록 혐오스러워하던 타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조차 이제는 뭘의 몸에서 나는 것이라면 향기롭게 느끼고 있었다. 더는 놓치고 싶지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곧 사라질 존재라면 사라질 때까지 끌어안은 채 놔주고 싶지 않았다.

“좋아해 뭘……! 그동안 몰랐는데 이제 나, 확실히 알아. 내가 왜 뭘만 보면 화를 내고 괜히 심술부렸는지. 이런 감정 처음이었으니까……. 드러내는 게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그치만, 이제 안 숨길래. 너무너무 좋아해 뭘!”

안은 팔에 힘을 더욱 강하게 실었다. 그를 끌어안을수록 자꾸만 짙어지는 그의 향기와 존재감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정말 페로렌 아가씨 맞아요?! 갑자기 왜 이래요?”

뭘은 이 상황이 굉장히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타오르는 서리한을 가지고 아이셀 업그레이드를 부탁하러 왔을 뿐인데, 페로렌이 아닌 처음 보는 낯선 여성이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는 페로렌의 모습이긴 한데 행동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뭘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페로렌의 머리를 잡고는 얼굴을 살폈다. 정말 페로렌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음이다.

“흑, 흐윽……?”

페로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성이 서서히 돌아옴을 느꼈다.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그 만의 냄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환상치고는 너무 사실적인 게 아닌가 싶었다.

페로렌은 여전히 뭘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글썽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봤다. 뭘은 마치 이 세계의 신종족과 처음으로 조우한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아가씨……? 이해 좀 시켜주실래요?”

“너……. 흐흑… 혹시 진짜야……?”

“제가 뭐 가짜도 있어요?”

진짜고 뭐고 그게 무슨 말인지 뭘은 알 도리가 없었다. 애초에 상상 속의 뭘은 페로렌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말이었다.

그가 진짜 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페로렌은 놀란 햄스터처럼 두 눈이 동그래지며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러나 부끄러운 사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곳엔 뭘만 있는 게 아니라 셀리안과 드웍프도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자 셀리안은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하하……. 오랜만이에요. 페로렌 아가씨.”

“와……. 아가씨가 형님 엄청 기다렸나 본데요?”

페로렌은 곧 앵두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는…….

“꺄아아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재빨리 문을 쾅-! 닫았다. 덕분에 뭘은 세차게 닫힌 문에 코가 깨져 철철 흐르는 피를 열심히 막아야 했다.

* * *

페로렌의 방문 앞에 서서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겨우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이쪽으로 발령받은 하수인 중 아는 얼굴이 있었기에 도움을 살짝 받았다.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보고 싶었단 말이죠?”

“아니야! 그건 그냥……! 오해야!”

그녀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몸에 둘러쓴 채, 조금 전 일은 오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마음속에서 자기한테 시켰다는데 귀신이라도 보는 건지 저런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나 그래……?

거기다 날 좋아한다는 증거로 고백과 동시에 페로렌의 굴복은 단번에 100이 되고 호감도 또한 50이나 넘게 폭풍 상승했다. 그런 중에 부정하는 것도 참 웃기는 노릇이다.

“아까는 내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처를 잘 못 했는데, 다시 한번 말해 줘봐요. 이번엔 제대로 반응해줄 테니까.”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이불 뒤에 숨어서 소리치는 페로렌을 향해 능청스럽게 빈정거리며 다가간다.

“아니, 그동안 날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참았대? 응?”

이불 안에서 페로렌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녀가 숨어있는 이불을 확 당겨 내린다. 그러자 놀란 소리를 하며 고개를 푹 숙인다.

그녀의 볼을 타고 맑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이 상황까지 와서도 스스로 인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분한 모양이다.

“자, 그렇게 보고 싶던 얼굴 마음껏 봐요.”

“그만하라고 진짜……! 진짜 열 받아. 흐윽…….”

페로렌이 코를 훌쩍거린다. 눈물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여워서 더 놀려 주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기껏 올라간 호감도가 도로 떨어질지 모르니 참아준다.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이쁘게 차려입었어요? 혹시 그 남자 만나러 가는 거예요?”

내 물음에 페로렌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정답을 찍은 것 같다.

“아가씨.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잘못했어요. 두 번 다시 눈치 없이 안 굴 테니까.”

같이 가자는 말에 페로렌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린다.

“싫었다며……. 나같이 까탈스러운 애랑 같이 여행하는 거……. 싫었다면서.”

“아가씨. 남자라는 생물이 말입니다. 아가씨가 보기에 복잡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되게 단순한 구석이 있어요.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다가도 다음날 가서는 막 후회하고 혼자 열 내고……. 또 그러다가 어루만져주면 금방 풀리기도 하고요.”

페로렌 볼의 눈물을 닦아주자 그녀가 나를 응시한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짓이냐면서 쳐냈을 테지만, 지금은 순한 양처럼 내 손길을 받아들인다.

“내가 잘못 했어요. 그동안 아가씨 없으니까 빈자리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 진짜 소중한 사람은 하여간, 뒤늦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니까요?”

“소중해? 내가……?”

“그럼요. 아가씨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요?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 줄래요……? 뭐, 이제는 싫다고 해도 강제로 데려갈 거지만…….”

닦아준 눈물이 도로 나오려는지 입술을 앙다물더니, 심호흡 후에 입을 연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생각은 해볼게. 만약 간다고 결정해도 네가 좋아서 따라간다는 거 아니니까……. 꼬투리 잡을 생각하지 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싶을까……? 하여간 못 말리겠다니까…….

*

페로렌의 이별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페로렌을 만날 때 만해도 환하게 웃고 있던 남자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진다.

“정말 미안해요. 데모즈 공. 이런 말씀드리게 돼서…….”

“음……. 하아……. 어쩔 수 없죠. 그게 당신이 원하는 길이라면…….”

“데모즈 공처럼 좋은 분이라면, 저보다 훨씬 멋진 여성분을 만나실 거라고 믿어요.”

“멋진 여성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데모즈의 말에 페로렌은 더욱 미안한 얼굴을 지어 보인다.

“떠나신다고 결정한 사람 앞에서 내가 무슨 실례되는 말을 하는 건지……. 페로렌 양이 그렇게 결정한 이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당신의 행복을 빌겠습니다.”

데모즈는 그렇게 말하며 쓸쓸해 보이는 모습으로 등을 돌린다. 처음엔 페로렌한테 껄떡대는 별 볼 일 없는 놈으로만 봤는데 의외로 순정파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 * *

“조금 전 그런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거야.”

“나쁜 사람……. 나쁜… 놈. 적…….”

“오, 맞아! 그렇게도 쓸 수 있어. 그리고 나쁜 사람의 반대말은 말은 좋은 사람이야.”

지난 열흘간 일레이나는 미실트에게 말을 가르쳐주며 꽤 친해졌다.

“일레이나……. 좋은 놈…….”

몇일 전 가르쳐준 ‘놈’의 쓰임새를 즉각적으로 적용하는 미실트를 보며 일레이나는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미실트는 하나의 말을 가르쳐주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서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즐거워 보이던 일레이나의 표정은 금세 다시 침울해졌다.

“미실트……. 우린 언제쯤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일레이나… 슬퍼……?”

“응……. 조금 슬퍼. 돈 벌어서 엄마한테도 보태드리고, 등록금도 내야 하고 학원도 다니고 싶은데……. 갇혀 있으면 그러질 못하니까……. 나도 평범하게 공부하면서 알바나 하고 싶었는데…….”

미실트는 일레이나가 하는 얘기의 몇몇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일레이나는 개인적인 사연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일레이나는 밝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힘든 상황을 이겨 내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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