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42화 (42/147)

<-- 노예상인 제의 -->                               “아니 형님, 저 진짜 진지하다고요. 말씀해주세요. 그때 저한테 거신 마법 뭐에요? 사랑에 빠지게 하는 마법이에요?”

아무래도 각인 효과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확실히 유저라도 무의식중에 뭔가를 느끼긴 하는 모양이다.

“너 혹시 로그아웃했을 때도 그래?”

“모르겠어요. 그때는 아닌 것 같긴 한데……. 로그인만 하면 형님 얼굴이 아른거려서 돌아버리겠습니다. 형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조건 따라야 할 것 같고, 어기면 죄책감이 심하고, 형님이 저번에 약속 장소로 나오라고 하셨을 때도 전 계속 나갔어요. 형님이 안 나오셨을 뿐이지. 돈도 계속 보내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곳이 있어서 못 보낸 거고요.”

얘가 하는 말이 정말인가……? 워낙 많이 속아서 이제는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드웍프는 확실히 아는 게 많고 쓸만한 구석이 조금은 있다 보니 내 팀으로 만든다고 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비밀을 밝혀서 아예 각인을 시험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할까?

아까 콤비 맞춘 것 때문에 복종 수치도 조금 오른 것 같고, 어차피 이거 알려준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을 테니……. 그래. 조금은 말해주자.

무엇보다 얘가 나를 사랑하는 걸로 착각하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싫으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때 너한테 마법 건 거 맞아. 정확히는 사랑이 아니라 복종하게 하는 마법. 그러니까 행여나 나 좋아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역시 맞았군요! 근데, 복종이라니……. 그거 엄청 사기 아닙니까? ”

“뭐 대충 너도 느껴봐서 알겠지만 100% 말을 듣진 않아. 인위적인 복종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복종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이 기술 써본 지 얼마 안 돼서 잘은 모르겠지만…….”

“자연스러운 복종이라…….”

드웍프는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 그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고막까지 전달되고 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러는 거야?

곧 그가 결심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형님. 오늘부터 제가 형님의 뇌세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웬 뇌세포 타령이야?”

“형님의 그 사기적인 능력을 제가 몸소 느껴본 바로는 굉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 능력을 개화시키면 진짜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요! 형님 혹시 이 게임 하시면서 최종 목표가 뭐에요?”

“목표? 그런 거 없는데.”

언제부턴 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게임을 하는데 굳이 목표 같은 게 필요할까? 그냥 재밌으니까 하는 거지. 어차피 회사 때려치우고 1년은 팍 놀기로 한 이상.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드웍프는 소금 한 줌 집어먹은 사람처럼 인상을 팍 쓴다.

“형님! 그거 좀 실망인데요. 남자라면 한 가지를 하더라도 목표가 있어야죠. 랭킹 1위가 된다든가. 게임 돈 팔아서 현금 부자가 된다든가. 아니면 그 능력으로 이 세상 모든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뭐 그런 거 없어요? 정말로?”

뭐 확실히 목표를 세우면 재밌긴 해도 그 목표에 너무 빠져들까 봐 일부러 세우지 않았다. 나는 진짜 제대로 된 목표를 설정하면 작정하고 빠져드는 사람이기에 언제든 현실로 돌아올수록 내 나름의 방책을 세운 것이다.

그러한 성격 덕분에 한때 파고든 게임의 몇몇은 랭커라는 부류에 들기도 했지만 끊을 때는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그 정신적 고통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다.

“뭐 일단은 하고 싶은 거야 있긴 한데. 목표는 아니고 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그 정도?”

“흠……. 그럼 형님, 이렇게 합시다. 제가 제안 하나 할게요. 형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가 알고 있거든요? 잠깐 귀 좀…….”

*

“노예상으로 돈 벌기라…….”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드웍프의 제안을 생각하며 걷고 있던 내게 페로렌이 물어온다.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지만, 드웍프의 제안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드웍프는 나의 재능을 살려 노예상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단순히 노예를 사다 파는 것이 아닌 키워서 파는 것.

아직 많이 퍼지지 않은 정보지만, 노예상은 이 세계에서 황금 노다지 수준의 돈벌이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이미 몇몇 사람들은 현실에서 집 몇 채는 살 정도로 벌어들였다고 한다.

아마 막스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지? 진짜 크게 벌이면 사업 수준으로 넘어갈 만도 하겠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듯이. 목표가 없던 나지만 드웍프의 제안에는 제법 귀가 뜨인다.

그간 일하면서 벌어둔 돈도 월세 내랴 관리비 내랴. 밑 깨진 항아리처럼 이쪽저쪽에서 쏙쏙 빠져나가서 막상 1년 놀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실상은 6개월도 못 놀고 다시 일을 시작할 것 같기 때문이다.

“뭘, 어디 가?”

페로렌은 커다란 여관 앞에서 나를 부른다.

“응? 아…….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하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터라 날은 어느새 어스름히 저물어 있었다. 결국, 큰 도시로 떠나는 건 미루고 우리는 가까운 톨로프 마을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나는 안 쉬고 그냥 가도 상관없었지만, 페로렌은 말은 안 해도 첫 여행이 힘든 모양이라 배려 차원에서 내가 먼저 쉬어가자고 했다. 그 덕분에 톨로픈의 이쁜 경치도 구경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급할 필요 없지.

드웍프는 잠깐 어디 좀 갔다 온다기에 보내줬다. 어차피 이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도망가진 않을 것 같다.

나는 여관 앞의 페로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그나저나 아가씨 꽤 제법인데요?”

“뭐가?”

“전 솔직히 아가씨가 돌아다니는 동안 계속 칭얼거릴 줄 알았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잘 참고 힘든 것도 잘 견뎌 내시는 거 보고 속으론 감탄했네요.”

“흥, 수행원 따……. 하아……. 너한테 칭찬받자고 그러는 거 아니 거든?”

그녀는 이 상황이 익숙지 않은지 아직은 수행원이라는 단어가 습관처럼 튀어나온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저택을 떠나오기 전 그녀에게 말을 놓겠다고 선언했음에도 어떨 땐 존대했다가 또 어떨 땐 말 놨다가……. 주체 없이 왔다 갔다 한다.

그새 습관이 들어서 존대하는 게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러고 있으니 군대 제대했을 때, 말투 때문에 고생했던 생각이 나네…….

*

“하룻밤 기준, 개인실은 10만 셀, 다인실은 30만 셀, 귀족실은 50만 셀입니다.”

작은 마을에 있는 여관 치고는 시설이나 외관이 웬만한 리조트급이라 가격도 꽤 비싸다. 톨로픈 마을이 알려지지 않은 휴양지인 모양이라. 비싸더라도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것 같다.

어쩐지 마을 경치가 끝내주더라니…….

나는 최대한 저렴한 것으로 하고 싶었으나, 개인 욕실이 딸린 것은 오직 귀족실 밖에 없었기에 페로렌을 위해 결국 피눈물을 흘리며 결제했다. 오늘 해적 잡아서 번 현상금을 전부 날린 셈이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오면서 페로렌이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50만 셀을 돌려주더라. 이렇게 바람직한 여인이었나? 갑자기 적응 안 되네…….

생각해보니 페로렌은 가지고 나온 돈도 얼마 안 될 텐데, 저거 다 떨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간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건가?

*

분명 귀족실은 2인실이라고 들었건만, 왜 침대가 하나뿐이냐……. 침대가 초대형 킹사이즈라 2인실이라고 했던 건가……? 페로렌에게 어떻게 할지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 소파를 가리킨다.

그리고는 본인은 즉시 욕실로 향한다.

그래, 난 안 그래도 소파에서 자려고 했어. 그걸 재확인한 것뿐이라고. 난, 정말 괜찮아. 비록 50만 셀짜리 최고급 귀족실을 빌려서 소파에서 잔다고 해도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소파도 널찍하니 좋고……. 만족해.

나는 만족스럽다고…….

웬만한 싱글침대 크기의 넓은 소파에서 푹신함을 체험하며 이불을 까는 와중, 페로렌이 욕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조용히 나를 부른다.

“저기……. 나 좀 도와줘야… 겠는데…….”

목욕 도와달라는 얘긴가? 애도 아니고 정말…….

“네, 갑니다.”

분명 설레야 하는 게 맞는 상황이지만, 이미 한번 해보기도 했고 익숙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담담한 느낌이다.

페로렌은 핏줄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뽀얀 피부의 나신을 수건으로 둘둘 감고 빈 욕조 앞에 머뭇머뭇 서 있다. 씻는 걸 도와 달라는 게 아니었구나. 김칫국 마셨네.

아무래도 물 트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확실히 저택과는 물 트는 방법이 달라서 나도 헷갈리는데…….

솨아아-

“아 됐다. 그럼…….”

물을 틀어주고 나가려는 찰나. 그녀의 한마디가 내 발을 붙든다.

“너도 씻어.”

“예?”

“냄새나니까. 너도 지금 같이 씻으라고.”

“저는 아가씨 씻고 나면…….”

“하아, 진짜……. 혼자 목욕하기 싫으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그러더니 그녀가 성큼 다가와서는 내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큰일인데 이거……. 그러면 안 되는데……. 왜 설레기 시작하는 거지?

“아래는 네가 알아서…….”

그녀는 내 바지만을 남겨 놓고 커다란 욕조로 돌아가 몸을 담근다.

*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그에 따라 내 정신도 모락모락 피어 흩어진다. 그녀와 나는 현재 등을 돌리고 있다.

저번엔 분명 견딜 만했는데 알몸 상태라 그런가? 왜 이렇게 몸이 민감해졌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내는 작은 물소리 하나에도 내 소중이는 산호초처럼 딱딱하게 솟아오른다.

아무 말이나 좀 해야겠다.

“아가씨 집에는 언제쯤 돌아가실 거예요?”

“왜? 돌아갔으면 좋겠어?”

왜 하필 해도 이런 소리를 했을까…….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 생활은 아가씨랑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오늘만 해도 목숨이 위험할 뻔했잖아요?”

“미안하지만, 네가 돌아가라고 해도 나 안 돌아가……. 이번 모험에 따라오려고 결심했던 거. 너한테는 한낱 고집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로선 인생을 바꿔 보려는 큰 도전이니까.”

페로렌 말대로다. 평범한 부잣집에서 살아온 그녀의 입장에서 이번만큼 큰 인생의 전환점은 없겠지. 하지만 그런 그녀가 왜 앞길 창창한 미래를 버리고 인생을 바꾸려 하는 걸까?

“나 있잖아. 사실 우리 할아버지가 무척 싫었어.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돈도 싫고, 할아버지 때문에 내게 주어진 이 삶도 싫었어. 언제나 혼자였던 나를 내버려 두고 매번 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정말 싫었어.”

나는 조용히 몸을 틀어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옆으로 몸을 돌린 채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주변의 걱정, 우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세공사가 아끼는 손녀라는 기대조차 나한텐 너무 큰 짐이었어……. 위대했던 할아버지와 다르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철부지일 뿐이니까.”

그래, 작은 소녀가 감당하기에 그런 기대와 걱정은 너무 무거운 왕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장신구가 도난당했단 소리를 들었을 땐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어. 그것만 없으면 더 이상 할아버지의 손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거든. 참 바보 같지……?”

그녀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운명이란 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결심한 거야. 모험을 떠나기로. 할아버지처럼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것을 겪다 보면 나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가 무릎을 안고 웅크린 자세로 고개만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본다. 여탕을 훔쳐보다가 들킨 아이처럼 부끄러운 마음에 잽싸게 고개를 돌린다.

“사실 나, 네가 내 목걸이 갖고 있는 거 알고 있어.”

“예?!”

페로렌의 입에서 나온 말에 등골이 서늘해져서는 다시금 그녀를 쳐다본다. 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에 그녀는 그저 재밌다는 듯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 그 미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내 심장은 벌렁벌렁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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