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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이나 먹어라
캐릭터가 삭제된 그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썅. 내가 무슨 현대판 홍길동도 아니고 이게 뭐야. 아빠를 아빠라고 못부르고!'
유천이 속으로 연신 욕을 지껄였다. 매일을 백수짓을 하며 신명나게 놀던 유천은, 캐릭터가 삭제된 그 날을 기점으로 이것도 경험이라며 제 아버지 회사의 막내로 들어온 채 신분조차 밝히지 못한채 매일을 구르고 또 굴러야 했다.
"어이! 김민성! 일 똑바로 안 하지!"
"죄송합니다 최부장님. 새로 뽑아 오겠습니다."
'저 씹새끼가. 다 만들어서 출력까지 했는데 말을 바꾸냐?'
김민성이란 이름으로 회사에서 막내로 구르길 두 달. 뽑아온 서류철로 머리통을 맞은 유천은 큰 결단을 내렸다.
"뭐야, 김민성 이거 어디갔어? 선현아, 민성이 어디갔는지 봤냐?"
"이거 최부장님 전해달라던데요?"
[사직서]
[개인 사정으로 사직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근성 없는 새끼를 봤나. 이런 새끼는 미리미리 싹을 잘라야 돼. 안 그러면 나중에 직책에 앉아서도 일을 똑바로 안한다니까!"
'니가 할 소립니까?'
방패막이가 없어진 어느 여름날. 다시 막내가 된 선현이 투덜거렸다. 사직서를 제출한 유천은 넥타이를 풀고 회사에서 나왔다. 이미 폭탄은 터졌다. 돌이킬 수 없는 한 수를 내어놓았으니 이제는 나아갈 때다.
-[아빠, 나 가출함]
사나이 신유천 나이 20살에 뒤늦게 비행 청소년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집에들어오자마자 유천은 캡슐로 들어가 게임을 시작했다. 두 달만에 보는 게임 속에 반갑게 들어온 유천이 캐릭터를 생성했다.
* * *
변한 것은 강제로 사회인이 된 유천 만이 아니다. 게임 속은 유천이 변한 것보다 더 많이 변해있었다.
캐릭터 크리스가 삭제되고 첫달.
멀쩡한 캐릭터가 한순간 랭킹 1위가 되었다가 랭킹에서 사라진 기현상에 유저들은 유니온과 유천에게 문의를 끊임없이 보냈다.
유니온 측에서는 공개를 꺼렸고, 유천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시간이 없다고 봐야했다. 그 날 이후 유천은 본가로 끌려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그 와중에도 게임 속에서 떠들석한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전 교황 펠프스가 접속 제한이 풀리기가 무섭게 새로이 건설중인 교황청에 쳐들어온 사건은 유저, NPC를 가리지 않고 유명한 사건이었다.
"크리스 개새끼랑 그 썅년 데려와!"
차마 전 교황을 내보내지 못하고 쩔쩔매던 견습사제는 훗날 말했다. 눈의 실핏줄마저 터트린 채로 자신을 노려다 보던 꼴이 미친 개와 똑같았다고.
"비켜주세요."
제 키만한 스태프를 들고서 나온 소녀가 견습사제를 향해 말했다. 견습사제는 옳다구나! 하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헬 파이어."
그 직후 시뻘건 불꽃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 이후로도 몇번을 쳐들어온 펠프스는 스태프를 든 소녀. 크리스티나의 손에 번번히 타죽거나 쫓겨나는 꼴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씨발 년이!"
물론 펠프스의 레벨은 폼이 아니었다. 몇번이고 반격을 시도하고 반발을 했었지만, 크리스티나에겐 손 끝하나 댈 수 없었다.
"전 교황 나리. 손길이 좀 음흉해 보이네?"
우드득!
그녀의 옆엔 언제나 녹색 빛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녀나 금발을 짧게 자른 미녀가 자리잡고 있었으니까. 결과만 말하자면, 연이은 깽판에 이은 연이은 사망. 거기에 사망으로 인한 아이템과 레벨, 스탯 드랍으로 펠프스는 점점 약해졌다.
정확히 한 달이 지나고 난 뒤에는 대륙 공적이 되여 보이는 족족 날아오는 칼침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랭킹도 어느새 세자리로 떨어진지 오래. 세력도 아이템도 상당히 잃은 그를 노리는 유저는 여전히 많았다.
"그 새낀 그러고 그냥 뒤져버렸어?"
매일 밤 발록과 라이헤르는 스태프를 품에 안은채 엉엉 울어재끼는 크리스티나를 달랬다. 그 꼬맹이는 은인을 제 손으로 죽인걸 아직까지 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도 두 달이 되던 날. 캐릭터 크리스가 부활했다. 흑마법사의 전직 교관으로서 다시 부활한 리치를 찾아 수많은 유저와 NPC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크리스티나와 발록, 라이헤르도 있었다.
"꼬맹이가 여긴 무슨 일로 왔냐."
"……. 아니에요 이 사람은."
자신을 보며 말을 거는 백골을 보며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발록과 라이헤르도 마찬가지였다. 싸가지 없는 말투며 행동거지 착용한 장비는 빼다 박은 듯 똑같았으나, 종종 인형마냥 같은 대사를 반복하고 같은 구역을 빙빙 도는 모습은 그들이 알던 크리스가 아니란 걸 알려주는 듯 했다.
쓸쓸히 자리를 벗어나는 셋은 밀려드는 인파에 묻혀 금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내가 이렇게 얼빠지게 생겼었다고? 이 인간들 일 똑바로 안했네!"
백골에 표정이 있다고 가정한다는 전제 하에, 유천은 제 전 캐릭터를 보며 신랄한 비평을 감추지 않았다. 이대로 나가면 유니온 본사에 찾아가 한 소리를 해야겠다. 다짐을 한 유천이 게임을 종료했다.
-[니 카드랑 통장 정지시켰다. 알아서 해라.]
"맙소사."
더 이상 게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유천의 생활고에 빨간불이 켜졌다.
* * *
"나 왔어."
"오늘도 고생했어. 씻고 와. 밥 해놨으니까."
채린은 벌써 며칠 전부터 이 상황이 영 익숙치가 않았다. 일전에 말했듯이 일을 배운다는 핑계로 본가로 끌려간 유천이 어째서 자신의 집에서 이러고 있는가?
채린은 화장을 지우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누나, 나 좀 재워주라."
캐리어 하나를 끌고서 제 집 앞에 무릎을 꿇은 유천이 한 말이었다.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은 채린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쳐다보자 유천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일을 배우긴 했는데, 상사 중에 또라이가 있어서 사직서를 쓰고 도망쳤더니……아빠가 통장이랑 카드도 다 막고, 유정이한테도 나 집에 들이지 말라고 했대……."
그 말에 채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유정이 누구 동생인데 그 말을 듣겠는가. 혹시 하는 생각에 채린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우리집 바보 보내요 언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요망한 녀석. 채린이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최근엔 유천이 자신보다 바빠 잘 만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며칠간만이라면 재워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그 생각에 들인 유천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가 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채린이 고정 프로의 촬영을 나간 동안 유천이 집안의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며, 저녁상까지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소나 빨래까지 네가 할 필요는 없다니까."
"먹고 재워주는 데 이정도는 해야지."
화장을 지우고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채린이 밥을 먹으며 투덜거렸다. 고맙긴 하지만 이럴려고 유천을 들인 것은 아니었다.
"괜찮다니까."
맞은편에 앉은 유천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집에서 쫓겨나고 막막했는데 이정도도 못하겠냐며 실실 웃는 유천에게 결국 채린도 백기를 들고말았다.
"그래서 낮에는 뭐하면서 시간 보내?"
설마 하루종일 가사일을 하진 않을테고. 자신이 없는 동안 유천이 뭘 하는지 궁금했던 채린이 넌지시 말을 건냈다.
"뭐, 게임 다시 시작했어. 생각해보니까 유니온 찾아가서 말 해야되는데."
"왜?"
"남의 캐릭터를 그 따위로 만들어 놓고 말이야. 내가 그렇게 얼빵한 표정을 짓는 해골은 아니었다고."
유천의 말에 채린이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워낙에 유천이 폴리모프를 쓰고 다닌 터라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직업은 뭐로 키우고 있는데?"
"사제."
그 말에 채린은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고 말았다. 졸지에 물을 뒤집어쓴 유천은 표정을 구기면서도 사레가 들려 켁켁거리는 채린의 옆으로 와 등을 두드렸다.
"미안. 네가 사제를 한다니까 상상이 안되는 거 있지."
"그건 그래. 그래서 말인데, 게임을 다시 시작한 지도 이제 꽤 됬는데 깽판 하나 좀 쳐보려고."
"무슨 짓을 하려고?"
"기대 해도 좋아."
채린의 물음에 수건으로 제 얼굴의 물기를 닦은 유천이 히죽 웃었다. 계속해서 물었지만 연신대답을 피한 유천은 소파에 앉은 채린의 무릎을 베고서 말했다.
"이제 잘까?"
"이제 9시 좀 넘었는데?"
"걱정하지 마. 평소에 자던 시간 전에는 못 잘거니까."
몸을 벌떡 일으킨 유천이 채린을 어깨에 들쳐메고서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린이 유천의 등짝을 두들겼으나, 유천은 허허 웃으며 침대 위로 채린을 던졌다.
그 날 채린은 유천의 말대로 평소에 자던 시간은 물론이고 새벽을 넘기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하하……."
해가 뜨고 난 뒤 아침으로 토스트를 구워준 유천은 따가운 눈길을 받아야만 했다.
"오늘은 혼자 잘거야."
"죄송합니다."
날이 새도록 침대를 뜨겁게 달군 유천은 등짝에 시빨건 손길을 남긴 채린이 촬영을 위해 집을 나설 때까지 꿇은 무릎을 펼 수 없었다.
"자기도 좋아했으면서."
유천이 툴툴거리며 집안일을 시작했다. 설거지와 청소를 마친 유천이 거실 구석에 있는 캡슐에 몸을 뉘였다.
"게임 시작."
검은 시야가 훤해지고 유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두개골이었다. 얼굴을 들이밀고 유심히 자신들 들여다보는 해골을 보며 유천이 입을 열었다.
"뭘 봐."
"애새끼가 입놀리는 수준 봐라. 죽고 싶냐?"
유천의 어조가 심히 맘에 안들었던 것일까. 해골이 턱을 딱딱 부딪히며 으르렁거렸지만 유천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그를 무시했다.
"시비걸거면 번지수 잘못 짚었다. 기도쟁이 자식아."
손바닥 위로 이글거리는 불꽃을 피워올린 해골을 흘깃 쳐다본 유천이 로브의 품속을 뒤적거렸다.
"못생긴 낯짝 들이밀지 말고 얌전히 뒤져라."
탕-!
온통 검은색 일색인 권총에서 붉은 기운이 튀아나왔다. 일직선으로 뿜어진 광선은 그대로 두개골에 직격. 그의 전신을 허물었다.
-띠링! [흑마법사 전직교관/천재(天災)] 크리스를(을) 제압하셨습니다.
-띠링! [레벨 업!]
-띠링! [레벨 업!]
.
.
.
끝도 보이지 않는 레벨업 세례에 메세지 창을 닫아버린 유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유천의 눈가에 들어온 물건이 있었다.
제단 위에서 먼지 쓸리는 소리와 함께 해골의 몸을 재구성 하던 구슬은 불행히도 유천의 눈에 들어 총격을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누구냐!""
뒤늦게 경비병인 듯한 이들이 몰려들었으나, 어쩌겠는가. 이미 전직교관인 리치는 유천의 손에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그를 쓰러트리고 경험치를 독식한 유천을 상대할 강자 또한 존재하지 않았기에 유천은 비교적 쉽게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너 뭐하는 새끼야?"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온 유천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거대한 녹색의 비늘 앞에서 히죽 웃으며 유천이 손을 흔들었다.
"이야, 우리 욕쟁이 도마뱀 오랜만에 보네!"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말하는 꼬라지 봐라?"
유천의 말에 대답한 것은 그 비늘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 금발의 미녀였다. 거리낌 없이 친한척 하는 유천을 향해 욕을 내뱉던 그녀에게 유천이 대꾸했다.
"얼씨구, 그리 어울려다니더니 말투까지 비슷해졌네? 걸레를 입에 물고 살아라 아주."
"이 새끼가 뒤질라고."
보다못한 라이헤르가 제 꼬리를 유천의 머리 위로 내리치려 했지만 뜻을 쉽게 이룰 수는 없었다. 유천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질 좀 죽이라고 누누히 말했는데, 도저히 변하질 않는 녀석일세."
소신 있는 녀석이네. 유천이 작게 투덜거리며 라이헤르의 비늘에 들고있던 총구를 겨눴다.
"너 누군데 아까부터 아는척이냐?"
"오빠 돌아왔다 이년들아. 눈치는 지나가는 개한테나 줬지?"
보다못한 발록이 유천의 손을 걷어차 권총을 저 멀리 날려버리며 질문했다. 손에 쥐고있던 권총이 어디로 가는지 관심도 안가진 유천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아는 그 꼴통새끼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만 해도 이렇게 짜증이 나는건 오랜만이야."
유천의 한숨에 뒤늦게 눈치 챈 둘이 대화를 주고받던 그 때, 유천의 머리에 시뻘건 불길이 작렬했다.
"뭐가 자랑이라고 그렇게 당당해요? 저기 구석에 가서 대가리 박고 반성이나 하세요."
제 몸집만한 지팡이를 들고 나타난 소녀가 불덩이를 맞고 나가떨어진 유천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교황의 명령]
당신을 보고 단단히 화가 난 교황이 구석에 가서 머리 박고 반성이나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혹여나 반발할 생각은 마세요. 당신은 쫄다구 신입 사제니까요.
난이도 : D-
수락하시겠습니까? [Y/N]
"까고있네. 울보 꼬맹이 주제에 누구한테 명령이야."
히죽 웃으며 유천이 퀘스트를 거부했다.
============================ 작품 후기 ============================
말도 없이 사라져서 냅다 한편 던지고 가서 죄송합니다. 쓴다 쓴다 말만 하고 정작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네요. 게으른 놈 기다려주셔서 고맙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