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볼트 마을 습격사건 --> 독이 든 주머니를 꺼낸다. 독을 무기에 바르기 위해 독주머니를 거꾸로 뒤집는데, 왜 이렇게 찔끔찔끔 나오는 거야? 점성이 있다더니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좀… 나와라… 나와!
툭-!
“앗! 아! 아 이런!! 망할!!”
주머니를 위아래로 털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다. 아, 세상 열 받네. 진짜…….
“크아아악!!”
응? 누군가 나 대신 열 받음의 비명을 질러주신다. 뭔 소리인고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가 떨어뜨린 독주머니가 눈에 붙은 한 명의 남성분이 계신다.
그는 번쩍번쩍 빛나는 대검을 든 채 온몸이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설마 저게 저 사람한테 가서 붙을 줄은 몰랐네……. 나름대로 회심의 작전이었던 것 같은데, 나 때문에 다 말아 먹은 거 아니야?
*
정답. 독 때문에 그의 몸이 굳고 나서 코볼트 족장은 모두를 행동불능으로 만들었고, 뒤이어 들이닥친 코볼트 무리에게 모두 끌려가서 죽었거나, 사망했거나, 목숨을 잃었겠지 뭐…….
나는 여전히 나무 위에 엎드려있다. 초조함에 까득까득 손톱을 깨물며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하나뿐인 독약은 날려버렸고 주변은 너무 조용해서 도망가기도 글렀고. 코볼트 족장과 맞서 싸우자니……. 두 눈으로 그 강함을 직접 목격했잖아? 아무래도 다음 파티가 올 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제까지 거기 숨어있을 생각이냐!”
코볼트 족장의 목소리와 함께 내가 올라탄 가지가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17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오, 아파!”
코볼트 족장이 스태프의 끄트머리를 위협적으로 들이민다.
“너는 뭐냐?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듯 코볼트 족장의 모습은 듬성듬성 떨이 빠지고 목소리는 쇠했다. 한참을 멀뚱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자 그는 스태프로 내 팬티를 걸어 쭈욱 들어 올린다. 그와 동시에 내 신체는 팬티에 걸려서 허우적댄다.
“으악! 뭐 하는 거야?!”
“말은 할 줄 아는 모양이구나.”
바둥거리다 바닥에 떨어진다.
“잠깐 무슨 말을 해야 당신이 나를 안 죽일지 생각하고 있었죠.”
나는 지금 이 상황에 살짝 놀라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게 생각보다 이성적으로 보인 탓이다. 조금 전 무시무시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그냥 동네 할아버지 같은 느낌?
“네 놈은 왜 나를 도와준 거지? 그놈들과 함께였다면 다른 인간들이 원하는 것처럼 나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도와? 언제? 아……. 조금 전 독을 말하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실수지만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좋은 생존 수단은 없으니까…….
“당신과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한 말이지만 나 자신도 조금 뻔뻔해 보인다.
“얘기를 나눠? 흥. 인간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나 같은 괴물하고 할 얘기가 뭐 있다는 거냐?”
코볼트 족장이 자조 띤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니까… 그게 조금 이상하다는 겁니다. 당신이 정말 인간을 죽이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잡아다가 두는 건지……. 여기 오면서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당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순간부터 저는 당신들이 인간을 죽이는 걸 단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이건 사실이다. 처음 두벤 마을에 들어와서 마주한 코볼트는 분명 난폭했다. 유저들의 목을 대롱거리게 할 만큼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영역에 들어온 후로부터는 코볼트들의 공격이 너무 조심스러웠다. 대부분이 행동불능으로만 만들 뿐. 이후에 마무리 일격을 날리지 않았으니까…….
“흠……. 네놈은 확실히 다른 인간들과는 달라 보이는구나. 내 동족의 피를 보지도 않았고, 적당히 통찰력도 가지고 있어. 따라와라. 네게 할 얘기가 있으니까.”
예기치 못한 상황. 이야기는 또 다른 전개로 흘러간다.
*
나는 그를 따라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도중에 마주친 코볼트 무리가 날 뜯어 삼킬 듯이 쳐다보는 걸, 애써 외면하며 걷자 곧 하나의 동굴이 나온다.
그곳엔 널따란 헝겊 더미가 중앙에 쌓여있고 촛불이 동굴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열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법한 동굴 끝에 다다르자 그가 입을 연다.
“먼저, 네 녀석 이야기를 들어보지. 네가 왜 여길 왔는지, 또 궁금한 게 무엇인지. 너도 분명히 이해되지 않는 게 있을 테니…….”
“아……. 저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모험가입니다. 두벤 마을에 당신들이 갑자기 나타나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그래서……. 네놈 역시 나를 죽이러 온 거군?”
그가 확인하듯 묻는다. 본인 앞에서 말하긴 껄끄럽지만, 지금은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또, 제가 봐온 것들을 생각해보면 실상은 의뢰 내용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당신들은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는 거죠? 마을 주민들은 당신들이 나타난 이후로 공포에 떨고 있어요.”
“네놈은 제법 사물을 넓게 볼 줄 아는 듯하니, 내가 하나 물을까? 넌 우리 마을을 봤지? 아마 두벤 마을도 봤을 거야. 두 마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어떤 생각……?”
그가 묻는 말의 요지를 이해 못 하겠다. 차이점이라면 인간과 코볼트의 마을이라는 거? 그 밖에는…….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질문이 조금 광범위했던 것 같군. 두벤 마을은 생긴 지 이제 30년이 조금 된 마을이야. 그럼 우리 마을은 어떨 것 같지?”
그의 물음에 코볼트 군락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마을 입구에 돌을 깎아 만든 명판. 깎여 나간 글자 위로 자라난 이끼. 나무로 세워 놓은 갈라진 울타리. 그것을 뚫고 자란 큰 나무의 기다란 뿌리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들은 결코, 하루 이틀 내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설마 당신들은 원래부터 이곳에…….”
“그래… 맞아……. 여긴 400년 동안 우리가 지켜온 터전이었어. 정확히는 두벤 마을이 있던 그곳까지 전부 우리의 영역이었지.”
400년.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런데 두벤마을 주민들은 왜 이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게 오래됐다면 왜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죠?”
“정확히 언제였더라……? 마을이 생긴 게 30년쯤 됐으니 그 정도 되겠군. 어느 날 젊은 청년 하나가 찾아와서 자신이 쫓기고 있으니, 몸 좀 숨겨달라고 하더군. 너무나 다급한 표정이기에 나는 알겠다고 했지. 코볼트 마을까지 찾아와서 부탁하는 인간이 흔치 않잖아? 얼마나 절박했으면…….”
족장은 바로 어제 겪은 일인 듯.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얘기를 풀어나간다.
“그 사건 이후로 그는 지금의 두벤 마을이 되는 근간에서 혼자 조용히 살 테니, 허락해주지 않겠냐고 하더군. 나는 흔쾌히 승낙했지. 넓은 영역에 인간 한두 명 살게 하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까.”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확실히 난폭하다고 소문난 코볼트 치고는 상당히 유한 성격을 지닌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을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우리 영역을 점점 깊게 침범하기 하더군. 네놈 알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코볼트는 자기 영역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편이야. 우리 부족은 조금 덜 한편이긴 해도 너무 심각하게 침범하면 우리로서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의 말이 공감 가서 고개를 끄덕인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우리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생활 영역을 점점 좁혀나갔어. 인간들도 우리도, 너무나 다른 생활방식 때문에 서로 마주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런데 그 청년은 거기서 그칠 줄 모르더군. 그가 지나칠 정도로 영역을 침범해오자 우리 부족원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어.”
그는 노쇠한 목에 마른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잇는다.
“부족의 불만을 들은 내가 직접 나서서 그와 얘기했어. 다행히 이야기는 좋은 방향으로 흘렀고, 그는 내가 지정해준 영역만큼을 허물고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약속까지 했지.”
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한데, 돌아온 건 무기와 횃불을 든 인간들이었어. 그들은 우리 영역에 불을 지르고, 내 동족들을 무참히 죽여갔지…….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나설 수밖에 없었어. 내 동족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나라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배은망덕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래도 맹세코 마을 사람들을 죽이진 않았어. 우리 영역에 침범한 이들을 잠재우고 가둬두기만 했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말이야. 인간들은 우리가 학살을 자행한다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우린 단 한 번도 인간들을 죽인 적 없어. 나는 무분별한 투쟁을 원하지 않아. 내 부족들한테도 그 부분에 대해선 단단히 일러두었다고…….”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느낀 것과 또 엘메이에게 들은 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짚이는 점은 분명히 있다. 그 점에 관해서 물어야겠다.
“그렇지만, 몇 달 전 당신이 두벤 마을의 촌장을 살해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제가 마을 근처에서 만난 코볼트는 인간들을 살해했고요. 이것만 본다면 한 번도 죽인 적 없다는 당신의 말은 모순적인 거 아닌가요?”
피해를 본 사람은 작은 피해에도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비록 학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을 주민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처음 나오게 된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마을에서 인간을……? 아……. 설마 그 아이가…….”
내 질문에 코볼트 족장은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여기에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잠시 흔들리던 호흡을 가다듬은 코볼트 족장이 이내 입을 연다.
“몇 달 전 나는 부족원들과 큰 결단을 내렸어. 나는 두벤마을의 촌장이었던 그 청년과 그의 아들을 만나 가둬둔 마을 주민들을 모두 돌려주고, 딱 한 달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지. 그 이후에 우리는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었어.”
“떠난다고요?”
“그래. 나는 너무 늙었고, 더는 그들과 싸울 힘도 의지도 없어. 그렇다고 부족원 손에 피를 묻히게 하자니, 그건 모든 코볼트들을 욕되게 하는 짓이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가꿔왔던 터전을 버린다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동안 그가 해온 고뇌가 얼마만큼 고통스러웠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제안을 건넸건만 그 청년에겐 내 제안이 아닌 다른 게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야.”
그가 허리춤에 묶어둔 주머니를 풀어 하나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스태프로 조심히 건져 올려 보여준다.
눈물 모양의 그 보석은 맑은 물처럼 투명하고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인다. 바이올렛 색상으로 빛이 나다가 에메랄드 같은 초록빛으로 변하기도 한다. 정말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보석이다.
“정말로 아름답지 않은가? 하지만 이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이 보석은… 세상 모든 신이 저주를 내린 보석이야. 세상을 경험하지 않은 순수한 자만이 이 보석을 직접 만질 수 있거든? 내 딸이 바로 그런 아이였어.”
그 보석을 보는 코볼트의 눈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인다. 저주의 기운 때문인지 힘든 얼굴로 보석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는다.
“나는 코볼트의 수명을 넘도록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겪고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생명체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참 어렵더군. 그 간절해 보이던 청년 하나를 믿었을 뿐인데, 그때의 내 선택이…….
그가 동굴 한편에 덮여 있던 헝겊을 걷어내자 코볼트 하나가 검게 변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었다.
“가장 아끼는 딸의 목숨까지 가져가게 할 줄이야…….”
“아…….”
이제 알 것 같다. 그의 눈이 유독 슬퍼 보이던 이유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