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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이나 먹어라
"도대체 그 놈은 어떻게 한 거야?"
난장판이 된 공동의 중심에서 노인이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는 노인의 머리 위로 금이간 종유석이 삐걱거리다 떨어졌다.
"에이, 귀찮게……!"
머리 위에도 눈이 달린 것인마냥 보지도 않은 채 손을 까딱이자, 종유석은 말 그대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럴 땐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게 제일 정확한 법이지."
중얼거리며 짚고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한번 찍자, 더이상 그 공동에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직후 공동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 * *
"아, 할거 없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 뜯고 다시 쓰고 싶은 편지에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고 제가 써놓고 생각없이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천이 한숨을 푹푹쉬며 천장을 노려다봤다.
뻔뻔하긴 그지없이 휴대전화만 노려보며 연락을 기다리는 유천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가 밤중에 싸지른 편지를 치우러 후다닥 위층으로 올라갔었으나, 문고리에는 포장된 상자나 제 편지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읽었으면 문자 한통 정돈 줄 수 있잖아. 알았다라던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는 거냐며 책임을 묻는 말이라도 와야 변명이라도 할텐데 일방적으로 저쪽에서 소통을 하려들지 않으니 유천의 입에선 한숨이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유천의 휴대전화가 진동을 울렸고 유천은 진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미안한데, 오늘 갑자기 너한테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 가능하겠냐?]
"당연히 안하죠. 머리도 복잡해 죽겠는데."
무척 오랜만에 듣는 한코치의 말에 투덜거린 유천은 이어진 말에 고함을 질렀다.
[나도 알지. 너 이런거 싫어하는거. 근데 이거 진행자가 채린이길래 혹시 해서 물어…….]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는데요?"
말이 도중에 끊어먹고서 물어오는 유천이 기가찬듯 대답은 한동안 오지 않았으나 한숨과 함께 코치의 대답이 돌아왔다.
[준비할 필요 없어. 게임 내에서 하는 거니까. 접속하고 있으면 운영진이 알아서 호출할거야. 30분쯤 뒤에 시작한다니까 얼른 들어가.]
"네."
[하여간에, 너도 애인 일이라고 평소에 안하던 짓도 하는구나. 누군 서러워서 살겠나…….]
"끊어요."
한 코치가 뭐라 투덜거릴 새도 없이 전화를 끊은 유천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한번 보고는 캡슐로 들어갔다.
[리트머스 대륙전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접속할때마다 보는 상투적인 메세지를 뒤로하고 게임을 시작한 유천은 망신창이가 된 땅거죽 위에 서있었다. 그날 일을 벌이길 제대로 벌인 것인지 땅속 깊숙히 자리잡은 신성력에 의한 데미지를 입고 있다는 메세지를 무시하고서 유천이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화악-!
모여든 빛무리가 유천을 감싼 채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유천은 언제나 그랬듯 벨리튼의 집무실이었다.
"영감, 노우한테 소식은 들었지?"
빛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유천이 나타날 것이라 예상한 벨리튼이 차를 내밀자 유천이 잔을 들어 올리며 묻자 벨리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크게 폭음이 울리면 굳이 그녀를 통해 듣지 않아도 결과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걸세."
벨리튼의 대답을 듣고서 유천이 입을 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만한 피해를 입혔고, 지금도 게릴라전으로 신성제국의 피해는 실시간으로 늘어가고 있지. 전면전을 벌이기엔 지금만큼 좋은 호기가 없어."
"거절하겠네. 자네 말대로 지금처럼 게릴라전과 자네와 새로온 그 친구만 있어도 저들은 알아서 뿔뿔히 흩어질텐데 굳이 뭉칠 이유를 줄 필요는 없지."
갑작스레 진지해진 유천의 말에 벨리튼이 거절을 표하자 유천은 인상을 살짝 구겼다. 그의 말대로 지금 신성제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지 않아도 머지않아 그들은 붕괴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진격을 원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화풀이 대상을 찾았다.
승인을 내주지 않는다면 그뿐이다. 어차피 이곳에 모인 유저들의 8할 이상이 자신이 모아온 이들이고 나머지 2할이 자신만 보고 따라온 이들이다.
처음부터 벨리튼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펠프스놈과 적대하는 세력 중 힘을 실어줄 만한 곳이 이곳 뿐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신으로 세력을 꾸릴 자신도 힘도 있으니 굳이 힘을 합할 이유도 없겠지.
"어째서 동부의 기사놈들이 자네를 싫어하는 지 알겠군.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즉흥적이야. 또한 감정에 너무나도 솔직하고 그에 휘둘리지. 자네는 흑마법사라는 이유 말고도 남과 많은 척을 쌓고 지낼걸세."
한숨을 내쉬며 유천에개 손짓을 하는 벨리튼. 명백한 축객령이였다. 그러나 유천은 알고 있었다. 벨리튼은 결코 이 배에서 내릴 수 없음을.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이상 내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벌써 흑마법사와 결탁한 타락한 공왕이라는 말이 신성제국 내에서 떠돌고 있는 이상. 유천을 밀쳐낸다고 한들 이미지 쇄신에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
"잘 생각해 보라고. 이 쪽은 일이 있어서 이만하지."
양 손에 제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연신 내쉬는 벨리튼에게 손을 흔들어준 유천은 한번 더 빛무리에 몸을 맡겼다. 마을 외곽에 이를 즈음 유천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같은 편한테 그런 식으로 말을 해도 될까요?"
"같은 편이라니, 착각이 심하네요. 이해관계가 맞을 뿐이에요."
파란색으로 GM 마크가 그려진 모자를 쓴 여성을 보며 유천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운영자가 손을 내밀자 유천이 그 손을 맡잡았고 유천의 시야가 온통 백색으로 가득찼다.
"이게 무슨……."
-모든 공격 스킬, 아이템의 사용이 금지됩니다.
-적용된 모든 스킬, 아이템의 효과가 취소됩니다. 이 장소를 벗어날 시 효과는 다시 적용됩니다.
백색으로 물든 것은 처음 뿐이었다. 온갖 장면이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데, 그 속도가 엄청났던지라 속이 뒤집힌 유천은 처음으로 비틀거리며 울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중얼거렸다. 이어 떠오른 메세지를 볼 새도 없이 운영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 처음 오시는 분들은 다들 그러더라구요. 조금 어지럽죠?"
이게 조금이냐! 평소에 자신이 이동 마법을 펼치고 다녔던 탓일까, 남이 사용하는 이동마법을 이용한 적이 워낙 적었던 터라 유천은 더욱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가 쓸때는 그렇게 쾌적할 수가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그쪽으로 가보도록 할까요?"
아직까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비틀거리는 유천의 한쪽 팔을 잡은 채 운영자는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정신을 차린 유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정신병원에 온 것 마냥 온통 백색으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약간의 화장을 위해서 옆의 대기실로 갔지만, 크리스 씨는 그럴 필요 없어보이니까 넘어갈게요."
운영자의 말에 유천이 자신만 뭐 차별대우 하냐는 듯 따지기 위해 손을 들어올리자, 유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앙상한 뼈마디였고, 유천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이를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아니요, 그렇게 늦지는 않았어요."
곧이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유천이 고개를 돌렸다. 허리께까지 넘실거리는 황금빛 장발, 온몸을 감싼 금색으로 용이 새겨진 백은색의 눈부신 갑주, 마찬가지로 금색 용이 그려진 등 뒤로 펄럭이는 푸른색의 망토까지, 은빛과 금빛이 어우러진 서클렛까지. 보기만 해도 성스럽다는 느낌이 펄펄 풍기는 사내를 보며 운영자가 대답하자 유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 오랜만에 보는걸?"
웃음기를 머금은 유천의 목소리에, 마찬가지로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펠프스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연신 키득이며 펠프스의 얼굴을 보던 유천은 뒤이어 들어오는 여성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펠프스와 마찬가지로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웨이브진 금발이 공간 내부의 백광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하얀 구두가 발을 예쁘게 잡아주고, 백은빛을 바탕으로 피처럼 붉은 수로 신성제국의 상징이 그려진 드레스를 입고있는 여성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처음뵙겠습니다. 크리스 씨. 신성제국의 성녀 레이라고 합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알고계시겠지만, 현재 벨리튼 공국 소속 크리스라고 합니다."
건네는 손을 마주잡으며 유천이 작게 이를 갈았다. 신성제국과의 전면전을 앞둔 상황에서 유천이 모르는 새로운 전력의 출현이란 까다롭기 그지 없었으니까. 한숨을 쉬며 유천이 손을 놓는 순간 건너편에서 채린이 걸어왔다.
"다들 친해보이네요. 레이씨는 저와도 초면이죠?"
평소 쓰던 계정이 아니다. 다리를 훤히 드러낸 핫팬츠에 굽낮은 구두, 두 어깨를 훤히 드러낸 흰색의 오프 숄더 블라우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짧은 머리. 방송용 서브 계정이라고 했었나. 드러난 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부분보다 많다. 그부분에 쏠리는 펠프스의 시선을 보며 유천은 빠득 이를 갈았다.
"이거라도 입어."
유천이 대뜸 제가 입고있던 로브를 벗어 채린에게 건네주었다. 로브 아래로 골반에 걸친 가죽바지와 얇은 레더메일이 앙상한 뼈가 그대로 드러나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혀를 찬 유천은 채린이 로브를 받아들자마자 입을 열었다.
"폴리모프."
채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유천이 건넨 로브를 툴툴거리며 입을때, 유천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널널하기 그지 없어 작은 움직임에도 펄럭이던 바짓단이 서서히 제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견골에서 솟아난 근육과 살갗이 레더메일을 들어올린다. 두개골에서는 흑단과도 같은 짙은 검은색의 머리가 자라나 현실의 유천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쯤이면 되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유천이 인벤토리에서 얇은 가죽제 재킷을 걸치고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모일 사람도 다 모였겠다. 시작해볼까요?"
손뼉을 치며 운영자가 입을 열었다. 유천과 펠프스의 시선이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 작품 후기 ============================
덱스트린님이 물어보신건데, 닉은 아마 한달반쯤 전에 바꿨을걸여 아무도 신경 안쓰길래 후기에도 안쓰고 있었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