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65화 (65/147)

<-- <로그아웃>키스는 영화처럼 달콤하게 -->                               햇살이 맑은 휴일의 오후. 게임을 잠시 접고 밖에 나왔다.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내리쬐는 햇볕에 떠다니는 먼지조차 팔랑팔랑 춤을 춘다. 역시 이런 날에는 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다니까?

-‘하연아 어디야?’

-‘저 중앙 분수대 쪽에 있어요.’

두드리던 핸드폰을 집어넣고 눈으로 하연이를 찾는다. 워낙 많은 사람이 있어서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한눈에 찾았다. 멀리서 봐도 빛나는 외모와 그녀의 패션은 못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다.

흰색 바탕에 초록 패턴을 더한 투톤 셔츠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앞트임 치마, 거기에 허리끈으로 포인트를 줘서 색 조합과 옷의 디자인까지 모두 완벽하다.

물론 그것을 평가하는 나란 놈은 패션의 패자도 모르는 그런 인간이라지만, 그래도 입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괜찮은 패션 아니겠는가?

여기서 보니까 스스로 패션을 소화하기 위해 몸매 관리를 정말 잘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진짜 인기 많을 것 같은데, 남자를 무서워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다.

“하연아! 일찍 왔네?

“아, 오빠 오셨어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동안 하연이를 몇 차례 만나다 보니 이제는 내가 많이 편해진 듯하다. 그렇지만 증상이 완벽하게 호전된 건 아니다. 내가 편해졌을 뿐이지, 아직 다른 남자하고는 스스로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그동안 그녀의 트라우마를 극복시키기 위해 꽤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건만, 증상 호전은 여전히 더디다. 그래도 전혀 성과가 없던 건 아니다.

처음엔 가게에 들어갔을 때 점원이 남자라면 주문도 못 했지만, 내가 옆에 있어 주면 간신히 주문 정도는 가능하니까.

“오빠……. 저번에 얼굴 괜찮으세요?”

“응? 아……. 괜찮아. 그때, 그냥 아픈 척 한 거야.”

지난번에는 운동을 하면 자신감이 붙는다기에 그녀와 같이 주짓수 도장에 다녀왔다. 처음엔 어색해하더니 중간부터 재미를 붙였는지, 갑자기 열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결국 내 광대에 그녀의 발꿈치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나서야 운동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때 얼떨결에 만져진 그 촉감은 상당히 좋았지…….

“그래도 진짜 재밌었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가요. 오빠. ……오빠?”

“어……? 어! 그렇지. 아, 방금 뭐라고?”

“주짓수. 그거 재밌었다고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가자고요.”

아, 또 가자는 소리였구나.

“그래, 좋지.”

너무 좋지.

*

파스타를 좋아하는 하연이를 따라 유명한 파스타 집으로 향하던 때 문자가 왔는지 그녀는 핸드폰을 확인한다. 머리를 넘기면 보이는 귀걸이조차 이쁘다.

하연이의 미모를 넋 놓고 보는데,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오빠 제 동생도 지금 남자친구랑 근처에 있다는데, 식사 같이해도 되냐고 물어보는데 어떠세요?”

“그래, 같이 먹자.”

5분 뒤. 우리는 근처에서 하연이 동생과 그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오빠. 송하란이에요. 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언니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남자라고……. 이쪽은 제 남자친구예요.”

역시 핏줄은 핏줄인가 보다. 두 자매가 어쩜 이렇게 빛나는 미모를 자랑하는지. 그에 반해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어우, 훤칠하시네. 반가워요. 하란이 남자친구 김민철이에요.”

“하하, 안녕하세요. 강기단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미안하지만, 너무 양아치처럼 보인다. 귀, 눈썹 피어싱에 목에서 귀까지 이어진 문신. 손목에도 보라색 눈동자가 바라보는 듯한 문신이 새겨져 있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뽐내는 시대에서 저런 외모는 이상한 게 아닐 텐데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하란이 언니분도 얘기만 많이 들었지 막상 얼굴 까는 건 오늘 처음이죠? 듣던 대로 미모가 연예인 뺨치시네.”

“오빠, 내 미모는?”

“넌 내가 얼굴 보고 만나는 거 아니라고 했지?”

정정한다. 내가 단순히 외모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 것 같다.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이상의 그 무언가가, 불길함을 감지한 내 촉을 발동시킨 것 같다.

“아무튼 친하게 지냅시다. 우리.”

“그래요. 친하게 지내요.”

하연이에게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가로채 대신 잡고 흔든다. 다른 남자라면 괜찮았겠지만, 왠지 이 남자로부터는 하연이를 지켜야 할 것은 생각이 든다.

“아, 참. 언니 분이 낯을 많이 가리신다고 했나?”

그가 뭔가 아쉬운 눈치로 입맛을 다신다.

“배고픈데, 이제 밥 먹으러 가죠. 뭐 먹을 거예요?”

“우리는 지금 파스타 먹으려고 생각했어요.”

김민철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식으로 손을 휘젓는다.

“에이, 무슨 배도 안 차게 파스타야……. 고기 먹어요. 고기. 저기 소고기 무한리필집 있던데 거기 갑시다. 다들 고기 좋아하죠? 거기 보니까 간만에 고기가 땡겨서.”

“무슨 간만이야 맨날 고기 먹으면서…….”

“야 원래 남자는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쓰는 거야. 그런 걸로 일일이 태클 걸지 마.”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이 사람하고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내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이 사람과 맞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다.

*

우리는 하란이 남자친구의 강요에 따라 소고기 리필 집에 왔다. 하연이도 괜찮다고 하고 나도 소고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오게 된 방식이 그리 맘에 들진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어.

“하란 씨 집게 이리 줘요. 내가 할게요.”

“오……. 자상해. 자기도 좀 보고 배워.”

“미친 소리 하지 마라. 남자는 저런 거 하면 고추 떨어져. 아, 형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고.”

말만이라도 이쁘게 했으면……. 김민철은 24살로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그래도 20대 후반은 될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어리다. 학교는 안 다니는 것 같고 개인 사업을 하는 모양인데, 대충 얼버무리는 걸 보면 자랑할 만한 사업은 아닌 것 같다.

“참, 기단오빠 저한테 말 편하게 해요. 저도 그게 편해요.”

“그럴까?”

하연이한테는 말을 놓는데 그 동생한테는 높인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

“근데 하연 씨는 남자 무서워하는 거? 그게 얼마나 심하길래 그래요? 아까부터 말을 한마디도 안 하시는데? 근데, 그런 병이 실제로 있나? 그냥 내성적인 거 아니야?”

“오빠. 우리 언니 그런 식으로 묻는 거 힘들어해. 하지 마.”

하연이는 김민철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묵묵히 채소만 집어 먹고 있다. 지금 상황이 긴장된다는 소리다. 입안에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이런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한다고 그러더라.

“와, 진짜 식은땀까지 흘리시네. 하연 씨 아무래도 안 되겠네. 다음에 따로 만나서 밥이라도 먹어요. 내가 남자에 대한 내성을 제대로 길러줄 테니까.”

“오빠가 우리 언니를 왜 따로 만나?”

“아니, 여자친구 언니 만나는 게 이상해? 내가 무슨 해코지라도 하냐? 웬 과민반응?”

“기단 오빠가 옆에 있는데 왜 자기가 굳이 그걸 하겠다고 나서냐고.”

내 말이 그 말이다. 자기 여자친구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따로 만나려고 해?

“아니 어차피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니라며. 나도 도와주고 싶다는데 왜?”

“아 참, 그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언니, 기단 오빠랑 사귀는 거야?”

“어?”

“응?”

갑작스럽게 물어오는 하란이의 물음에 하연이와 나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사귀자는 말은 안 했는데, 뭐 요샌 말 안 하고 사귀는 게 대세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서로만 응시하자 하란이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뭐야? 무슨 반응이 이렇게 미적지근해? 사귀는 거 아니야? 그냥 친구야?”

“야, 남자랑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남자들은 여자 만나는 거 무조건 흑심 있는 거야. 그냥 친구? 개소리하지 말라 그래. 고백 안 하고 친구로 있겠다는 건, 남자들이 애인 삼기는 싫고 어떻게든 한 번 자보려고 수 쓰는 거라니까? 아 형님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 인간 말을 좀 짜증 나게 하는 구석이 있네. 그리고 아까부터 날 은근히 깎아내리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 놓고 본인은 하연이를 따로 만날 생각까지 하고. 여자친구가 있는데 하연이한테 흑심 품고 있단 소리랑 뭐가 달라?

일단 저 자식이 하연이한테 접근하지 못하도록 못 박아 놔야지, 안 되겠다.

“뭔데? 빨리. 둘이 어떤 사이인데?”

“민철 씨 말대로 아직은 흑심만 품은 친구.”

하연이의 반응을 살피자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얼굴이 붉어지면서 급히 물을 마시는 척 컵으로 얼굴을 가린다. 게임 초기에 봤던 여성 NPC의 반응을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인가……. 역시 귀여워.

나와 하연이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색을 읽었는지 하란이가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리며 반응한다.

“어?! 그거 설마……. 우리 언니한테 지금 고백한 거? 어떡해 완전 로맨틱해.”

하연이는 끝까지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내내 고개만 숙인 채 식사를 끝마쳤다. 하란이가 도중에 언니의 생각은 어떠냐고 집요하게 물어왔지만, 내 앞에서 말하긴 싫은지 못 들은 척 척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간접 고백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우리 언니 잘 부탁해요. 언니 오늘 집에 오는 거 맞지? 있다가 집에서 봐.”

“그래. 들어가고, 있다가 봐.”

“다음에 봅시다. 형님. 그리고… 하연 씨.”

저 친구가 하연이 이름을 부르면 괜히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내가 질투하는 건가? 흠, 내 주제 질투는 무슨……. 모르겠다.

“우리도 가자. 곧 영화 시간이다.”

“아……. 네…….”

*

오늘은 평범한 영화관 데이트……. 인가 싶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이것도 하연이의 남자를 무서워하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 방법의 일환이다.

하연이는 남자뿐만 아니라 꽉 막힌 어두운 공간을 무서워한다. 정확히는 어두운 장소 자체가 무섭다기보단, 그런 장소에 있으면 남자에 대한 공포가 더욱 극대화된다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화관을 와 본 적이 한 번도 없단다.

영화관 자리에 들어서면서도 하연이는 평소 잡을 일 없던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다. 영화관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영화표는 프리미엄 티켓을 끊어왔다. 일반 영화표의 무려 5배가 비싸다.

대신 좌석이 20석뿐이고 전부 띄엄띄엄 커플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의 영화관은 나도 처음 와봤다. 전 여자친구는 영화 보는 걸 별로 안 좋아했고, 그나마 영화를 즐기는 사내놈들이랑은 이렇게 비싼 돈까지 주면서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와……. 여기 진짜 좋다.”

좌석부터 안마의자처럼 다리를 쭉 뻗게 조절할 수 있고 쿠션도 엄청 푹신푹신하다. 또 좌석 앞에 터치스크린이 있는데, 거기에 카드를 꽂고 팝콘 등의 음식을 클릭하면 결제가 되면서 자리로 가져다준다. 이런 것이 상류층의 맛인가…….

*

영화가 시작되고도 하연이도 여전히 긴장하는 것 같다. 영화 때문인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인지. 두 주먹을 꼭 말아 쥐면서도 영화 화면에서는 시선을 떼지 못한다. 영화를 좋아해서 집에서는 자주 본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의 꽉 쥔 손을 슬그머니 잡는다. 아까 전 하연이의 부드러운 손길을 재차 느끼고 싶어서 그러는 건 결코 아니다.

갑자기 들어오는 손에 하연이가 놀란 듯 움찔하며 손을 빼더니 곧 내 손인 걸 알고 가만히 있는다.

-‘그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도 당신을 사랑해. 지금 이 말을 안 하면 죽어서도 후회할 것 같았어.’

-‘그렇다면 지금 당장 보여줘요. 당신이 날 얼마큼 사랑하는지!’

어떤 영화에서든 자주 등장하는 황홀할 정도의 멋진 키스신……. 그리고 흘러나오는 로맨틱 절정의 배경음악. 그 장면에 감정이입이라도 된 것일까? 하연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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