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만난 웬수 --> 나는 생각할 겨를없이 집을 뛰쳐나온다. 퀘스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집에서 나를 막아서는 이는 없다.
어디부터 찾아야 하지? 그래, 장신구는 드웍프가 가져갔다. 그렇다면 드웍프를 찾아야 한다. 드웍프를 찾기 위해선 처음 있던 도시 에드 하이리스로 가야 한다.
드웍프가 아직도 거기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다른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우선 여기 위치가 어디지? 보아하니 샤울로드 같지는 않고, 이제 지도가 켜지니 확인해보자.
지도를 본 순간. 나는 왜 이 퀘스트의 난이도가 불가사의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발데린 공화국의 수도 틸프리아였다. 여기서 에드 하이리스 도시로 가기 위해선 우올로를 탄다고 해도 하루는 넘게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깰 수 있는지가 불가사의라는 말이었구나.
현재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57분 23초. 그렇다면, 태세전환을 시행한다. 내가 할 일은 남은 시간 동안 도망치는 것. 퀘스트 목표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 어차피 보상이 해방이라면 그 보상을 직접 쟁취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
*
그로부터 1시간 30분 뒤.
“제게 딱 1시간만 더 주십시오! 이번엔 진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자식이 어딨는지 알아냈다고요!”
나는 페로렌 앞에 무릎 꿇고 한 번의 기회를 더 구걸하고 있다. 그녀로부터 최대한 도망치던 와중 퀘스트 시간 10초를 남겨 놓고, 이 도시에서 진짜 드웍프를 발견했다.
그런데, 퀘스트 시간이 끝나자마자 T자형 지팡이를 든 테드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내 위치를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건지…….
난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 극렬히 반항했다. 감금상태가 일시적으로 풀렸기에 장검을 꺼내 테드와 맞서 싸웠지만, 내 검은 애꿎은 그의 옷만 촘촘히 찢어놨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저주받은 보석을 꺼내 그의 피부에 문댔지만, 신들의 저주가 고장(?)이라도 난 건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도로 집어넣어야 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을 꿈꾸던 한 남자는, 자신을 잡으러 온 늙은 집사에게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타격도 입히지 못한 채 처참하게 꺾였다는 후문이다.
솔직히 혼자 왔기에 만만하게 봤는데, 단순히 나이만 먹은 노인이 아닌 듯하다. 짧은 대결이었지만, 지팡이도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으니까.
그 존재로 인해, 앞으로 나의 탈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불길한 기운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다.
“제발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그놈만 잡으면 아가씨의 보석 전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페로렌은 여전히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책만 읽고 있다.
“페로렌님! 제발, 딱 한 번의 기회면 됩니다!
“아, 집중 안 돼.”
그녀는 혼잣말하더니 보던 책을 옆에 내려놓고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짝-! 뺨 위로 느껴지는 알알함과 함께 내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그런 나를 내버려 둔 채 그녀가 집사를 부른다.
“테드. 이거 교육 안 했어?”
“죄송합니다. 주의는 줬습니다만……. 아무래도 정식 수행원이 아니다 보니 부족한 것 같습니다.”
“데려가서 다시 교육해.”
그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논하든, 나는 지금 이유도 모른 채 뺨을 맞았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다.
그러나 이런 내 황당함을 분노로 풀어낼 겨를도 없이 테드에게 끌려가 1시간째 정신 교육을 받고 있다.
“아가씨의 뺨 정도로 끝난 걸 감사히 여겨라. 다음번에 실수하면 그걸로 끝나진 않을 거다.”
“그럼 저는 여전히 수행원입니까?”
“그래. 그나마 비슷한 나잇대의 남자 수행원은 너 하나뿐이니 아가씨의 정서 교육상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초 인성 교육부터가 글러 먹었는데, 정서교육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내가 봤을 때 그 아가씨가 바뀌려면 이 주변 인물부터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만약 수행원으로서 모시다가 아가씨의 모욕적인 행태에 못 참고 달려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까와 같은 일이 발생하면 그때도 내가 참고 넘어간다는 보장이 없다. 나도 참는다고 참는 편이지만, 때때로 욱하는 성격이 드러나면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선택을 하곤 하니까.
비꼬듯 말했지만, 테드는 진지한 얼굴로 받는다.
“아니, 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내가 막을 테니까……. 그리고, 한 번만 더 아가씨를 욕보이는 언행을 했다간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테드가 지팡이를 땅에 통! 찍으며 말을 잇는다.
“참지 않겠다.”
“…누가 진짜 그러겠다고 했습니까?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태연한 척 담담하게 말을 받지만, 그 눈에 띈 살기 때문에 다리가 와들와들 떨린다.
* * *
뭘의 교육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테드는 뭘과의 전투로 찢어진 자신의 정장 앞에 서 있었다.
테드는 장신구의 도둑을 찾아내기 위해 집 요정과 대화하면서 특별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장신구를 가져간 인물이 페로렌 아가씨에게 날개를 달아줄 귀인이 될 거라는 말.
물론 집 요정의 말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순 없었다. 그들이 약간의 미래를 본다고는 하나, 그것이 항상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집 요정의 그 말은 테드의 관심을 유발하기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집 요정이 자신에게 먼저 미래를 말해준 건 처음 있는 일이니 말이었다.
처음엔 단순 호기심이었지만, 그와 검을 겨뤄보니 확실히 엉성한 검술 뒤에 무언가 느껴지는게 있었다.
‘아무리 늙었다고는 하나……. 검 하나 제대로 못 쥐는 젊은이에게 공격을 허용할 줄이야…….’
정장에 새겨진 5개의 빗금.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신이 무려 5번 차례나 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테드는 근 10년간 겪어온 전투에서 이렇게까지 옷이 찢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게오르테드 발로그. 포를리안 왕국의 왕립 기사단장이었던 그는, 한때 포를리안 왕국에 유례없던 소드마스터 후보자로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검술뿐 아니라, 맨손 무술과 사격에까지 일가견이 있어 그 재능은 기사단의 귀감이 되었다.
비록 지금은 공주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쓴 채 모든 작위를 박탈당했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포를리안 왕국의 역사상 한 획을 그을 만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테드는 칼을 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자신에게 공격을 성공한 새로운 수행원의 재능을 내심 높이 사고 있었다.
‘집 요정의 말이 그냥 한 소리는 아니라는 건가? 제법 소질이 보여.’
누명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페론드 준남작이 죽고 나서, 그의 손녀를 보좌해 온 지도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페로렌이 아기였을 때부터 지켜온 그로서는 그녀가 혼인하기 전까지 항상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나이든 자신이 언제까지고 그녀를 보좌할 수도 없는 노릇. 그에게도 후임자가 필요한 시기였다.
‘조금 지켜본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 * *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 둘! 백만 스물…… 셋! 크하아!”
체력이 부족하긴 한가 보다. 고작 33개 하고 지쳐서 헐떡거린다. 현실에서도 안 하는 운동을 게임에서 이렇게 열심히 할 줄이야. 이게 다 인기를 유지하기 위한 눈속임이지만 말이다.
“오빠. 이것 좀 드시면서 쉬엄쉬엄하세요.”
“뭘 씨 몸 좋은 거 봐…….”
“하하, 고맙습니다.”
“윽! 갑자기 그렇게 웃다니, 자기 때문에 내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잖아.”
나는 4명의 여인에게 둘러싸여 순수한 청년인 양 눈웃음을 흘리고 있다. 젊은 남자 수행원이 부족한 이 꽃밭에서 어느새 나는 인기 만점의 청년이 되어있었다. 이게 다 힘쓰는 일은 전부 도맡아 하며, 하인들과 입이 닳도록 수다 떨고 다닌 결과다.
페로렌의 수행인이 된 지 일주일 째지만, 현재까지 페로렌과 마주하는 일 없이 내 상급 수행원에게 할 일만 착실히 배워나가고 있다. 하루에 배울 양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취미로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을 하다 보니 잠재도 조금이지만 올랐고, 몸 건강도 유지되는 것 같으니 앞으로 시간을 할애해서 꾸준히 해볼까 싶다.
“오빠, 저도 운동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나도 나도.”
“나도 배울래!”
“다들 적당히 들이대, 우리 자기가 힘들어하잖아.”
이 여인 중 한 명을 꼬셔서 각인을 한번 새겨 봐? 음……. 아니야. 그래도 첫 번째 각인인데 임팩트 있는 사람으로 골라야지.
얼마 전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한 여인이 자는 동안, 각인을 시도했다가 처참히 실패했기에 하는 소리는 아니다.
하나 확실한 건 각인은 대상의 의식이 깨어있을 때나 걸리는 것 같다.
“오빠가 본채로 가면 이제 만나기도 힘들 텐데, 들이대야죠.”
현재 나는 하인들이 모여 사는 별채에서 다른 하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테드의 말로는 조만간 본채에서 페로렌을 수행하게 될 거라고 하니 이 행복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별채 하인들은 본채의 수행원과 달리 페로렌을 마주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정원을 가꾸거나 페로렌이 집을 비웠을 때, 본채를 청소하는 일정도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페로렌은 북적북적한 걸 싫어하는 눈치라, 주변에 많은 수행원을 두면서도 그들이 눈에 띄는 걸 안 좋아하고 간혹 필요할 때만 찾는다.
그나마 테드 할아범은 오랫동안 보좌해서 그런가 눈에 띄어도 그리 귀찮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오빠, 이제 곧 나갈 시간이네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옆에 있던 저택의 하인의 말에 나는 시계를 쳐다본다. 페로렌의 하수인이 되고 나서 매일 1시간씩 찾아오는 일일 퀘스트의 시간. 바로 ‘드웍프 찾기’퀘스트다.
일주일 동안 3번을 목격했음에도 번번이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현재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 오늘은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 나의 ‘해방’을 위해.
*
나는 사냥에 나선 살쾡이처럼 눈을 번뜩이며 드웍프를 찾아다니고 있다. 엊그제 이 근처에서 드웍프의 똥똥한 실루엣을 목격했다. 예상이 맞는다면 녀석은 아직 이 주변을 순회하고 있을 것이다.
남은 시각 36분 32초.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발견만 하면 당장에 다리몽둥이부터 부러뜨려주마.
바로 그때. 낯익은 똥똥이가 눈앞을 지나쳐 한 사내에게 말을 건넨다.
“이봐! 너 초보자야?”
“예? 아, 네 그런데요?”
“퀘스트 필요해?”
“퀘스트요? 있으면 좋죠.”
드디어 찾았다! 드웍프! 언제나 같은 레퍼토리를 써먹고 다니는구나. 오늘이야말로 선량한 초보 유저를 좀먹는 더러운 NPC를 처단해주마!
나는 당장 드웍프에게 달려가서 그의 옷깃을 쥐어 잡고 당긴다.
“컥!”
“안녕? 드웍프?”
“뭐, 뭐야 넌?!”
나는 이 상황을 얼떨떨하게 쳐다보고 있는 초보 유저를 돌려보낸 뒤 드웍프를 끌고 뒷골목을 찾아간다.
좋은 장소를 찾았다. 나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구석으로 던진다.
“크윽!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야!”
드웍프는 도망칠 곳 없는 막다른 길에 막혀 당황한 눈초리 나를 노려본다.
“나 알지?
“네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너야말로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에드 하이리스 페로렌의 장신구라고 하면 기억이 좀 나려나?”
“에드 하이리스? 페로렌? 아……!”
기억이 난 모양이다. 그렇지만 녀석도 사실대로 말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일단은 발뺌이다.
“저는 그쪽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선량한 사람 괴롭히지 마시고 놔주시지요?”
기억 안 난다는 사람이 목소리 톤과 말투는 왜 바뀐담?
“걱정 마. 내가 기억 안 나는 데 좋은 약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 이거면 기억이 싹 돌아올 거야.”
검을 꺼내서 몇 번 휘두르자, 드웍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다. 내내 뒷걸음질 치던 그가 안 되겠는지, 단검을 하나 꺼내 휙 던진다.
챙-! 볼품없이 날아드는 단검 따위, 여러 개가 동시에 날아든다고 해도 전부 쳐낼 수 있다.
“이야!! 죽어!”
단검이 막히자 그가 검을 꼬나 들고 달려든다. 자세도 속도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장검으로 그의 무기를 세게 때려 날린 후 검의 면으로 그의 볼을 사정없이 후린다.
차악!
“크악!”
내가 아무리 약하다고 한들 초보자 상대로 사기 치는 녀석한테까지 질 정도는 아니다.
여태까지 제대로 된 사냥터는 한 번도 방문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 잘 싸울 거라는 자신감은 있다. 그 어렵다는 단체 퀘스트를 혼자서 클리어한 남자니까.
그래도 언젠가 사냥터를 한번 방문해서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객관적 수치를 가늠할 필요는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