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25화 (25/147)

<-- 막돼먹은 아가씨 -->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주변의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바닥엔 푸른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있고, 정원의 파릇파릇한 나무들은 가위손이라도 다녀간 듯 조각처럼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고급스러운 분수대와 조각상. 그 옆을 줄줄이 지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집의 하수인……. 이 아니라 그놈들이잖아?!

막스핀의 졸개 중 15명씩 뭉쳐 다니는 녀석들이다.

이제 알았다. 저놈들이 탈출한 날 쫓아와서 납치한 거였구나. 아니 내 위치를 어떻게 알고? 하여간 지독한 녀석들 같으니…….

근데 궁금한 건 왜 막스핀한테 데려간 게 아니라, 이런 곳에 데려왔냐는 것이다. 잠깐,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예전에 막스핀이 이런 말을 했었지.

노예 되기를 거부하면 성적 취향 더러운 귀족들한테 넘겨 버린다고……. 그 더럽다는 의미가 남색을 밝히는 남자 귀족이라면…….

내 앞의 할아버지는 여전히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하늘이시여. 부디 제 청년막을 보호해주소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다니. 정신병은 없다고 들었는데…….”

그는 곧 옆에 있던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우선, 이놈을 데려가서 씻겨라. 아가씨께서 불쾌해하시지 않게, 구석구석 깨끗이 씻겨라.”

“예.”

아가씨……?

그가 지시하자 몇 명의 사람이 나를 끌고 간다. 나는 마구간 같은 장소로 끌려가 손발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몸을 씻겼다. 간지럼 고문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수치와 모욕감이 들더구나.

온몸을 씻고 귀족의 하수인 같은 복장을 하고 나자, 그 이름 모를 할아버지가 다시금 나타나서는 내게 말을 건넨다.

“씻기고 나니 제법 모양새는 나는구나. 잘 들어라. 너는 페로렌 아가씨 저택에 와 있다.”

“페로렌?!”

페로렌이라면 분명, 예전 퀘스트 때문에 본의 아니게 훔친 장신구의 주인이 아니던가? 근데 왜 나를……?

“너는 이전에 에드 하이리스에 있는 페로렌 아가씨 별장에 숨어들어 장신구를 훔쳤을 것이다.”

“예?”

설마 그때의 일로써 나를 다시 잡아 온 건가? 일단은 부인하자.

“아,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거짓말할 생각은 마라. 그걸 키 작은놈에게 넘긴 것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분명 드웍프는 내가 들키기 전에 도망쳤을 텐데……?

“흥,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눈치 군.

아가씨가 머무는 곳에는 씨씨도비라는 집 요정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고 있지. 조금 까탈스럽긴 해도 비위만 맞춰주면 3년 전 잃어버린 작은 동전이 어디로 숨었는지까지 다 알 수 있다는 거다.”

그게 뭐야 무서워……. CCTV도 아니고 씨씨도비라니……. 제작자의 네이밍 센스가 조금 이상한데?

“네놈이 훔친 그 장신구는 페론드 준남작께서 손녀인 페로렌 아가씨를 위해 남겨주신 유품이다. 페론드 준남작 님이 누군진 들어봤겠지?”

“페론드 준남작……?”

한 번도 못 들어본 이름이다.

“페론드님의 명성조차 못 들어 본 얼간이였던 건가……. 잘 들어라. 네놈은 세상 가장 위대한 세공사 페론드님의 유산을 단돈 몇 푼에 팔아넘긴 파렴치한 죄를 범한 것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만은 확실하구나. 절대로 소리치지 않을 것 같던 할아버지조차 이렇게 노하는 걸 보니…….

나도 그런 귀한 걸 고작 1,000셀에 팔아먹고 싶진 않았다고요.

“죄를 저질렀으니, 네놈은 앞으로 페로렌 아가씨의 충실한 개로써 살게 될 것이다.”

이게 뭔 개 되는 소리야……?

“전, 감옥에서 죗값을 치렀습니다!”

“닥쳐라! 아가씨 앞에서도 그따위로 따지고들 생각이면, 당장 네 목을 쳐내겠다.”

이 할아버지 보기와 달리 굉장히 무섭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이제 아가씨를 뵈러 갈 것이다. 앞으로 아가씨 앞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여섯 가지를 말할 테니 명심해라.”

표정 좀 풀고 말씀하시면 안 되나? 무서운 표정 때문에 뭘 말해도 다 까먹을 지경이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른 채 할아버지는 6가지 철칙을 읊기 시작한다.

“첫째, 아가씨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움직이지도 짖지도 말아라. 둘째, 아가씨가 집중하실 땐 네 존재를 느낄 수 없도록 시야에서 사라지되 숨소리도 들리지 마라. 셋째, 아가씨가 길을 가시다 바닥이 더럽다고 하시면, 네 몸으로 길을 만들 것이며 넷째, 아가씨가 화가 나서 손찌검을 할 때면 잘 때릴 수 있도록 몸을 대주어라.”

인제 보니 그 싹수없던 꼬마 아가씨의 성격은 다 이 할아범 탓이었구먼? 애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혼을 내서라도 인도를 해야지 오냐오냐만 하고 있으니 걔 성격이 안 나빠지고 배겨? 요즘 애들이 얼마나 흡수가 빠른데.

그런 내 생각을 반박하기라도 하듯 할아범이 경고한다.

“특히 중요한 다섯째, 아가씨는 엄연히 성인식을 치르신 성인이다. 실수로라도 절대 어린애 취급하는 행동을 보이지 마라. 아가씨 본인께서도 외적인 모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계시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라.”

아, 애가 아니셨다? 그 모습이 성인이라는 것도 믿어지진 않는데…….

“끝으로 여섯째, 아가씨께서는 더러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신다. 하루에 5번 이상 반드시 목욕해라. 혹여, 내 말을 어길 시 네놈은 결코 평범히 죽지 못할 것이다.”

5번 이상이라니 살가죽이 먼저 벗겨지겠다.

그의 협박 섞인 경고 이후,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집으로 끌려 들어간다. 일단은 상황에 적응부터 하고 그녀를 만나서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야겠다.

잘만하면 힘든 일 없이 풀려 날 수도 있을 테니까.

*

할아버지에게 끌려가면서 이 집을 두리번거렸는데, 저번에 그 집이 별장이라는 말이 확 와 닿는다. 그때 봤던 집도 웬만한 집 이상의 크기였지만, 이 집은 거기에 5배쯤 커 보인다.

그나저나 준남작의 손녀면 작위가 있는 건가? 준남작은 귀족이라 보기도 모호하고, 귀족으로 쳐준다고 해도 가장 낮은 작위니까 그 손녀쯤 되면 작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그런데도 이렇게 큰 집이 있는 걸 보면 그 페론드라는 준남작은 어마어마한 재력가였나 보다.

똑똑-

“아가씨 새로운 수행원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새침한 목소리와 함께 고급스러운 문양이 구불구불 새겨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장을 한가득 채운 책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보석을 연마하는 법, 세계의 보석들, 목걸이 문화, 역사적 세공사들. 대부분 보석이나 장신구 세공에 관련된 책자들이다.

시선을 살며시 옮기자 한편에는 어린 소녀가……. 아니,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숙녀가 화장대 앞에서 귀걸이를 바꿔가며 걸어보고 있다. 두 번 보고 느끼는 거지만 저게 어딜 봐서 성인이람……?

그녀가 끌려온 나를 잠시 흘겨보더니 못마땅한 듯 말한다.

“테드, 그거 비누로 씻긴 거 맞아? 아직 냄새나잖아! 다른 향으로 다시 씻겨.”

그 뒤로 쫓겨나서 1시간 동안 다시 씻겨진 후 돌아왔다.

가축도 이런 취급 받진 않을 것 같은데…….

“아직 마음에 안 들지만, 처음보다 낫네. 수고했어 나가 봐.”

테드가 페로렌에게 고개 깍듯이 고개 숙인 뒤 나간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아가씨에게 저런 모습을 보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뭐, 주인과 하수인 관계니까 이게 당연할 텐데도 말이다.

“너.”

“예? 예.”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면서 묻길래 살짝 놀랐다.

“나 어때 보여?

자신이 입은 옷의 드러난 가슴 부분을 살짝 강조하며 묻는다. 어떻게 보이냐고……? 엄마 옷을 훔쳐 입은 어린 소녀처럼 보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조금 전 방을 나간 테드의 말을 상기시켜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도록 조심하자.

“아름다우십니다.”

성적인 매력을 어필해보려 섹시한 드레스를 입은 듯하지만 정말 안 어울린다. 분명히 이쁘고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음에도 어려 보이는 것 하나 때문에 나에게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 채린이의 고백을 거절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녀가 재차 묻는다.

“어떻게 아름답지?”

기습적인 연계 공격이라니……. 식은땀이 다 나는구나. 주저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에 뇌세포들이 작전을 짜고 여러 해결 방안을 내놓는다.

미치게 아름답습니다? 아니야 그건 너무 천박해.

죽여주게 아름답습니다? 아니야 그건 너무 상스러워.

매우 크고 아름답습니다? 아니야 이건 뭔 개소리야 대체?

가짜로 느끼는 감정을 억지로 쏟아 내려고 하니, 뇌세포가 분열을 일으킨다. 예로부터 과유불급이라 했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 뇌세포가 많아지니 이상한 소리만 뇌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구나.

잠시 생각을 멈추고, 그녀가 진정으로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떠올려보자. 그때 불현듯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어른스럽게 아름답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단어는, 아름답다가 아니다. 그녀가 진정으로 듣고 싶어 하는 말. 그것은 바로 어른스럽다는 말일 터다.

그런 내 생각이 다행히도 먹혀들었는지 만족한 듯 끄덕이며 침대 끝에 걸터앉는다.

“음, 그래. 뭐 당연하지. 너처럼 품격 떨어지는 게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칭찬을 해줘도 저런 식으로 받는 건 천부적인 재능인가? 어쩜 저렇게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가 몰라?

침대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던 그녀가 갑자기 차갑고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흘겨본다.

“네가 여기 왜 끌려온 지는 알고 있지?”

“집사분께 들어서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옮겨 손톱을 정리하며 말을 잇는다.

“그래, 알고 있다면 얘기는 빠르겠네. 넌 앞으로 내 최하급 수행원이 될 거야. 앞으로 밥은 내가 남긴 것만 먹고, 잠은 문 앞에 서서 자. 기상은 나보다 두 시간 일찍 해서 내가 일어난 후 마실 차, 신을 실내화, 씻을 물을 깨끗이 해서 준비해놔.

그녀는 수행원으로서 할 일을 산더미처럼 내뱉는 와중에도 단 한 번의 시선조차 이쪽으로 주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 시야에는 들어오지 마.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올 경우 구석이나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어.”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충실한 개가 되라던 테드 집사의 말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 정도면 좋게 봐줘도 개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페로렌 입장에서 이게 개 취급이라면 할 말은 없다지만, 난 콧대가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게 솟은 이 소녀의 개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제게 기회는 없습니까?”

“기회?”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아……. 더럽고 수준 떨어지면, 눈치라도 빨라야 하는데, 그것조차 안되는 구제 불능의 인간인 거야? 지금 네가 저지른 일이 어떤 일인지는 알고 기회를 달라는 거야 지금?”

“물론 입니다. 하지만 저는 억울합니다.”

“억울해?

내가 한 일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세계 제일의 세공사 페론드의 위대한 유산이자, 상대 가슴에 비수 꼽는 말만 골라서 하는 소녀의 할아버지 유품을 ‘속아서’ 훔친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속아서 훔쳤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했다.

물론 그녀가 이런 내 말을 듣고 ‘그런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구나.’ 하면서 풀어줄 리는 없지만, 현실에서도 정상참작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말을 꺼내서 손해 볼 건 없으니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그래? 속아서 그랬다는 거지? 그럼 네 말대로 한 번의 기회는 줄게. 네가 가져간 그 물건, 1시간 이내로 찾아와. 단, 실패하면 앞으로 나한테 인간으로서 대우받긴 어려울 거야.”

본인은 잘 모르나 본데……. 나는 이 방에 들어온 뒤 제안을 건넨 당사자로부터 인간 대우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나저나 한 시간 만에 찾는 게 가능하려나?

[퀘스트 발생! - 한번 훔친 장신구는 되돌릴 수 없다.][난이도: 불가사의]

퀘스트가 떴다. 드웍프를 찾아 장신구를 찾아오는 내용이다. 보상은 ‘해방’

근데,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난이도 불가사의는 뭐지요? 난생처음 보는 난이도도 있었네요? 어렵다는 거야 쉽다는 거야?

“지금부터 딱 1시간이야. 뭐해? 출발하지 않고?”

-‘남은 시간 59분 59초.’

시간 초가 생기면서, 급작스러운 퀘스트 전개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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