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리치다-436화 (436/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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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이나 먹어라

"한번만 말한다. 성 내의 관계 없는 주민은 지금 즉시 성을 떠나라."

마법으로 강화된 유천의 목소리가 성 내에 울려퍼졌다. 가디언들의 공격이 차례차례 가해질 때마다 박살이 나는 성벽을 보던 주민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만큼 부쉈으면 이제 충분해."

어느정도 박살난  성벽을 바라보며 유천이 고개를 끄덕이곤 가디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기가 무섭게 주민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도망치기 위해서이리라. 유천은 목을 가다듬고는 도개교를 가리켰다.

"저 방향으로 가면 성이 나올 겁니다. 성 내의 대표에게는 말을 해 뒀으니 몸을 의탁하시죠."

말을 끝내자마자 건물에서 나온 모든 주민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유천은 도개교를 들어올렸다. 쇠사슬 없이 문을 다시 제 자리에 끼워넣은 유천은 문을 봉쇄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금속음과 욕설, 비명에 유천이 제 옆의 크리스티나를 바라봤다. 삐질대로 삐진 라이헤르나 발록은 오지 않았다.

"결정했어?"

유천이 무릎을 굽혀 크리스티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까 전 하사를 죽이는 것부터 모든 장면을 바로 옆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뭐를요?"

"황녀로 돌아갈 건지. 이대로 몸을 감추고 두 녀석이랑 살지."

창백한 안색이 조금 더 하얘졌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소리다. 역시 눈치는 빠르다며 혀를 내두른 유천이 이어서 말했다.

"네가 황녀로 돌아가겠다면 네 확실한 지위를 약속하지."

"그, 그러지 않겠다면요?"

"신성제국이라는 글자를 지도 위에서 지워줄게."

뭐가 어려운 질문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유천이 웃었다. 짐을 받아들 것인지, 없애고 풀려날 지는 스스로 골라야 하는 법이다. 타인이 강요할 수도 없는일.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꼬마를 보며 유천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표정을 밝히는 꼬마 소녀를 향해 유천은 통보를 내렸다.

"대답을 하기 힘들면 조금 뒤에 듣지 뭐. 펠프스를 죽인 뒤 네 대답을 듣겠어."

몸을 일으킨 유천이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군가의 비명이 울리고 폭음이 터졌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역할을 보이고 있는 것이 황탑의 수호자였다. 덩치에 걸맞게 그의 몸이 지나간 자리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다.

-내성으로 진입한다.

제 본거지에 들어왔는데 놈이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응할 리가 없다고 확신한 유천이  채팅으로 명령을 전했다. 외성 또한 화려했으나 내성은 비교를 거부했다. 이전에 한번 무너트린 보석의 왕궁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은 물론 거기에 더한 장식을 덧붙인 그것은 이미 거대한 보석이나 다름 없었다. 유천이 자신을 가로막는 유저를 가볍게 리타이어시키고 성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미친. 이게 다 얼마야?"

복도는 바닥과 천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보석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다듬은 보석이 복도를 지나는 유천과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비췄다. 뒤이어 들어온 유천 소속의 유저들이라고 감상이 다르지는 않았다. 그 와중 현수은 이미 무기를 정리하고 인벤토리에서 곡괭이를 꺼낸 지 오래였다.

"여기서 한 몫 챙기는 거다!"

머리 위로 곡괭이를 높게 쳐든 현수가 크게 외쳤지만, 유천의 손짓 한방에 곡괭이가 터져나가자 입을 다물고 전방을 주시했다.

"긴말 않겠다. 지금부터 눈에 들어오는 모든 생존자를 죽여."

그게 불쌍한 주민이건 부패한 성직자건 간에 용서는 없다. 처음으로 떨어진 살육 명령에 유저들은 흥분했고 크리스티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천의 로브 소매를 당겼다.

유저들로서는 차후 보상에서 추가될 경험치에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고, 크리스티나로서는 죽어갈 주민들이 부디 저들의 눈에 띄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 거기다 내성 안쪽에 사는 놈들이면 크던 작던 펠프스와 관계가 있는 놈들일테지. 더욱 살려둘 이유가 없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지 않고 유천이 말했다. 소매를 당기던 손이 떨어져나가고 푹 숙인 크리스티나의 고개 아래로 눈물이 조금씩 떨어졌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편이 좋겠네. 사람이 지나치게 많이 모여있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속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대는 크리스티나의 목덜미를 들어 성 밖 정원으로 나온 유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든 싫든 네가 앞으로 살면서 이보다 더한 것도 보게 될거야. 그건 여기 없는 두 녀석이 도와줘도 마찬가지일거고."

아니, 더 심해질 거다.

"눈 돌리지마. 똑바로 보고 받아들여. 전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집어 치워."

앞으로를 생각해도 이 여리기 짝이 없는 꼬맹이는 훨씬 더 독해질 필요가 있다. 유천이 눈물을 닦아주며 나름 다독였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나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방법이 딱 하나 있어. 주민들도 성직자들도 더 안 죽이는 방법이."

"……뭔데요?"

"펠프스를 족치는거지. 그 놈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인데. 놈이 어디 있는지 예상 가는 곳 없어?"

어느새 우는 것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던 크리스티나가 손가락을 세개 폈다.

"가능성이 있는 곳은 세 곳이에요. 첫번째는 알현실. 아까처럼 성이 예전 그 모양 그대로라면 아마 꽤 많은 사람이 안에서 대기할 수 있을거에요. 킁! 기습을 하려면 그 안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공격하는 게 좋겠죠. 두번째는 홀이에요. 무도회나 공연 같은 것도 여는 장소니까 마찬가지로 숨어있을 가능성이 꽤 높을 거에요."

설명하는 도중에도 코를 훌쩍이며 열심히 설명을 하던 크리스티나가 성의 가장 높은 첨탑을 가리켰다.

"개인 집무실."

말을 알아듣기가 무섭게 거친 바람이 일었다. 긴 머리칼이 크리스티나의 시야를 가린 사이 최상층의 일부가 잘려나갔다. 건물 외부에서 내부 깊숙히까지 파고든 자국을 흘깃 살펴본 유천이 고개를 저었다.

"남은 건 두 곳인가."

아직 전쟁 종료까지는 넉넉한 시간이 남아있다. 천천히 찾아볼 요량으로 걸어 들어가던 유천과 그를 따르던 크리스티나의 귀에 철성이 들려왔다. 잇따른 고함소리까지 들려오자 둘의 발걸음은 절로 돌아갔다.

"이 방향은 홀이네요."

옆에서 중얼거리는 꼬맹이의 머리를 헝클인 유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홀의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한쪽 방향으로 달아나는 금빛 장발을 본 덕이었다.

"꽉 잡아. 떨어지지 않게."

크리스티나의 허리를 감아 제 옆으로 당긴 유천이 말했다. 제 품 속으로 끌려 온 소녀가 고개를 끄덕일 찰나의 틈도 주지 않고 유천이 발을 뻗었다.

"홀리 라이트!"

어느새 유천이 제 등 바로 뒤까지 온 것을 확인한 사내가 있는 힘껏 벽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사치스럽기 그지 없는 보석의 벽이 깨져나가며 공중에 뿌려진 빛을 반사했다.

"같잖은 짓을."

유천이 로브를 여미며 입을 놀렸다. 로브가 덥지 못한 부분은 빛에 닿기가 무섭게 시커먼 연기를 피웠으나 놀랍게도 로브에 닿은 빛은 달랐다. 로브 곳곳에 달린 덜그럭 거리는 갑옷 조각에 되려 반사되기도 하고(이 대목에선 유천이 욕을 지껄였다) 검은 번개가 튀어나와 앞서 달리는 펠프스를 후려갈기기도 했다.

"이거 그 때 잘린 그거 아니에요?"

품 안에서 크리스티나가 유천에게 좀 더 달라붙으며 물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천이 어떻게 다시 붙인 거냐 묻는 철부지 꼬마를 향해 말했다. 마치 인생의 진리를 알려주는 듯한 거만한 표정으로.

"현질. 현금술엔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아."

물론 이해 하지 못한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강화에 실패한거나 내구도가 한계에 달한 아이템은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러나 전투로 인해 부서진 무구나 장비는 조각난 형태로 남게 되는데, 이것을 붙일 수 있는 캐시 아이템을 유천은 주저 없이 질렀더랬다.

이윽고 등짝이 시커멓게 그을린 펠프스가 복도에 널린 문 하나를 걷어차며 굴러들어갔다. 그 뒤를 쫓으며 유천이 외쳤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결판을 내자!"

고함을 지르며 방에 들어간 순간, 유천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소리군!"

입꼬리를 있는대로 끌어올린 펠프스가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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