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28화 (28/147)

<-- 자유를 위한 투쟁 -->

“아, 형님. 진짜. 신고 안 해주시면 진짜 잘하겠습니다. 저 진짜 유용한 놈입니다. 돈 짭짤하게 만지게 해드리겠습니다.”

-‘드웍프의 굴복이 1 상승했습니다. (현재 43+)’

난데없는 굴복 상승이다. 대상을 억누르면 오른다는 게 행동으로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협박처럼 말로 억누르는 것도 포함되나 보다. 아직 녀석한테 알아볼 게 많지만, 시간이 없으니 이쯤 해야겠다.

“나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너 앞으로 매일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여기 장소에 나와 있어. 이제 가봐. 빨리 사라져.”

“예? 아, 예…….”

“그리고 아까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장신구 찾아오고 못 찾으면 10만 셀씩!”

드웍프가 얼떨떨한 얼굴로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내가 드웍프를 급히 보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현재 퀘스트 남은 시각 1분 남짓. 이 시간이 모두 지나면 테드가 귀신같이 나타나 날 데리러 가려고 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퀘스트의 목적인 드웍프는 찾았지만, 주목적인 장신구를 제대로 얻지 못했기에 보상인 이미 해방은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난 최후까지 저항할 것이다. 만약 내 힘으로 테드를 이긴다면 해방은 물론 페로렌의 장신구까지 전부 내 것이 되는 거다.

덤벼라. 테드. 당신을 쓰러뜨리고 기쁨의 승전보를 올릴지니!

*

“쿨럭…….

“오늘은 제법, 오래 버텼군.”

그래 봤자 평소보다 5분 정도 버텼을 뿐이다. 나는 현재 구겨진 잡지처럼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이 괴물 같은 인간은 대체 뭐길래 이렇게 강한 걸까? 단순 집사 나부랭이가 이렇게 싸움을 잘해도 되는 거냐고? 이런 상황이 지속 할수록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의심된단 말이다.

더군다나 더 열 받는 건 싸움에서의 태도다.

누군 죽기 살기로 공격하고 있는데‘동작이 너무 커’, ‘단조롭군’, ‘거기선 빈틈을 짧게 쳐라’ 등. 지도하듯이 말을 하니 맥이 빠져서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다.

기회가 된다면 묶어 놓고 각인을 시전하든가 해야지. 새로 얻게 된 2단계 자질은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고통을 느끼도록 해줄 거라고! 물론 그 기회란 게 언제쯤 와 줄지는 내 인생을 끄적이고 있는 신이라는 작자도 모를 듯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드는 표정 없이 앞을 주시할 뿐이다.

*

페로렌의 저택에 도착했다. 외견으로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집이지만, 막상 집에 들어가는 내 모습을 본다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의 모습 같다 하지 않을까?

물론 막스핀의 노예로 생활할 때보다는 훨씬 편하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는 이 몸뚱어리는 어디 한 곳에 매여 있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단체 퀘스트를 깨고 나서 받은 600만 셀로 작은 우올로를 하나 사서 꿈 같은 모험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신세에 빠진 건지……. 내 게임 속 인생도 참 기구하구나…….

“따라와라.”

응? 평소와 가는 방향이 어째 다르다. 보통은 저택에 들어서서 별채로 바로 향했지만, 오늘은 테드의 뒤를 따라 본채로 향하고 있다.

그의 뒤를 따라 걷자, 그가 말을 전해 온다.

“너는 그간 상급 수행원들에게 수행원으로서의 몸가짐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본래 1주 정도를 더 교육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바꿔 조금 일찍 본채에 들이기로 했다.”

뭐라고……?! 그럼 별채에 있는 내 꽃밭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싱싱한 꽃밭에 흐르는 꿀을 한 입도 못 핥았는데, 안돼! 이럴 순 없어!

“마,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수행원으로서의 몸가짐이 부족합니다.”

“그건 걱정 마라. 앞으로 페로렌 아가씨를 모시면서 남는 시간엔 내가 직접 교육할 테니.”

이런 걸 속된말로 새 됐다고 하는 건가. 아, 전두엽이 쓰라리기 시작한다. 그럼 그렇지. 나 같은 부랑자에게 꽃놀이는 사치였어.

“아가씨를 뵙기 전에 네게 전할 말이 있다.”

*

나는 테드의 명령에 따라 욕실에 들어가 몸을 빡빡 닦은 뒤 페로렌 방 앞에 서 있다. 테드가 몸을 두드리며 정중히 묻는다.

“아가씨 깨어나셨습니까?”

“응…….”

목소리가 들려오자, 테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서자, 페로렌이 비몽사몽 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멍하게 있다.

2시부터 낮잠을 잔다고 들었지만, 시간이 5시를 바라보는데, 여태껏 자고 있었나 보다. 미인은 잠꾸러기라지만 낮잠을 참 오래도 잔다.

페로렌은 잠이 덜 깬 듯 뽀얀 얼굴을 이불에 푹 파묻고 몇 초 정도 있더니 스스로 일어나서 테드가 준비해 놓은 차를 마신다. 저 모습만 보면 그 독한 소녀는 어디로 간 건가 싶다.

근데, 테드 이 양반은 언제 차까지 준비한 거야? 테드는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차도 모자라 그녀가 신을 실내화까지 전부 준비해놨다.

베테랑은 베테랑이네.

“아가씨가 씻을 물을 받아 놔라.”

테드가 내게 조용히 지시한다. 나는 즉시 욕실로 향한다. 내가 욕실로 들어가자 테드는 페로렌에게 전달사항을 말한다. 내용은 앞으로의 수행원을 나로 바꾼다는 말인 듯하다.

*

물을 받고 나오자, 테드가 당부의 말을 전한다.

“지금부터 아가씨를 모셔라. 교육받았던 내용 떠올려서 수행하고 아가씨가 불편함을 못 느끼도록 해드려라.”

그 말과 함께, 테드는 이 방에서 홀로 나간다.

뭔가 적응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임무가 주어졌다. 이런 거 딱 질색인데 말이다. 내가 과연 이 아가씨의 비위를 맞춰주며 역할 수행을 해낼 수 있을까?

“야!”

그런 걱정을 하기를 10초나 지났을까? 귓가에 앙칼진 페로렌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힌다.

“예!”

“물이 미지근하잖아! 처음부터 다시 받아.”

페로렌이 나가고 나는 다시 물을 받는다. 내가 나가자 그녀가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역시나 같은 강도의 소리침이…….”

“앗! 뜨거워. 야!!”

“예!”

“뜨겁잖아! 다시 받아!

그녀에 명에 따라 물을 다시 받는다. 그녀가 들어온다. 소리친다. 이와 같은 행동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1시간 경과 후.

“앞으로 이 온도 기억해놨다가. 이대로 받아 놔. 답답해 죽겠네! 진짜. 그리고! 너 땀나서 냄새나니까 가서 씻어.”

답답해? 답답하다고?! 누가 더 답답할까……? 난 무려 한 시간 동안 세숫물만 받으며 보냈다. 테드가 해준 말만 아니었으면 여자고 뭐고 그런 거 없었어.

이 방에 들어오기 전 테드는 내게 페로렌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녀의 부모는 멀리 있어 어려서부터 그녀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고. 그 때문에 타인을 대하는 방법이 익숙지 않으니, 조금만 이해하고 받아주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있잖아? 이건 내가 이해해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넘어서도 아주 한참을 넘어섰다.

아니 무슨 신체가 온도계도 아니고 저렇게 민감한 게 말이나 되는 거야? 코도 민감하고 피부도 민감하고 아주 기계가 따로 없으셔! 사실 나로서는 지금 받은 물의 온도와 이전에 받았던 물의 온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모르겠다.

뭐가 다른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고!

근데도 저 망할! 어린것 같기만 한 어른인! 아무튼, 쟤는! 그깟 세숫물 하나로 나를 1시간이나 고생시키고! 이제서 욕실 들어가더니 나한테 답답하단 소리나 하고! 열심히 받아줬더니 냄새난다고 또 씻으라고 하고! 한 시간 전에 씻었다고!

안돼. 이대론 안 된다. 물을 받는 와중에도 독설을 계속 들었더니 귀가 따갑다 못해 머리가 아릴 지경이다. 이러다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가 생길 것만 같다. 난 도저히 이 생활에 익숙해질 수가 없다. 어떻게든 드웍프를 닦달해서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그러나 이러한 내 바람과 달리 나는 그 날 이후 2주간 드웍프를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는 내게 장신구를 찾는 퀘스트가 주어지지 않았다.

*

오늘도 변함없이 맑은 날. 창창한 하늘로부터 싱그러운 햇살을 내리받아 고개 든 나뭇잎은 오늘따라 더욱 생기를 띄고 있다.

그에 반해 맞은편 그늘에 서 있는 내 정신은 갈수록 썩어 문드러지고 피폐해져만 간다. 나는 누구며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가? 여기는 어디며, 왜 나는 이곳에 있는가? 나는 나인데, 너는 너인가?

평생 일해도 사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저택의 정원을 가로지르며 홀로 사색에 빠져본다.

저 나무 위의 앉은 새들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워 종잘종잘 지저귀는 것이며, 저 바깥사람들은 무엇이 그리도 행복하여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것이더냐. 내 인생은 이렇게 불행할진대, 왜 그대들은 웃는 것이더냐.

감옥 문처럼 굳게 닫힌 저택의 철창문을 붙잡고 서자, 한량한 내 모습이 건너편 건물 창가에 반사돼 보인다. 감옥 아닌 감옥. 창살 아닌 창살. 그 안에서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

또각또각. 곧 뒤에서부터 구두 굽 소리가 선명히 들려온다. 그 소리에 내 귀는 토끼처럼 쫑긋 선다. 온몸의 털은 곧 불어닥칠 재앙에 대비하듯 자신을 곤두세운다.

잠시 후 문 앞에 한 대의 마차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문을 연다. 인간 이하의 취급 받기를 2주째, 어느새 독설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된 몸뚱이는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행동을 미리 찾아 수행한다.

오늘만 버티자. 그래, 바로 오늘이다. 오늘은 페로렌이 고귀하고 잘나신 귀족가 자제분들을 만나 열심히 수다 떠는 날이다.

그녀가 집을 비우고 나면 나에겐 쉬는 시간이 주어질 터. 나는 그 막간을 이용해 드웍프를 만나 페로렌의 장신구를 돌려받을 생각이다. 그렇게만 되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물론 해방은 드웍프가 장신구를 찾아놓았다는 전제하에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낱 희망을 걸고 있다.

드웍프는 장신구를 찾지 못하면 보내기로 한 10만 셀을, 3일 달랑 보내고 더 보내지 않았으니까. 그게 3일 만에 찾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지 내가 그동안 만나러 가지 못했기 때문에 장신구를 돌려주지 않은 거로 생각한다.

설마, 장신구를 찾지 못했는데 돈은 그냥 주기 싫어서 내뺀 거라면, 나는 놈을 찾을 것이다. 찾아내서, 죽일 것이다. 이미 각인을 새겨놓은 이상 그놈의 위치 정도는 대략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찾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역시나……. 신은 빌어먹을 역시나…….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뭐 하고 있어? 안 따라오고?”

“예? 저 말입니까?”

“너 말고 누가 있어? 어서, 따라와.”

평소에는 인간 취급도 안 하더니 왜 오늘따라 날 데려가려고 안달인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멋진 옷을 입혀준 이유가 바로 이거였나?

나는 페로렌과 함께 잘빠진 백마가 이끄는 마차에 몸을 싣는다.

“너, 크라바트 제대로 해.”

“이거 말입니까?”

페로렌이 내 목에 달린 중세식 넥타이를 보고는 다시 맬 것을 지시한다.

“흐음…….”

처음 보는 물건이라 한번 풀었더니, 다시 묶는 법을 모르겠다.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빼면 돌아오려나……?

“이리 내.”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자 페로렌은 답답했는지, 본인이 직접 크레바트를 잡는다. 인형 같은 손으로 몇 차례 꼼지락거리자 금세 크레바트의 모양이 멋들어지게 잡힌다.

의외의 모습이네. 어려 보여도 신부 수업은 다 끝났다는 건가?

*

마차는 한참을 굴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지더니, 곧 화려한 저택 입구에 다다른다.

“허어……. 참…….”

그 집을 보고는 할 말을 잃는다.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보면 볼수록 이 인간들 사치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페로렌의 집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이 집은 더하다.

도를렌 백작가. 이 집에 대해선 나도 아는 바가 없다. 그냥 이 집의 딸과 페로렌이 친해서 자주 왕래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페로렌!”

저게 누구야? 백작가의 화려한 대문을 열고 후광보다 빛나는 미모의 여성분이 행차하신다.

“도를렌 영애!”

그녀가 마중 나오자 페로렌은 발 벗고 달려나가 그녀와 포옹한다. 저 여자가 도를렌 백작가의 딸인가보다. 역시 높은 귀족의 자제라 그런지 저택의 대문만큼이나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신다.

“오는 동안 별일은 없었어?”

“응.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봐오던 사이라더니, 확실히 여느 귀족들과는 달리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허물이 없어 보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