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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이나 먹어라
멍하니 앉아 있던 유천이 정신을 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채린을 따라 현관문을 열던 유천은 제 발치에 걸리적 거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내렸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종이가방 사이로 튀어나온 보온병을 발견했다. 땅에 떨어진 충격 때문일까, 유천의 발에 채여서일까? 살짝 열린 보온병에서 따뜻하기 그지 없는 죽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유천은 다시금 입을 다물고서 고개를 돌렸다.
앞뒤 상관없이 게임을 종료하고 나온 유천에게 있어 다짜고짜 헤어지자 통보를 한 채린이 야속했고, 배신당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고개를 돌려 아직까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소피아를 보며 유천이 쓰게 웃었다. 배신한 것은 누구이고, 배신당한 것은 누구인가? 굳이 찾으려 애를 쓸 필요도 없었다. 당연한 것이니까.
"못볼 꼴을 보였네. 미안해. 피곤할텐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 거기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텐데."
"어, 어? 그래야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리는 유천의 모습을 보며 소피아는 대화를 더 이어갈 생각도 못한 채 움직이지 않는 제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서 열려있는 유천의 방에 들어갔다. 그 처량한 모습에 유천이 도와줄까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생각은 길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그게 후회될 뿐이었다.
말을 하고 데려왔어야 됬나? 아니 그 정도는 이해를 해줄 수 있잖아,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녀석인데. 아니면 내가 전에 또 잘못한 게 있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의미 없는 생각만 계속하며 유천은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낮까지만 해도 그만큼 좋을 수가 없었는데. 현관 근처의 선반에 올려진 제 졸업장을 보며 유천은 표정을 구겼다.
"사과해야겠지."
여기서 계속 혼자 생각을 하던 자책을 하던간에 그건 결국에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진심을 말하고 전한 뒤에 제대로 사과하자. 결심을 내린 유천이 발을 내디뎠다. 한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게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나한테 그럴 자격은 있나?
그 생각 하나가 드는 것만으로 수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캐릭터를 인질로 잡고서 불러냈던 첫만남부터 그에 이은 고백과 데이트까지. 솔직하게 말하면, 채린이 하고 싶었던 것이 있긴 했을까. 후회에 뒤이어 찾아온 자괴감은 유천의 발걸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정말 날 좋아했던건 맞을까. 아니 내가 좋아했던 건 맞나? 계속된 물음에 유천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 완전히 쓰레기잖아."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제가 채린의 입장이었더라면 진작에 헤어지자고 했으리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채린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게임을 하던 자신 뿐이었을 것이고. 게임을 마친 유천이 채린에게 건낸 말도 수고했다는 말 같은 위로도 아니였다. 단순히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또 하고 싶은 것만 했다. 더군다나 최근에 와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나?
납치 당하기 전까지는 몰라도 그 후에 대해선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히 죽은줄로만 아는 채린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알게 된 이후에도 자세한 설명은 피했다. 아까 채린이 말했듯이. 채린은 언제나 유천을 기다리고 이해하고 또 걱정했다. 자신은 그것 하나 눈치 채지 못하고 천둥 벌거숭이마냥 제 맘대로 설치고 다니기만 한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천은 제가 지금 사과를 하는 것 마저 망설여졌다. 사과를 해서 쉽사리 용서를 받을만큼 자신이 한 행동은 가벼웠나? 주춤거리며 현관에서 물러난 유천은 거실 한켠에 숨겨둔 포장된 상자가 보였다. 아까 나가서 채린에게 주겠다고 사온 옷들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유천이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할말이 없어서 미안해.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내가 생각해도 내가 잘 한 일은 하나도 없더라. 누나 말대로 언제나 누나 혼자만 기다렸던 것도 사실이고 내가 뒷일은 생각 안하고 설친것도 사실이야. 내가 이런말 하는 것도 참 웃기지만 잠깐만 시간을 가져보자. 이건 누나 주려고 샀던 거니까 받아주면 좋겠어.]
종이 위에 채린에게 할 말을 쓰던 유천은 겨우 글을 마무리짓고서 종이백에 포장된 상자와 함께 편지를 넣었다. 그리고 현관을 나서서 채린의 집 문고리에 종이백을 걸고는 다시 제 집으로 내려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눈이 문으로 향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다고, 그렇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며 문을 열고 제게 안기는 채린을 상상하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제 집으로 돌아왔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유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이만큼도 뻔뻔한 놈이었구나.
제 집의 문을 열고서 들어온 유천은 엎어진 보온병을 치울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지 뒷춤이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그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어 유천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잠들고 말았다.
* * *
"감기에는 따뜻한 죽이 좋다고 했으니까."
일을 마치고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집에 들어온 채린이 손수 장을 봐온 야채들을 씻으며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 스케쥴을 끝으로 당분간은 휴식기에 들어갈거라는 제 기획사 실장의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죽을 끓여서 유천에게 한 숟갈 한 숟갈 손수 먹여주는 상상을 하며 채린이 히죽거렸다. 그 다음엔 이렇게…….
"앗!"
멍하니 히죽거리다 달아오른 냄비에 맨손을 올리는 실로 멍청한 짓을 한 채린이 찬물에 손을 식히며 생각했다. '너 먹이려고 죽 끓이다 손 데였어.'라고 말하면 유천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실로 즐겁기 그지 없는 상상을 하는 와중에 채린의 휴대전화가 가볍게 진동을 울렸다.
[언니, 울 오빠 오늘 졸업장 가져감. 오늘자 싱싱한 백수 빠르게 처분함. -유정]
에, 그러면 내일부턴 자신도 유천도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간만에 둘이서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생각에 괜히 얼굴을 붉힌 채린이 유정에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답장을 보내고는 불을 껐다. 죽이 식을 새도 없이 빠르게 보온병에 옮겨 담은 채린이 종이가방에 보온병을 챙겨넣고 반찬 몇개를 더 챙겨넣은 뒤에 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어떤 옷을 좋아할까? 고민을 하며 옷을 챙겨 입은 채린은 옅은 화장을 하고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꼼꼼히 살피곤 준비 완료!라고 작게 외쳤다.
종이가방과 함께 내일 갈아입을 여벌옷을 담은 가방을 메고서 제 집을 나선 채린은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유천의 집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유천이라면 또 게임을 하고 있을테니 먼저 들어가서 저녁을 준비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도어락을 조작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
그리고 채린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백이 볼품없이 현관에 나뒹굴었다. 현관의 정면에 위치한 욕실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물기를 가득 머금고서 샤워 가운을 걸친 소피아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나오는 모습을 본 탓이었다. 그 장면을 본 채린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쟤가 왜 지금 저기 있는거지?
머리의 물기를 털며 등을 돌린 소피아 또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채린과 눈을 마주치고서 굳은건 마찬가지였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별 거 없었다. 낑낑거리며 제 다리를 끌고 방에 들어가 집에서 입으라며 유천이 건네준 펑퍼짐한 츄리닝을 겨우겨우 걸치고서 방에서 나오자, 세로로 눈을 쩨고서 자신을 노려보는 채린을 보며 소피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미안하기는 했지만 소피아는 그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곧장 캡슐로 몸을 옮기고서 유천을 호출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줄래?"
어이, 아무리 그래도 캡슐에서 이제 발만 밖으로 뺀 사람한테 벌써부터 그걸 요구하면 어떻게 해. 소피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유천을 호출한게 악수는 아니였나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잠깐 소피아가 딴청을 피우며 고민하던 사이, 채린이 유천에게 폭탄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리 그만하자."
'에에?!'
채린의 말에 소피아는 속으로 경악을 하며 생각했다. 제가 대형사고를 터트린 것이 분명하다고. 채린이 유천을 밀치고서 제 가방을 챙기고 문을 나서는 장면까지 지켜본 소피아는 멍하니 유천을 바라봤다. 갑자기 와서는 다 나때문이라고 집에서 쫓아내면 어떻게 하지? 오늘 잘 곳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소피아가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때 유천이 소피아에게 들어가서 쉬라는 말에 소피아는 겨우 방에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 작품 후기 ============================
에에? 단합 죽이넼ㅋㅋㅋ
요번 편은 유천이 감정을 위주로 한번 써봤긔. 저번에 어떤분이 서평 써주신 대로 이 놈은 사회생활하는데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잘 하는 놈이 아님니다 연애는 당연히 처음이고 생각은 제 중심이죠. 그게 연애사에서도 적용이 되서 무조건 지 맘대로 가고 채린이가 질질 끌려다니고 무조건 유천이를 이해해주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서 이렇게 써봤슴다. 솔직히 그만큼 여자들한테 꼬리치고 다녔는데 이만큼 봐준것도 보살이다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