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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사기단-3화 (3/147)

<-- 광놈, 뭘이 된 남자 -->                               그녀가 잠시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름을 묻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녀가 이름을 묻자 곧, 하나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앞으로 불릴 이름을 정해주세요. 한번 설정하면 쉽게 변경하실 수 없으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세요.’

메시지에 잠시 고민한다. 딱히 생각해둔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주 쓰는 아이디야 있긴 하지만, 가상 현실인 만큼 사람 이름다운 걸로 하고 싶은데…….

“으음, 뭘로 하지…….”

“‘뭘’님이 시군요. 확실하신가요?”

“예?”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뭘’님 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뭐? 뭘? 뭐?!”

나는 얼굴에 물음표 3개쯤 떠 있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본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거여? 아이디 선택부터 확정까지 순식간에 내 아이디가 ‘뭘’로 정해졌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장난이죠?”

“네? 뭘 님, 뭘요?”

“진짜?”

“네? 뭘 님,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돌아버릴 것 같다. 이건 NPC인 척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는 악마가 뒤에 숨어있는 게 분명해. 그러나 NPC한테 따져봤자 아무 소용 없겠지. 그러면서도 내 손은 분에 차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꿀 수 있을 거야. 아이디쯤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궁금한 거나 왕창 물어보자.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됩니까?”

“네 물론이죠. 뭘 님. 뭘 물어보실래요?”

“혹시 이건 물어보면 안 되려나?”

“뭘요? 뭘 님? 뭘 말이에요?”

“부랑자 캐릭터 혹시 히든 캐릭터 같은 겁니까?

“뭘 님, 그건 저도 잘 뭘라요. 아, 몰라요.”

듣다 보니 뭔가 기분이 기분 나쁜데? 은근히 ‘뭘’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그리고 NPC가 말실수도 해? 그 정도로 사실적이게 구현해놨다 이거야?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뭘요, 뭘 님? 뭘 일부러 그런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 짓지 마! 넌 내가 여기온지 5분 만에 지난 보름 동안 빌어먹을 원숭이한테 당한 것보다 더 큰 수모를 주고 있으니까!

“후우…….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굳이 쌓여있는 화를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그래 봤자 나만 열 오를 테니……. 나는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기 위해 도움말에서 생략한 기본 조작법 등. 필요한 것을 대충 묻고 이곳을 빠져나간다.

어차피 게임 중에도 도움말을 불러 쓸 수 있다니 참조하면 되겠지.

*

환한 빛과 함께 눈을 뜨자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 한가득 펼쳐진 그것은 맑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다. 거리낄 것 없이 탁 트인 푸른색 도화지에, 아무렇게나 떼어놓은 흰 솜사탕 조각조각이 시원한 조화를 이룬다.

높은 하늘은 그저 바라만 봐도 그동안 가슴 깊이 쌓아놓던 근심 걱정거리도 함께 씻겨 나가는 것 같다.

그때, 날개 달린 배 한 척이 높은 하늘을 가르며 유유히 지나간다. 저게 우올로라는 건가보다. 부유하는 대륙 사이를 자유롭게 항해하는 배. 이 게임의 대표적인 시스템 중 하나다.

저 위에 있으면 어떤 기분이 느껴질까? 나도 언젠간 저런 배를 타고 항해할 날이 오겠지?

“하아…….”

좋은 기분에 살며시 눈을 감아본다. 포근한 햇살은 담요처럼 몸을 덮어주고,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은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머리를 쓸어넘긴다. 설렘이라는 감정과 산책하는 기분. 오늘은 하루는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다 싶다. 이 기분 하나만으로도 지금껏 힘들었던 모든 걸 보상받는 것 같다.

그래,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거친 흙먼지가 내 얼굴 위로 쏟아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푸앗!”

얼굴로 날아드는 흙 싸대기에 상반신을 퍼뜩 일으키자, 상인의 짐을 허리가 굽도록 짊어진 말 한 마리가 내 옆을 지나간다. 말도 힘겨운지 걸어가면서 똥을 푸득푸득 싸재끼고 있다. 까딱했으면 흙먼지가 아닌 말의 똥 덩어리가 얼굴로 떨어질 뻔했다. 심장이 철렁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시장 거리의 한복판이다. 몇몇 사람들이 길바닥에 취객처럼 누워있던 날 보고 깔깔거린다.

산뜻한 활기로 가득 찬 이 거리에서 재빨리 몸을 일으킨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옷을 털며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걸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바닥에 누워있었는가? 세상에 시장바닥에 누워서 시작하는 게임이 어딨단 말이야? 그래 이건 분명 그 요망한 요정 계집의 음모가 분명하다.

계집이란 단어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 요정만큼은 그렇게 불러야 속이 시원하다. 날 ‘뭘’로 만든 그 도우미 요정 말이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대체? 내 잘못을 굳이 꼽자면 힘내라고 하이파이브하듯 손을 내미는 요정이 얄미워, 실수인 척 뺨따귀를 날린 게 전부인데 이런 창피를 주다니. 내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리라.

나는 뭘이된 내 아이디를 돈 주고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 무척 화가 났을 뿐이라고.

그럼 일단 조용한 곳까지 왔으니, 능력치 좀 보자. 사실 너무 처량할까 봐 보기 싫은데 왠지 한 번쯤 봐야 할 것 같다.

이름: 뭘 / 레벨: 1 / 몸 상태: 보통

공격력: 7 / 방어력: 1

직업: 부랑자

체력: 20 마력: 10

힘: 1 / 민첩: 1 / 지력: 1 / 건강: 1

잠재: 20

그렇단다. 예상대로다. 근데 잠깐만, 체력이 20?! 문에 찧어 죽는 것도 어쩐지 이해가 가네. 캐릭터 선택 시 이 정도로 상세히만 나왔더라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을…….

능력치 창이 너무 단출한 게 아닌가 싶지만, 복잡한 건 싫기에 상세정보는 닫아두었다. 그 밖에 도우미에게 들은 말로는 능력치가 0이거나 얻지 못한 정보는 아예 표시가 안 된단다. 능력치의 종류가 몇 개인지는 모르겠으나 게임을 진행하면서 ‘특별 능력’이라는 분류로 점차 늘어나는 모양이다.

그 외 중요 정보라고 한다면, 행동에 따라 최하단의 ‘잠재’라는 스탯이 상승하는데, 이것은 ‘몸 상태’에 따라 현재 지닌 능력치 어디에든 일시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점수라고 한다.

힘 5짜리와 팔씨름을 한다면 힘이 1인 나는 당연히 질 테지만, ‘잠재’가 20인만큼 몸 상태가 좋으면 내 힘은 순간적으로 최대 20이 증가해서 이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원하는 대로 적용되는 건 아니고, 약간 복불복인듯싶다.

그리고 잠재 점수는 레벨이 오를 경우 기본 능력치에 분배 합산된다고 한다. 이것이 레벨업 시 보너스 능력치 역할까지 하는 모양이다. 이 말은 잠재점수가 없으면 렙업을 해도 별 효과를 못 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도 레벨업 시 기본 능력치 일부가 올라가기 때문에 레벨이 높을수록 세지는 건 여느 게임과 마찬가지다.

잠재 포인트는 능력치가 높을수록 얻기 힘들어지는 모양인데, 튜토리얼에서 원숭이를 많이 잡은 탓에 내 잠재능력은 레벨에 비해 높은 편인 것 같다. 비록 원숭이들이 경험치를 안 줘서 렙업은 못했지만…….

그 밖에도 하단의 상세 정보가 많은데…….

“꺄아악!”

어디선가 뻔한 비명이 들려오고 뻔한 장소에서 뻔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 같기에, 지루하게 혼자 생각하며 이해하는 건 생략하겠다. 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나도 그 뻔한 장난에 어울려 줄까? 하면서 걸어왔지만, 막상 거의 다 오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튜토리얼 원숭이한테도 그렇게 죽어댔는데 여기서도 만약 또 죽으면?

듣자 하니 하드코어 캐릭터는 3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대폭 깎이는 디버프뿐 아니라 잠재가 줄어들고, 한 달에 2번 이상 죽을 경우 캐릭터 자체가 삭제된다고 하는데…….

한 번 정도 죽는 거야 괜찮다 치지만, 여기서 모든 능력치가 깎이면 전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걸어가다가 발 딛는 충격으로도 죽는 거 아니야?

설마 그렇진 않을 거야. 그렇게 믿으면서도 요즘은 믿는 대로 잘 안 이루어진다는 사실들이 새삼 떠오른다.

“살려주세요. 으흑.”

“조용히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퀘스트 발생! - 골목의 영웅] [난이도: 어려움]

〈내용〉

에드 하이리스의 한 주택가 골목의 한 여성이 괴한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괴한으로부터 그녀를 구출하세요.

〈목표〉

괴한으로부터 그녀를 구해내세요.

〈보상〉

명성 20 획득 / 추가 보상 확률 존재

상황을 주시하고 있자, 그 뻔한 퀘스트의 내용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퀘스트 창을 닫아버렸다. ‘이 퀘스트 안 할래요.’라는 의미가 담긴 행동이다.

난이도가 ‘어려움’이다. 퀘스트 난이도는 캐릭터 수준에 따라 측정된다고 한다. 어차피 능력치 낮은 부랑자라서 실제로는 쉬운 퀘스트도 ‘어려움’으로 나오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막상 보니 진짜 어렵잖아?!

아니, 주택가 골목의 뻔한 퀘스트면 적이 많아 봤자 2~3명 정도여야 하는 거 아닌가? 저건 대체 뭔데?

“감시 잘해.”

“물론이지.”

“꽤 반반하게 생겼는데?”

“빨리 잡아가자고.”

“뒤로 좀 가봐.”

들리는가? 저 수많은 목소리가. 못해도 15명은 돼 보인다고. 아니 자기들끼리 골목에 낑겨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서는 여자 한 명을 괴롭히고 있다고? 심지어 제법 좋은 갑옷을 입은 양반들이?

이 게임 진짜 정체가 뭐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수석 판사급 명쾌한 판단을 내리며 조심스럽게 자리를 뜨려는데, 골목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자기야! 도와줘!”

자기란다. 자가가 왔나 보다. 안 하길 더욱 잘했어. 원래 임자 있는 여자랑은 엮이는 거 아니랬어. 그렇게 생각하며 어떤 부러운 자식인가 하고 무심코 돌아보는데, 그녀의 시선이 가냘픈 새끼 고양이처럼 나를 보고 있다. 자연스레 괴한들의 시선도 나를 따라온다.

나? 나를 말하는 거야? 나한테 저런 이쁜 자기가 있던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발언으로 인해 총 30개의 들짐승 같은 눈동자가 쌍심지를 켜고 나를 노려본다. 먹이가 될 운명을 아는 노루의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인가?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겠지?

그중 한 사내가 고갯짓으로 그냥 꺼지란다. 자존심이 심각하게 상하지만,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가려는데,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내 발을 붙든다.

“아오. 씨…….”

어느새 나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다. 절대로 그녀가 심장을 울릴 정도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단지 이 불타는 정의감 때문에. 추가 보상이 뭔지 궁금했기 때문에 그래서 가는 거다. 또 몰리기 전에 몰아가자는 것이 내 주의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나한테 전투에 쓸만한 기술이 있던가? 기술 창 좀 볼까?

[구걸]

부랑자 전용. 주변 대상에게 임의의 아이템을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구걸 시전 시 성공 확률이 20% 증가합니다. 같은 장소에 오래 있으면, 성공 확률이 1%씩 차오르며 구걸에 성공할 경우 다시 20%부터 시작합니다. 길거리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설명〉

구걸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인간 사회의…….

아오. 꺼! 그냥! 무슨 구걸 따위의 설명을 백일장처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어?! 그럼 그렇지 부랑자가 뭐 있겠냐?

몸집이 큰 사내가 내 앞에 다가와 선다. 신장은 나도 큰 편이지만, 그는 내 몸을 가릴 정도로 몸집이 크다. 혼자 서있어도 골목이 꽉 찰 정도니까.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세 보인다. 내 머릿속에선 어느새 큰일 났다는 생각만 톰과 제리처럼 이리저리 맴돌고 있다.

“죽기 싫으면 꺼져.”

점심으로 시궁창 칵테일을 만들어 먹었나, 놈의 지독한 입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한다. 섬세함을 더럽게 잘 살린 게임이로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의 복장을 슬며시 곁눈질했다.

놈은 사슬과 얇은 철판을 촘촘히 엮어 만든 갑옷을 걸친 채, 허리춤에는 평범하게 생긴 장검을 비끄러매고 있다. 현재 날 얕잡아보는 탓인지 무기를 꺼내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 선빵이다!

그의 안면부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린다.

“흡?!”

갑자기 날아드는 주먹에 놈은 눈만 똥그랗게 뜬 채 움직이지도 못한다. 원숭이를 상대로 단련한 내 주먹은 만만하게 볼 게 아니라고!

-‘2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빡-! 소리와 함께 내 피가 2만큼 깎인다. 분명 내가 주먹을 내질렀는데 왜 내 피가 깎이냐? 설마 자신의 주먹도 감당 못 할 정도로 나약한 인간인 건가 싶던 그때, 녀석이 차고 있는 목걸이가 빛을 띠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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