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를 위한 투쟁 --> “근데, 뒤에 누구?”
“어? 아, 새로 들인 수행원.”
“정말? 남자 수행원은 처음 아니야? 괜찮아 보이는데, 어디서 저런 수행원을 들인 거야?”
“괜찮긴…….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에, 눈치도 없어서 데리고 다니는 게 고역이라니까? 당장 쫓아내고 싶은데, 테드가 하도 당부해서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중이야.”
아리따운 아가씨께서 나를 칭찬해주시는데 왜, 네가 나서서 훼방 놓는 거야? 페로렌 따위와는 상냥함부터가 다른 레이디 미란델께서 나를 향해 눈짓하며 손 내민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도를렌 백작가의 영애 미란델이라고 해요.”
“아, 예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미란델. 저는 페로렌 아가씨의 수행원. 뭘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 어떻게 들리실진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제 눈앞에 서 계신 것 같습니다.”
“훗, 재밌으신 분이네요.”
그녀가 싱그럽게 웃는다. 그에 따라 내 기분도 하늘을 나는 것 같다.
“다들 어서 들어가자.”
미란델이 저택으로 먼저 들어가고 홀리듯 그녀의 뒤를 따르려는데 페로렌이 손을 잡아끈다.
“왜 그러십니까?”
“너 입조심 해. 미란델이 착해서 인사까지 건네주니까, 어디 수행원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그런 말을 입에 담아? 다른 영애들 앞에서 그따위 소리 했다간, 돌아갈 때 마차 뒤에 밧줄로 묶어서 끌고 갈 줄 알아.”
내 입 갖고 말하겠다는데 왜 자기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인지 모르겠다. 본인은 남자한테 이런 말 한 번도 못 들어봐서 질투 나나 보지?
*
저택의 연회장 햇볕 잘 드는 곳에선 이미 11명의 영애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본래 귀족들의 사교 파티에서 수행원은 따로 방을 마련해 대기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가벼운 회합이기에 나뿐 아니라 다른 수행원들까지 옥내에서 가볍게 돌아다니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향긋한 커피와 맛 좋은 케이크가 종류별로 보기 좋게 나열돼 있다.
쉬폰, 무스, 티라미수, 쇼콜라, 파운드 등. 전부 내가 사랑하는 케이크들이다.
이럴 땐 먹는 게 남는 것이라 하였다. 나는 먹거리를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 전망 좋은 발코니에 자리 잡는다. 지금까지 페로렌이 남긴 음식만 먹었더니 뱃속은 항상 허기져있다.
페로렌은 워낙 깔끔하게 먹고 조금만 먹다 보니 그녀가 남긴 음식 먹는 게 꺼려지진 않지만, 그래도 신체 건강한 남자 입장에서 1인분과 0.5인분의 차이는 신발을 한 짝만 신는 것과 동일하다.
난 처음에 그녀가 남긴 음식 먹으라는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였을 줄이야. 테드 말로는 수행원의 태도를 보기 위해 며칠 그러고 말 거라는데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빨리 케이크로 배나 채우자.
“와 맛있네…….”
견과류가 한 움큼 들어간 파운드 케이크를 포크로 집어 한입 베어 물자 폭신한 식감이 가장 먼저 느껴진다. 이후 달달함과 우유의 고소함이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지며 혀를 즐겁게 해준다.
폭신하기만 한 식감이 다소 물릴 무렵. 빵에 사이에 숨어있는 견과류가 오도독 씹히면서 상황을 또 한 번 역전시킨다. 이것을 절정으로 새로운 맛의 신명 나는 향연이 꿈틀거리며 일어난다. 한가지 빵임에도 상당히 여러 가지 맛이 느껴지는 게 진짜 맛있어…….
“음…….”
케이크의 맛을 느끼며 경치를 구경하니 이곳이 바로 제2의 천국이로구나.
바로 옆 발코니에는 나와 같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서 있다. 금발이 멋들어지게 흩날린다. 나도 금발로 염색이나 해볼까?
그와 눈이 마주친다. 가만히 있기 뭐하니 인사라도 건넬까?
“안녕하세요?”
“흥. 거지도 아니고 쯧쯧…….”
뭐, 거지……? 그가 내 얼굴과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쳐다보더니 콧방귀를 뀌고 들어간다. 어이가 없네……? 귀족 모신다고 지도 귀족이 된 줄 알고 있어.
열 받지만 화를 낼 때가 아니다. 지금은 내 심신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다.
*
연회가 조금씩 무르익어 갈 때쯤, 영애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나 문득 궁금해져서 조금 귀 기울여보니 결국 그거다. 남의 얘기, 남자 얘기.
어떤 후작의 영식이 어땠느니, 어떤 남작에게 청혼받았다느니, 황태자 전하가 자기를 보고 웃어준 적 있다느니.
자리가 어떻든 대상이 누구든, 수다의 내용은 어딜 가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조금만 더 먹고 잠깐 눈이나 붙여야지.
그때 페로렌이 내 뒤로 와서는 등을 툭 친다.
“조금씩 가져다 먹어. 품위 없이 뭐 하는 짓이야?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행실 신경 써.”
그렇게 눈총을 주고는 화장실을 찾아 떠난다. 이젠 아주, 먹는 걸로도 뭐라고 해. 서러워서 살겠나 진짜.
“근데 있잖아요……. 페로렌 영애 말이에요.
그녀가 나가고 영애 무리에서 페로렌이라는 이름이 언급되기에 문득 관심이 쏠린다. 무슨 얘기들을 하시려나? 내가 현 상황을 역전할 만한 큰 약점을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남자한테 한 번도 에스코트 못 받아봤다면서요?”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어쩜… 그럴 수도 있구나……. 안타까워라.”
“네, 맞아요. 이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요? 보기엔, 인형처럼 이쁜데 왜 그럴까요?”
“얼굴만 이쁘면 뭐해요?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 보이는 건 사실이잖아요?”
나도 궁금해서 듣고 있긴 하지만, 페로렌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 무섭다 진짜.
“어디 그것뿐인가요? 친부모와 페론드 경까지 그렇게 되셨으니, 남자들이 불길해서 접근을 안 하는 거죠.”
그렇게 돼……? 그렇게 됐다는 건 설마……. 부모가 멀리 떨어져 있다더니, 죽었다는 말을 돌려 말한 거였구나…….
“그래도 이쁠 나이인데……. 혼자 있긴 아까운데 말이에요”.
곧 한 영애가 건너에 앉은 영애를 보며 제안한다.
“미엘로나 영애. 이번에 바일 공작 전하께서 주최하시는 파티에 참석하신다면서요? 거기나 한번 데려가 보지 그래요? 그 정도 규모라면 괜찮은 영식도 많이 참석할 텐데.”
“어머, 싫어요! 준남작의 영애를 데려갔다가 무슨 소릴 들으려고요? 그날은 품격에 신경 써야 하는걸요?”
“호호, 그 말씀은 꼭 페로렌 영애가 격 떨어진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솔직히, 저는 좀……. 저번에도 언급했지만, 페로렌 영애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달갑진 않네요. 우리 모두 지체 높으신 귀족가의 영애인데, 페로렌 영애는 그렇지 않잖아요?”
몇몇은 그녀의 생각에 동조하며 페로렌에 대한 뒷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한다.
원래 페로렌의 부모는 준남작 작위를 받기도 전에 죽어서 페로렌에게는 아무런 작위도 주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를 안타까이 여긴 페론드 준남작이 그녀를 양딸로 입양함으로써 그녀에게 준남작 작위를 물려줄 예정이었나 보다.
그러나 페론드 준남작이 죽으면서 나타난 그의 배다른 자식이, 작위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여성 신분의 페로렌은 결국 아무런 작위도 받지 못하고 끝난 듯했다.
“세상에……. 그런 팔자라면 제가 남자라도 꺼려지겠어요.”
“이제 영애로 남는 것도 모호해졌네요?”
“네. 그렇죠. 하지만 회합을 주관하신 미란델 영애께서 페로렌 영애를 특별히 챙겨주시니 별수 있나요?”
페로렌에 대한 험담을 내내 듣던 미란델이 찻잔을 들고 티스푼으로 살짝 친다. 땡-! 하는 맑은소리와 함께 모든 영애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다들 교양을 지켜주세요. 모두의 사교를 위한 모임이지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모임이 아니잖아요?”
수습하기엔 살짝 늦은 게 아닌가 싶지만, 그녀 덕분에 페로렌을 몰아가던 분위기는 다소 환기됐다.
가만 보면 페로렌 이 아가씨도 참 딱한 구석이 있었네. 나한텐 그렇게 독하게 굴길래 그 말발로 사교계까지 휘어잡는 줄 알았더니만, 그건 또 아니었나 봐?
한참 후 화장실에 갔던 페로렌이 들어온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그녀의 눈이 붉어 보인다. 꼭, 운 사람처럼……? 에이, 설마.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저 소녀가 울 리가 있나…….
음……. 그렇게는 생각해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혹시 듣고 있던 건가? 모르겠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자. 페로렌이 울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은 나를 괴롭히는 독종 상사나 다름없는데. 꼴 좋다 뭐!
그런데,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미엘로나 영애!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어머! 목소리 낮추세요. 여기가 평민들 노는 곳도 아니고 품위 없이…….”
“방금 발언 사과하세요!”
“솔직히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다들 말만 안 하는 것뿐이지. 같은 생각들을 하고 계실걸요? 지금도 보세요. 수준이 안 맞으니 아무것도 아닌 말에 흥분해서 이런 추태까지 부리시고.”
“추태라고요?! 하……!”
페로렌은 기가 차서 말문이 턱 막힌 듯하다.
“미엘로나 영애. 참으세요.”
“두 영애 모두 자중하세요.”
주변의 영애들이 말려보지만 불붙기 시작한 싸움은 주변의 작은 부채질 정도로는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세요. 본인도 느끼는 게 있으니 아무 말씀 못 하시는 거잖아요? 오늘 데려온 수행원만 봐도 그래요. 품위도 없이 접시에 한가득……. 수행원이 아니라 밖에 나다니던 부랑자라도 데리고 온 거 아니에요?”
갑자기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어 오른다. 근데 부정을 못 하니까 더 열 받네? 그런 나를 대신해 페로렌이 나서서 싸워준다. 나를 위한다기보다는 본인을 위한 싸움이겠지만…….
“미엘로나 영애의 비실거리는 수행원보다야 많이 먹고 튼튼한 제 수행원이 백번 낫네요!”
“제 수행원이 비실거린다고요? 흥, 국교 기사단 출신의 엘리트 수행원에게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요?”
“얼마나 비실대면 기사단에서 쫓겨나 미엘로나 영애의 수행원 노릇이나 하고 있겠어요?
미엘로나 영애도 페로렌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차츰 언성이 높아진다.
“지금 말씀 다 하셨나요? 페로렌 영애? 그렇게 자신 있으면 수행원끼리 결투라도 시켜보시겠어요?!
“누가 겁낼 줄 알아요?! 좋아요! 해요!”
그때, 연회장의 문이 벌컥 열리며, 기품이 흐르는 중년의 남성이 들어온다. 모두 연회장에 들어온 그를 보며, 황급히 예를 갖춰 고개 숙인다.
“도를렌 백작님을 뵙습니다.”
“아, 아버님…….”
그가 바로 이 저택의 주인 도를렌 백작인 듯하다. 미란델은 소란을 일으켜 아버지 얼굴에 먹칠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연회장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기에 들렀다. 평소 조신하기로 소문난 영애들이 오늘은 무슨 연유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미란델은 페로렌과 미엘로나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 내용을 최대한 축소해서 전달했다. 영애들 사이에서 기 싸움은 잦은 일이라지만, 대놓고 다른 영애를 무시하는 행태는 귀족 된 도리로서 몰상식한 행위일 테니까 말이다.
*
그래서 말인데……. 사건을 정리, 축소, 전달한 것까진 좋다 이거야. 근데 왜 결론이 기사단 출신의 수행원과 내가 결투하는 걸로 난 거냐고?!
백작의 중재 아래 상황이 정리되고 영애들의 사교 파티는 급하게 마무리되어 지금은 마차로 향하고 있다.
내가 기사단과 결투를 하게 된 결정적 원인인 페로렌은 입을 꾹 다문 채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고 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 따질 수도 없고 참. 뒷모습에서부터 열 받았으니 말 걸면 죽여버리겠다는 오라가 뿜어져 나온다.
“페로렌. 아가씨? 괜찮습니까?”
“아무 말 말고, 그냥 마차에 타.”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리고 있다. 쏟아져나오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것 같다.
마차에 올라타자 기수가 지체 없이 말을 이끈다.
마차에 타서도 그녀는 한마디도 안 한 채 창밖만 보고 있다. 나를 대하는 태도만 보면 정말 재수 없는 인간이다 싶지만,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또 안쓰러워 보인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묻자 그녀가 반쯤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앙다문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눌러 참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울고 싶으면 우셔도 됩니다. 지금부터 이 마차에서 보고 들은 거 없는 셈 칠 테니까. 지금은 품위 같은 거 안 지키셔도 괜찮습니다.”
그녀가 떨리는 입술을 떼기 시작한다.
“품위를… 안 지켜도 돼?!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을 당했는데! 너 때문이잖아!”
고여있던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져 내린다.
“이게 다! 다 너 때문이야! 흐윽……!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흐윽! 많이 먹으래! 그런 자리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흑흐. ……그런 창피 당한 것도! 모욕받은 것도! 다 너 때문이라고!!”
그녀가 꽁꽁 감춰둔 울분을 터뜨림과 동시에 엉엉 울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에서 유리알 같은 눈물이 주체 못 할 정도로 쏟아져 나온다.
자기 자신을 욕할 용기는 없고,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지만, 지금만큼은 그녀를 욕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생소한 아픔을 견뎌내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이니까.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을 여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테드 하나뿐인 이 소녀는 아직 그것을 배우지 못한 것뿐이니까. 큰 고통 후에는 이겨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그냥 기다려주면 된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우는 그녀를 보듬어 안는다.
“그래요, 실컷 욕하면서 펑펑 울어요. 지금은 그래도 돼요. 그 모진 시선들, 혼자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영애들 사이에 흉험하게 흐르던 그 독기. 그것을 지켜보는 입장에선 그 기운만으로도 누구 하나쯤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녀린 몸으로 그런 흉기 없는 전장에서 잘 견뎌 온 페로렌을 보니 진심 어린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후련해질 때까지 실컷 울고 나면 한결 편해질 거예요.”
“으아앙! 흑흑! 흐아앙! 흐윽! 냄새나! 바보야아! 흑! 으아아앙!”
근데 이 아가씨는 이 와중에도 냄새 타령이냐……. 참, 사람이 분위기 좀 내보겠다는데 한번을 안 도와주네. 진짜…….
그러면서도 그녀는 떨어지지 않은 채, 본인의 작은 손으로 오밀조밀 매어준 크라바트 위에 얼굴을 묻는다. 내가 어쩌다가 게임에서까지 우는 여자를 달래고 있는 건지 원…….
참 다사다난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