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71화 (71/147)

<-- 인연 그리고 이별 -->                               그렇게 무려 9차까지 간 뒤 그녀가 졌다는 말을 할 때 비로소 행위를 멈출 수 있었다. 나도 나지만, 나를 이 정도로 빨아먹은 한 그녀도 참 대단하다. 한 번만 더 갔더라면 내가 먼저 포기했을지도…….

찢어놓은 옷은 그녀의 하수인들이 와서 새 옷으로 가져다주었다.

“하아……. 기진맥진이야. 온몸이 아파서 서 있을 수도 없겠어. 정말, 내 입으로 항복을 말하게 할 줄이야. 역시 챔피언은 챔피언이네. 스스로 가문의 규율을 깰 정도로 날 미치게 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가문의 규율이요……?”

“우리 가문의 여성들은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면 안 되거든? 그런데 챔피언이 된 순간 네게 키스하고 싶을 만큼 몸이 뜨거워져서 어쩔 수 없었어. 이건 비밀로 하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이었나? 가문의 규율이라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게 한단 말이야? 정말 이해 안 되는 규율을 만들어 놨네.

“설마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이 정도의 잠재력을 가졌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내 손에서 챔피언이 탄생할 줄이야. 놈들 표정이 가관이겠는데?”

“뭐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녀는 자신처럼 콜로세움에 싸움꾼을 내보내는 귀족들과 매일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덕에 챔피언 타이틀까지 얻어냈으니 그 기세가 등등할 터.

그런 나를 대견해 하면서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한편으로는 아쉬운 눈치다.

“챔피언의 자리를 지킬 생각은 정말로 없어?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릴 수 있을 텐데?”

확실히 챔피언 전을 치르고 나니 명성과 돈이 한 번에 확 올랐다. 경기가 끝나고 그녀는 내게 그동안 승리한 것에 대한 상금을 쥐여주었다. 상금은 무려 5168만 셀. 얼마 안 한 것 치고는 노예 털기보다 많이 번 것이다.

물론 이번 경기에 관중이 많이 왔고 둠페일에게 걸린 금액이 유독 컸던 터라 우연히 잭팟을 터뜨린 거지만, 그래도 상금이 후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안 합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솔직히 이번 둠페일 경기의 경우는 순수 내 힘으로 이긴 게 아니라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 것뿐이고, 노는 물이 커지면 더 센 강자들도 수두룩하게 등장할 텐데 난 거기서 그들을 상대하면서 왕좌를 지켜낼 자신이 없다.

거기다 나는 노예를 거느리는 걸 좋아하지, 노예가 되는 걸 원하진 않는다. 물론 화끈한 멜시엘의 노예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만…….

“안 한다니 더 잡을 순 없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대신 마지막으로 나와 같이 파티에 좀 가줘야겠어. 내기에 포함된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파티요?”

그녀는 웃으며 매혹적으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그녀의 명에 따라 저택 방 한편에서 기다리고 있다. 저택에 들어오는 건 처음인데 이미 미란델의 저택을 한 번 봐서 그런지 큰 감흥은 없다.

그동안 봐온 바로 그녀는 남편 없이 혼자 사는 모양이다. 처음엔 자작 부인이라기에 남편이 자작인가 싶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녀 본인이 자작 직위를 가진 듯하다.

잠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자 멜시엘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한 여성이 따라 들어온다.

“파티에 그런 꼴로 갈 순 없잖니? 솜씨가 좋은 아이니 너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줄 거야.”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한데……?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자. 자작 부인이 낌새를 차렸는지 웃으며 말한다.

“정말 이쁜 아이지? 옷만 만들기엔 아까운 미모라니까? 얼굴 감상하려고 일부러 자주 이용하는 것도 있어.”

그래 미모가 뛰어난 건 확실한데……. 내가 놀란 건 그 이유가 아니다. 분명히 어디선가 봤던 얼굴이라 그렇다. 이름이 뭐였더라…….

“오늘 몸을 너무 혹사했더니 피곤하네……. 그럼 난 좀 쉴 테니. 저 남자 옷 좀 부탁해, 일레이나.”

“네, 멜시엘 자작 부인.”

그래, 맞아. 일레이나. 게임 초기에 날 물 먹였던 첫 번째 주요 인물. 그때는 내가 뒤통수 맞을 줄 모르고 먼저 들이대긴 했지만, 그래도 내 첫 시작이 끔찍하게 돌아간 건 바로 이 여자 때문이지.

잘 만났다. 다시 보니까 아주……!

예뻐……. 여전히 그녀는 아름답구나. 지금까지는 프리지아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를 다시 보니 내 마음이 옮겨가고 있다.

“저……. 치수 좀 재겠습니다. 옷 좀… 벗어주세요.”

“아 그러죠.”

내 얼굴을 못 알아보는 듯하다. 그녀의 요구에 따라 옷을 하나둘 벗으면서 생각한다. 이 NPC는 누가 만든 걸까? 결코 랜덤 시스템을 돌려서 나온 캐릭터는 아닌 것 같은데……. 이 정도 수준이라면 누군가 애정을 갖고 만든 게 분명하다.

그녀의 미모가 탄생한 것에 대한 고찰하던 와중 그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옷 벗고 있는데요?”

“소, 속옷은… 입어주세요…….”

헉! 나도 모르게 속옷까지 벗어 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9차례나 욕망을 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에는 검은 먹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구나.

민망함을 무릅쓰고 속옷을 제대로 입은 채 제대로 신체 측정을 받는다. 그녀는 얇은 줄로 내 가슴을 쭉 감아서 상체 사이즈를 재기 시작한다.

음, 가까이서 봐도 완전무결함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역시 괘씸해. 나를 물 먹인 대가로 이 여자한테 각인을 새겨 봐? 각인을 새긴 다음에 조교해서 경매에 올릴까? 이 정도 여자라면 조교 안 해도 꽤 나올 것 같은데…….

몸매가 드러나는 옷이 아닌데도 비율이 좋다는 게 느껴질 정도니, 외모 점수만 따져봐도 천만 셀은 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내 신체사이즈를 재던 그녀가 내 시선을 감지했는지 흘끗흘끗 올려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기……. 죄송한데, 다른 곳 봐주셨으면……. 기, 긴장돼서 집중이…….”

연약한 척, 부끄러운 척. 그게 네 컨셉이라 이거지? 그래 놓고 저번처럼 내 뒤통수를 칠 생각이겠지. 이번엔 안 통한다, 이 요녀야!

어느 정도 측정이 마무리된 거 같으니 슬슬 시작해볼까?

“마지막으로 손 크기만 재면……. 으읍?!

-일레이나에게 각인의 흔적이 새겨집니다.’

일레이나의 볼을 잡고 기습키스를 한다. 각인의 개화 능력 덕분에 키스하는 것으로 각인의 흔적을 새길 수 있다. 이제 천천히 복종의 각인으로 만드는 것만 남았다.

“츄읍-! 푸읏! 가, 갑자기 이게 무슨……!”

그녀가 나를 밀쳐 내더니 요동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를 기억 못 하는 것 같길래, 기억나게 해주려고요.”

“누구……. 설마 당신? 으으읍!”

이제야 내가 누군지 생각난 듯하다. 떨리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입술로 밀어붙인다. 그녀를 침대로 밀쳐서 눕히자 금빛 머릿결이 사라락- 퍼진다.

그러나 그녀는 저번과 달리 이번엔 고개를 피하며 저항한다.

“프읏! 이, 이러지 마세요!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항하는 이유가 그거였던 건가? 그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 아니면 원래 있던 건가? 어떤 자식인지 부러워 죽겠네.

막상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까 각인을 새길까 말까 고민된다. 살아온 인생이 이건 나쁜 짓이니까 하면 안 된다고 부정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왜 나쁜 짓을 하고 싶어지는 걸까? 그녀를 빼앗고 철저히 망가뜨리고 싶은 검은 욕망이 심장부에서부터 펄펄 끓는 석유처럼 밀려들고 있다.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군데요? 이 근처 사람이에요?”

“여기 사람……. 아니에요. 제발……. 이거 놔주세요.”

“사람이란 게, 원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게 되는 멀어지는 거예요.”

어느샌가 악당 같은 말을 잘도 내뱉고 있다. 그래 난 노예 상인이잖아? 이 세상에 착한 노예 상인이 어딨어? 그동안 내가 신사답게 굴어서 얻어온 게 뭐 있냐고? 난 좀 더 악랄하고 잔혹해져야 할 필요가 있어. 나 자신이 이득을 보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이해시키며 그녀를 손에 넣기로 마음먹는다.

“으읍……! 프읏!! 아윽! 싫어요……! 제발……. 하지 마세요…….”

그녀의 손목을 옭아맨 채 키스하던 입술을 살며시 뗀다. 나와 시선을 피하면서 심하게 떨고 있다. 이 반응을 보니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죄책감이 검은 욕망을 슬금슬금 밀어내고 있다.

안 돼! 나약해지지 말자. 그래, 이건 각인의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 여인이 얼마나 바뀌는지 확인해볼 기회라고! 게임에서만이라도 내 멋대로 살 거야.

그때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멜시엘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신경 쓰지 않았더니 그녀가 오는 소리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 순간, 일레이나가 나를 밀쳐내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간다.

“죄, 죄송합니다……!”

“어? 일레이나! 다 끝났니?”

멜시엘은 갑자기 뛰쳐나가며 멀어지는 일레이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곧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뭐 좀 급히 처리해야 할 게 있다고 갑자기 저러네요. 옷 치수 재는 건 다 끝났습니다.”

의심하지 않게 그렇게 둘러댄다.

“무슨 일이기에 차 마실 시간도 없이…….”

“그러게요. 워낙 바쁜 일인가 봅니다. 아, 내일 파티에 갈 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몇 명 있어서 말입니다.”

*

1년에 한 번 있는 귀족들의 연회 파티. 찬찬한 황금빛 조명 아래, 200명도 넘을 법한 사람들이 옥내를 찬찬히 돌아다니고 있다. 대부분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자식들로 보이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파티라니……. 정말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뭘 님. 오늘 너무너무 멋있어요.”

“맞아, 형님. 그러고 보니 오늘 진짜 멋있는데요? 남자인데도 반하겠어요. 어디서 사신 거예요? 저도 그런 옷 한 벌 사 입어야겠어요.”

“너는 그 모습으로 이런 옷이 가당키나 해? 악덕 사채업자처럼 보일걸?”

“하하, 형님 농담도 잘하셔.”

농담은 무슨…….

나는 멜시엘에게 부탁해서 페로렌을 비롯한 동료들을 데리고 파티에 참석했다. 그동안 나를 기다리느라 심심했을 테니 배려하는 차원에서였다.

이들은 새 옷을 때깔 곱게 빼입은 내 모습을 보고는 감탄을 마지않는다. 역시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 연회장에 들어서면서부터 꽤 많은 여인이 이곳을 흘끗흘끗 쳐다본다. 일레이나 솜씨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이 멋진 모습을 보면서 할 말 없어요?”

“뭐……. 음…. 괜찮아 보여.”

할 말이 그것뿐이라니……. 페로렌은 오늘따라 나를 피하는 느낌이다. 내가 너무 잘생겨 보여서 당황이라도 하셨나?

그녀는 더 할 말 없는지 화제를 돌린다.

“이 정도 규모의 파티는 정말 오랜만에 와보네.”

이런 파티가 처음인 나는 살짝 기가 눌리지만, 페로렌은 익숙한 모습으로 연회장을 거닌다.

“형님, 저도 귀족 파티는 처음인데 여기 정말 별천지네요. 사람들이 작위를 탐내는 이유를 이제 알 거 같아요. 주변이 너무 드높아서 마치 천사들 사이에 떨어진 악마가 된 기분이랄까? 여기서 괜찮은 영애나 하나 잡아서 팔자 좀 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드웍프는 유독 신나 보인다. 챔피언전에서 내가 승리한 이후로 영혼이 나갔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 타격이 없나 보다.

“야, 너 전 재산 날렸다면서 괜찮냐?”

“제가 전 재산을 왜 날려요?

“너 둠페일한테 돈 다 걸었다며?”

“에이, 형님 그걸 믿어요? 당연히 형님한테 걸었죠. 둠페일한테 걸었다고 하면 형님이 악에 받쳐서 이기려 들 테니까 거짓말 좀 했어요. 내기 건 아주 짭짤합디다.”

와……. 이 녀석 사람의 심리를 역 이용할 줄도 아네? 역시 무시무시한 사기꾼의 잔머리야.

“뭘 님! 저, 저기 구경해도 돼요?”

잔잔하게 곡을 연주하는 악사들을 지나가자 셀리안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어온다. 역시 같은 음악인이라 그런지, 이끌리는 모양이다.

“그럼요. 셀리안.”

셀리안이 연주가들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달려간 뒤 우리는 페로렌의 안내에 따라 의자 없는 빈 테이블 하나를 잡고 섰다. 테이블도 계급별로 자리가 있는지 아무 데나 앉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 귀찮게시리…….

곧 한 쪽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멜시엘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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