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방장군 --> “후우…….”
다시 햇빛을 보니 좋구나. 게임 시작 후 이상한 짓만 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아직도 레벨은 1이다. 그런데 잠재를 보니 1이 올라서 21이 되어있었다. 뭐 오를 만한 걸 했던가? 아무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사냥을 해서 레벨업을 해야겠다.
그 전에 무기 좀 사둘까? 지도가…….
[발데린 공화국 (1280년)]
면적 536,328 km2
거주인구: 800만 명
상비군: 4만 6천 명
정착지: 발데린 공화국에는 1개의 대도시와 9개의 중대도시, 32개의 중도시가 있으며 작은 소도시와 마을이 많이 분포되어있습니다.
[현재 도시 상세]
〈에드 하이리스〉
면적: 701 ac
인구: 4만 2천 명
귀족: 756명 / 경비병: 315명
설명: 에드 하이리스는 대도시 키빌라츠의 주요 무역로를 연결하는 위성도시로 발데린 공화국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도시 정보〉
건초상: 28 / 대장장이: 44 / 마구간: 51 / 목수: 73 / 빵집: 52 / 주점: 105……./
잘못 켜서 도시정보를 열었다. 도시에 대한 정보가 한도 끝도 없이 나열되면서 눈이 돌아가기 직전에야 간신히 닫을 수 있었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질릴 뻔했네.
무역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정치 권력자들은 저 정보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저렇게까지 깊이 공부할 자신이 없다고…….
그래도 게임의 규모가 크긴 한가 보다. 저런 상세 정보까지 나오는 걸 보면.
나는 가까운 무기 점을 찾기 위해 다시 지도를 열었다.
* * *
일레이나는 원통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몸을 담그고 있었다. 따듯한 물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찰박찰박 손으로 물을 휘적거리던 그녀는 몇 시간 전 있었던 일로 기분이 영 뒤숭숭했다.
‘그 사람 뭐야 진짜……? 도와준 게 고마워서 옷이나 하나 만들어주려고 데려왔는데……. 갑자기 입을 맞추다니……. 그건 정말…….’
그와의 생생했던 입맞춤을 떠올리며, 일레이나는 낯부끄러운 듯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는 벌게진 얼굴을 누가 볼까? 물속에 반쯤 가라앉히고 입으로 물을 부글거렸다.
‘키스라는 건 원래 그런 느낌일까……? 정말 무서운데도 그 느낌은…….’
지구에 있던 몸이 한순간 우주로 이동한 듯 붕 뜨더니, 온몸이 우주 일부가 된 것처럼 산산이 흩어졌다가. 순식간에 점 하나로 압축되면서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
그 오묘하고 이상했던 느낌에 일레이나는 자신도 모르는 새 허벅지를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 * *
[대장장이 몬델의 장검]
공격력: 14 (25~30)
내구력: 30/30
요구 레벨 1 / *요구 힘 6
희소성: 일반
〈내용〉
에드 하이리스에 살고 있는 대장장이 몬델이 벼려낸 장검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초보 모험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후우…….”
재산을 털어 기본에서 약간 강화된 무기를 샀는데, 부족한 힘 때문에 14로 고정되는 무기 공격력을 보니 자연스레 한숨이 나온다. 부랑자가 무기를 안 끼고 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없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도 힘이 부족한데 낄 수 있다는 게 어디냐? 요구 힘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아예 못 꼈을지도 모르는데…….
장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니 확실히 그 무게가 크게 느껴진다. 레벨업 해서 힘이 올라가면 좀 나으려나?
-‘기술 ‘기본 검술’을 깨달았습니다. (‘한 손 검의 사용”으로 인해)
응? 뜬금없이 기술을 획득했다.
[기본 검술]
모든 근접무기의 근간이 되는 검을 이용한 싸움법입니다. 당신은 근접무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본 검술 자체에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다른 근접무기술을 배울 때 효과적인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해당 기술은 현재 힘과 민첩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설명〉
검? 막대기? 대파? 바게트? 손에 잡히는 거라면 일단 닥치는 대로 들고 휘둘러보세요. 어쩌면 그것이 세상에 없는 당신만의 검술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검술을 창시해 낸다면, 잊지 마세요. 그 뿌리는 기본 검술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말이죠.
뭔 기술 설명이 이래? 난 또 좋은 건 줄 알았네.
한마디로 기술이라기보다 그냥 검을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하는 말 같다.
그나저나 무기 공격력은 14인데 무기를 착용하고 나니 캐릭터 공격력은 8이 증가해서 총 15가 됐다. 무기 수치가 공격력에 그대로 반영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걸로 사냥은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맨주먹보다야 낫겠지? 그럼 용병 길드에 들러서 할 만한 퀘스트가 있는지 좀 둘러봐야겠다.
“거기 잠깐, 잠깐!”
누군가 움직이려는 나를 불러세운다. 돌아보자 키가 반 토막만 한 아저씨가, 똥똥한 몸을 뒤뚱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드워프?”
“아니다. 이놈아!”
지겨운 말을 들었다는 듯 호통친다. 그렇지만 달려올 때 모습은 영락없이 드워프다. 그래도 찬찬히 살펴보니 드워프보다 얍삽하고 뾰족하게 생긴 거 같긴 하다. 그는 웬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있다.
“너 초보자야?”
“예, 그런데요?”
“퀘스트 필요하지?”
“네, 뭐…….”
그가 뜬금없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민다.
“이게 뭐예요?”
의문을 품으면서도 공짜라면 일단 받는다.
“퀘스트야. 쉬우면서도 보상이 짭짤하지. 생각 있으면 훑어봐.”
[퀘스트 발생! – 드웍프의 부탁] [난이도: 쉬움]
〈내용〉
드웍프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목표〉
페로렌의 집에서 그녀의 장신구를 찾아 드웍프에게 가져다주세요.
└페로렌의 목걸이를 찾으세요. 0/1
└페로렌의 귀걸이를 찾으세요. 0/2
└페로렌의 반지를 찾으세요. 0/1
*추가목표 - 10분 이내로 모든 장신구를 찾아오세요.
〈보상〉
명성 5 획득 / 추가 보상 확률 존재
뭐야, 드웍프나 드워프나 그게 그거잖아…….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페로렌?”
“아, 페로렌은 내 친동생인데, 지금 연회장에 가 있거든? 근데 실수로 귀중품을 놓고 왔다지 뭐야? 집에서 그것만 가져다주면 돼. 보상은 거기 적힌 것보다 많을 거야. 추가 보상으로 100만 셀은 지급될 테니까. 빨리 가져다주면 더 지급해줄 수도 있고.”
이전 같은 추가보상이라면 사양이지만, 100만 셀이면 꽤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알아서 찾아온 퀘스트 치고는 보상이 진짜 후한 듯싶다. 난이도도 쉬움이고……. 단순 심부름 퀘스트 같은데 받아볼까?
“예. 할게요.”
퀘스트를 승낙하자, 그가 상세한 위치를 지도에 표기해준다.
하지만 왜 이땐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이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사건의 시작이 될 거란 사실을…….
*
마지막 목걸이가 이건가? 집어 들자 목걸이 중앙에 박힌 눈물 모양의 보석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진짜 영롱하게도 생겼네.
“헉”
살짝 건들이자 보석이 떨어지려고 한다. 가짜도 아닐텐데 왜 이렇게 쉽게 떨어져? 떨어지지 않게 붙여놓고 인벤토리에 조심스레 집어넣는다.
-‘습득한 장신구를 가지고 드웍프에게 돌아가세요.’
드워프에게 받은 퀘스트 아이템을 모두 습득하고 주변을 잠시 둘러본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집이다. 중세시대 돈 많은 부호가 살고 있을법한 그런 집 말이다. 집 자체는 엄청 크다고 할 순 없지만, 벽에 걸린 그림이나 조각상의 품질로 볼 때 상당히 부유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뭔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동생의 집이라면서 집에 사람도 없고 열쇠도 없대서 문을 넘어서 왔다. 거기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치자고, 집안을 둘러보는데 가족사진이라고 있는 것 중에는 드웍프인지 뭐시기인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얘인가?”
지금 손에 든 액자 속 할아버지랑 같이 서 있는 소녀가 페로렌인 모양인데,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남자들을 홀리고 다닐 만큼의 미인으로 성장할 싹수가 보인다. 도저히 그 드웍프랑 같은 핏줄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뭐 별일 있겠어?”
왠지 불안한 마음에 혼자 중얼거리며 저택을 빠져나간다.
*
“이봐! 여기야! 가져왔어?”
높게 쌓아 올린 담의 틈 사이로 드웍프가 모습을 보인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내게 빨리 오라며 손짓한다. 다급히 손을 뻗기에 저택 안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오호혹, 좋아……! 크흠. 보상은 여기. 수고했어.”
그가 짤랑이는 돈주머니 하나를 담벼락 틈으로 던져 놓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진다. 돈주머니의 무게로 볼 때 100만 셀이 들어있을 것 같진 않은데…….
보상을 받고 열어보는 순간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뜬다.
[퀘스트 완수 – 드웍프의 부탁]
페로렌의 장신구를 모두 찾아 드웍프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고마워합니다.
〈보상〉
명성 5 획득
〈추가보상〉
1,000셀
-‘명성이 5 증가 하였습니다. (현재 명성: 25)’
-‘기술 ‘훔치기’를 깨달았습니다. (‘성공적인 도둑질’로 인해)’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부터 튀어나온다. 드웍프가 건넨 돈주머니엔 100셀 가치의 동전 달랑 10개만 들어있었다. 살다 살다 NPC한테 이런 적극적인 사기를 당해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와중에 훔치기는 또 뭐야? 성공적인 도둑질로 인해 얻은 기술이라니……. 나 설마 속아서 도둑질 한 거야……?
[훔치기]
대상이 가진 소유물을 자신의 소유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훔치기 시전 시 성공 확률이 5% 증가합니다. 실패 시 들키지 않을 확률이 5% 증가합니다. (조건부 발동: 훔칠 목표 설정 시)
해당 기술은 현재 민첩, 카리스마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설명〉
도둑질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유흥을 위해서, 도벽 때문에, 재미를 위해서. 당신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나요? 당신이 가진 동기로 다른 이들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주세요!
이놈의 기술 설명은 왜 다 이따위인지도 모르겠다. 설명은 그냥 꺼두는 게 정신 건강을 위해 이롭겠어.
그럼 다시, 정신부터 차리고 내 상황을 좀 돌이켜보자. 그러니까… 빌어먹을 부랑자로 시작해서, 빌어먹을 원숭이들과 보름간을 사투했고, 빌어먹을 도우미를 만나서, 빌어먹을 내 아이디가 뭘이 됐고, 빌어먹게 이쁜 NPC한테 작업 걸다가, 빌어먹을 성추행범으로 신고당해 감옥에 들어가고, 빌어먹을 드워프가 나한테 다가와 사기를 치더니! 빌어먹을 얻은 건 달랑 1,000셀이랑 도움도 안 되는 훔치기뿐이라고?! 빌어먹을!! 가진 기술이 구걸이랑 훔치기?!
“야 이 식빵에 잼 발라 먹을 인간들아!!! 게임을 이따위로 만들어?!”
들어줄 사람 없는 욕지거리를 하늘에 냅다 쏘아 올려도 도무지 속이 후련해지지 않는다.
악재의 연속인 내 상황이, 이 세계의 신으로서 군림하고 있는 운영자들의 농간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나쁘게 흘러갈 수가 있는 거냐?
물론, 내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중 일부는 내 성급함이 불러온 참사이기 때문에…….
“그래, 지금부터……. 지금부터라도 잘하자. 그래… 그러면 돼.”
최면하듯 되뇌어도 치미는 울분은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원래 하려던 대로 여길 나가서 용병 길드나 들러보자고, 지금부터 시작하면 돼. 나쁘지 않아 지금. 난 이제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고.
그러나 내 악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이 저택의 꽤 높은 담장을 구렁이처럼 넘어간 뒤에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후우……. 이거 참.”
나 진짜 도둑놈이 따로 없…….
“이봐!”
“으악!”
갑자기 달려온 사내가 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 신원을 묻는다. 경비병? 이 집 주인? 뭐가 됐든 켕기는 짓을 하다 잡혔으니, 상황이 안 좋은 것만은 분명하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내 신원을 증명해줄 드웍프도 없는 데다 그 녀석이 있다고 해도 진짜 페로렌인지 뭐시기인지의 친오빠일 거란 보장도 없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은 꺼내볼까?
“저, 전 드웍프 씨의 심부름으로…….”
“드워프? 드워프 누구?”
“드워프 말고 드웍프요. 페로렌 씨의 오빠라고 들었는데요……?”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아가씨의 오빠를 사칭해? 우리 아가씨는 외동이셔 인마!”
외동이라고? 그럼 그렇지. 일말의 기대를 걸어봤건만 역시였다. 일개 NPC한테 속아서 도둑질까지 하게 될 줄이야…….
날 잡은 사내의 뒤편에서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다가온다. 물론 내 쪽에서만 익숙하다. 집 안에서 사진으로 봤던 얼굴이기에…….
“그건 뭐야?”
“아가씨! 이상한 녀석이 저택의 담을 타고 있었습니다.”
페로렌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표정이 썩어들어 간다.
“훔친 거 없는지부터 살펴. 그리고 저게 닿은 담장 깨끗이 닦아 놔 구역질 나니까.”
와, 어린 게 말하는 싹수가……. 내가 어떻게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건 그녀 주변에 있던 사내놈들은 이 잡듯 구석구석 내 몸을 뒤진다.
“아가씨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거지 같습니다.”
있을 리가 없지. 이미 그 사기꾼한테 다 넘겼으니까…….
“그럼 그거 알아서 치우고 그 자리도 깨끗이 닦아놔.”
“알겠습니다. 아가씨.”
“들어갈래. 문 열어.”
아예 날 사람 취급도 안 하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겪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정도 싸가지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래서, 너 뭐 하는 놈이야? 왜 남의 집 담을 타고 있어? 도둑이야?”
“아닙니다!”
“그럼 뭔데?
다행스럽게도 내가 이 집에서 나오는 광경은 보지 못한 듯하다. 정말로 다행이다. 그렇지만 나에 관해 물으니 일단 뭐라도 둘러댈 필요가 있다.
“저… 저는 그러니까… 으……. 음유시인입니다!”
왜 이딴 소리가 튀어나왔는지 나도 잘 모른다. 순간 중세 시대 직업이 뭐가 있는지 생각이 안 난 탓에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순수한 중세 배경도 아니라, 평범한 걸로 말해도 됐을 텐데, 세상에 악기도 못 다루는 음유시인이라니……. 설마 진짜로 악기 연주를 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뭐, 그래서 그 이후에 어떻게 됐냐고?
“으흐흐흐.”
“야 이 미친놈아! 안 닥쳐? 독방에 들어가야 조용 할래?!”
또 미친놈이 됐지 뭐. 오늘의 두 번째 교훈, 수상한 NPC가 건네는 퀘스트는 함부로 받지 말자.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려갈는지 이젠 두렵다 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