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36화 (36/147)

<-- 아가씨! 소원을 들어주세요 -->                               “므으, 흐윽…….”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뚝뚝 떨구어낸다. 끝내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테드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잘 알았습니다. 아가씨.”

테드가 천천히 일어나서 허리춤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든다.

그가 단도를 돌려 잡는다. 저 자세는 그가 단도를 던질 때 잡는 자세다. 이런 젠장……. 레벨업……! 레벨업이라도 해서 버텨야 해!

-‘형언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 당신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게임 진짜! 레벨업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그가 움직인다. 곧 단도가 날아들 터.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는……! 나는 창문을 깨고 몸을 던진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내 몸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 와중에도 두 눈은 최대한 피해를 경감시킬 만한 곳을 찾는다.

연못이다. 저기로 잘만 떨어지면…….

“크아윽!!

-‘죽음을 1회 견뎌냈습니다.’

2층 높이라고는 해도 꽤 높아서 고통이 상당하구나. 작은 연못에 떨어졌는데도 죽을 정도의 피해를 보았다. 그렇지만 살았으면 됐어.

“크흐윽…….”

아파도 참고 도망쳐야 해. 그가 내려오기 전에…….

그런데…….

풍덩-!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테드가 내 앞을 막아선다.

하아……. 나는 왜 이 괴물 같은 할아범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이젠 정말 망했다…….

*

나는 이 저택의 잘 쓰지 않는 구석의 방으로 잡혀 들어왔다. 내 바로 옆 의자에는 테드가 데려왔던 괴생명체가 앉아있다. 코와 귀가 여우처럼 뾰족하고 눈은 당구공처럼 크다. 그 생명체는 테드에게 잡혀 온 이후부터 줄곧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테드는 우리를 내버려 둔 채 홀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홀로 독백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리고 혼자가 되는 것에 익숙하시다. 아가씨의 부모님은 아가씨가 세상을 인지하기 전 괴한에게 살해당하셨고, 페론드 준남작께선 아가씨가 11살이 되던 해 병으로 세상을 뜨셨지.”

테드는 자리를 옮겨 뜨거운 물과 찻잎이 놓인 테이블로 향하며 말을 잇는다.

“그간 겪어온 일들은 여린 아가씨가 견뎌내기엔 너무나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가씨 마음에 독으로 쌓여 마음속 큰 병을 만들었지. 아가씨가 타인에게 모질고 독하게 행동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주전자에 찻잎을 떨어뜨려 차를 우려낸다.

“지난날 감정 없는 기계처럼 살아온 내게, 아가씨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자만과 남 위에 올라서는 법만 알던 내게 아가씨를 보좌해 온 날들은 겸손과 멈춰 서는 법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었지.”

그는 갓 우려낸 뜨거운 홍차를 찻잔에 쪼르륵 따라낸다. 주전자를 든 자세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아가씨를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도록 노력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내겐 아가씨를 보살필 자격이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만 갖고 있었을 뿐 아가씨의 병을 낫게 해주는 데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지.”

그는 따라낸 찻잔을 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래, 평생을 칼만 잡아 오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아가씨의 마음속 깊은 병을 고쳐줄 방법을 알지 못했어. 그래서 자네를 내 후임자로 두면 어떨까 생각했다. 나와는 다르게 살아온 자네라면 그 방법을 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내 앞에 홍차가 놓인다. 그리고 그가 마주 앉는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여태까지 내가 했던 행동 중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어. 이 믿지 못할 작은 집요정의 말만 듣고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다니…….”

테드의 시선이 내 옆에 앉아있는 생명체에게 향한다. 그가 바로 전에 말했던 집요정인 듯하다. 테드의 냉철한 시선을 받은 집요정은 귀가 파르르 떨리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저,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저, 정말이……!”

푸욱-! 갑작스러운 테드의 공격.

고급스러운 테드의 지팡이가 집요정의 폐부를 관통해 들어간다.

“께, 께게에에엑……!”

“이 미래는 읽지 못했나 보군…….”

주요장기가 꿰뚫린 집요정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죽어간다.

“께겍에엑…….”

깊게 박혀든 지팡이를 쑥 빼내자 테이블은 집요정이 내뿜은 피로 붉게 물든다. 집요정은 커다란 눈망울에서 구슬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힘없이 바닥으로 엎어진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래도, 조금 더 자세한 미래를 알고 말했어야지.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일수록 그 대가가 무거운 법이거늘.”

테드는 죽어가는 집요정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손수건으로 지팡이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지금까지 보고 느끼던 테드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가 이토록 잔혹하고 무서운 존재였던가? 페로렌과 관련된 일에 열성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 거라고는…….

그는 지팡이를 손질하며 내게 말한다.

“이번 일로 너에게 화를 내진 않겠다. 모두 내 실수이니 화를 낼 가치도 없지. 하지만 처음에 분명하게 말했을 것이다. 아가씨를 욕보이는 언행을 했다간 어떤 이유에서든…….

그가 지팡이를 바닥에 사뿐히 찍으며,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다.

“참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는 홍차를 내 앞으로 더 가까이 밀며 말한다.

“차가 식겠군……. 음미해라. 시간은 딱 10초 주겠다. 그동안 남은 생을 만끽해라.”

이런 상황에서 홍차가 입에 들어갈 리 없다. 더군다나 입에도 안 맞는 홍차를 억지로 마셔줄 생각도 없다.

“7초 남았다. 5, 4…….”

줄어드는 생존 시간에 반강제적으로 인벤토리에서 장검을 꺼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한다.

나는 간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긴장하는 반면, 무기를 빼든 내 모습을 보고도 테드는 그저 태연하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살짝 피하면 한 방에 죽지는 않을 거야.

“3.”

먼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면?

“2.”

아니야, 이 영감한테 그게 통할 리 없어.

“1.”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이길만한 길이 안 보여. 일단은 선공이다.

“흐읍……!”

이쪽에서 장검을 먼저 내지른다. 그러나.

팽-! 단 한방으로 장검이 내 손에서 이탈하며 공중에서 빠르게 회전한다. 곧바로 그의 지팡이가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온다.

쐐액-! 바로 그때……!

“멈춰! 테드!!!”

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던 장검이 떨어지며 방바닥에 푹 꽂힌다.

“허억…….”

테드는 내 목을 겨눈 채, 방안에 들어온 페로렌에 의해 행동을 멈췄다. 그녀가 0.1초만 더 늦었어도 내 목에는 구멍이 뻥 뚫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골이 다 송연해지는구나.

“아가씨.”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테드는 급히 테이블보를 끌어당겨 집요정의 시체를 덮는다. 페로렌은 화난 얼굴로 테드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그의 뺨을 짝-! 때린다.

“내 집에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러? 지금 제정신이야?!”

“죄송합니다. 아가씨.”

페로렌의 분노를 테드는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그걸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광경이다. 여태까지 생활하면서 테드가 맞는 장면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지팡이 이리 내!”

테드는 군소리 없이 그녀의 말에 따른다. 저 지팡이는 아마 페로렌이 처음으로 테드에게 선물한 지팡이 일터.

지팡이를 받아든 페로렌은 그걸 그대로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다. 테드는 그녀의 앞에 고개 숙인 채 있을 뿐이다. 말없이 묘한 긴장의 시간만이 흐른다.

한숨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힌 페로렌이 나를 잠시 보더니 다시 테드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깐 경황이 없어서 말 못 했는데 테드가 오해한 거 맞아! 뭘의 말대로 내 옷에 벌레가 들어갔고, 뭘이 그걸 떼어주려고 했던 것뿐이야. 마침 그 장면을 테드가 우연찮게 목격한 거고.”

페로렌은 식탁보로 덮여있는 집요정을 보더니 인상을 쓰고는 이내 시선을 돌린다.

“후우……. 오늘 테드가 보여준 행동. 절대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날 위해 그런 거라고 생각해서 한 번은 넘어갈 거야. 다신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해줬으면 좋겠어. 이 방은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넌 잠깐 나 좀 봐.”

*

페로렌의 명령으로 현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테드를 두고 우린 그 방을 나왔다.

그녀가 갑자기 왜 나를 옹호했을까? 현재로선 각인의 효과가 발휘됐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데…….

그녀의 뒤를 따르는 동안 조용히 그녀의 각인정보를 확인한다.

이름: 페로렌/ 레벨: 11 / 몸 상태: 약간 지침

직업: 장신구 세공 견습생

체력 290 마력 360

힘: 7 / 민첩: 10 / 지력: 36 / 건강: 12

기품: 5

기분: 단순하게 생각할래…….

〈각인정보〉 1차 각성

호칭: 없음

호감: 67(+) /애정: 0 /헌신: 0 /굴복: 63(+) = 복종: 32.5%

〈신체 정보〉

키: 155cm

가슴: 69cm / 밑가슴 60cm / 허리 52cm / 엉덩이 79cm

〈기교〉

세공지식(4), 보석감정(MAX)

장신구 세공 견습생? 놀고먹는 줄 알았더니 직업이 있었어? 참, 뜻밖이다. 하기야 할아버지도 세계 최고의 세공사라 했고 매일 보는 책도 그런 류의 책이니, 전혀 뜬금없는 부분도 아니구나. 기교도 그런 쪽으로 발달 된 것 같고…….

그녀의 복종도는 현재 32.5%. 같이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 그런가, 호감이나 굴복 점수가 드웍프보단 확실히 높게 잡혀 있다. 찾아보니 복종이 30%가 넘으면 명령 복종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근데 잠깐……. 페로렌을 따라서 방에 들어온 것까진 좋은데, 왜 거길 들어가는 거야? 할 말 있던 게 아니었나?

내가 멈춰 서자 그녀가 홱 돌아본다.

“뭐해? 안 들어오고?”

들어오라고?

“할 말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거긴 욕실인데…….”

금남의 구역. 세면대에 물 받아 놓을 때가 아니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 그녀가 나를 끌어들인다.

“누가 몰라? 너 때문에 온몸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와. 씻으면서 얘기하려고.”

혹시나 이 장면을 테드가 또 보게 되면 어쩌려고…….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

“하아……. 좀 낫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귓가에 철렁거리는 물소리가 그윽하게 들려온다. 눈을 뜨면 죽이겠다는 페로렌에 말에 눈은 꼭 감고 있다.

그런데 그게 더 고역이다. 시각을 차단하는 바람에 여자와 욕실에 있다는 느낌만 부각돼서 모든 감각이 더 예민해진다. 빨리 아무 말이라도 꺼냈으면…….

시한폭탄 째깍대듯 초조함의 시간만 흘러가던 중,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연다.

“만약, 내가 널 풀어준다면……. 앞으로 뭐 할 거야? 솔직하게 말해 줘…….”

“일단은 우올로 한대 사서 모험이나 떠나보려고요. 사냥도 해서 돈도 벌고, 세상 구경도 하고…….”

물소리가 잠깐 멈춘다. 욕조에서 그녀가 일어나 뭔가를 가져오더니 다시 들어간다. 이후 비누칠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거 정말이야? 다른 사람의 하인으로 가려는 건 아니고?”

“제가 미쳤습니까? 그거 싫어서 나가려는 건데? 아……. 뭐, 아가씨가 싫다는 건 아니고…….”

“음……. 뭐, 솔직히 남 떠받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 정도는 이해해.”

혹시나 안 좋게 받아들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렇진 않은가 보다. 그새 철든 거야? 아니면…….

“손 내밀어 봐.”

그녀가 말하는 대로 손을 내밀자 곧 내 손에 무언가 쥐어진다. 미끌미끌한 이 감촉.

“비누?”

“등에 칠해 줘. 다른 곳 보지 말고… 등만 봐.”

눈을 뜨니 페로렌의 새하얀 등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등으로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앞으로 정리해 넘기고는 내 비누칠을 기다린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등에 정성스레 비누칠해간다.

“음…….”

체구가 정말 작구나. 손바닥에 비누를 묻혀서 쭉 훑어내리기만 해도 등의 대부분을 칠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체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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