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그리고 이별 --> 무도의 시간이 다가오고, 연주자들이 장내에 들어섰다. 곧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저마다 어울리는 짝을 이뤄 우아한 백조처럼 춤을 추었다. 춤을 권유받은 페로렌도 그 아름다운 무리에 속해 있었다.
“정말 처음 추시는 거 맞아요? 정말 잘 추시는데요?”
사내의 물음에 페로렌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귀족이라 부를 순 없지만, 귀족에 버금갈 만큼 문화생활을 누려오던 페로렌에게 춤 정도는 기본소양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 내가……. 남자와 파티에서 춤을 추고 있어.’
뭘을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갈망하고 있을 꿈 같은 일을 이 자리에서 이루고 있으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정말 자신이 원하던 것일까? 그토록 원하던 일이라면 지금 느껴지는 이 기분은 대체 뭘까……?
무도의 연주가 고조되고, 산들바람처럼 하늘거리던 춤은 어느새 따사롭게 일렁이는 석양처럼 잔잔해졌다.
남자는 페로렌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맞추며 냇가에 나뭇잎 흘러가듯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외모도 매너도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페로렌은 이런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는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가슴 속에 확실하게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이 마음이 무엇 때문에 느껴지는 것인지, 페로렌은 알지 못했다.
페로렌의 눈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사내가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입을 열었다.
“페로렌 양. 저, 아무래도 당신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습니다. 미쳤다고 여기셔도 좋습니다. 제가 느끼는 이 마음만은 지금 꼭 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고백을 들은 페로렌의 눈이 크게 떠졌다. 춤의 첫 권유. 거기서 이어진 첫 고백. 그럼에도 부담스럽지 않고 정중한 고백이었다.
다시 한번 무도회의 음악과 조명이 바뀌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무도회마다 반드시 오는 키스타임이었다. 주변의 춤을 추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파트너와 진하게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춤을 이어갔다.
사내가 페로렌에게 물었다.
“제가 당신한테…….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생각하지 않고 승낙했을 제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 모르겠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민하는 페로렌의 작은 턱에 사내의 손끝이 가볍게 닿았다. 그리고 사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페로렌은 떨리는 마음에 눈을 꼭 감았다. 둘의 호흡이 흐르는 음악처럼 고요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사내의 입술이 페로렌의 입술에 닿을 무렵.
‘아니야. 이건 아니야……!’
페로렌은 고개를 홱 돌려 사내의 키스를 피했다. 사내는 허공에 입을 맞추고는 민망함에 시선을 내렸다.
“죄송해요……. 저는 준비가…….”
“아……. 아니에요, 내가 성급했어요.”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백작가의 차남이면 그래도 좋은 집안이잖아. 근데 왜 결정적인 순간에……. 그 녀석이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한 때는 수행원이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여행 동료에 지나지 않는 뭘이 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히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그의 섬세하지 못한 말투나 행동들은 오히려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왜……. 모르겠어. 정말…….’
사내는 페로렌의 머릿속에 무슨 혼란이 일어났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페로렌. 당신에게 천천히 다가가도 될까요? 이대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첫 만남에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게 무례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당신을 욕심부리고 싶어요.”
사내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말을 들으니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야 왜……? 기뻐야 하는 건데……. 왜…….’
이유 모를 눈물에 감정이 복받칠 무렵.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사내의 몸이 확 멀어졌다.
“읏?!”
상황을 살펴보니 한 남자가 귀족 사내의 팔을 잡은 채 꺾고 있었다. 백작가의 차남 데모즈는 고통스러움에 비명을 내질렀다.
“뭘……?!”
“너 뭐야? 네가 뭔데 우리 아가씨를 울리고 있어?”
“아아윽!! 뭐, 뭔가 오해가……!”
“오해……? 내가 다 봤는데 거짓말할래? 싫다는 사람 붙잡고 키스하려는 것도 모자라 강제로 끌어안고, 사내새끼가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뭘이 자기가 했던 일들은 생각도 안 하는지, 백작가 차남에게 크나큰 실례를 범하고 있었다.
페로렌은 서둘러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뭘!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빨리 못 놔?!”
“아가씨! 이런 놈은 따끔한 맛을……!
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로렌은 뭘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렸다. 오해가 분명한 이상 그의 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평소보다 더욱 감정 실린 따귀에 뭘은 자신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얼얼함을 느꼈다.
“당장 그 손 못 놔?!!”
“아, 아가씨……?”
페로렌의 성난 외침에 뭘은 당황한 얼굴로 사내의 손을 풀어주었다.
“죄송합니다! 데모즈 공. 제 일행이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너 나 좀 봐!”
페로렌은 잔뜩 흥분해서 괜찮다는 사내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뭘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
“네가 뭔데 그 상황에서 나서? 네가 뭔데?! 네가 내 수행원이야? 네가 내 보좌관이야? 약혼자야?! 네가 뭔데 거기서 함부로 나서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데 왜?! 넌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같이 여행하는 사람일 뿐이잖아!”
너무 화가 났다.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뭘이 자신을 너무 화나게 했다.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껏 이어야지 도무지 상종 못 할 인간이라는 게 뒤늦게 확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오겠다고 한 것조차 이제는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뭘 또한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같이 여행하는 사람……. 저는 아가씨한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요?”
최소한 그 이상의 무언가가 서로에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순히 뭘 혼자만의 착각인 듯했다.
“그럼? 그럼 뭐가 더 있는데? 말했잖아. 우린 여행 동지일 뿐이라고. 나, 아까 그 사람한테 고백받았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들 축하해 줄 만한 멋진 남자한테 고백받았단 말이야!”
가슴에 응어리졌던 답답함이 터져 나오면서 눈물이 똑똑 흘렀다.
“근데 네가 그걸 다 망쳐버렸어. 넌 왜 항상! 중요한 순간에만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해? 대체 왜 그러는데 너!!”
울면서 소리치는 페로렌의 말에 뭘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페로렌, 너 고백 받은 게 기뻐서 운 거였냐?’
자신이 오해했고 방해한 건 맞지만, 다른 사람한테 고백받았다는 말이 뭘의 가슴엔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페로렌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눌러 닦으며 말했다.
“나, 이제 여행 그만할래. 너의 그 이상한 행동들 받아주는 것도 지치고! 낡고 허름한 장소에서 자는 것도 지치고! 내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도 더는 못 참겠어! 어떻게든 괜찮은 척, 안 힘든 척 버텨보려고 했는데 이제 그런 척도 못 하겠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거?
“그래. 진심이야. 나 다시 원래 생활로 돌아가서, 나한테 고백한 그 사람이랑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면서 지금까지 못 누렸던 거 누리면서 진짜 귀족으로 살 거야.”
얘기를 듣던 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처음 고백받은 사람한테 그 정도까지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가씨 그렇게 의지가 약했던 사람이에요? 따라오겠다고 할 땐 기를 쓰고 따라오더니! 이제는 밑도 끝도 없이 그냥 그만하겠다? 결정이 그렇게 쉬워요?”
“그래, 나 원래 의지도 약하고 결정도 쉽게 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애초에 널 따라오겠다는 결정도 한순간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그랬던 거였어. 나! 그땐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고!”
뭘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감을 느꼈다. 열심히 모아놓은 페로렌의 호감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이대로면 그녀가 진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가씨, 일단 진정하고 해봐요. 화난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물론……. 오해한 건 내가 미안해요! 근데, 아가씨가 모르는 남자 품에서 울고 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참냐고요?!”
“하, 네가 왜 못 참는데……?”
“그건…!
“말해봐 못 참는 이유가 뭔지?”
그녀의 물음에도 뭘은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수행원이었으니까?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여행 동료로서? 그냥 내 걸 남한테 뺏기기 싫은 마음? 그 어떤 말로도 한 번 틀어져 버린 페로렌의 마음을 돌릴 순 없을 것처럼 보였다.
“봐, 대답 못 하지? 너도 그냥 생각 없이 뛰어든 거야. 대책도 없고 생각도 없이 뛰어든 거라고! 제발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살아! 머리는 뒀다 어디에 쓸 건데!”
“그래서, 정말 그만하겠다고요?”
“그래!”
“알겠어요! 그래요! 그 귀신처럼 하야말간 한 녀석이 그렇게 좋으면 가요! 가서 아주 잘 먹고 잘사시길 바라는데……! 이거, 이거 있죠?”
뭘은 품에서 아이셀을 꺼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건……! 내가 가질 거예요!”
“마음대로 해! 이 멍청아! 나도 더 이상 할아버지 후광에 비친 존재로 살기 싫으니까!”
페로렌이 마음을 돌렸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 못나 보이는 걸 감수하고 뱉은 말이었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이거 소질 부여해준다면서요!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재료만 가져와! 그럼 마지막으로 해줄 테니까! 그리고 그걸 마지막으로 너랑 나는 다신 볼 일 없을 거야!”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뭘도 점차 이성을 잃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케이! 좋아! 나도 당신처럼 입 거칠고 까탈스러운 여자랑 처음부터 여행하기 싫었네. 뭐! 재료 악착같이 모아서! 당신 능력만 제대로 빨아먹을 거니까 각오하셔!”
“이……. 이제 우린 완전히 끝이야!”
“하! 시작도 안 했는데 끝은 무슨 얼어 죽을! 그동안 더럽고 역겨운 곳에서 사시느라 고생 많이도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아주 깨끗하고 청렴한 인생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안녕입니다!”
뒤도 안 보고 멀어지는 뭘을 보며 페로렌도 몸을 돌렸다. 그러나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페로렌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고개를 떨군 채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았다.
“흐윽……. 나쁜 자식.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할 수 있어…….”
의지가 약하다는 둥의 말을 던져 놓고, 정작 자신한테는 한두 번의 권유로 마음을 돌린다니……. 그가 던지고 간 말들이 너무 아파서 계속 눈물만 흘렀다.
“페로렌, 괜찮아요……? 걱정돼서 따라왔어요.”
눈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페로렌은 재빨리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아……. 데모즈 공. 죄송해요. 못난 꼴 보여드려서…….’
“아, 아니에요.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요.”
페로렌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데모즈가 물었다.
“……조금 걸을래요?”
뭘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매너 있고 따듯하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멋진 남자였다. 페로렌은 그의 산책 권유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와……. 페로렌이 언제부터 저렇게 순종적인 캐릭터였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떠난 줄 알았던 뭘은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떠나기 무섭게 남자를 따라가는 페로렌을 보고는 기가 차서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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