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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oe
"으아아아……."
전날 죽어라 퍼마신 술 덕에 아주 떡이 되어버린 유천은 그 댓가를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잠은 깨었음에도 눈조차 제대로 띄여지지 않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으며 머리는 깨질듯 울려오기 시작했다. 또한 허리부분이 유난히 쑤시는 느낌에 유천의 인상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그리고 다시금 제 눈에 들어오는 살색의 향연에 유천은 고개를 돌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필름이 끊겼다. 어째서 거실에서 술판을 벌이던 자신이 어째서 채린과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지조차 이해가 안되는 지금 유천에겐 이 상황을 어찌 해쳐나가야할 지의 간단한 생각조차 불가능했다.
"으음……조금만 더 자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은 커녕 채린의 몸에도 술냄새는 나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한 라일락 향이 베어있어 유천의 머리를 더 어지럽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중 가장 유천의 머리를 어지럽게 한 것은 역겹기 그지 없는 밤꽃 냄새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순간 유천의 사고는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잠꼬대라도 하는 듯 중얼거리던 채린이 유천의 머리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
커다랗게 눈을 뜬 유천의 얼굴은 금새라도 터질 듯 붉어졌다. 완전히 제 시야를 가득 메운 살색을 차마 맨정신에 볼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은 유천은 얼마못가 더욱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
"우웁!"
"간지러워……."
유천이 숨을 내쉬는 것이 그리도 간지러웠던 것인지, 유천의 머리를 좀 더 끌어앉자, 유천은 두가지 위기에 직면했다. 첫번째가 얼굴에 바로 닿는 보드라운 살결,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생존의 위기였다. 무척이나 강하게 끌어안은 덕에 유천은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힘을 줘서 채린을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유천은 조심스레 채린의 팔을 풀려 했지만 그것 또한 힘을 풀지 않은 채린 덕에 실패. 고개만 조심히 빼려고 했지만 그것 또한 제 얼굴을 막고 있는 두 살덩이에 의해 실패. 이제는 숨이 부족해 머리조차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듯 유천은 눈만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때 유천의 귓가에 나즈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칫."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제 머리를 누르던 힘이 풀리자 유천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 했다고 중얼거리는 유천에게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채린이 말을 건넸다.
"괜찮아?"
"아니……."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유천은 채린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보나마나 또 유정이 시켰겠지. 자신이 좋아할 거라면서. 거기에 채린은 보기 좋게 낚인 것이고. 속으로 유정을 실컷 까내리던 유천은 곧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나갈게. 좀 있다 나와."
아무리 볼거 다보고 갈거 다 간 사이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인지 얼굴을 긁적거리며 주위에 널부러져있던 제 바지만 걸친 유천이 방을 나서자 채린은 다시금 혀를 찼다.
"이러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미련이 남아있는 듯 연신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던 채린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제 옷을 찾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스티로폼 박스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유천을 볼 수 있었다.
"이 년이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나."
제 머리를 집고서 중얼거리던 유천을 쳐다본 채린이 유천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만 쭉 내밀어 박스의 윗면에 붙어있는 쪽지를 본 채린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둘의 사랑을 위해, 파이팅! ps. 난 졸업하기도 전에 고모 소리 듣고싶지는 않아.]
머리를 부여잡고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채린이 유천과 눈이 마주치자, 유천이 먼저 피식 웃으며 채린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안 그래도 지난 밤의 일로 헝클어져 있던 머리가 더욱 헝클어지자 채린이 하지 말라며 유천의 팔을 툭툭 쳤지만 유천은 웃으며 그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할까. 평범하게 영화나 볼까?"
"미안, 오늘은 스케쥴이 잡혀 있어서."
아직까지 잠이 덜 깬듯 눈을 비비며 눈꼽을 떼던 유천이 채린에게 말을 건네자, 채린은 미안하다는 듯 작게 웃으며 유천의 눈꼽을 떼주곤 대답했다. 그런 채린의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던 유천이 제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채린의 등을 화장실로 떠밀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데이트는 다음에 하고 누난 나갈 준비나 해."
나는 게임이나 하지 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는 유천을 향해 채린이 슬쩍 웃더니 유천의 등을 쿡쿡 찌르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채린의 말을 들은 유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는 시간 많으니까, 그 때 데이트 하면 되지 뭘."
"그래. 그러면 되겠네."
채린이 말을 마치고 욕실로 들어가자, 유천은 연신 히죽거리며 캡슐에 몸을 뉘였다. 이어서 채린에게 다녀오라며 말을 건네곤 커버를 닫고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 시작."
게임 시작과 동시에 제 눈 앞에 드러나는 장면을 스킵하고서 게임에 접속한 유천은 익숙한 두 명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금발이 허리께까지 내려온 발록과 은은한 녹색이 감도는 은발의 라이헤르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자 유천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며 외쳤다.
"무, 무슨 일인데!"
"유언은 그게 끝이냐?"
"제 잘못 하나 모르는 놈한텐 유언을 남기게 해주는 것도 과분하지."
분명 자신이 로그 아웃한 장소에서 다시 나타났는데, 어째서 이 둘이 제 눈 앞에 있는 지에 대한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유천에게 사형 선고와 같은 말을 남긴 둘은 이윽고 유천에게 공격을 하려다 말고 포기했다. 이미 한두번 있던 일도 아니었다며 말이다.
"그래서 그 꼬맹이는 어쩔건데."
"무슨 꼬맹이?"
"그냥 이걸 죽여?"
이어진 라이헤르의 질문에 되묻는 유천을 보며 다시금 유천을 죽이려던 발록은 라이헤르의 만류에 겨우 들어올린 손을 내리고서 이를 갈고는 유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며 키득거리던 유천은 라이헤르에게 뒤통수를 후려맞고 나서야 제대로 발록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신성제국 꼬맹이."
"그냥 데리고 있어. 내가 죽일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날 죽이려 드는 건데 뭐. 그렇다고 위협적인 것도 아니고 오해 때문에 그런것 같은데 풀릴 때까지 놔둬."
발록의 말에 유천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며 계속해서 물어오는 둘에게 그냥 일이 있었다며 넘어가려던 유천의 눈에 발록의 뒤에 숨어있던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얼마 전에는 절 죽여보겠다며 함정까지 팠던 녀석을 보자 유천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말로만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고 실제로 행동은 취하질않았떤 둘의 태도를.
"꼬맹이한텐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그리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유천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자 무정하기 그지 없는 발록은 그런 유천의 고개를 강제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말해'라고, 싫다며 거절하는 유천에게 결국 발록은 강수를 내밀었다.
"네가 말 안한다면 어쩔 수 없지. 데리고 있어도 너 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워댈텐데, 여기서 죽이는 수 밖에."
순식간에 안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해진 크리스티나의 표정을 보고는 유천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저런 말을 내뱉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유천은 다시금 한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그때 성이 무너진 건 내가 한 짓이 맞는데, 전 교황을 죽인 건 내가 아냐. 됬냐?"
발록의 으름장에 유천이 크리스티나를 보며 대충 설명하고서 발록을 바라봤다. 그러나 발록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더 정확히 설명하라며 유천을 부추겼다.
"지하실에 있었지. 나랑 전 교황이랑 펠프스 놈이랑 그 근위병인지 뭔지 하는 놈들은. 잠깐 어두워진 사이에 펠프스 그 놈이 전 교황 배때지에 칼빵을 놓고 나한테 뒤집어 씌운 거라고."
"그, 그걸 누가 믿을 것 같아요!"
내가 이러니까 설명을 안 하려고 했지. 크리스티나의 반박에 한차례 투덜거린 유천이 발록과 라이헤르를 보며 질문했다. 크리스티나의 눈에 맺힌 눈물에 잠깐 머뭇거린 것도 잠시, 발록과 라이헤르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너희는 내가 언제 성직자들 보고 먼저 선빵 날리는 거 봤냐."
"아니."
"지들이 먼저 쳐놓고 죄는 너한테 죄다 뒤집어 씌웠지."
유천의 질문에 대답하는 둘을 보며 크리스티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하자, 유천은 거기에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난 성직자 놈들 보면 오히려 피한다고, 근데 그 놈들이 되려 날 죽이려고 안달하다가 죽는거지. 덧붙이자면 내가 봉인 풀렸을 때 나 찾으러 온 성직자놈들이랑 안 부딪히려고 내가 별 짓을 다한 건 너흰 죽어도 모를거다."
인식은 좋지 않지만 처음 보는 면전에 공격을 꽂을 정도로 싫어하진 않는다는 유천의 설명에 크리스타나가 어이 없는 눈초리로 유천을 바라보자 유천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뭐 때문에 이걸 설명하고 있어야 되는 건지.
"아, 몰라. 난 갈테니까 알아서 해. 다시 돌려 보내든 너희가 데리고 살든 니들 맘대로 하라고."
이젠 뭐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며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마을 귀환 스크롤을 찢어버리는 유천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둘이 이젠 벌벌 떨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해줄까?"
* * *
"뭐야."
마을로 돌아간 유천의 눈에 보이는 것은 꽤나 웃기는 모양새였다. 포로라는 상태 메세지를 머리 위에 띄우고서 광장에 무릎 꿇고 있는 유저들이 수백명이 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가장 선두에 있는 펠프스를 보며 유천이 씨익 웃었다.
"넌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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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전쟁에서 패배한 유저들의 일부를 생포했을 경우 그를 포로로 만들 수 있다. 포로는 승리 측의 결정에 따라 응해야 하며, 별다른 지시가 없을 시 게임 시간으로 30일 동안 결박을 풀 수 없으며 모든 행동이 불가능해진다. 이 상태이상 디버프는 어떤 물약과 디스펠로도 해제할 수 없으며 죽어도 효과는 지속된다.
포로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씩 웃은 유천은 유저들을 보며 입을 열었고, 그 순간 그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한 것은 비단 유천의 착각은 아닌 듯 했다.
"헬 파이어."
시작은 간단하게 가자고. 유천의 말과 함께 그들은 푸른 불꽃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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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주는 목요일까지 노니까 계속 올려볼게요