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23화 (23/147)

<-- <로그아웃> 새로운 인연 -->                               “푸하하! 그래서? 그래서 걔는 뭐래?”

“지는 손만 잡았다고! 보고 있으면 되게 웃기다니까?”

언제나 시끌시끌한 대학가 술집. 최신 유행하는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술에 잔뜩 취해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하는 청년들이 넘쳐나는 이곳도 참 오랜만이다.

“기단 오라버니! 여깁니다!”

한 아가씨가 구석 테이블에서 발랄하게 소리치며 나를 향해 팔을 크게 흔든다.

임채린. 나이 21살. 키 156cm에 몸무게……. 대충 4, 50사이겠지 뭐.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 가르치는 과외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난 동생인데, 외모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싹싹하니 활발해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다.

예전에는 과외 외적으로도 만나 얼굴을 자주 봤는데, 내가 대학교를 자퇴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정확히는 일에 몰두하느라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끊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우연히 만나서 다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때 이 친구한테 고백 받아서 사귈 뻔도 했으나, 당시 얘가 미성년자이기도 했고 키 차이도 크게 나고, 이것저것 안 맞는 게 많아서 거절했다.

남들은 배가 불렀다고 하지만, 오래전에 봐서 그런지 동생 이상으로 안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그래도 옆에 두면 참 괜찮은 동생이다.

“오빠!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내가 오빠 요즘 힘들단 말 듣고 힘 좀 써서 회복의 자리를 마련했죠.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이 친구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연결 다리라고 부를 정도로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면이 있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면 요즘 자주 못 만나는 내 친구들까지 불러모아 이런 술자리를 만들어 낼 정도라는 것으로 설명이 될까?

“강기단! 진짜 얼굴 까먹겠다야. 너 회사 때려치웠다며? 존나 부럽네! 새끼. 나도 때려치우고 싶다.”

“아저씨 연락 좀 하고 살아요. 좀!”

“이 친구 이거! 왜 이렇게 늦었어?”

“야, 오랜만이다. 늦어서 미안해. 차가 좀 막혀서.”

역시 친구는 친구다. 연락이 끊겨도, 오랜만에 만나도, 서먹한 것 없이 얼굴 보며 편하게 웃을 수 있다니까.

누나! 여기 한 명 더 왔거든?! 술잔 시원한 거 하나랑 병 세 개만 더 줘요!”

“너넨 아직 학교 다녀?”

“졸업하고 일 다닌 지가 언제야?”

“난 아직 1년 남았어.”

다들 술자리 분위기에 들떠서 화기애애하다. 시끌벅적한 자리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세상 구경이라도 하지. 나도 한잔하면서 기분 좀 띄워야겠다.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동창회 하는 줄 알았네.”

나까지 무려 9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모여 있다. 그중 5명은 내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고 나머지는 채린이를 통해 알게 된 친구와 동생들이다.

“아니, 선생님! 무슨 날이냐니요? 회사 그만뒀다고 벌써 날 세는 거 포기하셨어요? 오늘은 불타는 황금 요일! 다음 주까지 쭉 황금연휴 아닙니까!”

아 벌써 그런 날이 됐구나. 확실히 친구 녀석 말대로 날 세는 걸 잊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땐 그렇게 연휴만 기다렸는데, 매일이 연휴가 되니 황금연휴든 뭐든 이제 눈에 안 들어온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간사하다니까?

“근데 이 자슥, 숙녀분들 앞에서 옷 한번 후리하게도 입었네.”

“이게 요즘 유럽 쪽에서 먹히는 패션 선구자 스타일인데 모르시나 봐?”

“이야, 요놈. 물에 빠지면 입만 살아서 동동 뜨겠어요. 구라가 아주 그냥 찰져.”

사실 1차만 하고 갈 것 같아서 얇은 티 하나에 반바지만 입고 왔는데, 얘들은 오늘 끝까지 갈 생각인가보다.

“야, 그래도 기단이는 키가 크니까 뭘 걸쳐도 너보다 나아 보여.”

“저기요, 지금 싸우자는 거예요?”

두 친구의 장난스러운 싸움에 주변에서 키득키득 웃는다.

“오빠들! 나 지금 친구 한 명 더 불렀는데 괜찮아?”

채린이가 아까부터 핸드폰을 두드리더니 친구 한 명을 더 불렀단다.

“이뻐?”

“당연하지!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완전 이뻐. 패션디자인 학과라 옷도 잘 입어!”

“어, 그럼 환영!”

하여간 사내 녀석들이라고 이쁜 것부터 찾는다. 물론 나도.

“환영!”

*

“하연 아기씨! 여깁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채린이가 일어나서 입구를 향해 팔을 흔든다. 그곳엔 목 끈이 있는 홀터넥에, 어깨가 살며시 드러나는 오프 숄더 원피스를 이쁘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채린이를 발견하고 다가오는데, 친구 놈 3명이 동시에 이런 말을 내뱉는다.

“와, 진짜 이쁘다.”

그중에 여자친구 있는 분이 정확히 2분이다.

“너희 여자 친구 있는데 그런 말 해도 되는 거냐?”

“아니, 그냥 표현만 한 거잖아. 말도 못 해?”

“뭐 어련하시겠습니까?"

확실히 친구 놈들 말대로 이쁘긴 하다. 피부도 하얗고 눈도 크고 다리도 시원스럽게 뻗어있어서 어딜 가나 주목받을 법하다. 거기에 스타일까지 좋으니 지금 당장 연예계를 데뷔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는 나랑 같은 학교 패션디자인과에 다니는 송하연. 나이는 스물 한살이고…….”

채린이가 그 친구를 자기 옆에 앉혀 놓고 소개하는데 친구 하나가 말을 막는다.

“잠깐만, 채린아. 근데 너 뭐 친구 대변인이야? 자기소개는 원래 직접 해야지. 우리 뉴페이스의 아리따운 숙녀분 목소리 좀 들어봅시다.”

“아……. 제, 제가요……?”

“오! 방금 들었어? 목소리도 완전 이뻐! 계속해. 계속해. 계속해.”

내 친구 녀석이 짓궂게 자기소개를 시키며 응원가 부르듯 계속하라는 말을 반복한다. 나도 그녀의 목소리가 더 들어보고 싶긴 하지만, 그녀는 그런 주목이 다소 부담스러운 것 같다.

하기야 나라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선 그럴 테니까…….

“야, 그만해. 우리 다 처음 보는 데 불편하시겠다. 채린아 네가 소개해 줘.”

“와 이거 나만 나쁜 놈 만드는 거 봐! 얘들아 기단이 이 새끼 벌써부터 점수 따려는 거 보이냐?”

“점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원래 나 같은 젠틀맨들은 태생부터 이런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거야.”

“푸핫! 젠틀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중 가장 상또라이가 킥킥.”

결국, 채린이가 그녀를 소개하고, 그녀에게 우리를 한 명씩 소개하고 나서 술자리를 이어갔다. 한참 술로써 흥이 오르자 1차를 끝내고 나와 2차로 호프집에 들른 뒤 3차 목적지를 정했다.

“야! 우리 클럽 가자! 클럽!”

“어! 오빠 저도 클럽 좋아요! 춤추자!”

이 친구들은 클럽에 환장한다. 나는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하나 분명한 건 그곳에 사람을 미치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클럽 받고, 테이블은 제가! 잡아드립니다.”

“어 진짜? 웬일이야? 오늘 같은 날은 테이블 잡으려면 최소 3, 4바틀은 주문해야 할 텐데……?”

“돈 걱정 말고 자리 있는 곳이나 알아봐.”

“이야, 사장님 깡다구 좋으시네. 요즘 사업 좀 잘 되시나 봐요? 그럼 내가 좋은 곳으로 안내할게. 이 근처 말고 차 타고 조금 더 나가자. 더 좋은 데 있어. 내가 웨이팅 없이 바로 입장하게 해줄게. 물도 그쪽이 훨씬 더 좋아.”

차를 타고 20분 정도 와서 한 클럽에 들어왔다. 근데 친구 한 녀석이 입구를 통과하며 불같이 화를 낸다.

“저 가드 어이가 없네? 지금 봤지? 나 뺀찌 먹이려는 거? 기단이는 저 복장으로도 통과시키면서 왜 나를 잡아? 미친 거 아니야?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뭐? 스타일이 구려? 짝퉁 아니냐고?”

“신입이라잖아. 네가 한번 참아.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기단이랑 너랑 비교하면 안 되지. 너는 본바탕이 다소 후달리잖냐.”

“이 자슥이 그렇게 정확한 지적을 하고 들면 내가 할 말이 없네. 킥킥. 아니 근데, 진짜 기분 나쁘다고. 아무리 딸려도 입뺀 당할뻔한 건, 생전 처음이네. 테이블 잡았다니까 들여보내 주는 거 봐. 뒈지려고 진짜.”

“풀어. 풀어. 들어가면 마음 달라져. 오늘 석찬이가 크게 쏜대잖냐. 기분 좋게 마시면서 놀자고!”

내가 봤을 때 입장 거부당할 뻔한 건 복장이 문제가 아니라 태도 문제가 아닐까 싶다. 가드의 얼굴을 귀엽다고 톡톡 치는데 열이 안 받고 배길까?

둥-! 쾅-! 둥-! 쾅-! 둥! 둥!

안으로 진입할수록 클럽의 열기가 뜨겁게 느껴진다. 괴물 같은 스피커가 고막을 자극하며 심장을 둥둥 울려대고, DJ의 현란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열광하며 짜릿한 비트에 몸을 맡긴다. 오색찬란한 조명은 벽에서 벽으로 뻗어가며 환상적인 춤판의 열광을 고조시킨다.

바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친구들은 모두 춤을 추러 나갔다. 나는 춤도 못 추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테이블에 앉아 샴페인만 축내고 있다. 애들은 어차피 춤만 출 거면 왜 굳이 비싼 돈 주고 테이블까지 잡은 거야?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채린이 친구인 하연이도 춤추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하연아! 넌 춤 추는 거 안 좋아해?

“아……. 네! 저는 별로…….”

하연이는 첫인상과 달리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다. 채린이나 여자끼리 대화할 때 보면 이 정도로 조용하진 않던데. 나나, 내 친구들한테는 먼저 말 거는 법이 없다.

“아니 클럽에 왔으면 춤을 춰야지! 두 분 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일어나! 일어나! 놉시다!”

한창 춤을 즐기던 채린이가 다가와 나와 하연이의 손을 잡고 나간다. 춤은 전혀 못 추는데 이끌린 탓에 억지로 나가서 몸만 흔들고 있다. 하연이도 음악에 맞춰 몸을 들썩이며 손뼉만 치고 있다. 우리 둘 다 클럽 초보 티를 팍팍 내고 있다.

“훠우!”

그때, 한 남자가 몸을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다짜고짜 하연이 허리에 손부터 얹는다. 그 순간 하연이의 표정이 얼어붙으며, 몸을 잔뜩 움츠린다.

이게 이곳의 분위기이다 보니 그 남자한테 뭐라고 하긴 그렇지만, 여자 쪽에서 싫어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지.

나는 하연이의 손을 잡아 그 남자에게서 떨어지게 한다. 다행히 그 남자도 그 이상 집적대는 눈치는 아니다. 곧바로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난다.

그러나 하연이는 여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떨고 있다. 그렇게 무서웠던 건가? 나는 그녀를 테이블로 데려간다.

“하연아, 여기 잠깐만 있어 봐.”

나는 채린이를 불러 불안해 보이는 하연이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하연이를 진정시킨 채린이가 나를 조용히 불러낸다.

“오빠, 혹시 집에 갈 때 하연이 좀 데려다줄 수 있어?”

“하연이? 왜? 집에 가고 싶대?”

“응, 하연이도 조금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춤을 못 추다 보니 음악 듣고 사람 구경하는 맛에 앉아있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 하려니 지루해서 중간에 빠지기로 했다. 하연이도 보아하니 나와 비슷한 것 같다.

“알았어. 지금 가면서 데려다주지 뭐.”

“그리고 잠깐만……. 하연이에 대해 해줄 말이 있는데…….”

*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어쩐지……”

송하연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큰 학대를 받은 뒤로 남자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채린이를 비롯한 그녀의 많은 친구가 옆에서 도와주고 자신도 그것을 고치고 싶기에 노력한다지만, 트라우마라는 것이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라는 건 나 또한 겪어봐서 잘 알고 있다.

“근데, 채린이 얘는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그러는 건지 참…….”

‘사실 하연이 오빠한테 소개해주려고 이 자리 데려온 거야. 오빠라면 착하고 배려심도 많으니까. 하연이가 나아지는 데 도움 될 것 같아서. 다른 오빠들은 음흉해서 안 될 것 같고. 이참에 하연이랑 연락처도 교환하고 사이좋게 지내봐. 설마 나도 모자라서 하연이까지 거절하진 않겠지?’

채린아, 내가 얼마나 음흉한 인간인데 나를 믿고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기는 거니 대체……?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온다. 일단 하연이가 기다릴 테니까 가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