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2 / 0440 ----------------------------------------------
엿이나 먹어라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별 거 없었다. 초여름이라 아직까지는 추운 날씨에 캡슐로 들어가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러다 걸렸다간 게임을 하는건지 잠을 자는건지 구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만 나리라.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던 유천의 눈이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방향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절대 가고 싶지는 않았어. 동생인 네가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어차피 본가로 들어가 요새는 잘 들어오지도 않는 유정의 방문 앞에서 저 혼자 지껄이던 유천은 온갖 난리를 혼자 다 치고 난 뒤에서야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목을 틀어 문고리를 돌렸다.
"망할 년, 요샌 거의 오지도 않으면서 짐만 남겨두고, 거기다 문까지 잠근 채로 가다니."
쓸데없이 철저해. 투덜거리며 유천은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런 유천의 눈이 다시금 거실의 한 구석으로 향했다. 주위의 온도를 체크하는 온도센서, 그에 맞춰 주변 온도가 설정된 기온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히터를, 설정된 이상으로 올라가면 에어컨을 틀어주며 시트 또한 웬만한 소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푹신하다, 높낮이 조절까지 가능해 침대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말 그대로 오직 게임 폐인의, 게임 폐인을 위한, 게임 폐인에 의해 제작된 캡슐. 저기서 잠을 잔다면 최소한 춥지는 않겠지. 수면이냐 애정전선이냐. 그 선택의 기로에서 유천은 당연하게도 캡슐에서 자는 것을 포기했다.
"하루쯤 찬바닥에서 잔다고 죽지는 않으니까."
등은 꽤 결리겠지만. 그 정도 쯤은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니 넘어갈만 했다. 아니, 분명히 그랬어야만 했다.
"에-엣취!"
네, 감기에 걸려버렸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컨디션이 좋았다고는 하나, 어제부터 유천은 병원에서 그 난리를 쳤다가 경찰에게 한참을 시달리고 온 피로조차 제대로 풀지 못한 상태였고, 잠도 자지 않고 게임까지 했다. 피로가 쌓이고 쌓였던 주제에 쌀쌀하기까지한 날씨, 이불한장 덮지 않고 소파에서 자다가 잠꼬대로 바닥에 떨어진 채 그대로 곯아떨어진 유천은 감기 몸살에 걸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네, 아무래도 이틀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많이 피곤했던 것 같아요. 아마 오늘도 못 나갈거에요. 죄송합니다."
[아뇨, 유천이도 아니고 채린씨가 죄송할 필요까지야…….]
"아뇨, 제 탓도 조금……많이 있는 일이라서."
유천에게 유천의 담임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물어서 그 번호를 알아낸 채린은 유천이 침대에 누워 자신이 해준 죽을 떠먹는 모습을 보며 통화를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유천이 원래 자신의 몸을 잘 돌보지 않아 이런 일이 한두번 있는 건 아니라며 되려 채린을 달래오는 통에 채린의 눈가가 살며시 가늘어지며 유천을 노려봤다.
'한두번이 아니라 이거지?'
솔직히 이번건이 자신의 탓이 적지는 않았으나,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라면 얘기는 조금 많이 달라진다. 솔직히 이번 건은 유천이 안에서 자고 싶다며 문을 열거나 두드렸으면 져주는 척 열어줄 생각이었던 채린은 되려 유천이 언제쯤 문을 열지 기다리다 잠이 들었고, 유천은 그러거나 말거나 소파에서 저 혼자 자다가 저 꼴이 나버린 것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어느새 통화를 종료한 채린이 조금은 화난 눈초리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본 유천은 대뜸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한이 든다느니, 춥다느니, 기침이 가라앉질 않는다느니. 물론 그것은 현직 배우인 채린이 보기에는 정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아픈척이었으나, 못본 체 하기로 했다. 어찌되었건 이번 건은 그녀의 잘못이 맞았으니까. 그게 아무리 데이트를 파토내고 한 행동이 게임이었다는 것에 대한 분풀이었다고는 해도.
"일단 죽은 마저 데워 뒀으니까 점심엔 데워서 먹어. 나는 일 다녀올게. 다행히 열은 꽤 내린 것 같아."
"어어? 그래. 다녀와."
아픈 척이 먹힌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이마를 쓸어내리는 채린의 행동에 유천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기도 잠시, 유천은 손을 들어 방을 나가는 채린을 보냈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기 직전 채린이 방 안의 유천에게 들리게끔 말했다.
"게임, 하지 말라고는 안하니까, 적당히 해. 그러다 또 약속 깨거나, 아프면 가만히 안 둘거야."
"알았으니까, 누나도 일 잘 하고와, 다치치 말고."
크지는 않게, 그러나 현관에서는 들을 정도로 말을 마친 유천은 슬쩍 몸을 일으켰다. 고작 몸을 틀어 침대에서 내려왔을 뿐인데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작게 욕을 지껄인 유천은 이마에서 떨어지는 물수건을 침대 근처의 서랍장 위에 얹어두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골이 울리는 듯한 느낌과 어지러움이 유천을 덮쳤지만 유천은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들고 나온 빈 그릇을 싱크대 안쪽에 넣어둔 채 캡슐 안에 비척비척 들어갔다.
"게임 시작."
아픈건 아픈거고, 게임은 게임이다. 심오한 인생의 진리라도 되는 양 유천은 대충 알람만 맞춘 채로 게임을 시작했다. 수백번은 더 본 익숙한 로딩장면이 지나가고, 시야가 컴컴해지더니 다시 밝아졌다. 생각 외로 이른 아침부터 접속한 유저는 적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유천을 보고 되레 놀라는 유저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유천의 시선이 돌아가자 눈길을 피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노우는 있냐."
그나마 게임에 들어오니까 살것 같다며 중얼거린 유천이 주위의 유저 중 하나를 잡고 물었다. 이 시간에도 접속한 유저가 의외로 많아 있을 거라 생각해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아쉬운 듯 혀를 끌끌차던 유천은 주위의 유저들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접속한 인원은 전원 벨리튼 공국으로 향한다. 뒤에 접속하는 인원에게는 따로 메세지를 보내둔 뒤 벨리튼 공국에서 모일 수 있도록."
"그럼 너……는 뭐 하는데?"
유천의 말에 한 남성 유저가 손을 든 채 유천에게 반말로, 무척이나 어색하게 질문했다. 마치 유천에게 존대를 해야할 지, 반말을 해야할 지 고민 중이라는 듯 말을 마친 후에도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남성 유저를 보며 유천은 제 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리곤 입을 열었다.
"본진털이."
"에에?"
유천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유저 대부분이 경악하며 외쳤다. 솔직히 유천이 뭐가 아쉬워 자신들을 포섭(이라 쓰고 협박이라 읽는다)했겠는가, 무언가 쓸 곳이 있어 포섭한 것일 텐데, 첫 전투 조차 하는 도중 빼돌려졌다. 그 뒤로는 하는 행동이 마치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어이가 없는 눈초리로 자신을 보는 여러명의 눈을 보며 유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벨리튼 공국 근처의 신성제국 잔당을 회유, 처치하는 역할. 그리고 주변에 있을 반 신성제국 세력을 모으는 것이 목적, 난 아까도 말했다시피 본진털이."
솔직히 질문 받고서 바로 만들어낸 내용이었다. 퀘스트 하나 클리어하겠답시고 개고생 하면서 모았는데,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버리는 건 아깝다. 그렇다면 어디 써먹을 구석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유천은 곧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려 깊은 숲으로 들어갔고, 유저들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겨우 이딴 거 시키려고 우리를 끌고왔다 이 말이지?"
"젠장, 적어도 펠프스 그 새끼는 공격대 역할이라도 줬지!"
투덜투덜거리며 유천이 들어간 숲 방향을 쳐다보던 유저들은 곧 하나 둘 그 자리를 떴다. 어찌되었던 현재 그들의 소속은 신유천과 벨리튼 공국의 소속이었고, 어차피 신성제국 측에선 이제 그들을 받아줄 생각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러나 저러나 유천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이기기만 하면, 이득인 것은 분명하니까."
아직까지는 신성제국에 붙은 유저의 숫자가 벨리튼 공국과 유천에게 붙은 유저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그들이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배분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지금 자신들은 달랐다. 신성제국에 비해 유저들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인전, 난전을 비롯해 전투에 있어서는 현 랭커 전원을 합친 것 보다 강하다는 유천이 있다. 이후에 유저들이 몰려들어 끼어든다고 한들, 처음부터 있던 그들에 비해 배분율이 높지는 않으리라.
""거룩한 주신의 뜻으로, 그에 반하는 간악한 무리를 당신의 힘으로 심판하소서, 신의 심판.""
유저들이 하나 둘 출발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그 순간, 숲을 둘러싼 채로 흰색의 기운이 치밀어 오르며 사방에서 들려오는 기도문에 유저들의 인색이 창백해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신성제국의 반격이었다. 신성술에서도 단체로 행하는 공격에 있어선 제네시스 다음으로 손꼽히는 신성술에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굳어져 있는 사이, 숲 안쪽에서 유천의 목소리가 울렸다.
"태고의 자락. 신에 필적하는 거대한 힘이 지금 그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거신의 팔."
태양마저 가릴 듯한 거센 빛무리가 숲을 가득 채운채 떨어져 내렸다. 유저들이 유천의 반응이 늦었구나 싶어 벌써부터 채념한체 사망 패널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나무 수십그루를 뿌리채 뜯어내며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손이 빛무리를 가로막았다. 여름날 햇빛을 손으로 가리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그 결과는 상당했다. 미처 그 거대한 팔과 손이 막지 못한 곳에 있던 유저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그대로 산화되어버렸지만, 그 아래 있던 유저들은 털끝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 산화된 유저 또한 체 한손을 넘지 못했다.
"내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도."
근처의 나무 위에 발록과 라이헤르를 향해 눈짓을 한 유천이 나무 사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유천의 얼굴을 본 라이헤르와 발록이 그 자리에서 티나와 함께 사라지고, 빛무리에 밀리듯 뒤로 밀려나던 거대한 팔은 점차 제 몸체를 일으켜 세웠다. 빛무리가 발악을 하듯 이리저리 사방으로 거센 빛을 토해냈지만, 터무니없게 거대한 크기에 걸맞는 힘으로 그 빛을 몰아낸 팔은 주위를 한번 휩쓸었다.
"하늘로 보내줄 수는 있지."
눈 깜짝할 사이에 눈 앞을 가리는 수많은 메세지의 향연에 유천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아직까지 어벙한 표정을 지은체 멍하니 서 있는 유저들을 보며 유천이 손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하냐고. 그 입모양을 본 유저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곧장 거대한 팔이 쓸어버린, 한때는 숲이였을 공터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한차례 웃어보인 유천은 아직 거신의 팔이 휩쓸지 않은 숲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옥 끝자락의 영원의 겁화, 고대의 맹약에 따라 내 적을 그대의 품 안에 안아라, 헬 플레어."
순식간에 유천의 뒤에서 나타난 순백의 불꽃에 숲 너머의 유저들은 일순간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간신히 두 발로 땅 위에 섰다. 주위의 수분이 순식간에 매마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까지 피어오르는 나무를 보며 신성제국 축의 유저들은 침을 꼴깍 삼키려했다. 그러나 그 침마저 분비되기가 무섭게 그대로 기화가 되버리는 꼴을 피할 수 없었고 그 이후는 유저들 또한 나무들과 다를 수가 없었다. 신성제국의 유저들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순백의 불꽃이 아가리를 벌린 채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좀 기분이 상쾌하네."
접속하자마자 학살극을 펼친 유천의 소감은 단 한마디였다.
============================ 작품 후기 ============================
에...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