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그리고 이별 --> “그래, 데려오겠다던 자들이 이 사람들인가?”
“아, 멜시엘 님. 말씀드렸던 동료들입니다.”
페로렌과 드웍프는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작령을 국가에 환원하여 별도로 작위를 관리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대우를 받을만한 계급임은 분명하니까.
“다들 작고 귀엽게 생겼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자작 부인.”
작다는 말에 발끈할 줄 알았던 페로렌이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의외다. 이런 장소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잘 알고 있구나.
멜시엘은 페로렌의 대답에 인자한 눈웃음으로 화답하고 나를 부른다.
“뮬린, 잠깐 나하고 같이 가지.”
그녀의 명에 따라 페로렌과 드웍프를 둔 채 멜시엘을 따라 자리를 옮긴다.
“확실히 옷이 잘 어울리는구나. 꾸며 놓으니 제법 귀태가 나.”
“감사합니다.”
멜시엘은 몸이 또 한 번 달아오르는지 끈적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스스로 자중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런 곳도 괜찮은데 말입니다…….
*
그녀를 따라간 뒤는 별거 없었다. 콜로세움의 라이벌 관계쯤 되는 귀족들에게 새로운 챔피언인 나를 소개하고 시답지 않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중 한 사내는 나를 향한 살의를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쏟아냈는데, 후에 그 이유를 들어보니 내가 처참히 무너뜨린 둠페일의 주인이었단다.
그 괴물을 사들이느라 돈깨나 썼을 테니, 그런 살의를 표출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더군다나 그의 부인 되는 사람은 바로 옆에서 나를 향한 무한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니 더욱 열 받을 수밖에……. 내가 잘난 걸 어쩌란 말인가?
사람 없는 연회장 복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멜시엘은 내 옆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린다.
“그 인간들 표정 봤니? 그렇게 고소할 수 없다니까? 하아……. 네가 있어서 요즘 사는 게 너무 재밌어졌어. 고마워 뮬린. 나를 찾아와줘서…….”
말하는 느낌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다. 왠지 모르게 연민이 느껴지는 그런 눈빛이다.
“한동안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는데, 덕분에 뻥 뚫린 것 같아. 네 앞에서만이라도 이거 벗어도 되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 가리개를 끌러 내린다.
“으음……. 네가 떠난다니 정말 아쉬워. 생각을 바꿀 순 없겠지?”
그녀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인다.
“그래도 덕분에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어. 언젠가 너보다 뛰어난 챔피언들을 줄줄이 아래 두고 거느릴 생각이야. …그렇게 아무도 못 건드릴 정도로 내 이름에 힘이 생기면…….”
그녀는 손에 쥔 얼굴 가리개를 씁쓸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더 이상 이깟 천 쪼가리 뒤에 숨진 않을 거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녀가 진정으로 이루고 싶던 게 무엇인지를……. 그녀는 가문의 규율로 인해 얼굴을 가리는 생활을 평생토록 해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던 것 같다.
자존감은 바닥. 스트레스는 높아져만 가던 채로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탈출구를 찾다 보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콜로세움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자와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를 한다는 이유로 주변 귀족들의 질타와 견제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낸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긴급히 명성이 필요했던 내가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고…….
어쩌면 강인한 남자들을 자기 아래 두고 싶은 뒤틀린 욕망도 그런 데서 나온 걸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좋았지만, 그녀 자신은 욕구를 풀 곳이 없으니 많이 힘들었겠지.
그래도 챔피언을 키웠다는 전적이 생겼으니 누구도 전처럼 그녀를 함부로 할 순 없을 것이다.
“멀리서라도,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멜시엘 자작부인.”
그녀는 이후의 말 대신, 내게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누가 볼까 재빨리 얼굴 가리개를 귀에 건다.
“아, 참 아직 장갑은 못 받았다고 했지? 내 개인실에 일레이나 와 있을 거야. 찾아가 봐. 오늘은 편히 즐기다가 떠날 때 얼굴 한 번 보여주고 가렴.”
뒤돌아 가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뒤, 그녀가 말해준 개인실로 향한다.
*
“아……. 오, 오늘은 손 치수만 재고 갈게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일레이나가 나를 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떨군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 정도로 미움받고 있다는 증거겠지.
이름: 일레이나 / 레벨: 21 / 몸 상태: 건강함
직업: 재봉사
체력 290 마력 360
힘: 32 / 민첩: 37 / 지력: 31 / 건강: 26
신중: 2
노예 랭크: D
기분: …….
각인정보 1차 각성
호감: 9(-) /애정: 0(-) /헌신: 0(-)/굴복: 19(-) = 복종: 7%
신체 정보
키: 171cm
가슴: 89cm / 밑가슴 68cm / 허리 57cm / 엉덩이 92cm
〈기교〉
재봉(MAX), 손재주(4),
복종이 7%. 여태까지 각인을 걸었을 때 이 정도로 낮은 사람은 없었는데, 이대로라면 언제든 각인이 풀려버릴 위험이 있다. 아무래도 만남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런 걸까?
원래는 오늘 복종도를 높여서 그녀를 데리고 가려 했는데. 이렇게 낮으면 당연히 거절하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잖아.
“치수 다 쟀어요. 장갑은……. 파티 끝나기 전에 만들어서 전달해 드릴게요. 그럼…….”
정말 한순간도 같은 공간에 있기 싫은가 보다. 치수 재기를 20초 만에 끝낸 그녀가 나가려고 몸을 돌린다.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순 없다. 그녀를 내 소유로 만들기로 마음먹은 이상. 끝까지 해볼 생각이다.
“아……!”
-‘일레이나의 호감이 1 하락했습니다. (8--)’
그녀는 잡힌 손목을 탁 틀어 뺀다. 말은 안 하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 증오스러울 만큼 싫다는 내색을 표정 하나로 드러낸다.
이미 떨어져 버린 호감도. 더 되돌릴 수 없게 되기 전에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일레이나의 호감이 1 하락했습니다. (7--)’
“으읏……. 이거… 놔 주세요……! 소, 소리지를 거예요!”
나는 그녀의 의견을 묵살한 채 그대로 각인을 시전한다. 각인의 효과가 발동되자 일레이나의 몸이 부르르 떨려온다.
“끄흣? 아흑……! 끼흐읏!”
각인의 강력한 효과로 인해 그녀는 짧은 비명을 간헐적으로 내뱉으며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으려 한다. 정확히 무슨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본 바로는 엄청난 쾌락을 안겨주는 것 같다.
이 효과를 받고 나면 복종도가 일시적으로 폭증할 테니 그때를 이용해 명령을 내릴 생각이다.
“하으으읏……. 하아응…! 끄흐읏! 갑자기 왜… 이런……? 하악…!”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잘 익은 벼밭의 찬란한 황금빛을 머금은 그녀의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고인다.
“당신은 내 말을 거역할 순 없을 거예요. 당신은 이제부터 내 노예니까.”
“그……. 그게 대체 무슨…….”
무슨 말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나는 어느새 악마 같은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본다.
* * *
“오우, 저 여자 완전 내 취향인데? 페로렌 아가씨. 저는 좀 둘러보다 올게요.”
변태 같은 시선으로 이런저런 여인들을 훑어보는 드웍프의 물음에 페로렌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도대체 뭘은 자작 부인과 어디를 갔기에 이렇게 안 오는 건지 모르겠고, 그나마 같은 여자로서 수다 떨 만한 셀리안은 연주가들 앞에서 눈을 감고 흐느적거리고 있으니 페로렌 혼자 쓸쓸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혼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을 우습게 보는 건 괜찮아도 남들이 우습게 보은 건 자신의 성격상 용납 못 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가식적으로 얘기를 나누자니, 그런 수고를 감내할 만큼 절박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뭘이 올 때까지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고 몸을 옮기려던 때 누군가 페로렌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저기 아가씨.”
젊고 멋있게 생긴 남자였다. 여느 귀족가의 자녀가 그렇듯 뽀얀 피부에 귀티가 흘러 주변에 아우라를 뿜어대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의 부름에 페로렌은 정중하게 되물었다.
.
“네, 왜 그러시죠?”
“아……. 그러니까 저는 하스톰 백작가의 차남 데모즈 펠러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데모즈 공. 저는 페로렌입니다.”
“페로렌 양이군요. 사실……. 다름이 아니라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집안 자제분인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매번 파티에 참석하면 자주 있던 일이었다. 모두가 같은 선생 밑에서 교양수업이라도 받은 건지 이성이라면, 계급부터 묻고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에 든다면서 계급 따위가 뭐가 중요해?’
귀족들에게 받아온 상처가 쌓이다 보니 계급부터 따지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페로렌도 한때 귀족과 결혼하고 싶어서 목맨 적 있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이번 여행이 끝난 면 귀족과 결혼해서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할 정도니, 결국 계급주의적 사상에 찌든 건 본인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 자각을 못 할 뿐.
‘어차피 잠깐의 흥미겠지. 이 남자도 똑같이 떠날 거야…….’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그가 먼저 말을 걸어주니 기쁜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페로렌은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는 이 귀티 나는 남자를 무례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상대하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의 배경을 알고 대화하다 보면 금세 흥미를 잃을 테니 말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평민이에요. 멜시엘 자작부인의 초대로 잠시 방문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페로렌은 남자가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테이블의 위치로 귀한 집 자녀가 아니라는 것쯤은 사내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잠시 시간 때우기 위해 혹은 친구들과 내기에 져서 말을 걸어온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페로렌의 말을 전해 들은 그의 안색이 오히려 밝아졌다.
“아……. 다행이네요. 혹시 높은 집안 자제분이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 많이 했습니다.”
‘내가 평민이라니까 쉬워 보인다는 거야?’
사내는 그런 의미로까지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페로렌은 아니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높은 집안 자식들은 약혼자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마음에 든다고 함부로 말을 걸었다간 약혼자에게 찍혀서 견제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평민이라면 약혼자가 있더라도 견제당할 위험이 없으니 마음 놓고 말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페로렌은 자신에게 다가온 사내가 여느 귀족 집안 자제와 마찬가지로 속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사내의 말에 페로렌의 마음이 사뭇 동했다.
“저……. 이런 말씀, 초면에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짝이 없으시면 저와 춤춰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춤이요……?”
누군가에게 춤을 권유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 대화나 산책 정도야 누구와도 할 수 있다지만, 이런 파티에서 춤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많은 사람 앞에서 춤을 추는 대상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공표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약혼도 안 한 사람끼리 춤을 춘다고 해서 반드시 이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 가벼운 마음으로 춤을 권유하는 남성은 없었다.
‘이 남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페로렌은 그의 말에 내심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권유한 대상이 이 누구 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토록 원하던 남자로부터의 첫 번째 춤 권유가 뭘을 우연히 따라온 파티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했다.
“네……. 권유해주신다면…….”
페로렌은 주책없이 들먹거리는 가슴을 스스로 절제하며 사내의 권유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