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의 눈을 떠라 --> 조금은 멋진 척하며 자리를 뜨려는데, 조금 전 쓰러뜨린 한 명이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킨다.
“이… 자식. 여길 어떻게 들어온……! 커억!”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도로 눕히긴 했지만, 이전번 적들과는 달리 몸이 단단하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정통으로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리다니……. 설렁설렁하다간 훅 갈 것 같다. 조만간 페로렌한테 기품부터 가르쳐달라고 해야지, 안 되겠다.
무기 소질 발휘를 해야 조금이라도 더 세지지…….
*
아! 저긴가 보다.
사람 10명 정도는 일렬로 누워 잘 수 있을 법한 크기의 동굴 입구가 보인다. 동굴의 벽의 날카로움 정도로 봤을 때 날붙이 따위로 깎아 만든 인위적인 동굴인 것 같다.
그 앞에는 단 한 명의 경비만이 지루한 일과를 견디지 못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아무리 제집 안마당이라지만 저렇게 허술해서야 쓰겠나?
출발해볼까?
“아아악!!!”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멀찍이 귀에 익은 비명이 들려온다. 분명 드웍프 목소린데……. 이거, 아무래도 드웍프가 잡힌 것 같다.
“으음? 뭐지 뭔 소리야?
드웍프의 비명에 동굴 앞에서 졸던 경비도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설렁설렁 걸어간다.
지금이 기회다. 아무도 없을 때 노예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어. 하지만 드웍프를 무시하면 쟨 분명 죽을 텐데……. 일반 캐릭터라면 마음 놓고 무시할 테지만, 드웍프도 하드코어 캐릭터라는 게 마음을 동요시킨다.
어떻게 하지……?
아 몰라!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동굴로 발걸음을 옮긴다.
* * *
“뭐야 이놈은?”
“어디서 나타난 놈인지 모르겠어. 이 난쟁이가 우리 무기를 빼돌리고 있길래 손목을 잘라버렸는데. 죽어도 입을 안 열더라고.”
“이거 완전 정신 나간 놈이네? 어떻게 털 곳이 없어서 우리를 털어?”
드웍프 주위로 5명의 인신매매단 일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드웍프는 쓰라린 고통을 호소하며 잘려나간 팔을 옷가지로 감쌌다. 옷은 곧 손목에서 흐르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인마. 너 어디서 왔어?”
인신매매단 일원이 손바닥 너비의 칼날을 드웍프의 턱 아래 거칠게 들이밀며 물었다. 그의 몰지각한 행동에 드웍프는 턱 밑의 피부가 잘려나가는 통증을 생생히 느껴야만 했다.
드웍프의 남은 체력은 382. 방어력도 높은 편이고 기존에 1700이 넘어가는 체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남은 체력은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 다행스러운 건 손목이 잘리고 재빨리 대처한 탓에 상태이상 출혈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대로 치료 받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죽을 수 있었다.
“너 벙어리야?”
물어오는 그의 검은 눈동자는 사악하고 모진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드웍프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비록 게임이라 할지라도 온몸이 느끼는 공포는 현실과 한치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게임을 끄고 나면 한순간 편해질 감정이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뒷골이 먹먹해질 정도로 크나큰 공포가 전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야, 이거 노예로 쓸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냥 죽여.”
그가 서슬이 시퍼런 칼을 치켜들었다. 드웍프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작은 몸으로는 도망치는 것도 막아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윽고, 드웍프의 두 눈에는 내려치는 칼의 잔상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순간……!
쨍-!
“흡?!”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저희 주인님과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하여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벡스터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드웍프의 눈앞에는 뭘이 나타나 자신을 향해 내려치는 칼을 막아내고 있었다.
드웍프는 당혹, 놀람, 감동의 마음으로 상황극을 맞받았다.
“뭘……. 크흠, 뮬린군. 나는… 괜찮네…….”
“뭐야?! 넌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인신매매단 일원은 자신들의 기지에 한 명도 아닌 두 명씩이나 외부인이 침입했다는 사실에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당혹스러워하는 인신매매단 일원과 달리 뭘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희 주인님께서는 오늘 이곳에 방문하여 직접 개인적으로 사용하실 성노예를 구매할 예정이셨습니다. 이미 그쪽 보스와는 협의가 이뤄진 사항인데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보스가 직접? 이 자식이 어디서 거짓말을……. 우리는 여기까지 사람을 불러내서 거래하지 않아!”
“이런, 이런. 일반적이라면 그게 당연한 말씀이죠. 하지만 저희 벡스터 주인님과 같은 업계 큰손들은, 언제나 예외를 만들어내곤 하시죠.”
“뭐? 큰손?”
인신매매단 일원은 큰손이라는 말에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명 복장으로 봤을 때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만약에라도 그가 큰손이 맞는다면 지금 하는 이 행동들은 보스에게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을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보스가 노예 거래한다고 얘기 들은 거 있어?”
“아니, 지금 거래할만한 노예가 딱히 없을 텐데?”
인신매매단 일원은 본인들 끼리 속닥거렸다. 그러나 뭘은 귀가 밝아지는 재능 기술 덕에 그들의 얘기를 전부 듣고 있었다.
“오늘 그쪽 보스와 최근에 잡아들인 파랑 머리 노예를 하나 거래하기로 했습니다.”
“파랑 머리? 파랑 머리 노예라면 남자밖에 없는데……. 그걸 개인 성노예로 쓴다고……?”
그는 예리한 눈으로 뭘을 쳐다봤다. 왜 남자가 남자 성노예를 구하느냐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그런 사실에 뭘은 내심 당황했다. 파랑 머리 노예 얘기만 엿들었을 뿐 그 노예가 남자라는 걸 몰랐던 탓이다. 그러나 뭘은 뻔뻔함이 극에 달한 사람처럼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벡스터님께서는 남색을 밝히시는 분입니다. 주로 수비 쪽 입장이시죠. ……비밀입니다만, 아주 ‘딥’하게 당하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그 발언에 오히려 드웍프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터트렸다.
“뭐?! 크흠, 뮬린 군! 제발 그 입 좀……. 닥쳐주게.”
얘기를 줄곧 듣던 인신매매단 일원은 뭘의 뻔뻔한 태도에 의심이 신뢰의 마음으로 바뀌어 갈 무렵. 곧 자신이 놓친 하나의 사실을 상기해 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거짓말이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데 그래?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 갈뻔했어. 이봐! 그놈은 우리 무기를 훔치다 걸렸어! 큰손이 무기를 훔치다 걸린다는 게 말이 돼?!”
칼날 같은 지적에도 뭘은 조금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물론 말이 되지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좋은 거래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들의 낡고 오래된 무기를 전부 새것으로 교체해드릴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찮은 도둑놈 취급한 것도 모자라서, 업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시는 벡스터님의 손목을 잘라내는 행악을 저지르셨지요!”
뭘의 분노 섞인 일갈에 인신매매단 일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들이 진정으로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확신이 없던 탓이었다.
주변에는 인신매매단 일원이 큰소리에 이끌려 점차 몰려들고 있었다. 드웍프는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뭘에게 눈치를 주었다.
“크흠……. 진정하게 뮬린.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후우……. 제가 다소 흥분했던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벡스터님. 일단 치료를 위해 먼저 돌아가시지요. 그럼 저희는 다음에 다시 방문해야겠군요. 이곳 보스께 전해주시지요. 오늘 일은 정말 실망스럽다고!”
뭘은 벡스터를 데리고 인신매매단 기지를 유유히 떠났다.
아니, 떠나려고 했다. 그 장소에 부대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 * *
“크흐흐흐……. 으하하하하! 재밌는 연극 잘 봤다!”
뭐지 이 불길한 웃음소리는……? 소리가 나는 곳을 둘러보니 높은 방책 위에 한 사내가 걸터앉아 시원스럽게 웃고 있다.
“얘들아…….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냐! 보스는 절대! 창고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다고! 큰손이고 뭐고 그런 멍청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라!”
그가 높은 방책에서 성큼 뛰어내린다.
“하아악!”
“영호신 형님! 괜찮으십니까?”
뛰어내리다가 발을 잘못 디뎠는지. 발목을 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뭐야 저 인간……. 개그 캐릭터야?
“아 겁나 아파!! 야. 나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쟤네나 잡아.”
영호신이라고 불린 사내의 말에 인신매매단 일원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네……. 드웍프. 뛰자!”
“예, 형님!”
나는 드웍프를 이끌고 입구를 향해 달린다. 입구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금방 나갈 수 있다.
“형님! 근데, 저 영호신이라는 사람 유저 같습니다.
“안 그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졸개들이 부르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는 유저일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이 세계에서 영호신 따위의 이름은 드물기 때문이다. 대충 하는 행동거지만 보면 4, 50대의 아저씨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더라…….
아무튼 그가 유저라면 전투가 힘들어질 수 있으니 싸움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응? 쟤들 뭐야?”
“얘들아! 침입자다! 그놈 둘 막아!”
입구 쪽에 아직 사태파악 못 하는 몇몇 일원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 움직이듯 하나둘 행동을 개시한다.
“어딜 도망치려고!”
“후읍!
지팡이를 꺼내 달려가면서 앞을 가로막는 사내에게 투척한다.
“컥!
사내는 지팡이 끝에 머리를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진다. 달려가면서 땅에 떨어진 지팡이 줍는다. 출구가 머지않다. 앞을 가로막는 두세 명의 적이 있긴 하지만, 저 정도 적은 처리할 수 있다.
“나 먼저 가서 저 둘부터 처리할게.”
“예, 형님.”
보폭이 짧아 달리기가 느린 드웍프를 두고 앞의 두 사내를 빠르게 정리한다. 치명타가 아닌 이상 한 방에 쓰러지지 않다 보니, 제법 강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두 명 정도는 가뿐하다.
“빨리 뛰어!”
“거기서!!!”
이제 코 앞이다. 뒤에 우리를 쫓는 놈들이 꽤 많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산중이기에 쫓는 게 쉽지는 않을 터.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탕!
어디선가 화약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은색의 철갑탄이 내 종아리를 뚫고 바닥에 파편을 흩뿌린다.
-‘69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태이상 ‘다리 골절’을 당했습니다.’
“커허억……!”
갑작스러운 통증에 엎어져서 그대로 바닥을 구른다.
“형님?!”
뭐야 이거……? 총……? 총도 있었어?!
고통과 당혹이 뒤엉킨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니, 영호신이라는 사내가 고풍스러운 총에 피어오르는 화약 연기를 후 불어내며 총알을 채워 넣고 있었다.
“윽! 하아……. 야, 드웍프. 너 먼저 나가.”
“하지만 형님…….”
“난 알아서 살 수 있어. 빨리 나가.”
-드웍프의 호감이 3 상승했습니다. (현재 46+++)
-드웍프의 굴복이 3 상승했습니다. (현재 62+++)
어느새 복종도가 40% 가까이 치솟은 드웍프는 내 말을 거역하지 않고 따라준다. 아니면, 도망치라는 명령이라 들은 건 아니겠지?
나는 생명력 회복을 도와주는 말린 고기를 뜯으며,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본다.
말린고기를 먹고 곧 있자 피가 가득 차오른다. 역시 사 오기를 잘했다. 매번 까먹고 있다가 요 앞마을에 들렀을 때 보이기에 샀는데 바로 써먹을 일이 생길 줄이야…….
특제 말린 생선의 효과와는 약간 다르지만 1분에 체력이 100씩 차오르는 효과로 1분마다 내 피를 풀피로 만들어준다.
“이야, 넌 뭔데 다리가 금세 회복되는 거냐? 방금 뭐 먹은 거야?”
영호신이 신기한 걸 봤다는 눈치로 물어온다. 그의 주변엔 인신매매단 일원 수십 명이 양아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껄렁거리는 모양새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체력은 가득 찼지만 상태이상 골절 덕분에 움직이는데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있다. 다리 골절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움직임이 많이 제한 될 것 같다.
“얌전히 항복해라. 목숨만은 살려줄게.”
영호신이 총구를 만지작거리며 얘기한다.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쏴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전해진다.
우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공격권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의 요구대로 양팔을 들며 항복 의사를 밝힌다.
“묶어라, 얘들아.”
“예,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