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2화 (2/147)

<-- 튜토리얼이 쓰러지지 않아 -->                               나는 지는 게 싫다. 특히 게임에서는, 어쩌면 게임에서만…….

뭐, 사실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이 짓도 계속하다 보니 점점 익숙하고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빌어먹도록 빠른 원숭이의 주먹을 무심한 듯 훅훅 피하다 보니 내가 왠지 무림고수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정신적 마조히스트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무려 16시간 동안 같은 죽음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질리지도 않는다니. 만일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양산형 판타지 게임 소설 중 하나인 ‘노예사기단’ 속 주인공이라면 아마 극히 강한 먼치킨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 책의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약해빠진 건 나와 달리 찌질함과 똘끼로만 충만한 캐릭터니까.

*

“우끼끽!”

“아오. 시끄러워 좀!”

원숭이가 질러대는 소리가 고막을 성가시게 자극한다. 나는 원숭이의 주먹을 회피하며,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린다.

파악-! 내 주먹에 원숭이의 턱이 돌아간다. 이제는 반격도 제법 할 수 있다. 장족의 발전이다. 스스로 손뼉을 쳐주자.

그랬더니 이제는 원숭이가 주먹을 내지른다. 역시 손오공의 바탕은 원숭이라 했던가? 마치 손오공처럼 내 공격을 오차 없이 따라 한다.

이제는 원숭이 주먹에 내 턱이 그대로 돌아…… 가는 정도면 충분했는데, 그냥 턱이 떨어져 나가며 즉사했다. 이 원숭이……. 어쩌면 진짜 손오공이 아닐까? 그게 아니면 이 정도의 힘이 말이 안 된다고.

어쩌면 내가 정말 더럽게 약한 맷집을 가졌거나…….

오늘은 포기다. 결국, 로그아웃하고 음식으로 떨어진 기력을 보충했다.

솨아아- 샤워기를 틀고 따듯한 물에 몸을 적신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소름이 전신에 쫙 퍼져나간다. 따듯한 우유에 흠뻑 적신 카스텔라만큼이나 온몸이 노곤해진다.

노는 것도 힘들어. 참 웃기는 일이지? 일주일 전만 해도 회사 때려치우면 뭐든 편할 줄 알았는데. 정작 놀고 있으면서 이제는 그게 힘들다고 하니…….

"킥킥."

나 자신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제대 후 3년 동안 차비, 밥값 아껴가며 벌어둔 돈 3,000만 원. 회사를 때려치운 직후, 스스로 고생했다는 의미로 적금을 깨서 3년 생활비에 가까운 가상현실 게임기를 선물했다.

학창시절엔 프로게이머를 지망할 정도로 게임을 좋아했는데,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터는 친구 만나 잠깐 머리 식힐 시간도 없었다. 공부에 일에 게임이야 굳이 안 해도 상관은 없다지만, 삶의 유일한 낙이었던 것조차 못하니 죽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일하고 들어와서 자고 눈 뜨면 다시 출근 전쟁.

회복할 시간 없이 몇 년이고 반복될 것 같은 지루한 일상이, 내 숨통에 가래떡 한 조각을 끼워 넣은 것처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게 된 것이다. 퇴사. 그리고 이 게임.

제목이… 뭐였더라? 영어 몇 글자였는데 까먹었다. 하는 게임 이름조차 모르냐고 하겠지만, 난 이 게임의 딱 세 가지가 마음에 들어서 시작했으니까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제목 따위 몰라도 된다. 그래서 그 세 가지가 뭐냐?

자유도 높은 RPG, 게임 트레일러, 가상현실 게임 중 가장 최근에 발매된 따끈한 신작.

학창시절 RPG를 좋아했고, 돈 좀 쓴 듯한 트레일러가 마음에 들었고, 당장 내 욕구를 풀어줄 최신 게임이 필요했으니 아주 적절한 초이스가 아닌가?

게임의 사회적 배경이 중세라고는 하는데, 거기에 잡다한 것들을 섞어서 순수 중세 RPG라 보기는 모호한 장르인 것 같다. 스팀펑크 쪽도 섞인 것 같고. 모쪼록 게이머들을 자극할만한 판타지적 요소는 다 집어넣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가상현실 게임에 대한 내 로망을 이루기엔, 그것이 허허벌판의 황무지 배경이래도 충분하다.

아,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국내와 해외 유명한 게임 회사가 합작해 5년을 넘게 공들인 초 기대작이었단다. 그래도 게임 고르는 눈은 죽지 않았다니까.

근데 그런 게임이 왜? 튜토리얼 왜? 원숭이 왜? 대체 왜? 다시 또 빡이 오르려 했지만, 얼음장 같은 찬물이 날 강제로 덮치는 바람에 여고생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샤워를 끝마쳤다.

*

간이침대에 몸을 누인 채, 정확히 4시간 자고 눈을 떴다. 그리 피곤하진 않다. 나폴레옹 수면법이라고 해서 예전에 유행하길래 따라 해봤는데, 어느새 적응돼서 덜 자는 만큼 남는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간을 공부에 쓰진 않는다.

그런고로 게임에 접속한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지금의 기분을 읊조리자면

하늘 아래

시옷,

비읍,

지읒과 같구나.

지은이 본인.

이 게임 그냥 때려치울까……. 최소 상황에 적응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오늘 하루도 무려 18시간을 연속으로 했건만 튜토리얼 하나를 못 넘기고 종료해야만 했다. 그래도 한 가지 어제보단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원숭이 한 마리를 최대 3방까지 때렸으니…….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일은 힘을 내서 4방을 목표로……. 가 아니라, 클리어해야지 뭔 개소릴 지껄이려는 거야?

다음날이었다. 실패.

그 다음날 실패.

다음날 실패.

다음 실패.

다 실패.

실패.

패.

.

“이 씹썅쑝!”

게임기에서 튀어나온 나는 한글의 조합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천박한 단어를 내뱉으며, 게임기를 거의 부숴버릴 뻔했다. 그러나 이성을 잃기 전 끝나지 않은 할부금이 떠올라 고귀하신 옥체에 앉은 먼지만 고이 털어드렸다.

열흘 동안 저 미친 튜토리얼을 깨기 위해 안 해본 짓이 없었다. 부활 후 10초의 무적 시간 동안 출구까지 죽어라 달려보기도 했고, 원숭이한테 협상도 했고, 신세 한탄도 했고, 진지한 태도로 화해도 시도해보았다.

오죽하면 우끼끼하며 원숭이 흉내도 내었으니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선 범위 내에선 다 해본 것이다. 그래서 어땠냐고?

결과는 눈, 코, 입 날 만지는 원숭이들의 손길에 내 몸에 달려있던 모든 게 찢겨나갔다. 거대하게 만들어 놓은 내 소중이도 말이다. 그놈들한텐 별로 소중하지 않았나 보다. 집어던지고 노는 걸 보면……. 각설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도저히 진행이 안 되잖아! 안 돼! 안 된다고! 으아아악!!! 느껴지는가?! 내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면 책을 찢고 나가서 당신의 고막에 내 처절한 비명을 직접 들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이 망할 게임은 더욱 망할 게 뭐냐면, 캐릭터 삭제도 안 되고! 정작 중요한 커뮤니티도 없단다!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도! 모든 정보를 게임사 측에서 막아 놓았으며! 게임 내 정보들은 오로지 게임 내에서만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단다!

이 정보는 게임 공식 사이트에서 얻은 내용이다.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과는 또 다른 진짜 현실 만든다는 것이 이 게임 제작사의 신조라는데, 진짜 제대로 할 모양이다.

게임 외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시 고소한다는 내용과 사례가 있으니 얼씨구나 한숨이 절로 나오누나!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전 과거의 나에게 편지를 써보자.

[지금은 이 문장이 이해되지 않겠지만, 넌 정말 개새끼야]

부디, 부랑자 캐릭터를 생성하고 있는 과거의 나에게 잘 도착하기를 기원합니다. 일기를 끄적인 뒤 잠에 빠졌다.

*

오늘로써 게임을 시작한 지 보름째. 나는 여전히 튜토리얼에 갇혀있다. 언제부턴가 빌어먹을 원숭이가 왜 튜토리얼부터 잔뜩 튀어나왔는가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게 다 내 탓이니. 오프닝을 생략한 내 탓이오. 도움말을 넘긴 내 탓이오. 부랑자를 택한 내 탓이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을 시작했건만, 뜻밖의 득도를 하게 된 기분이다.

나는 분명 RPG 게임을 시작했는데, 어느샌가 가마솥에 올라탄 채 지팡이로 하나로 산을 오르는 초 고난이도 게임처럼 플레이하고 있다. 산을 잘 타다가 한번 삐끗하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그 지독한 게임 말이다.

현재 이 게임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도 똑같다. 이건 RPG가 아니다. 멘탈 믹서기지……. 근데 열 받아서 끄고 나면 어느샌가 또 도전하고 있다니까?

지금은 원숭이들과 신명 나게 싸우고 있다. 물론 한방 스치면 사망이기에 놈들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잘 피해내고 있다.

“우끼익!”

지금까지는 원숭이를 15마리쯤 쓰러뜨렸다. 처음과 달리 내가 내지른 주먹을 몇 대 맞으면 놈들은 일어나지 못한다. 가끔 치명타가 터지는지 놈들의 얼굴이 한 방에 터져나갈 때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피하는 것도 전보다는 수월하다. 익숙해진 건지 능력치가 증가한 건지 뭔진 모르겠다. 능력치 창 여는 방법을 모르겠으니까. 그 정도도 못 배울 수준의 초보 구간에 내가 갇혀있다. 다시 상기되니 씁쓸하다.

“빠쌰!”

“우끽!”

“하아… 하아……. 징글징글했다. 진짜 얘들아. 후…….”

5시간째, 내 주변으로 수백 마리의 원숭이가 처참하게 쓰러져있다. 마라톤을 전력 질주를 한 것 마냥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는다. 해냈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중간에 출구 앞까지 갔지만, 열리지 않는 문에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원숭이를 다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때 조금 눈물이 나오더라. 땀인 척했을 뿐이지.

결국,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원숭이를 말살시켰다. 이제 원숭이 따위 두렵지 않다. 그간 당해온 고통과 수모에 비교하면, 지금 처참히 퍼질러진 원숭이들의 모습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너무도 약한 복수였다고! 마음 같아선 다시 시작해서 재차 공포를 맛보여 주고 싶지만 한 번만 봐주겠어.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해야 하니까!

기쁜 마음에 팡파르처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아껴두며 출구로 다가간다.

근데 출구가 자동으로 열리지 않는다. 아마 너무 많은 원숭이의 사체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문 앞에 쌓인 원숭이들의 사체를 주섬주섬 주워 구석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게임 속 주인공인데 너무 폼 안 나는 거 아니냐? 대작이라며? 이 정도는 넘어가지 좀. 튜토리얼만 이러길 바랄 뿐이다. 얼마쯤 치우기 시작하자. 출구의 문이 탕! 하고 활짝 열렸다.

근데, 그게 문제였어.

너무 활짝 열린 게 문제였다고.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래요. 죽었어요. 문디자슥처럼 문 뒤에 있다가 문에 콱! 찍혀 죽었다고요.

-'부활 무적 시간이 10초간 적용됩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자마자 눈을 감았다. 설마 아니겠지? 다시 살아나진 않았을 거야. 대작이라며? 그 정도 배려는 해놨을 거야 그지? 나는 초조한 수험생처럼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내 귓가에 여지없이 성난 원숭이 떼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끼끼끽!”

“후읍……. 하, 하아…….”

지하 300m 천연 암반수가 흐르는 깊이에서 끌어올린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온다. 일단 심호흡. 그리고나서…….

“야 이 [email protected]#$%^&*”

배우지 못한 사투리까지 동원하며 욕과 비명을 퍼부었다. 그로부터 다시 3시간 후, 나는 그 지긋지긋한 출구로부터…….

쾅!

“드디어 탈출한다!”

드디어 나왔다. 탈출이다.

“탈출이다! 탈출이다! 따아아악!!!”

나는 미친놈처럼 포효한다. 진짜 누가 그렇게 보더라도 상관없다. 실제로 나는 반쯤 미쳐 있었으니까. 이곳엔 그 빌어먹을 원숭이도, 빌어먹을 문도, 그 빌어먹을 구간은 전혀 없다. 만세다. 만세야.

원숭이를 잡던 곳에서 이어지는 영상이 나온다. 오프닝과 이어지는 영상인가보다.

“필요 없어!”

라고 말하면서도, 혹시나 했기에 그냥 쭉 봤다. 다 본 감상은……. 그냥 건너뛸 걸 그랬어.

별 건 없었다. 그냥 원숭이를 처치하고 당신이 어쩌고, 신이 어쩌고, 부유의 땅이 어쩌고, 자유로운 모험과 인생 어쩌고 그러더니 끝났다.

잠시 후, 시원한 바람이 풀어오며 하늘 배경이 끝없이 펼쳐지는 장소가 눈앞에 나타난다. 곧이어 발아래 나무판자가 뚝딱뚝딱 생기더니 주변 환경을 금방 만들어간다.

“새로 오신 부랑자님이시군요!”

만들어진 주변 환경을 살필 겨를 없이 도우미 NPC처럼 생긴 요정 캐릭터가 앞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우미라고 해요.”

누가 아니랄까 봐 머리띠에 붙어있는 이름부터가 도우미다. 그녀의 해맑은 인사에도 내 입에선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온다.

“안녕 못해요. 빌어먹을 원숭이 튜토리얼은 왜 이렇게 어렵답니까? 자그마치 보름을 거기 갇혀 살았다고요. 알아요?!”

“어? 그 부분은 그냥 넘길 수 있는데 모르셨나요?”

넘길 수… 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번개가 내 정수리를 쾅! 하고 내리쳐 온몸의 혈관을 풍선처럼 파파팍! 터뜨리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내가 만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돌처럼 굳어서, 쩍하고 쪼개지지 않았을까?

“그거 게임 시작 시……”

“그만! 듣고 싶지 않아!”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의 말을 막는다. 그냥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직업이 ‘미친 부랑자’로 바뀌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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