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겐 너무 버거운 그녀 --> “아, 이런 세상에…….”
눈앞에 감옥 철창을 통째로 뜯어 손에 쥐고 있는 둠페일이 서 있다. 그는 야수의 것처럼 날이 선 호흡을 씩씩 내쉬며, 갑판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정중앙을 가로막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이 심히 불쾌해 보인다. 예상컨대 조심스럽게 비껴가려다가는 갈비뼈 한두 개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쾅-! 뒤쪽에서 철제문 가격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앞에는 잔뜩 성난 불곰이 길을 막고 있고 뒤에선 굶주린 흑호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 이렇게 된 이상.
그동안 부모님께 쓰지 못한 안부 편지나 써야겠다. 그동안 못한 말 이렇게라도 전해드려요.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둠페일이 소리에 반응하더니 내게 다가온다. 그의 기에 압도되어 할 말도 도망칠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갑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나를 도와줄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이게 무슨 소란……! 이, 이게 뭐야?!”
하늘이시여 죽으란 법은 없나 봅니다. 그렇게 얄밉던 길드원 얼굴이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나 좀 살려줘요! 얘들 깨어났어요!”
“조, 조, 조금만 기다려!”
그러더니 올라간다.
“야 이 씨……!”
이 상황에서 조금을 어떻게 기다리냐 이 인간아!! 일단 다가오는 그를 진정시켜보자.
“잠깐만, 진정하시고 아저씨……. 저도 아저씨랑 같은 노예거든요?”
“노예라고? 감히! 누구더러 노예라는 거냐! 이 몸은 둠페일이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귀를 쩌렁쩌렁 울린다. 판단을 잘못한듯하다. 진정제를 넣으려다 흥분제를 투약한 꼴이다. 흥분상태 그대로 공격 자세를 잡는다.
곧이어 투석기로 바위를 던진 것같이 빠르고 묵직한 주먹이 날아든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빠른 공격이라 보이더라도 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어느새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온다. 일단은 피하려고 움직이고는 있는데, 주먹이 커서 전부 피하진 못할 것 같다. 근성 능력치가 낮은 탓에 2번 연속 죽음 저항을 바라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이고…….
들어오는 피해의 양에 따라 잠재가 발휘된다면 살수도 있을 테지만, 잠재가 발휘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말짱 도루묵이다.
이제 곧, 피해가 들어 온다. 어떻게 모은 잠재인데, 제발 부디 한방만 견디자……!
“으으……!”
파악!!!
“음……?”
분명히 큰 소리가 났음에도 피해가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잔뜩 쪼그라든 어깨를 펴고 살며시 눈을 뜬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내 목숨을 노리던 여인이 어느새 철창문을 부수고 나와, 둠페일의 엄청난 주먹을 발로 막아내고 있었다.
“네년은 뭐야?”
태연한 척하지만 둠페일도 다소 놀란 듯하다. 자신의 주먹을 조금의 흔들림 없이 발하나로 막아낼 줄은 상상도 못 한 얼굴이다.
“방해. 내. 적.”
“뭐? 흐읍?!”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신체가 공중에서 화려하게 회전하며, 둠페일의 안면을 돌려찬다.
콰앙!!! 그녀의 발에 맞고 날아간 둠페일은 다른 노예들이 갇혀있던 감옥을 몇 개나 부수며 멀찍이 날아간다. 내가 저런 공격을 맞고 견딘 거라고? 지금 따질 때가 아니야 도망치자!
나는 둠페일이 날아간 틈을 타 갑판 위로 잽싸게 달린다. 그녀가 사냥에 나선 흑표범 같은 몸놀림으로 나를 뒤쫓는다. 빠른 속도에 거리가 급격히 줄어든다. 그 순간…….
쿠웅! 돌 더미에 묻혀있던 둠페일이 튀어나와 그녀의 옆구리를 가격한다. 그녀는 벽을 부수고 노예들을 씻기던 방까지 날아간다.
“제법 강해. 근데, 그게 전부군.”
둠페일이 벽을 뜯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저 모습들을 보면서 든 생각. 갑판 위의 인간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 괴물들을 데려온 거야?
마취약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감옥 문조차 통째로 뜯어버리는 괴물을 어떻게 호송하려고 한 건지…….
이래서 사업이란 아이디어만 있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다. 사전조사부터가 엉망이니 이 사달이 날 수밖에…….
소란이 거슬렸는지 부서진 감옥 사이로 잡혀 온 다른 노예들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고 있다. 쟤들도 설마 저 정도로 세다면, 여긴 지옥으로 바뀔 것 같다.
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서둘러 갑판으로 올라간다.
*
갑판에 올라오니 길드원들이 이제서야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 아주 느긋해 빠졌어!
“아니,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아래층이 지금 난리가 났는데!”
그때 내가 올라온 계단으로부터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7명? 8명?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그게 몇 명이든 중요한 건 저들의 머릿속엔 지금 파괴본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때, 눈앞에 시스템 창 하나가 떠오른다.
[퀘스트 발생! – 스핀호 노예 탈출 대작전!][난이도: 어려움]
막스핀 길드원이 잡아 온 노예들이 우올로 지하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들은 분노에 휩싸여 막스핀 길드원과 전투를 일으킵니다. 이 거친 싸움터에서 살아남으세요.
〈목표〉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살아남으세요.
〈보상〉
명성 50 획득 / 잠재 5 획득 / 경험치 획득
뜬금없이 퀘스트다. 이런 식의 이렇게 역동적인 무작위성 이벤트라니 게임 잘 만들었는데……? 퀘스트가 내 목적과 같으니까 일단은 확인하고 살아남는 걸 최우선으로 하자.
“크아아!!!”
“오, 온다! 도망쳐!”
싸움꾼들이 터프하게 소리치며, 갑판 위로 달려든다. 그들은 장비도 두르지 않은 알몸이고, 선원들은 저마다 가벼운 장비라도 든 상태이다.
그런데 기선제압부터 당하고 있으니 뭐라고 해야 할지…….
“젠장! 난 싸움 못 하는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닥치고 일단 막아!”
“난 보스한테 전서구부터 날릴 게!”
정말 오합지졸들이 따로 없다. 나도 무기를 꺼내 들고 주변을 경계한다. 갑판으로 처음 올라온 인원은 정확히 7명이다. 그러나 그 뒤로 한두 명씩 계속 올라오고 있다.
그들은 싸움꾼답게 선원들이 칼을 들었다는 것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든다. 오히려 무기를 뺏어 듦으로써 기세가 등등하다.
“흐아!”
촤악-! 선원의 목이 반쯤 잘려 피를 뿜는다. 그 옆의 다른 선원은 주먹으로 얼굴이 뭉개지도록 맞고 있다. 싸움꾼들은 피가 난무할수록 더욱 광적으로 흥분해서 선원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다.
“이런 약골들이 우릴 잡아 왔단 말이야?! ……넌 뭐야? 왜 동료들이 싸우는 데 가만히 있어?”
선원의 턱을 잡고 목을 부러뜨린 싸움꾼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온다. 피를 흠뻑 묻히고 저벅저벅 오는 걸음이 마치 살인귀 같다.
“저는 동료가 아닌데요.”
나는 이놈들을 한 번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다니 남자답지 못한 놈이구나! 네놈부터 죽여주마!”
그는 내 진심을 몰라 준 채 나를 향해 줄달음치며 손을 뻗는다. 그가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발을 뒤로 빼고 장도를 들어 그대로 목을 향해 찔러넣는다.
“커억……!”
장도가 그의 목을 깊숙이 찔러 들어가며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칼을 뽑아내 바닥에 털자, 액션페인팅과 같은 예술적 작품이 바닥에 그려진다.
어떻게 한 거지? 방금 엄청난 피해를 준 것 같은데? 스스로 행한 행동에 감탄이 나온다.
“으아아!! 다 죽여주마!”
한 명의 싸움꾼이 쓰러지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싸움꾼 하나가 패기 있게 소리치며 달려온다. 그가 곧 하늘 높이 뛰어 나를 향해 칼을 내려친다. 나는 장도를 들어 튕겨냄과 동시에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두 허벅지를 횡으로 긋는다.
“크윽!”
깊은 상처에 무릎 꿇은 그를 향해 사선으로 내리 벤다. 싸악-! 목부터 가슴뼈까지 피부가 갈라져 뼈가 드러난 채 바닥에 고꾸라진다. 기본 검술의 보정 덕분인지 제법 멋있는 싸움을 할 수 있다.
내가 싸우는 모습을 곁눈질하던 한 길드원이 나를 부른다.
“이봐! 너 싸울 줄 알잖아? 잠깐, 따라와!”
투펭. 나한테 뭐라고 했던 그 재수 없는 인간이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내 팔을 잡아 이끌어 소란이 덜한 곳으로 간다.
“저기 왼쪽 길 보이지?”
투펭이 뒷길로 통하는 왼쪽 길을 가리킨다. 그곳에선 싸움꾼 3명 이 선원들과 대치 중이다.
“저기 좀 뚫어.”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반드시 그 길을 지나야 할 필요가 있다면 싸워볼 수는 있겠지만, 이유도 없이 왜 내가 이따위 인간을 위해 그걸 해주겠는가?
“우올로 후미 지하에 비트급 우올로 두대가 있어. 그걸 타고 탈출할 수 있다고.”
“동료를 버리겠다는 건가요?”
“너, 지금 상황 안 보여? 여기서 그냥 죽을래? 네 하찮은 목숨이라도 구걸하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이 인간 정말 쓰레기다. NPC였나? 아무튼, 동료를 버린다는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다니……. 물론 나였어도 그랬겠지만, 그래도 친한 동료는 버리지 않을 거라고.
고민된다. 이 인간을 여기서 죽여서 게임상의 쓰레기 하나를 줄이느냐. 아니면 이 말대로 비트급 우올로를 찾아서 같이 탈출하느냐. 나는 우올로를 조종해 본 적이 없으니 도우미가 필요하긴 한데…….
그래 일단은 실리를 생각하자.
“알겠어요. 일단은 당신 말대로 하죠.”
그 사이 왼쪽 길목에서 대치 중이던 선원 세 명은 벌써 정리당했다. 그나저나 내가 3명이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둠페일이랑 날 공격했던 여자에 비하면 약해서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데…….
“이야!!”
아 그렇지. 달려드는 적과 바로 옆을 지나가는 뭉게구름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 있다.
바로…….
“집어던지기!”
날고 있는 우올로 밖으로 그를 힘껏 집어 던지자 비명이 점차 멀어져 간다.
“으아아아아!!!”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 느려터진 싸움꾼 하나 잡아 던지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들어와!”
이어지는 주먹 가볍게 피하고, 가볍게 들어……! 어우 왜 이렇게 또 무겁냐? 이놈의 잠재가 진짜……. 제법 잘 발휘되긴 해도. 이럴 땐 곤란하다니까? 적재적소에 발휘만 되면 얼마나 좋을꼬?
그래도 남자니까! 잠재 따위 없어도! 기본 힘으로 들 수 있어!
“으랏 챠!”
“하아아아악!!!”
“흐아…….”
잠재 능력이 발휘되지 않으니 생각보다 많이 지친다.
“너도 떨어질래?”
마지막 싸움꾼을 보면서 말한다. 그가 자존심 상한 듯 달려든다.
챙-! 푸욱! 이번엔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투펭이 놀란 듯 날 쳐다본다.
“너 진짜 잘 싸우잖아? 지금까지 왜 약골인 척했어?”
약골인 척한 게 아니라 너희가 약골 취급한 거지……. 근데, 아닌 게 아니라. 나 자신도 왜 이렇게 잘 싸우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분명히 난이도는 ‘어려움’ 퀘스트인데. 기본 적들이 너무 약한 느낌이다. 잠재 발휘가 잘 된 덕분인가?
아니, 어쩌면 둠페일과 그 여자가 평균 난이도를 높여놨을지도 모르지……. 그 둘은 엄청 강했으니까.
*
우올로다. 이게 비트급 우올로인가보다 우올로 중에서도 가장 작은 배. 오토바이나 제트스키 같은 모양새인데 크기는 3m 정도 된다. 이걸로 대륙 간 횡단은 어렵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가까운 도시까지 가는 정도면 가능하겠지.
한대 당 딱 두 명 정도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투펭이 먼저 우올로 두 대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한 대에 올라탄다. 그럼 나도 따라서…….
“잠깐! 넌 저걸 타! 두 명 타기엔 베릴이 부족하다고!”
그의 뒷좌석에 타려는데 나를 막아선다. 우올로의 연료가 부족하다고 하는 것 같다. 근데, 그러면 곤란하지!
“저 우올로 조종 못 하는데요?”
“그건 네 사정이지 인마!”
말과 함께 그가 우올로에 시동을 건다. 우올로 문이 서서히 열리며 우올로 보관소 안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안 되겠다. 그가 떠나기 전에 죽여야겠다. 이대로 그가 떠나게 내버려 두면 내 평생을 후회하며 살 것 같아.
그럼 내 안의 악마를 깨워보자. 나는 장도를 빼 들고 그를 향해 다가간다.
“이봐…….”
“응? 앗……?!
망설일 것 없이 우올로 손잡이를 잡은 그의 팔을 내려친다.
“이야아!!!”
서걱-! 칼끝에 미세하게 걸리는 느낌과 함께 투펭의 비명이 크게 울려 퍼진다.
“끄으으악!!! 이 빌어먹을 새끼! 이게 무슨짓이야아아윽!”
그가 눈치채고 팔을 빼는 바람에 팔뚝만 깊이 베고 말았다. 이거, 아쉽구먼…….
“팔을 못 쓰겠어! 젠장!”
“그건 네 사정이지 안 그래?”
나는 칼에 묻은 피를 바닥에 털어내며 다시 한번 칼을 겨냥한다.
“이번엔 실수 안 할게. 똑바로 대라. 잘못 썰리면 더 아프니까.”
“자, 잠깐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올로 때문에 그래? 그거라면 조종법을 알려줄 테니까. 한 번만 살려줘. 나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서 죽으면 내 딸자식이 슬퍼할 거라고 크흑흑…….”
하아……. 또 이렇게 애원 모드로 나오니까. 죽이기가 꺼림칙하다. 어떻게 하지? 우올로 조종법도 알려준다는데 그냥 살려줄까?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일단은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래. 제법 좋은 제안이었어. 한 번 살려줄게.”
“크으……. 조종법 알려줄 테니 내 옆으로 오라고…….”
그의 옆으로 다가가는 순간, 그가 돌변해서 내게 발길질을 한다.
“크억!”
나는 그에 맞고 바닥을 구른다.
“모르면 그냥 여기서 뒈져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이 자식이 진짜!!”
그의 말과 동시에 우올로가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가 출발하려는 그 순간……!
파자작-!!
내 뒤편의 나무 벽이 부서지며 거구 한 채가 날아온다. 거구의 신체는 우올로에 탄 투펭과 부딪히고도 모자라 기둥까지 날아가 처박힌다.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아주 적절하게 나타났다.
날아온 이의 정체는 둠페일이었다. 그의 온몸엔 심각한 타박상과 긁히면서 생긴 열상이 한가득하다.
그 강해 보이던 둠페일이 어쩌다 저런 모습이 되었는가? 감히 예상하건대 이 괴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여기까지 날려 보낼 인간이 이 배에서는 딱 한 명 있다. 그건 바로…….
둠페일이 부수고 나온 벽 근처를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반대에서 그녀가 걸어 나온다. 그녀 역시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살인 병기와 같다.
이 아래서 여태 싸우고 있던 건가?
“적. 죽어.”
나를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데 정말 무섭다. 나를 죽인다는 건지 둠페일이 죽었다는 건지. 지금 둠페일이 일어나는 걸 보면 나를 죽인다는 의미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