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아웃-로그인>새로운 인연 --> “하연아?”
“앗?! 아……. 네?”
그녀를 부르자 매우 놀란다. 부른 내가 더 놀랐다.
“가자, 데려다 줄게. 집이 어디야?”
“채린이는… 요?”
채린이가 설명을 안 했나 보다. 뭐라고 설명하지……? 그때 하연이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채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채린아. 응. 아, 그래……? 알았어. 응 그럴게. 아니야 괜찮아. 그래. 응, 응. 신경 써줘서 고마워.”
확실히 나와 대화할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채린이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대충 무슨 내용으로 통화했는지는 다 들었다. ‘보증할 수 있는 좋은 오빠다.’, ‘같이 가면서 대화 많이 해봐라.’, ‘네 증상 고치는 데 도움 될 거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아, 음…….”
통화가 끝나고 머뭇거린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겠다.
“집, 갈까? 기다려봐 택시 부를게.”
“아! 아니에요…….”
“그럼 버스 타?”
“아……. 아니요…….”
“지하철?”
“아니…… 요.”
많이 힘든가 보다. 남자랑 단둘만 있는 상황에선 더욱 심해진다더니. 한마디 하기도 힘든가 보구나.
“으…….”
그녀가 혼자서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본인도 답답하겠지. 보고 있으려니 안타깝다.
“그냥 걸어가다가 택시 보이면 타고 가자, 집 방향이 어디야? 데려다 줄게.”
하연이와 함께 쭉 걷고 있다. 집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원래 걸어 다녔나 보다. 나란히 걷는 내내 그녀와는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다. 말을 걸면 전부 단답형으로 끊겨서 말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또각또각. 하이힐 굽 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이러고 있으니 나까지 말주변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그나저나 꽤 오래 걸었는데 다리는 안 아픈가? 굽도 조금 있는 것 같은데 그냥 택시 부를까……?
그 순간, 하이힐 굽이 비포장도로 균열에 깊이 빠지며 똑! 하고 부러진다.
“아앗……!”
“어? 하연아!”
“아…….”
다리를 삔 것 같다.
“괜찮아? 다리 다쳤어?”
드라마에서나 보던 클리셰가 나에게도 그대로 발생하는구나. 이럴 땐 정석에 따라…….
“내가 업어…….
“아니요! …괘, 괜찮아요.”
빛의 속도로 거절당했다. 현실은 드라마와 같지 않다. 현실에선 상황의 변수라는 게 참 다양하게 적용되기 마련이니까. 흠, 살짝 민망하네…….
“정말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아으…….”
발이 많이 아픈 듯하다. 나는 그녀의 발목 상태를 보며 하이힐만 조심스레 벗겨만 준다. 말없이 끙끙 앓기를 3분. 결국, 그녀가 먼저 머뭇거리며 입을 연다.
“오빠……. 죄송한데…… 어, 업어주시면…….”
말을 하면서 온몸을 떨고 있다. 말하면서도 심적으로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나도 어린 시절 가벼운 공황장애를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냥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하연이도 그때의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겠지.
“정말… 죄송해요…….”
“응? 아니야 괜찮아.”
사실 하연이는 핸드폰을 쥐고 택시를 부를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내 도움을 받았다는 건 그만큼 이 괴로운 증상을 고쳐보고 싶다는 의미겠지. 이 증상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더 큰 걸림돌이 될 테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겠다.
*
“엄마는 167이고 아빠는 186이에요.
“아 부모님 키가 커서 네 키도 그렇게 크구나. 너는 정확히 몇인데?”
“전 171이요. 근데 키는 오빠가 저희 아빠보다 더 커 보이는데요?”
“아니야, 내가 너희 아버지보다 조금 작아. 난 85야.”
집까지 그녀를 업고 걸어오면서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취미가 뭐냐는 말로 말꼬를 터서 대화하다 보니 어느덧 가족에 대한 키 얘기까지 나왔다.
“이제 진정 좀 됐나 보네? 처음보다 말하는 게 편해 보여.”
“어? 정말… 그렇네요……? 저, 사실 남자랑 이렇게 많이 말해본 거 처음이에요.”
본인도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실은 제가 남자 기피증을 앓고 있어서……. 남자들하고 대화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거든요.”
“응. 나도 사실 채린이 한테 얼추 들었어. 그 증상 때문에 네가 많이 힘들어한다고 그러더라. 나도 오래전에 비슷한 증상 앓은 적이 있어서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어.”
사실 채린이가 나한테 부탁한 거지만, 그대로 말하면 하연이가 채린이한테 미안해할 테니까…….
“아,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왜 갑자기 대화하는 게 편해진 건지 모르겠어요. 목소리만 들려서 그런가? 그건 아닌데……. 다른 남자들은 목소리만 들려도 엄청 떨리는데……. 이상하게 오빠한테 업혀서 말하니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도 너무 신기해요.”
“어쩌면 내가 남자로 안 보여서 그럴 수도 있지.”
내 농담에 하연이가 처음으로 웃는다. 웃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웃는 소리만 들어도 내 기분까지 좋아진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남자와 평범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별거 없지? 이렇게라도 대화하면서 네 증상이 호전되면 좋겠다.”
“네, 저도 정말. 이 증상 떨쳐버리고 싶어요……. 아!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작은 빌라다. 이곳 원룸을 빌려 혼자 사는 듯하다.
“혼자 사는 거 안 무서워?”
“적응돼서 괜찮아요. 근처에 사는 친구들도 많고요.”
부끄럽지만 나는 처음 자취할 때 상당히 무서웠다. 평소에는 신경 쓰이지 않던 것들이 잘 시간만 되면 귓가에 소름 돋게 강조되는 느낌이 들더라. 수돗물 흘러가는 소리, 시계 째깍거리는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한동안 내게 불면증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상황을 겪어보니, 아직 어린데도 혼자 사는 하연이는 참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내가 그냥 겁쟁이인 건가?
“저 이제 여기서 내려주세요.”
“잠깐만 내려주면 또 말 못 할 수도 있으니까 그 전에, 핸드폰 좀 줘 볼래?”
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앞으로 괜찮으면 하루에 10분씩이라도 통화하자. 그런 나쁜 증상들은 최대한 빨리 없어져야 너도 편하지. 그냥 친오빠라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연락해도 돼.”
“네, 오빠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거우셨을 텐데 죄송해요. 집까지 고생시켜드려서.”
“무겁긴 뭘, 너 밥 좀 더 먹어야겠더라. 그럼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다리는 얼음팩 같은 거 있으면 차갑게 찜질 좀 하고 귀찮더라도 병원에는 꼭 가보고.”
“네. 고,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혹시나 했는데 내려주고 얼굴을 보니 또 떨리나 보다.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네. 그래도 오랜만에 나와 바깥바람도 쐬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니까 기분은 좋구나. 이제 돌아가서 한숨 자고 게임이나 하자.
* * *
게임에 접속한 뒤, 단체 퀘스트를 끝내고 얻은 돈으로 옷 한 벌을 구매했다. 언제까지 팬티 차림으로 다닐 순 없으니까. 그런데…….
“아 쪽팔려…….”
정말, 쪽팔려 죽겠다. 이 도시에서 파는 옷은 하나 같이 패션 센스가 최악이다. 도대체 왜 남자 옷들에 노출도를 올려놔서 젖꼭지 하나씩은 보이게 해놓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니까? 팬티만 입고 다니는 것보다 이게 더 부끄럽다고.
반면 여자 옷들은 제법 괜찮아 보인다. 노출이 있긴 하지만 남자 옷만큼 심하지 않고 나뭇잎을 포인트로 잡아줘서 자연 친화적인 느낌을 잘 살렸다.
원치도 않는 변태 같은 옷을 의무적으로 사 입은 뒤, 배가 고파져서 식당으로 향한다. 그때.
“헙……?! 저 여자가 왜……?“
날 죽이려고 달려들다가 목마르다며 내 소중이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던 그 여자가 앞을 지나간다. 설마 날 쫓아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고, 근처 도시가 여기 밖에 없으니 여기로 온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마주치지 않게 다른 식당을 찾아가자.
*
-‘스테이크를 섭취하였습니다. 힘이 20 증가합니다. 이 효과는 1시간 동안 지속합니다.
와, 이럴 수가. 이거 정말 맛있다. 가격은 3만 셀로 단순히 포만감 채우는 요기 치곤 비싸지만 절대 후회할 가격은 아니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그 안에 감춰진 육즙이 뿜어져 나오며, 혀의 표면을 부드럽게 감싼다. 식감은 과장해서 말하면 이빨이 없어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연하고, 씹을수록 최고급 고기와 신선한 채소볶음의 향이 입안 전체를 풍성하게 감돌아서 먹는 이로 하여금 최고의 찬사를 끌어낸다.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맛이로다.
스테이크를 흡족하게 먹고 있는 와중 바텐더가 나에게 와인 잔 하나를 건넨다.
“손님. 이건 손님께서 고기를 너무 맛있게 드신다고, 다른 손님께서 주문해주신 와인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도 있네. 당혹스러우면서도 재밌는 이벤트다. 누가 준 걸까? 둘러보니 몇 안 없는 사람 중에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딱히 안 보이는데. 어쨌거나 공짜라면 사양할 이유는 없지.
좋은 와인은 향에서 알아보는 법. 와인의 향을 맡자, 잘 발효된 포도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사실 와인을 많이 즐겨보지 않아서 냄새를 맡아도 좋은 와인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근데 색이 왜 이러지? 와인의 색이 두 개로 보인다. 원래의 와인색 위로 다른 색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싶어 눈을 비비지만, 여전히 그렇다.
“저기요. 이 와인 색은 원래이런가요?”
“예? 뭔가 문제 있나요? 잠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와인을 눈으로 확인하더니 별문제 없단다. 그렇지만 가게에 진열된 와인 중에 이런 색을 띠는 와인은 없는데……. 뭐지? 뭐 상관없으려나? 맛만 좋으면 되지.
으음, 목을 넘어가는 느낌이 매우 부드럽다. 와인이 제법 맛있구나. 어쩌면 공짜라서 더 맛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공짜는 최… 고……. 어……? 근데 왜……. 나… 왜 이러지……? 갑자기……. 왜……. 이렇게……. 피곤…….”
*
정신을 차리고 어둠속에서 눈을 뜬다.
“흐억!”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잠들었었나? 여긴 어디지? 먹먹할 정도로 어두운 환경이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다.
분명 스테이크 마시고 와인을 마신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후의 전혀 없다.
손발은 꽁꽁 묶여있다. 이런 상황 왠지 익숙한데……. 설마, 납치당한 건가? 대체 누가? 왜? 이렇게 뜬금없이?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을 하염없이 맴돌지만 마땅한 답을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사람. 정황상 가게 주인장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다. 인신매매단 같은 건가? 와인 색이 이상해 보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던 건데. 이런 젠장!
공짜 좋아하다가 골로 가게 생겼네.
일단 침착하고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내자. 우선은 지도를 켠다.
“하아…….”
설마 했는데 이곳이 어딘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딘지 모를 곳으로 잡혀 와서 내 신선한 장기를 산채로 끄집힌 채 아무도 모를 숲속에서 쓸쓸히 죽어가게 될까? 아니면, 눈알이 8개쯤 달린 악마에게 잡혀가 사악한 흑마법의 산제물이 될까?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와중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생하셨군요. 이건 추가 사례금입니다.”
“별말씀을 저기……. 혹시나 저희 보스에게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외부에 알려질 일은 없을 겁니다.”
누구지? 한 명의 목소리가 귀에 익는다. 분명 어디서 들었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하던 중 덮고 있던 천막이 확 걷히면서 눈이 아플 정도의 밝은 빛이 화악-! 새어 들어온다.
“윽!”
“생각보다 금방 깨어났군.”
누구? 누구지? 처음 듣는 목소린데…….
눈이 빛에 적응하자 앞에 있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노년의 할아버지였다.
역시나 처음 보는 얼굴이다. 깎아 지른 듯한 콧수염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테안경,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한 정장이 그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