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34화 (34/147)

<-- 아가씨! 소원을 들어주세요 -->                               다음 날 아침.

어젯밤 그녀와의 격렬한 정사 이후, 그녀의 제안은 결국 거절했다. 단물만 빨아먹고 튄 쓰레기가 된 것 같아서 조금 꺼림칙하지만 내게도 생각해둔 시나리오가 있기에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미란델은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눈빛이었지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든 필요하면 와도 된다고 하니 든든한 대피처가 하나 생긴 것 같다.

미란델은 떠나는 나와 페로렌을 배웅하고 있다.

“페로렌, 이렇게 일찍 가서 아쉬워…….”

어제는 친구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더니 페로렌 앞에서는 또 절친 행세다.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정말 무섭다.

“근데 미란델 영애……. 거기는 갑자기 왜 그래? 어젠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페로렌이 미란델 영애의 드러난 쇄골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녀의 쇄골에는 빨갛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저기는 분명……. 내가 어제 무심코 빨았던 곳이다. 설마 저렇게 티가 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 조금 부딪혔나 봐.”

“……그래. 그럼 이만 갈게.”

“응. 그래 잘 가고 다음에 봐.”

페로렌은 먼저 마차로 향한다. 미란델은 나를 보며 남모르게 윙크를 하고는 저택으로 들어간다.

*

마차를 타고 가며 페로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따로 말 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냉담해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뭐 또 더러운 거라도 봤나?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연다.

“어제, 좋았어?”

어제 좋았냐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웬 어제?

가만……. 어제라면?! 설마……. 어제 미란델과의 행위를 알아버린 건가? 당혹스러운 마음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며 그녀에게 되묻는다.

“예? 뭐, 뭐가요?”

“어제 국교 기사단을 이겼잖아. 좋았냐고.”

아……. 결투 얘기였구나. 괜히 제 발 저린다.

“하하……. 좋았죠. 그럼.”

조금 뜬금없는 구석이 있네. 그녀는 잠시 나를 뚫어지라 보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이어서 한다.

“너는 만약……. 나 같은 사람에게 고백받는다면 어떨 것 같아?”

“아가씨가 저한테요?”

“나 말고 이 멍청아! 나 같은 사람!”

이번엔 한 대 뜬금없이 맞았다. 근데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설마 이 아가씨가 나한테 고백하려고 그러는 것 같진 않고……. 남자의 시각을 알고 싶다는 건가? 최근 그걸로 많이 고민하는 것 같긴 하던데…….

“외모나 성격……. 그런 게 같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페로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가씨 같은 사람이라…….”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좋겠지……. 너무 거짓으로만 말하면 진실을 알게 됐을 때 받을 상처가 커질 테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거절할 것 같습니다.”

내 의견을 듣더니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왜……. 거절할 건데?”

“진짜 말씀드려요……?”

페로렌이 조금은 슬퍼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당사자 앞에서 고백을 거절하는 이유를 말하기가 살짝 꺼려진다. 그렇지만 본인이 듣고 싶어하니 살짝만…….

“아가씨 같은 사람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도 떨어지고 성격은 모질고 손버릇은 더럽고 가슴도 작은 데다, 사람은 또 얼마나 예민한지 더러운 건 손톱만큼도 못 참고,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무엇보다 저는 너무 어려 보이는 여자는 취향이 아닌데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그만해 이 멍청아!!

“아악!!”

여태껏 그녀에게 맞아본 따귀 중에 가장 따끔했다. 어깨의 회전을 이용해서 따귀를 날릴 줄이야…….

“아니 아가씨가 아니라면서요!”

“나 같은 사람이랬잖아! 그럼 그게 나를 욕하는 거지! 죽을래?!”

너무 직설적이면 상처받을까 봐 적당히 순화해서 말한 건데,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너 오늘 밥 먹지 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세요! 앞에 말씀드린 모든 것을 제외하고 서라도 아가씨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 같아서, 제 곁에 두면 흠이라도 날까 봐 거절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흠……. 정말이야……?

“그럼요. 아가씨. 아가씨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인걸요?”

급히 둘러댔다. 내 환상적인 순발력. 아주 좋았어. 자찬할 만해.

“내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면, 앞에 한 말도 결국 나를 두고 한 말인 거네?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이야……. 그걸 그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구나. 고건 몰랐네. 마무리는 언제나 이런 식이구나……. 이제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맞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고…….

*

페로렌은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혼자 사색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했다. 이튿날도 그녀는 여느 때처럼 혼자였다.

똑. 똑.

일정 간격으로 들려오는 노크 소리 이후, 집사 테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식사 시간입니다.”

그러나 페로렌은 깊은 사색에 빠져 테드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테드는 재차 노크 후에 정중히 묻고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녀는 읽던 책을 손에 올려둔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멍하니 있는 시간이 있긴 했지만, 예민한 그녀가 방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있는 건 테드가 보기에도 드문 광경이었다.

“아가씨……? 식사 시간입니다.”

“응? 아……. 안 먹을래.”

“예. 그럼. 간단한 차와 요깃거리를 준비해놓겠습니다. 필요할 때 불러주십시오.

“응. 아 저기…….”

그녀는 나가려던 테드를 불러세웠다. 뭔가 묻고 싶은 말이 있는듯했지만 머뭇거렸다.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자 테드는 고개 숙여 묵례 후 등을 돌렸다.

곧, 방을 나가려는 테드의 뒤로 그녀가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근데, 걘 어디 갔어?”

“뭘 군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잠시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10분 정도면 돌아올 겁니다.”

그녀가 묻는 말의 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는 대답해주었다. 그녀 인생의 대부분을 곁에서 보좌해온 테드이기에 그녀가 묻고자 하는 것쯤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테드의 대답에 페로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면 내가 보잖다고 전해.”

이후 테드가 방을 빠져나간 후 페로렌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까지 피할 순 없겠지. 애초에 내 하수인인데 왜 내가 피해 다녀야 해?’

어제 도를렌 백작가에서 돌아온 뒤부터 뭘은 페로렌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결투에 대한 소원을 들어 달라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페로렌은 그를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다. 그의 소원이 뭔지 확실하지 않지만, 왠지 들어줄 자신이 없어서였다.

여자의 감이라는 건 때로 소름 돋을 만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 같은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뭘이 비는 소원이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라면…….

*

결투가 있던 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뭘이 빌 소원을 빨리 듣고 처리해버리자는 생각에 뒤늦게 뭘이 묵고 있는 방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그의 방에서 미란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페로렌은 조심스럽게 방안을 들여다봤다. 페로렌은 왜 그녀가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자 앞에서 잠옷 차림이라니……. 아무리 수행원 앞이라지만 자신의 수행원도 아닌 남의 수행원 앞에서 귀족의 영애로서의 체통을 깨는 일이었다.

페로렌은 뭘과 미란델이 나누는 얘기를 몰래 엿들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을 후회했다.

“이 제안은 당신이 그녀를 배신하는 것 아닌가요?”

“배신이요? 음……. 애초에 그런 건 신뢰가 있는 관계에서나 가능한 거겠죠?”

‘어떻게 미란델이 저런 말을…….’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함께해온 미란델이기에 페로렌은 그녀의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더욱 믿기 힘든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두 사람이 몸으로 나누는 뜨거운 밀회의 현장. 그 장면을 생생히 목격한 페로렌은 정신이 혼미해져서 더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페로렌은 열렬히 사랑을 나누는 둘을 놓고, 자신의 방으로 정신없이 돌아왔다.

*

‘뭘이 미란델에게 간다고 하면 보내 줘야 할까? 아니야, 누구 좋으라고? 나한테서 도망치겠다고? 내가 그렇게 둘 거 같아? 그치만……. 뭘은 날 위해 싸워줬는데……. 그게 소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

페로렌은 어지럽게 오락가락하는 마음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 수행원을 들이고, 몇 주간 그와 생활했다.

처음엔 테드의 당부로 인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지만, 며칠 지켜보니 곁에 두고 써도 괜찮겠다는 마음이었다.

비록 일은 못 하지만 임무를 받으면 나름 열정적으로 행하는 것 같고, 제법 눈치 살피며 비위 맞추는 것도 잘해서 이번 결투 사건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수행원 취급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날의 사건 이후부터는 뭘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그를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다가도 갑자기 화가 치밀고, 태연히 있다가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급히 당황하는 하는 둥. 감정을 조절하는 장치가 망가진 기계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은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똑. 똑.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문이 열리며 뭘이 들어왔다. 그는 배시시 웃으며 페로렌의 앞에 다가와 섰다. 오늘따라 기분이 유독 좋아 보였다.

“아름다우신 우리 아가씨 얼굴은 왜 이렇게 보기가 어려운 건가요?”

“너 내가 그렇게 웃지 말랬지?”

눈앞에서 그가 웃고 있으니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화가 맞는지, 그게 아니면 다른 유사 감정인지 페로렌은 깨닫지 못했다. 확실한 건 평소 화가 났을 때와는 왠지 다른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근데, 아가씨……. 오늘은 소원……. 들어주실 거죠?”

“그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불렀어.”

페로렌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각오했던 시간이 온 왔구나 싶었다. 페로렌은 화장대 앞 의자에 몸을 털썩 기대고는 그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지시했다.

뭘은 기다렸다는 듯 한차례 목을 풀더니 페로렌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엔 소원 풀이에 대한 해맑은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크흠……. 제 소원은 별거 아닙니다. 저를… 해방해주세요. 풀어만 주신다면 본의 아니게 제가 훔쳤던 아가씨의 장신구는 반드시 찾아서 돌려드리겠습니다. 만약 1달 이내 못 찾으면 그땐, 제 목을 가져간다고 하셔도 순순히 따르겠습니다.”

‘역시 그런 소원이었구나…….’

페로렌의 예상대로 뭘이 원하는 것은 해방이었다. 처음 그를 수행원으로 맞이했을 때부터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페로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불길한 이별의 예감들은 항상 징크스처럼 맞아떨어지곤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경중은 다르지만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들어주는 게 맞겠지……?’

뭘에게는 이미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했고 그는 자신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장신구도 반드시 찾아 준다는 약속을 걸었다. 물론 그가 진짜로 장신구를 돌려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목숨을 걸 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단 소리였다.

그렇다면 머리 아프게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페로렌은 굳은 결심 뒤 입을 열었다.

“네 소원……. 못 들어줘.”

결심했던 마음과 달리 정반대로 뱉어진 말에 페로렌은 자신도 놀랐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뭘을 풀어준다면 그가 금방이라도 미란델에게 달려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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