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5 / 0440 ----------------------------------------------
엿이나 먹어라
상패를 들고서 집에 들어온 유천은 연신 낄낄 웃으며 교복을 아무렇게나 벗어서는 방 구석에 던졌다. 그리고는 익숙한 몸짓으로 캡슐의 커버를 열고 몸을 뉘이려던 유천은 잠깐 멈칫했다.
'몸살 다 떨어질 때까지 게임 금지야.'
캡슐에 한발짝을 들여놓자마자 떠오른 채린의 한마디에 유천은 한숨을 내쉬며 캡슐의 커버를 닫았다. 아무리 요새 자신의 사칭범(?)들이 돌아다녀 걸릴 확률이 낮다고 해도 채린을 속이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소피아랑 정현 그 놈도 볼겸, 병원이나 가야겠다."
위잉-
생각을 마친 유천이 방 안으로 들어가 검은색 데님 청바지와 얇은 셔츠 위로 푸른색의 스웨터를 입고 외투를 찾으려 옷장을 뒤적거리는 도중,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휴대전화가 작게 진동을 울렸다.
[오늘 시간 되면 좀 만날 수 있을까? - 하늘이형]
"이 형이 웬일이지?"
연락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였다. 종종 안부를 묻기도 하고 실없는 주제로 대화도 자주 나누기는 했으나, 실제로 만나자는 연락은 처음이었기에 유천은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며 몇 시에 만나면 되겠냐 물었다.
[급한 일은 아니니까, 볼일 있으면 끝나고 문자 줘 - 하늘이형]
답장을 받고서 잠깐 고민하는가 싶던 유천은 6시 조금 넘어 저녁이라도 먹자며 제 집 근처의 식당을 문자로 알려주고는 옷장에서 검은 야상을 하나 걸쳤다. 그나마 크게 사서 입었던 것이기에 전보다 덩치다 더 커진 유천에게 맞는 몇 안되는 옷 중 하나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듣는 이 하나 없는 텅빈 집. 유천의 인사만이 작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구름이 걷히며 창문 사이로 삐져나온 햇살에 거실에 있던 책장에서 반짝하고 작게 빛이 빛났다.
"어? 진짜 게임 안하네?"
화보 촬영을 나왔던 채린은 대뜸 울리는 휴대전화의 알림에 유천이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음을 알고, 몰래 설치해둔 카메라로 유천이 게임을 하는 지 안하는 지 확인하려 했다. 역시나라고 해야 될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휘적휘적 벗어던지고는 캡슐로 들어가려는 유천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채린은 곧 캡슐에서 나오는 유천을 보며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나랑 한 약속 때문인가?"
그런 거라면 기분 좋겠다며 채린은 웃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웬지 오늘은 무슨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모델 분들은 준비해주세요!"
"네!"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촬영 스태프의 외침에 채린은 웃으며 크게 외쳤다. 환한 조명이 채린의 웃음을 더 밝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 * *
"어제 몸살에 걸리셨다는 것 치고는 상당히 회복 속도가 빠르시네요. 굳이 약까지 드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 그래요?"
"네. 다음 환자 들어오세요!"
소피아가 입원한 병원에 도착한 유천은 먼저 진료실에서 제 몸상태에 대해 진료를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감기가 떨어질 것이라 말하는 의사를 보며 유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실 바깥으로 나갔고, 의사는 다음 환자를 호출했다.
"이제 내일부터 다시 게임 할 수 있겠다."
연신 키득거리며 유천은 당장 내일부터 게임을 할 생각에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폐인 아니랄까봐, 게임할 생각에 부들부들 떨기는."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아니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데?"
유천이 실실 웃으며 채혈실의 바로 앞을 지나치며 계단에 발을 오르는 동안, 누군가 유천의 뒤에서 궁시렁거렸고,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유천이 등을 돌려 바라보자 그곳에는 지원이 있었다. 얌전한 검은색 머리로 염색을 하고서. 깜짝 놀란 유천이 삿대질까지 해가며 외치자 몰리는 시선에 지원이 표정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좀 닥쳐. 소피아 그 년 보러 갈거면 저기서 나오는 저 놈 따라 가던지."
"그 말투는 어떻게 바꿀 수는 없을까. 예나 지금이나 거북하기 그지 없는걸."
츤데레 말투는 남자가 쓰면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더라. 유천이 실실 웃으며 지원의 말에 농담을 건넸다. 절대 지원의 다리 위에 얹혀진 두 팔위로 덮여진 담요 아래서 빛나는 수갑을 보고서 놀린 것은 아니였다.
"오, 쟤도 왔네."
"재수도 없지 왜 하필이면 소피아 그 년이랑 같은 병원이야."
투덜거리던 지원이 욕을 지껄이며 채혈실 안으로 들어가자, 지원과 마찬가지로 푸른 머리를 검게 물들인 성열이 채혈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성열은 유천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욕을 중얼거리고는 유천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검은 옷을 입은 정장사내의 손에 팔이 잡혀 막히고 말았지만. 그 순간 성열은 또 한번 욕을 중얼거렸다.
"젠장, 누가 도망친다고 자꾸 잡아!"
욕설에 깜짝 놀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건 말건 성열은 씩씩거리며 제 팔을 잡은 덩치를 어깨로 들이받고는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성열의 어깨에 밀쳐진 검은 옷의 사내가 곧 제 어깨를 툭툭 털고는 유천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소피아 양을 보시려면 저 치를 따라가면 됩니다."
손가락으로 성열의 뒤통수를 가리키는 검은 옷의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유천은 성열의 뒤를 따라가며 성열의 등 뒤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지원과 마찬가지로 수갑을 찬 성열은 그저 부들부들 떨면서 욕만 지껄여댈 뿐, 유천에게는 손 끝하나 댈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소피아년. 이 안에 있으니까 들어가 새꺄."
투덜투덜거리며 성열이 그 옆의 병실로 들어가자, 유천은 피식 웃으며 성열의 뒤통수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는 소피아의 병실로 들어갔다.
"어? 몸은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덕분에."
병실의 문을 열자마자 세상 모르게 소파 위에 누워서 쳐 자고 있는 정현을 발로 차려던 유천을,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던 소피아가 발견해 먼저 말을 걸었다. 유천은 소피아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현을 발로 툭툭 걷어차고는 소피아의 침대 근처에 의자를 끌고가 앉았다.
"넌 괜찮지? 그 때 안다쳤고?"
"뭐야, 천하의 신유천이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아니면, 작업거는 건가?"
"큰일 날 소리."
"에이, 재미없게."
유천이 소피아의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 한쪽 다리에 손을 얹고서 말을 건네자, 소피아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유천에게 농담을 건넸다. 누가 누구한테 위로를 하는건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중얼거린 유천은 소피아의 이마에 꿀밤을 먹여주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밖에 두 명은 어떻게 된 거냐?"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크리스 걔까지 합쳐서 세명 모두, 아버지를 구하겠답시고 설치다가 모조리 진압. 여기에 끌려와서 상처 치료받고 자료 뽑는 중이야."
"자료?"
어차피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 자신에게 쳐들어왔던 놈을 본 순간부터 그 세명이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다. 다만 소피아까지 노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지. 그 와중에 거슬리는 단어 하나가 귀에 들어오자 유천은 미심쩍은 눈빛을 하며 소피아에게 물었다.
"알다시피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평범하지는 않잖아? 그런 귀한 샘플은 함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설마 너도 저 새끼들처럼 피 뽑고 그러지는 않지?"
"이게 피 뽑고 다니는 팔로 보여?"
소피아가 너스레를 떨듯 어깨를 으쓱이며 유천과 자신, 그리고 소파 위의 정현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하자, 유천의 표정이 보기 흉할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나마 소피아가 보여준 두 팔에 바늘 자국이라고는 혼수상태일때 꽂았던 수혈 팩과 영양보충제 외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맞다 여기 밥은 어때?"
"어딜 가든 병원 밥이 그게 그거지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몸을 던져가며 자신을 지켜줬던 소피아를 다른 놈이 건드는 꼴은 볼 수 없던 유천이 다행이라며 소피아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벽면의 시계를 보며 물었다. 어느새 시간이 하늘과의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볼을 부풀리며 불만이라는 듯 중얼거리는 소피아를 보며 유천은 소피아의 침대 근처에 세워진 휠체어를 꺼내고는 말했다.
"나랑 저녁 먹으러 가자."
"어머, 그거 데이트 신청?"
"오냐. 얼른 타기나 해."
어차피 두명이나 세명이나 그게 그것일 대화 내용, 한명이 늘어난다고 달라질 건 없다. 유천은 연신 웃으며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소피아에게서 유정이 보인다며 중얼거리고는 소피아가 올라탄 휠체어를 밀며 병실에서 나왔다.
"아직, 그 환자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필요 없어. 오늘부로 퇴원 시킬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지원을 비롯한 그 세명 모두 미운정도 정이라면 단단히 박혔다. 그런 사람들을 실험재료 대하듯 하는 이 병원에 소피아를 둘 생각은 없던 유천은 그대로 유니온의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피아를 퇴원시켜달라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고 자신을 말리는 의사와 경호원들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아무래도 휠체어는 택시를 타기 어려운데……."
이번으로 5번째. 휠체어를 가지고는 택시를 탈 수 없다며 거절하는 택시기사를 보며 유천은 아직까지 자신을 따라오는 의사와 경호원들에게 휠체어를 밀어주고는 소피아를 등에 업었다.
"이제 되죠?"
휠체어를 받고서 아직까지 멀뚱멀뚱 서있는 이들을 보며 피식 웃은 유천은 택시기사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고는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떠나고 난 뒤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따라오는 의사들을 보며 유천과 소피아는 서로를 마주보고는 곧 한바탕 웃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졸리다 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