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씨! 소원을 들어주세요 -->
“꼼꼼히 칠해. 등에 네 더러운 땀이 잔뜩 묻어서 피부가 썩어가는 것 같으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어쩜 이렇게 주옥같으신가 몰라.
그나저나 참 오묘한 기분이다. 페로렌에게 비누칠을 해주고 있다니…….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이 상황……. 이것도 각인의 효과인가? 한번 시험해볼까?
“잠깐 일어나 봐요.”
“어? 왜?”
그녀는 되물으면서도 마지못해 일어난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거긴 내가 해……!”
엉덩이까지 조물조물 비누칠하자 급히 몸을 빼며 손을 쳐낸다.
“가만히 있어요. 혼자 해본 적 없어서 제대로 못 하잖아요.”
그러나 내 말에 곧 얌전한 고양이처럼 엉덩이만 뽈록 내민 채 가만히 있는다. 평소 같았으면 ‘수행원 따위가 감히 누구한테 명령이야?’라는 말을 남겼을 테지만…….
“읏……! 수행원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명령 질이야?”
아, 그런 말 남기는구나……. 그래도 그녀의 자그마한 엉덩이는 내 명령에 순순히 따라준다.
“혼자 목욕하는 건 서투르니까 이건 내가 닦으라고 명령하는 거야. 아까처럼 기어오르는 행태는 절대 용서 못 해.”
그렇다고 한다. 어련하실까요. 정말.
“그럼요. 아깐 제가 돌았나 봅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자……. 그럼 이쪽 보세요.”
“으……. 앞에는 내가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돌아본다. 페로렌은 자신의 가슴과 중요 부위를 가린 채, 천장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음……. 으…….”
한 손에 들어올 법한 그녀의 가는 목부터 작은 어깨, 작은 팔 그리고 그녀의 작은…….
“가슴에서 손 내려봐요. 닦아줄 테니까.”
“여긴 정말 내가…….”
“숨길 게 뭐 있어요? 목욕일 뿐인데. 빨리 내려요. 이상하게 안 볼 테니까.”
“므으…….”
그녀가 마지못해 손을 내린다. 정말 말을 잘 듣는다. 각인의 효과가 코볼트 족장처럼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다.
차라리 이건 이 나름대로 괜찮아 보인다. 완전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인간성을 유지하면서 복종하니 사람 냄새도 나고 좋구나.
“음… 읏……. 간지러워. 거긴 적당히 해.”
이쁜 쇼트케이크의 생딸기처럼 얹어진 그녀의 열매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그녀가 상체를 옴직거린다.
“색깔이 참 예쁘네요. 이렇게 이쁜 색은 본 적이 없어요.’
“색이 뭐가 중요해? 크기가 중요하지…….”
그녀는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가슴을 숨긴다.
“에이, 색상이 시각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데요. 크기가 미적 가치에 영향을 준다면 색은 예술적 가치에 영향을 준다고요. 희대의 예술가들도 색을 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잖아요? 저는 이렇게 이쁜 색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예술이라고요.”
“으음……. 흠. …그래? 남자가 보기에……. 그렇게 이뻐 보여? ”
“그럼요. 모든 남자를 대표해서 감히 말씀드리는데, 정말 예뻐요. 자부심으로 여겨도 좋을 만큼…….”
그녀가 부끄러운 듯 숨기던 가슴을 조금은 자랑스레 내밀며 잘난 듯 떠든다.
“흥, 뭐, 당연한 거지. 내 몸에 못난 곳은 없으니까.”
참 알기 쉽다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죠. 그럼 아래, 손 좀 치워주실래요?”
“뭐……?”
“아래도 닦아야죠. 손 치워주세요.”
“여긴 안 돼!”
페로렌이 몸을 돌린다. 이 정도 수위는 또 저항하는 건가?
“안될 게 뭐가 있어요? 빨리 손 치워요.”
“안된다면 안 돼! 이제 목욕 끝낼 거니까 나가서 기다려!”
끝까지 보채다가 결국엔 쫓겨난다.
-페로렌의 애정이 1 상승했습니다. (현재 1+)
-페로렌의 헌신이 1 상승했습니다. (현재 1+)
각인점수가 올랐다. 헌신이야 명령 수행으로 올랐다 치지만, 애정은 왜 오른 건지 모르겠네……. 스킨십이라 오른 건가? 일단 나가서 기다리자.
* * *
뭘을 내보낸 페로렌은 자신의 중요 부위를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펴며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손엔 수돗물과 다른 성분의 물이 흥건히 묻어있었다.
‘하아……. 들킬 뻔했잖아……. 수행원 앞에서 부끄럽게 실금이라니…….’
분명 소변과는 다른 감촉일 테지만, 그 사실을 깨닫기에 페로렌은 경험이 한참 부족했다. 페로렌은 자신이 남긴 부끄러운 흔적을 숨기기 위해 잽싸게 물을 뿌려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 * *
“정말입니까?! 정말 풀어 주신다고요?”
“두 번 묻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학습 능력이 그렇게 떨어져? 풀어준다니까?”
심장을 푹푹 쑤시는 독설을 듣는데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각인 이거 정말 좋은 기술이었네!
묶어놓고 강제 희롱해도 돌벽처럼 굳건하던 마음을 단번에 바꿔놓다니……. 역시 각인은 최고의 마법이었어.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네, 말씀하세요.”
풀어준다는데, 어떤 조건을 못 들어줄까? 훔쳐간 장신구 1시간 내로 찾아오라는 거지 같은 조건만 아니면 다 들어줄 수 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연다.
“나도 데려가.”
“아, 뭐 그 정도야……. 가 아니라 예? 어딜요?!”
잘못 들은 거겠지? 나도 데려가라니? 올 때 메론바 사 오라는 소리를 잘못 말한 건 아닐까?
“너 모험 떠나는 곳. 나도 데려가라고.”
이 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인가……. 여행이야 물론 혼자보단 둘이 재밌고, 둘보단 넷이 재밌고 그렇지만, 모험은 여행과 다르다.
앞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어떤 상황과 마주할지 나조차도 모르는데, 거길 따라가겠다고?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온 아가씨가? 대체 날 얼마나 괴롭힐 생각인 거야 이 여자는…….
“아가씨. 뭔가, 착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저 여행이 아니라 모험 가는 건데요?”
“알고 있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요?”
“그 정도 각오는 이미 했어.”
“아가씨 지저분한 거 못 참잖아요. 그런 게 천지에 깔렸는데.”
“참아보도록 노력할 거야.
“전 비도덕적인 일 막 하고 다닐지도 몰라요.”
“언제는 도덕적이었어? 괜찮아.”
배드민턴 국가대표라 해도 말을 이 정도로 잘 쳐내진 못할 것 같다. 후우……. 아 또 두통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싫으면 관두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랬다간 풀어주는 것도 무효로 할 거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데려가야지……. 하루만 데리고 다니면 지쳐서 돌아가겠지.
부디 그랬으면…….
*
별수 없이 그녀와 함께 떠나기로 한 뒤, 테드의 방에서 다시는 하고 싶지 않던 단독 대면을 하고 있다. 지금 내 앞에는 향이 좋은 녹차가 놓여있다. 홍차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차 향이 참 좋군.”
앞에 앉은 테드는 날이 차갑게 선 눈매로 나를 쳐다본다. 조금 전까지 살벌하게 싸웠던 터라, 묵직한 톤에 기가 눌려 앞에 놓인 차를 들기가 어렵다.
“왜 아가씨가 갑자기 마음을 돌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가씨가 너를 옹호하기 위해 했던 말이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날 선 눈매가 조금은 온화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아가씨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구나.”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는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더군. 너를 따라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이야……. 아가씨의 조부인 페론드 준남작께선 살아계실 적 항상 긴 여행을 다니곤 하셨다.”
그는 찻잔을 둥글게 문지르며 과거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그 때문에 아가씨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긴 여행 끝에 준남작께서는 항상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셨지. 아가씨가 잠들 무렵이면 언제나 아가씨 곁에서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려주곤 하셨거든?”
그가 옛 생각에 잠겨 가볍게 웃음 짓는다.
준남작께선 언젠가 아가씨가 성년이 되면 함께 여행 다니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 결국,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었지만…….”
과거 생각에 웃던 그의 표정에 곧 씁쓸한 미소가 어린다. 그의 시선이 내 눈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뭘. 아가씨를 지켜다오. 지금까지는 네 상급자로서 명령만 내렸지만……. 이번만큼은 부탁이다. 아가씨의 보좌관으로서가 아닌. 그간 아가씨의 성장을 지켜봐 온 아버지의 마음으로…… 네게 부탁하는 것이다. 부디……. 아가씨를 지켜다오.”
그가 페로렌을 생각하는 마음, 그것은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던 어떤 판단을 내리던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는 진정한 아버지 같은 존재.
단지 그는 어느 날 떠맡은 작은 아이를 바르게 키워 낼 수 있는 경험이 부족했을 뿐, 훌륭한 아버지로서 할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생각한다.
테드는 잠시 후 뒤편에서 기다란 상자 하나를 가져와 내게 건넨다. 상자를 열어 보니 척 봐도 품격 있어 보이는 지팡이 하나가 들어있다.
[신스메이너]
공격력: 78 (75~80)
내구력: 50/50
요구 레벨 1 / *요구 기품 1
희소성: 고유
〈소질〉
-통증의 메아리 *사용 불가 기품 부족
해당 무기로 적 대상에게 피해를 주면, 1초 후 동일한 피해를 줍니다.
-뼈아픈 타격 *사용 불가 기품 부족
해당 무기로 주는 관절 피해가 2배 증가합니다.
-꼬마 장군
해당 무기의 요구 레벨과 모든 요구 능력치가 1로 고정됩니다. 해당 소질은 특수 능력치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내용〉
페로렌이 특별 주문 제작한 세상에 하나뿐인 지팡이. 매드 펄마이나 광산에서만 캘 수 있다는 신비로운 광석 ‘신스’를 이용해 만든 지팡이다. 가볍고 단단한 강도가 특징.
고, 고유 아이템?! 무려 희귀 아이템보다도 한 단계 높은 아이템이다. 특히나 저 무기 소질이라는 건……. 무기에 내재된 능력인가 본데, 효과가 가히 사기 수준이다.
꼬마 장군 이라는 소질 덕분에 이런 사기 무기를 1레벨에 낄 수 있다니. 완전 내 맞춤형 무기가 아닌가! 1무기 주제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다만 일부 효과들은 기품이라는 특별 능력치가 필요해서 먼저 그 능력치부터 얻어야 할 것 같다. 가만, 페로렌 한테 기품이 있었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그 지팡이는 아가씨께서 내 생일선물로 미리 준비해두신 거라고 하시더군. 그렇지만……. 아무래도 네가 갖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내게는 아가씨께서 처음으로 선물해주신 지팡이가 있으니까.”
테드는 페로렌이 쓰레기통에 던졌던 지팡이를 다시 가져와 사용하고 있었다.
“이건 아가씨께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군.”
그가 자신의 지팡이를 정성껏 손질한다. 분명 페로렌이 알면 난리를 피울 것 같긴 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물건이니, 페로렌의 입장에선 용납이 안 될 일이지…….
비밀로 해달라는 거 보면 아무리 테드라도 그녀에게 혼나는 건 싫은 모양이야.
*
드디어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페로렌의 대저택 앞에서 작별을 고한다.
“아가씨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테드의 배웅에 페로렌은 말없이 테드에게 다가가 포옹한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포옹이라는 게 느껴진다. 테드도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테드. 나 돌아올 때까지……. 항상 건강해야 해?”
“알겠습니다. 아가씨. 이번 여행에서 부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십시오. 전 항상 이곳에 있겠습니다.”
“응…….”
페로렌의 작별인사가 끝나자 테드가 나를 바라본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만에 하나 아가씨에게 큰 변이 생긴다면, 그땐 아가씨가 말리시더라도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왜 나한테는 끝까지 경고만 하는 것인가…….
“너를 믿겠다.”
그의 마지막 말에서 나를 깊게 신뢰할 거라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말로 못 박을 만큼 자신이 있지는 않아서 말이다.
나는 테드가 준비해준 말 한 필에 올라탄다. 안장에는 페로렌의 짐 한 보따리가 매달려있다. 여행이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책에 옷에 이것저것 산더미처럼 쌓아놨다. 오죽하면 말이 다 불쌍해 보일 정도니…….
최대한 줄인 게 이 정도라 더 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이제 갑니다. 안녕!”
페로렌이 뒤에 올라타고 드디어 출발한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수행원의 생활이 이제 막을 내린다. 그간 얻은 건 조금이고 잃은 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생활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위해 가보자꾸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